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근대화와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조선반도의 강제병합을 통해 제국주의 열강으로 성장한 일본은 1918년에서 1922년까지 대략 4년간 또 다른 전쟁을 치렀었다. 그 전쟁이 바로 러시아 적백내전(Russian Civil War)이다. 일본이 참전한 이 전쟁인 어떤 전쟁이었고, 일본은 왜 철수했으며, 파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은 이에 대해 한번 얘기해보고자 한다. 20세기 초인 1910년대 전 세계는 인류최초로 최악의 대살상을 경험했다. 그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1914년 유럽에서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동맹상태였던 일본 또한 이 전쟁에 참전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일본은 독일 식민지인 마리아나 군도와 마셜 군도 그리고 캐롤라인 군도를 점령하고, 독일령이던 중국 영토인 칭다오를 점령했다.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휘청거렸지만, 일본은 영토 확장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한 유례없는 호경기를 맞이했다. 여기서 탄생한 것이 바로 나라킨이라고 불리던 벼락부자들이었다. 물론 이런 호경기 현상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거품경제의 현상으로 나타나 불황에 시달리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대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의 대결이었다.

 

독일과의 전투에서 극심한 사상자만 내던 러시아 제국은 전쟁 와중에 빠지게 되는데,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17년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시작된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는 니콜라이 황제를 몰아내어, 케렌스키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내각을 들어서게 했다. 그러나 이 임시정부 내각은 민중의 염원을 들어주지 못했고, 그해 4월 스위스에서 귀국한 레닌과 그가 이끄는 볼셰비키들은 몇 개월 후 혁명을 일으켰다. 그것이 바로 10월 혁명이었다. 10월 혁명을 통해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러시아에서 탄생했고, 공약에 따라 볼셰비키들은 19183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음으로써 전쟁에서 빠졌다.

 

1917년 러시아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진영은 사회주의 세력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을 들어 차르를 복귀하려는 세력을 지원하며 침략해왔는데, 그것이 바로 1918년에 시작된 적백내전(Russian Civil War)이었다.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 연합국에는 영국과 동맹을 맺었던 일본도 포함됐다. 혁명 러시아에서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미국과 더불어 19188월에 공동출병을 선언했다. 이 선언에 따르면 일본은 1만 명의 군대를 파병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인 7만 명 이상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들은 러시아 연해주의 중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와 동부 시베리아 그리고 북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일본의 시베리아 파병은 시작부터 난항에 부딪쳤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경제호황은 19188월과 9월 사이 쌀소동이 일어나면서 점차 불황으로 이어졌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군수물자 시장을 잃게 된 일본은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게 되었다. 거기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1919년 식민지 국가 조선에선 3.1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칭다오 점령 당시 일본이 중국 정부에게 요구했던 21개조 요구에 반대하는 5.4운동이 중국에서 일어났다. 이처럼 일본의 시베리아 파병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진행되었다.

 

거기다 적백내전은 볼셰비키 측이 점차 전선에서 승기를 잡게 되면서, 침략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초기 오합지졸의 군대였던 적군(Red Army)은 내전이 끝날 무렵에 500만 명이 넘는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1918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연합국들은 점차 군대를 철수하며 볼셰비키 정권을 인정해주는 방향으로 나갔다. 당시 일본이 적백내전 파병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공산주의 전파를 막는다.”는 것이었지만, 공동으로 출병했던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들로부터 시베리아를 차지하려 한다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적백내전 시기 일본군이 주둔하던 시베리아 일대에서는 이른바 시베리아 빨치산(Partisan)들이 활발히 활동했다. 이 빨치산들은 백군과 간섭군을 돕는 철도와 운송시설들을 파괴하고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특히나 1920년에는 이른바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이 일어나 빨치산에 의해 일본 외교관과 군인, 거류민 등을 포함한 700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1920년 시점에는 사실상 적백내전이 볼셰비키 측의 승리로 끝난 시점이었다. 1년 뒤인 1921년 미국에서 워싱턴 회의가 개최되었고, 여기서 연합군의 육해군 군축이 요구되었다. 일본의 군대 또한 감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은 시베리아 출병에서 전쟁비용 10억과 3,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고 아무런 소득 없이 1922년에 철수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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