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미국과 소련 간에 냉전이 시작됐다. 냉전은 미소양국의 군사적 대립과 갈등으로 표출되었고, 많은 부분에서 양국은 경쟁했다. 현재 한국에서 가르치는 세계사 교과서나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가르치는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냉전의 구도를 마치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거의 없는 이야기일 뿐이며, 그것이 제국주의자들의 위선과 기만 속에서 만들어진 주장일 뿐이다. 이를 알 수 있는 역사적 팩트가 존재하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국과 우크라이나 극우주의자들의 협력이다.

(스테판 반데라,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민족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현실은 나치에 협력하여 인종청소를 포함한 각종 전쟁범죄를 저지른 대학살자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예전부터 반소감정이 심했던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 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와 같은 극우 민족주의자 단체들이 침략자 나치를 해방군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OUN의 지도자였던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는 나치와 협력하여 소름끼치는 대량 인종 학살들을 저질렀는데, 대표적으로 1941929일에서 30일에 수도 키예프(Kiev)외각에 있는 바비야르(Babi Yar)에서 33,721명의 유대인을 기관총으로 집단 학살한 사건이 대표적이었다. 나치의 우크라이나 점령 기간동안 대략 15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는데, 스테판 반데라가 지휘하는 OUN 대원들은 나치의 천인공노할 정책에 적극 협력했으며, 1941년에만 최소 30만의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다.

(미콜라 레베드, 우크라이나 봉기군의 지휘자로 수만에서 수십만의 유대인과 폴란드인 그리고 러시아인 등을 인종청소하고 학살한 전쟁범죄자다. 그러나 미국 CIA는 그를 후원했으며, 그 덕분에 천수를 누리며 살다 1990년대에 생을 마감했다.)

 

또 다른 조직으로는 우크라이나 봉기군(UPA, Ukrainian Insurgent Army)가 있었으며, 미콜라 레베드(Mykola Lebed)나 로만 슈케비치(Roman Shukhevych)와 같은 UPA 인사들은 볼리니야아 갈리치야 지역에서 반데라의 군대가 그랬듯이 소름끼치는 민간인 학살 및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1943년 볼리니아 지역에서는 최소 35,000명에서 7만 명 혹은 10만 명 이상의 폴란드 주민들이 이들에게 무차별 학살당했으며, 스테판 반데라 또한 이런 천인공노할 인종학살극을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벌였다.

(CIA,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CIA는 소련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서유럽에서 파시스트들과 협력했다. )

 

나치에 협력했던 이들은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이 점차 반격하기 시작하자, 나치와 소련군을 동시에 대항한 전투를 벌였으며, 이런 게릴라전은 1945년까지 지속됐다. 물론 이들은 소련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반파시즘 항전에 참가한 소련 인민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1944년부터 1945년 상반기 까지 91,615명의 우크라이나 극우주의 군대가 소련군에게 사살됐고, 비슷한 비율의 숫자가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스테판 반데라와 같은 몇몇 우크라이나 극우주의 성향의 인물들은 연합국 점령지역으로 도망쳤고, 몇몇은 서유럽이나 미국 등에 정착했다.

(냉전 당시 OUN과 CIA의 관계를 알려주는 자료, 올리버 스톤의 다큐인 우크라이나 불에 휩싸이다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1945년 당시 나치 전범들을 재판하기 위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있었는데, 반데라와 같은 우크라이나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심판이나 처벌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냉전 초기 미국은 이들을 이용하고자 했다. 따라서 미국 CIAOUNUPA 지도자들의 미국 이주를 후원했었으며, 이들을 소련 전복을 위한 전복부대나 첩보부대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었다. 한마디로 미국은 소련에 맞서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 전쟁범죄자들을 이용했다. 심지어 볼리니아와 동부 갈리시아에서의 폴란드인 학살에 막중한 책임이 있는 미콜라 레베드(Mykola Lebed)1990년대까지 뉴욕시 퀸즈에 살았었다. 미국의 지원 아래 이런 전범들은 잘먹고 잘살았었다는 얘기다.

 

더욱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 것은 미콜라 레베드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로마로 탈출하여 연합국과 접촉했는데, 미 육군 방첩대는 그를 뮌헨으로 빼돌렸으며, 19496월에는 CIA의 협력하에 미국으로 보내졌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법무부가 레베드를 미국서 추방하려고 했으나 후일 CIA 국장이 되는 앨런 덜레스(Allen Welsh Dulles)미콜라 레베드는 CIA에 엄청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하며, 핵심적인 반소작전을 돕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 세워진 스테판 반데라 동상, 스테판 반데라의 동상은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때도 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보도하는 서방 언론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냉전 초기 소련 휘하의 우크라이나에 침투하여, 작전을 개시했다. 우크라이나 지역에 남아있던 일부 잔존세력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1946년과 1947년에 여러 작전들을 게시했다. 벨라도나 작전(Operation Belladonna 1946), 스라소니 작전(Operation lynx, 1946) 그리고 삼지창 작전(Operation Trident, 1947)등이 있다. 실제로 미국 CIA는 스테판 반데라나 미콜라 레베드와 같은 인물과 협력하여 194995일 우크라이나인 스파이 선발대를 낙하산으로 소련에 침투시켰다. 그리고 이런 공작은 1954년까지 지속됐다. 물론 소련은 이런 제국주의 무리들을 신속히 처리해버렸다.

 

이처럼 미국은 나치 협력자들을 통해 소련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려는 정치공작을 했었고, 실제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냉전 당시 적국에 대한 값비싼 정보를 워싱턴에 제공한 대가로 CIA는 그 보답으로 민족주의자 퇴역군인들을 영향력 있고 권위 있는 지위에 두면서, 그들이 기존대학에서 준 학문적인 기관이나 학술적 지위를 만드는 것에 도움을 줬다.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는다며 이런 전쟁범죄자들과 파시스트들을 이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 피시스트들은 미국에서 호의호식하며 살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진실은 서방 사회에서 알려지지 않았다. 반공주의 교육과 제국주의 교육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를 보여주는 역사다.

 

미국이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한 이유에는 동유럽에 대한 소련 지배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소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런 악행들을 저질렀으며, 이와같은 사실에서 미국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냉전 초기에 추구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해리 트루먼이 말하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의 진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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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프스키 2022-03-16 1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서 잘 보았습니다. 저도 서첩반 반걸랍/스테판 반데라를 박노자 교수 문서에서 확인한 바 있었는데 문서에서 더 확실하게 보았고요 나중에 서몽 피득류랍/시몬 베틀류라에 대해서도 써 주세요... 관련 문서들의 주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필 서몽 피득류랍/시몬 베튤류라는 영문자료 뿐이네요...

박노자 교수의 문서

http://www.redian.org/archive/71712

https://blog.naver.com/bec5483?Redirect=Log&logNo=221996757798

사첩반 반걸랍/스테판 반데라

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D%85%8C%ED%8C%90_%EB%B0%98%EB%8D%B0%EB%9D%BC

서몽 피득류랍/시몬 베틀류라

https://en.wikipedia.org/wiki/Symon_Petliura

NamGiKim 2022-03-16 19:47   좋아요 0 | URL
오마이 뉴스도 있습니다.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810842
 

나는 평소에 책을 읽으면 서평을 쓰곤 한다그리고 그러한 서평들을 내가 자주 이용하는 알라딘 웹 사이트에 서평을 올리곤 한다물론 아주 가끔의 경우는 책을 안 읽고 서평을 쓰는 경우도 있다물론 책을 안읽고 리뷰를 쓰는 데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다첫 번째는 지나치게 부당한 이유로 폄하당하는 경우이다즉 일부의 악플로 테러 행위로 인해 책이 지나치게 부당한 평가를 일반인들에게 받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두 번째는 책 내용에 비해 지나치게 고평가 되는 경우이다책 내용이 너무나 안 좋은데 많은 이들이 고평가 하니균형 있는 비판이 필요하다 느껴서이다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이 책에 대해 단순히 욕을 하기 위한 경우이다물론 이런 경우 알라딘에서 100자 평을 이용하기도 하지만욕설이 들어갈 경우 제재를 받는건 어쩔 수 없다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한 첫 번째의 경우는 내가 알라딘에 올린 김일성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리뷰이다물론 나는 이 책을 중간중간 부분적으로만 접했지 완독하지 않았다그러나 책을 안읽었음에도 리뷰를 단 것은 이 책의 가치에 비해 너무 폄하 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따라서 나는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알라딘에다 최고 점수인 별 5개와 더불어 장평의 리뷰를 달았다앞에서 언급한 두 번째의 경우는 최근 글항아리에서 출판한 티머시 스나이더(Timothy Synder)의 저서 <피에 젖은 땅(Bloodland)>에 대한 리뷰에 해당한다.

 

최근 들어 스나이더의 책이 국내 네티즌들과 책 리뷰어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이 책의 내용은 부제목에서 밝히듯이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을 다뤘고이 두 명의 독재자들로 인해 20세기 유럽사가 피로 물들었다는 것이 책의 저자 스나이더의 주장이다쉽게 말해 과거 냉전시기 팽배했던 히틀러 스탈린 전체주의론적인 접근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이 책이 국내에서 인기를 끄는 것은 한국 사회가 아직까지 북한과 대립하며 반공주의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거기다 저자 스나이더가 다루는 동유럽 현대사는 필연적으로 반소주의적인 스텐스를 취하기 쉬운 소재다이런 부분에 있어서 한국 사회가 스탈린을 히틀러와 같은 선상에서 접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저자 스나이더가 하는 주장들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또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미국 몽클레어 주립대학교의 교수인 그로버 퍼(Grover Furr)는 2014년 당시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피에 젖은 땅에 대한 체계적인 반박서를 출간한 적이 있다. ‘Blood Lies’라는 제목을 가진 퍼 교수의 책은 스나이더가 책을 쓰며 이용한 1차 사료들을 하나하나 파헤치면서 반박했으며심지어 우크라이나어 폴란드어 등 원어 사료까지 파헤쳐서 반박했다굳이 그로버 퍼 교수의 체계적인 반박서가 아니더라도스나이더의 관점은 소련사에 대한 수정주의 학파 측 관점으로 보아도 문제가 많은 책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나이더 책의 문제점이 잘 알려져 있지 않기에 나는 지난 4월 말에 책에 대한 반박 리뷰를 쓴 것이다.

 

물론 알라딘에 글을 올린 뒤 많은 이들의 댓글이 달렸다그중에는 예전부터 내 블로그에 와서 뉴라이트적 시각으로 욕설과 비방만을 일삼던 이도 있었고알라딘 친구분들의 긴 댓글 및 질문도 있었다내가 글을 쓰면서 스탈린 2천만 학살을 언급하며 비판의 소리를 높인 건 사실이다그러나 그 2천 만 학살론을 스나이더가 한 것으로 내가 주장했다고 생각했던 분들도 있었다물론 자주 언급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건 무리가 아니라 생각한다내가 2천만 학살설을 언급한 건 어디까지나 한국사회에 잘못알려진 부분에 대한 지적이지 스나이더가 주장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큰 틀에서 보자면 스나이더의 주장이 그러한 반공주의적 주장과 크게 맥락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얘기이긴 하지만어쨌든 스나이더가 스탈린 2천만명을 죽였다고 거짓말 친다.”라고 한 적은 없다그 외에도 다른 부분에 대한 주장 및 반박을 달면서 내가 책을 안 읽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책을 안 읽었다는 사실을 밝힌 게 출판사 측에서 태클을 거는 요인이 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워낙 잘 팔리는 책이라 하지만출판사 측에서 내 리뷰가 판매에 문제가 될거라 판단하고선 알라딘 측에 요구하여 게시글을 강제 비공개 처리 해버렸다강제 비공개 처리가 된 것은 4월 30일 그것도 내가 가장 바빴던 날 그러니까 여러 집회 및 개인적 용무가 많았던 날에 일어났다출판사 측에서 책을 안 읽은 것을 문제 삼은거야 원론적인 차원에서는 맞는 얘기긴 하다하지만 내 리뷰가 책과 관련 없다는 공문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다왜냐하면 내가 쓴 리뷰는 스나이더가 한 히틀러 스탈린 전체주의론에 대한 반박문이기 때문이다.

 

워낙 잘 팔리는 책이라 출판사 측에서 내 리뷰가 거슬렸던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깊게 생각해보면 이러한 짓거리는 출판사 측에서 상당히 강제적이고 비상식적인 조치라 할 수 있다심지어 이의를 제기하여 해결하려면 방통위에 분쟁조정을 신청하라는 알라딘 측의 메일이 왔는데상식적인 선에서 말이 안 되는 조치라 할 수 있다그 이유는 기존 홈페이지에 올라온 알라딘 리뷰 중에는 책을 안읽고 쓴 리뷰가 많기 때문이다즉 그러한 기준으로 보았을 때책을 안읽고 올린 다른 이들의 페이퍼나 리뷰 또한 제제를 당해야 하고 현재 <세기와 더불어>에 달린 악플들 또한 차단 되야 한다따라서 이러한 부분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출판사 측의 조치는 소위 스나이더가 침마르게 주장하는 진정한 전체주의론적 행동이다.

 

워낙 어이가 없어서 결국 출판사측에 전화를 했는데원칙적으로 출판사측에서 책을 안읽은 리뷰에 대해 그런 조치를 할 수 있다고 한다책을 읽고 쓰면 문제가 없다고 한다조금 믿기지 않아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지인에게 물어보았는데 그렇다고 한다따라서 책을 읽고 쓰면 이번에 차단된 내 리뷰를 올려도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글항아리 출판사에서 내 리뷰에 대해 이러한 전체주의적 행위를 하며 보여준 조치에 나는 상당히 기분이 나빴고 어이가 없었으며 화도 조금 났었다본인들 스스로가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서적을 출판해놓고 일개의 블로그 리뷰어에게 전체주의적 행위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상당히 실망한 나는 올해 안에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책을 읽고 이 반공주의적 서적이 얼마나 많은 거짓말과 과장 그리고 제국주의와 반공주의적인 서적인지를 아주 낱낱이 밝힐 생각이다두고 해라 피에 젖은 땅!!!!

 

리뷰를 읽고 싶은 사람은 여기를 클릭하시오

 

(로자갤에 올린거)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kpd&no=57566&search_head=100&page=1

 

(페이스북에 올린거)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3911236168922027&id=100001070470657


(관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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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승전 76주년을 생각하며

1945년 4월 거침없이 진격하던 소련군은 독일 국경에 도달했다. 독일 국경에 도달한 소련군은 4년간의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독일군의 종심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 붕괴시켰고, 나치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도달했다.

베를린에 도달한 붉은 군대는 도시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독일은 1944년부터 총동원으로 모집한 국민 돌격대와 히틀러 청소년단 단원들까지 동원하여 전투를 치렀지만, 소련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소련군은 250만 명의 병사와 6,200대의 전차 및 자주포, 7,500대의 항공기 그리고 41,000문의 대포가 동원됐다.

베를린 방어구역에 대한 포위봉쇄에 동원된 병력만 해도 150만이나 되었을 정도다. 거기다 1945년 1월 벌지 전투가 서방 연합군 측의 승리로 끝나면서, 미ㆍ영ㆍ프를 중심으로한 연합국 군대는 독일 본토를 향해 진격했고, 1945년 4월 26일 엘베강에서 소련군과 만나 악수와 우정을 나눴다. 말 그대로 독일은 동서남으로 포위된 것이다.

소련군의 진격이 베를린의 국회 의사당에 도달하자 히틀러는 아내 에바 브라운과 함께 권총 자살을 했다. 그의 애완견 블론디도 독약을 먹고 죽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한 뒤에도 전투는 1주일이나 더 이어졌다.

히틀러에 이어 총통이된 카를 되니츠와 베를린 방어군 사령관 헬무트 바이틀링를 포함하여 1945년 5월 8일 항복을 선언했다. 독일이 항복한 5월 8일은 소련에게 두시간이나 빨랐고, 따라서 소련에게 있어 승전 기념일은 5월 9일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치른 희생은 어마어마했다. 2,700만이 죽었는데, 이중 1,000만 명은 군인이었고 1,700만 명은 민간인이었다. 민간인 대다수는 독일이 자행한 무차별 학살에 의한 것이었다. 특히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나치 독일의 학살은 극에 달했는데, 나치가 전개한 벨라루스 초토화 작전에서만 3년간 벨라루스 민간인 300만이 학살당했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나치와 이에 협력하는 세력들에 의해 수백만이 죽었다.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유대인 대다수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 나왔다. 우크라이나 민족 영웅으로 알려진 스테판 반데라는 수십만 명의 유대인과 폴란드인을 학살했다.

아무튼 이러한 희생을 거치고 소련은 나치 독일을 멸망시켰다. 미국의 문학가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자유를 사랑하는 이들이 소련의 붉은 군대에게 절대 값을 수 없는 빚을 졌다.˝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현재 우리가 보다 더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는것은 당연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희생도 있다. 이런점에서 우리는 소련과 스탈린의 공로가 매우 크다는 사실은 잊어선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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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근대화와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조선반도의 강제병합을 통해 제국주의 열강으로 성장한 일본은 1918년에서 1922년까지 대략 4년간 또 다른 전쟁을 치렀었다. 그 전쟁이 바로 러시아 적백내전(Russian Civil War)이다. 일본이 참전한 이 전쟁인 어떤 전쟁이었고, 일본은 왜 철수했으며, 파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은 이에 대해 한번 얘기해보고자 한다. 20세기 초인 1910년대 전 세계는 인류최초로 최악의 대살상을 경험했다. 그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1914년 유럽에서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동맹상태였던 일본 또한 이 전쟁에 참전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일본은 독일 식민지인 마리아나 군도와 마셜 군도 그리고 캐롤라인 군도를 점령하고, 독일령이던 중국 영토인 칭다오를 점령했다.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휘청거렸지만, 일본은 영토 확장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한 유례없는 호경기를 맞이했다. 여기서 탄생한 것이 바로 나라킨이라고 불리던 벼락부자들이었다. 물론 이런 호경기 현상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거품경제의 현상으로 나타나 불황에 시달리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대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의 대결이었다.

 

독일과의 전투에서 극심한 사상자만 내던 러시아 제국은 전쟁 와중에 빠지게 되는데,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17년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시작된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는 니콜라이 황제를 몰아내어, 케렌스키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내각을 들어서게 했다. 그러나 이 임시정부 내각은 민중의 염원을 들어주지 못했고, 그해 4월 스위스에서 귀국한 레닌과 그가 이끄는 볼셰비키들은 몇 개월 후 혁명을 일으켰다. 그것이 바로 10월 혁명이었다. 10월 혁명을 통해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러시아에서 탄생했고, 공약에 따라 볼셰비키들은 19183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음으로써 전쟁에서 빠졌다.

 

1917년 러시아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진영은 사회주의 세력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을 들어 차르를 복귀하려는 세력을 지원하며 침략해왔는데, 그것이 바로 1918년에 시작된 적백내전(Russian Civil War)이었다.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 연합국에는 영국과 동맹을 맺었던 일본도 포함됐다. 혁명 러시아에서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미국과 더불어 19188월에 공동출병을 선언했다. 이 선언에 따르면 일본은 1만 명의 군대를 파병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인 7만 명 이상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들은 러시아 연해주의 중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와 동부 시베리아 그리고 북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일본의 시베리아 파병은 시작부터 난항에 부딪쳤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경제호황은 19188월과 9월 사이 쌀소동이 일어나면서 점차 불황으로 이어졌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군수물자 시장을 잃게 된 일본은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게 되었다. 거기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1919년 식민지 국가 조선에선 3.1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칭다오 점령 당시 일본이 중국 정부에게 요구했던 21개조 요구에 반대하는 5.4운동이 중국에서 일어났다. 이처럼 일본의 시베리아 파병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진행되었다.

 

거기다 적백내전은 볼셰비키 측이 점차 전선에서 승기를 잡게 되면서, 침략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초기 오합지졸의 군대였던 적군(Red Army)은 내전이 끝날 무렵에 500만 명이 넘는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1918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연합국들은 점차 군대를 철수하며 볼셰비키 정권을 인정해주는 방향으로 나갔다. 당시 일본이 적백내전 파병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공산주의 전파를 막는다.”는 것이었지만, 공동으로 출병했던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들로부터 시베리아를 차지하려 한다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적백내전 시기 일본군이 주둔하던 시베리아 일대에서는 이른바 시베리아 빨치산(Partisan)들이 활발히 활동했다. 이 빨치산들은 백군과 간섭군을 돕는 철도와 운송시설들을 파괴하고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특히나 1920년에는 이른바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이 일어나 빨치산에 의해 일본 외교관과 군인, 거류민 등을 포함한 700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1920년 시점에는 사실상 적백내전이 볼셰비키 측의 승리로 끝난 시점이었다. 1년 뒤인 1921년 미국에서 워싱턴 회의가 개최되었고, 여기서 연합군의 육해군 군축이 요구되었다. 일본의 군대 또한 감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은 시베리아 출병에서 전쟁비용 10억과 3,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고 아무런 소득 없이 1922년에 철수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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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4월 12일인 오늘은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우주탐험을 하게 된 날입니다. 그는 보스토크호를 타고 지구 한바퀴를 돌았고, 무사히 귀국하여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라는 타이틀은 그 상징성이 매우 높습니다.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은 소련의 영웅이자 전 세계 노동인민의 영웅입니다. 그가 우주탐험을 하게 된 지 60년이 흘렀습니다. 비록 소련은 30년 전에 해체되었지만, 러시아인들을 위대한 영웅 유리 가가린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저 또한 그를 좋아합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며 마치겠습니다.
“소련은 우주 분야의 성취를 통해 적지 않은 정치적 효과도 보았다. 피그만 침공 5일 전인 1961년 4월 12일, 소련 우주인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지구궤도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 아프리카 대륙 상공을 자나면서 가가린은 식민주의와 싸우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에게 격려 메시지를 보냈다. 3주 후 미국인 앨런 셰퍼드가 우주 비행에 성공했지만 궤도 비행에는 못 미쳐 빛이 바랬다. 이후 서유럽인의 40%가 소련이 전체 군사력 및 전반적인 과학적 성취 면에서 미국을 앞선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우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에 불안을 느낀 케네디는 이례적으로 상하 양원합동회의를 요청하고 그 자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자유냐 압제냐 하는 전쟁에서 이기려면 우리나라는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다시 안전하게 지구로 귀환시키는 목표를 달성해야 합니다.” 이 연설이 있고 나서 1년 가까이 지난 시점인 1962년 2월 존 글렌은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지구궤도 비행에 성공했다. 지구궤도를 세 바퀴 돌고 아슬아슬하게 귀환했지만 미국인의 사기를 드높이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62년 8월, 소련은 다시 지구궤도를 17바퀴 도는 우주비행선 보스토크 3호를 발사하고, 그다음 날에는 보스토크 4호까지 쏘아 올렸다. 이듬해인 63년 6월에는 일주일간 궤도 비행을 함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우주선에는 최초의 여성 우주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도 타고 있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524~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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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4-12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놀라워서 찾아보니 이분이 세계최초 우주비행사네요!

NamGiKim 2021-04-13 12:51   좋아요 1 | URL
세계 최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