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는 해였다코로나 바이러스로 시끄러웠던 그해 10월 국내 인터넷상에서 중국의 발언에 크게 불쾌함을 느꼈던 국내 네티즌들이 제법 많았던 것 같다그 이유는 바로 중국의 시진핀 정부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항미원조라는 표현을 썼고이를 중국 사람들이 옹호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이런 문제가 한국 연예계까지 퍼지며 상당히 큰 사회적 논란으로 까지 번졌었다물론 나는 중국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다소 타국이나 타인에게 무례한 행동을 안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또한 타국 역사나 문화에 대한 중국의 역사왜곡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한다.

(항미원조 중국 포스터)

 

예를 들어서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김치 및 한복을 자신들의 고유문화로 설명하려는 태도에 대해서 큰 불쾌감과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그것이 당연히 잘못됐다고 본다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중국의 문제점이 그들이 표현하는 항미원조와 묶이며항미원조라는 표현까지 역사왜곡으로 묶어서 보는 국내의 언론이나네티즌들의 입장과 태도는 잘못됐다고 생각하며항미원조라는 표현 자체가 근거 없는 역사왜곡이 아니라고 본다.

(시진핑의 역사왜곡?????)

 

많은 사람들이 잘 알려고 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6.25전쟁 즉 한국전쟁은 얼마든지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해석이 갈릴 수 있는 부분이다한국에서는“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 전쟁이라 하여 ‘6.25전쟁이라는 명칭을 대체로 많이 사용한다반면 북한은 이 전쟁을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남조선 괴뢰 도당을 몰아내는 전쟁으로 인식하는 의미에서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그리고 중국은 미국에 맞서 조선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항미원조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즉 한국전쟁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의 차이이지 역사왜곡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2020년 국내에서 보도된 뉴스)

 

그렇다면 중국에서 얘기하는 항미원조전쟁이라는 표현이 과연 어떻게 해서 역사왜곡이 아니고 틀린 표현이 아닌 것일까그 이유는 20세기의 아시아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의 제2차 국공내전이 일어났고, 1949년 공산당이 승리했다승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고중국은 이 전쟁에서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소련을 대신해서 참전했다.

(국내에 출판된 항미원조 관련 서적)

 

이들이 참전한 이유에는 미국의 군사적 전략과도 연관이 있다우선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대 아시아 라인은 한반도와 일본 대만 그리고 인도차이나까지 연결되어 있었고미국은 한반도와 대만 해협 그리고 인도차이나 북부 지역에서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 전략적 방법이었다특히 인도차이나의 경우 미국은 프랑스의 식민주의 전쟁을 지원했고그것을 바탕으로 프랑스는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호치민 정부를 군사적으로 탄압했다마찬가지로 대만에서도 미국은 장제스를 지원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에서는 이승만 정부가 북진하게 됨에 따라 미국이라는 세력은 중국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 왔다.

 

즉 이런 부분에서 보았을 때시진핑이 항미원조를 운운하며 미국의 제국주의를 격퇴했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다오히려 이것은 한국전쟁을 단순히 김일성의 침략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것을 합리화 하려는 이들이 다양한 역사적 예시를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실제로 당시 미국은 제국주의였고트루먼 독트린은 그 제국주의적 행위의 시발점이었다따라서 필자는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중국이 항미원조 전쟁을 주장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왜곡된 시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필자는 중국 네티즌들이 BTS와 같은 한국측 연예인들에게 어떤 무례를 범했는지와는 별개로중국의 항미원조론 자체가 역사왜곡이라는 시각은 논리적으로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따라서 항미원조는 역사왜곡이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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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폭격하고 있는 미공군의 B-29 폭격기)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전개됐던 한국전쟁(Korean War)은 참으로 끔찍하고도 처참한 전쟁이었다남북을 합쳐 수십만의 병사가 사망했고, 3만 6,000명 이상의 미군과 20만 이상의 중국군이 전사했다민간인 사망자는 남한과 북한을 합쳐 최소 150만에 달하며많게는 300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년간 전개되었던 이 전쟁은 남북한 전역을 초토화시켰고민중들의 삶도 피폐하게 만들었다이 전쟁을 파괴적인 전쟁 그리고 대량살상적인 전쟁으로 변모시킨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미군의 무차별 폭격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이 침략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즉각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했다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너무나 즉각적이었는데전쟁 초기부터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가 일부지역을 폭격하기에 이르렀다미공군은 유엔군과 한국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을 당시연합군에게 막강한 화력을 지원했다이는 인천상륙작전에서도 마찬가지였고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던 시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또한 미군의 폭격은 1950년 10월 25일에 참전한 중공군에게도 공포를 안겨주었으며이것은 중공군이 주간보다는 야간에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인민군과 중공군이 반격하여 다시 전쟁이 원점으로 돌아온 시점에도 미공군의 폭격은 끊이지 않았다폭격은 1951년 휴전회담이 시작되는 시점에도 지속됐고사실상 휴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까지 지속됐다심지어 북한지역 뿐만 아니라 심양이나 단동과 같은 중국 영토에도 미공군의 폭격이 있었다쉽게 말해 전쟁 당시 북한은 미공군의 폭격을 3년 동안이나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북한 지역)

 

폭격은 참으로 끔찍했다이 분야를 깊게 연구한 김태우 교수의 저서 <폭격>에 따르면 당시 미공군은 평양원산흥남함흥청진나진성진 등의 대도시들을 주로 폭격했다그 이유는 적의 병력과 물자가 전선으로 못 가도록 적 후방의 교통중심지와 도로 및 철도 그리고 병력 이동로 및 숙소 등에 폭격 전쟁 수행의지를 꺾기 위함이었다쉽게 말해 전략폭격을 한 것이다물론 이것은 말이 전략폭격이었다. 1950년 7월 6일과 13일에 있었던 원산폭격은 그 피해는 민간인 거주지역으로 대량 확산된 양상을 보였다. 7월 13일에 있던 폭격으로만 원산에서 1,249명의 민간인이 희생됐고그 가운데 195명은 여성이었고, 125명은 어린이였으며, 122명은 노인이었다미군의 폭격을 초기에 받았던 항구도시 원산은 1953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폭격에 시달렸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했던 미군의 폭격은 북한 북부지역에 있는 신의주에서도 발생했다중공군이 전쟁에 참가한지 2주정도가 되던 1950년 11월 8일 미공군은 신의주를 폭격했었다당시 미군 소속 항공기 100대가 신의주를 집중 폭격했다이 폭격은 신의주를 향한 최초의 공중폭격이었는데당일 폭격으로 총 3017호에 달하는 공공건물들 가운데 2,100호가 파괴됐다또한 1만 1,000호 이상의 일반 주택들 가운데 680호가 파괴되었다. 11월 8일에 있던 폭격으로 최소 5,0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했고그중 4,000명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최근에 출판된 김태우 교수의 <냉전의 마녀들>에는 북한지역을 조사했던 국제여맹의 대화를 담고 있는데그 내용을 인용하겠다.

 

“ “전쟁 전에는 어디에 사셨죠?” 누군가가 물었다.

 

이 부근에 살았어요.” 그녀는 흑갈색의 빈 공터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방 세개의 제대로 된 집이었는데모두 불타버렸어요그 안에 있는 것들까지 모두”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아요.”

 

운이 좋다고요?” 누군가 큰 소리로 물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었다심중을 알 수 없는 깊은 눈에 따스함이 서렸다. “남편과 아이들이 모주 온전하잖아요화재를 피해 달아날 때 비행기들이 기총소사를 했어요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죠하지만 우리는 운이 좋았어요정말 행운이었죠.”

 

이 여성 외에도 많은 신의주 시민들이 소이탄 폭격으로 당시의 저공 기총소사(strafing)에 대해 증언했다조사위원들은 이 기총소사로 인해 신의주 시내 전반이 더욱 철저하게 불타버린 것으로 파악했다.”

 

출처냉전의 마녀들 p.151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에 따르면 미공군은 1950년 6월 29일부터 휴전 발효 1분 전까지 끊임없이 폭격을 했는데이 전쟁 기간에 이북 지역에 투하된 폭탄은 총 47만 6천 톤이라고 한다브루스 커밍스가 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 따르면 미공군은 전쟁기간 동안 총 63만 5,000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여기에 추가적으로 3만 2,557톤의 네이팜 폭탄도 추가되어 총 66만 5,000톤에 달하는 폭탄을 한국전쟁에서 투하했다태평양 전쟁 당시 미공군의 폭격으로 일본의 60개 도시가 43% 수준으로 파괴되었던 반면 북한의 도시와 마을의 파괴 정도는 40~90%까지로 추산된다고 한다.

(마을 지역에 투하된 네이팜 폭탄)

 

1952년 당시 매슈 리지웨이를 이어 유엔군 사령관이 된 마크 클라크는 그해 6월부터 북한에 대한 맹렬한 폭격을 게시했다이때 북한의 수풍댐이 연속공격을 받아 북한은 전력의 90%를 잃었고, 7월에는 평양공습이 하루에 1,254회에 달했다고 한다당시 북한의 평양 방송은 7,000명이라고 보도했었다미공군의 이 공습은 효과적인 폭격 성과를 만들기 위해 중국 국경도 침범했었으며항공모함 4척과 500대 이상의 항공기가 동원됐다당시 파괴된 수풍댐에는 900톤에 달하는 폭탄이 투하됐다.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총 100만 명에 달하는 북한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이것보다 더 많이 전사자를 추정하는 통계도 있다이런 3년간의 폭격으로 북한의 도시들은 말 그대로 초토화 됐다또한 민간인 사망자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으며미공군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공습에 사용한 폭탄보다 3배나 많은 양의 폭탄을 북한 폭격에 사용했다미공군의 폭격으로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 중에서 18개의 도시는 초소한 50%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미공군의 폭격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었다.

 

우리는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도시란 도시는 거의 다 불태워버렸어요.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죽였고 700만 명 이상을 고향에서 내몰아서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비극이 일어나게 된 거죠.

 

출처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p.73~74

(가족을 잃고 애타게 울고 있는 북한 여성)

 

이처럼 북한을 향한 미공군의 폭격은 참으로 무자비하고 잔혹했다그러나 여기서 절대로 잊어선 안 되는 사실이 있다그것은 바로 이런 미공군의 폭격이 단순히 북한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서울수복 이후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28일까지 서울의 지역별 사망자와 부상자 수를 공중폭격과 총포격 등 원인별로 조사한 결과공중폭격이 4,250명이 나왔다서울 용산에서만 미군의 폭격으로 1,587명이 사망했고, 7월 16일의 경우 미군의 B-29 폭격기 47대가 225kg짜리 파괴폭탄 1,504발을 철도공장과 차량철로 등에 투하했다고 한다그 외에도 미공군의 폭격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도 빈번히 발생했고당연히 이런 초토화 작전 과정에서 있던 폭격으로 인근 지역 민간인 피해자들도 속출했었다안재성 작가가 쓴 <이현상 평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김태우 교수의 신간 <냉전의 마녀들>)

 

재귀열은 남부군뿐 아니라 한반도 곳곳에서 막대한 인명을 앗아가고 있었다미국산 세균은 북한 지역에도 대대적으로 살포되어 중공군은 물론지료약을 구할 수 없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어갔다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전남지역에서도 많은 민간인이 죽었다 한반도를 신무기 시험장으로 삼은 미국은 소형 핵탄두나 다름없는 네이팜탄과 세균무기를 마음껏 사용하고 있었다.

 

출처이현상 평전 p.386

 

이처럼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폭격은 남한과 북한을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고 할 수 있으며전쟁에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 피해와 살상을 야기했다따라서 한국전쟁에서 미공군의 무차별 폭격이라는 주제는 절대로 제외할 수 없으며한국전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반드시 알아야할 주제이다.

 

참고문헌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김성보 기광서웅진지식하우스, 2004

 

이현상 평전안재성실천문학사, 2007

 

폭격김태우창비, 2013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와다 하루끼(), 남기정(), 창비, 201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현실문화, 2017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존 다우어(저), 정소영(역), 창비, 2018

 

냉전의 마녀들김태우창비, 202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김동원 안광획 이정훈(공저), 4.27시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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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8-25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 본 KBS다큐영상에서도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일본에서 제조한 네이팜탄으로 월미도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영상을 봤습니다. 브루스 커밍스의 책은 읽지 못했지만 이런 내용이 있다니 놀랍네요.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박태균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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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 그리고 세계사적으로 영향을 끼친 전쟁이다. 1950625일 북한의 침공으로 시작되어 1953727일까지 대략 3년간 전개되었던 이 전쟁의 영향은 2021년인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분단 7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분단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움직임은 분명 있었지만, 그 구조는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한반도를 냉전의 마지막 보루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많은 피해와 영향을 주었다. 현재 북한이 강력한 반미주의 국가가 된 것이나, 한국이 강력한 반공주의 국가가 된 것도 이 한국전쟁이라는 사건을 통해 설명이 가능할 정도다.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미소냉전시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쟁이기도 하다. 비록 스탈린이 이 전쟁에 정규군대를 보내지는 않았으나, 북한의 김일성에게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전쟁 초기부터 신속히 군사개입을 했으며, 50만 가까이 되는 병력을 한반도에 파병하기도 했었다. 이에 따라 한국전쟁은 미국의 대외정책에도 변화를 가져왔었다. 한국전쟁이 또 다른 의미에서 특수한 전쟁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전선의 급반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초기 북한은 남한 땅 90%를 점령했었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과 유엔군은 북한땅 90%를 점령했었다. 서로가 거의 먹힐 뻔했던 상태에서 전세를 역전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은 내전의 잔혹한 민간인 학살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나 전쟁 초기 이승만 정부에 의해 자행된 국민보도연맹 학살이나 서울 수복 이후 남한지역에서 벌어진 부역자 학살이나 북한지역에서 벌어진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은 그 규모나 잔인성에 있어서 상상을 초월했다. 1951년에 발생한 거창양민학살 사건의 전개를 보면 김종원이 지휘하는 한국군에 의해 총 1,400명이 학살당했는데, 이들 중 대다수는 여성, 아이, 노인이었다. 미군에 의한 직접적인 민간인 학살도 일어났고, 그것이 바로 노근리 학살이었다. 노근리 학살에서 미군은 최소 300명에서 600명의 민간인을 전투기 기총소사와 기관총과 소총 난사로 학살했다. 전쟁 초기 우익 군경에 의해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로 최소 30만의 민간인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잔혹하게 학살당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이승만은 대학살자 혹은 코리안 킬링필드(Killing Field) 주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분명 냉전(Cold War)이라는 시대사적인 배경에서 일어났다. 이 냉전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미국의 핵공격 계획이다. 미소냉전은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경쟁과정이기도 했는데, 당시 미국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핵무기를 투하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특히 이 계획은 유엔군 총 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적극 추진하려 했었다. 그러나 소련의 참전과 이에 대한 스탈린의 맞대응이 무서웠던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공로를 쌓았단 매슈 리지웨이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이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다. 아마도 1949년 소련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수소폭탄을 우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사회에서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기억되는 한국전쟁(Korean War)은 과거 매카시즘적인 반공주의 국가였던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되기 매우 힘든 주제였다. 브루스 커밍스나 박명림, 정병준, 박태균 등 그 외의 여러 학자들이 한국전쟁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를 단행했고, 여러 연구 성과물을 만들어 냈지만,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아주 편협한 틀에 박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반공주의라는 영역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과 국가 보안법이라는 일제 치안유지법의 후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55주년에 맞춰 박태균 교수가 집필한 책 <한국전쟁>은 학계의 여러 평가 및 분석을 다루고 있다. 또한 한국전쟁 이전의 통일 운동이나, 민간인 학살, 미국의 정책, 이승만 암살 시도, 미국의 세균전, 박헌영 숙청, 남북한 정권의 강화 등 여러 가지 주제를 다뤘다. 무엇보다 이해하기 다소 힘든 학술서가 아닌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중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탈반공주의화를 위해 여러 부분에서 시도한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박태균 교수가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모든 시각을 전부다 동의한다고 할 수는 없다. 분명 내 생각과 다른 부분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맥락에선 일치하는 부분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 같다.

 

저자 또한 반공주의를 벗어던지려는 여러 노력들을 책에서 보여줬다. 북한은 무조건 나쁜놈과 같은 과거 반공주의 프레임을 최대한 많이 벗어던지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점이 책을 읽으면서 만족스러웠다. 한국전쟁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도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일독을 적극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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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마녀들 -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김태우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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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북한은 전쟁 초기부터 1953년 휴전협정을 조인할 때까지, B-29 폭격기를 포함한 미공군의 최신식 항공 폭격에 시달렸었다. 수도 평양을 포함하여, 원산, 청진, 함흥, 신의주 등의 도시들은 말 그대로 달의표면(Surface of the Moon)’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미공군의 폭탄세례를 받았었다. 2차 세계대전부터 현재까지 제공권에서만큼은 단한번의 헤게모니를 잃지 않았던 미국의 전쟁방식은 바로 이와 같은 압도적인 화력공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은 전쟁 3년기간 동안 북한을 폭격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을 폭격하기 위해 태평양 전쟁에서 사용한 폭탄의 양은 20만 톤에 불과했다. 여기에는 소이탄과 같이 터질 때 2,000도에서 3,000도의 폭발력을 지닌 폭탄들이 대거 투하됐으며, 19453월에 있던 단 하루 동안의 폭격만으로도 10만 명의 민간인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터뜨린 폭탄은 전쟁 3년 기간 동안 총 635,000톤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본토 공습 당시 미국이 투하한 폭탄에 3배 이상에 달했다. 물론 이런 폭격은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 지역에서도 있었으며, 여기에 사용한 네이팜 폭탄의 양까지 합치면 총 665,000톤이 된다.

 

사실 전쟁 초기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미국방부의 기본 지침이었던 군사시설만을 폭격하는 것을 목표로 했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 이후 맥아더는 폭격의 전략전술을 바꿨고, 그로 인해서 미국은 단순히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군사시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시설들까지 대규모 융단 폭격을 감행하게 된 것이었다. 1950118일 미공군이 북한의 도시 신의주를 폭격했었다. 대략 100대의 미군 항공기가 투입되어 신의주를 집중폭격했는데, 이날 총 3017호에 달하는 공공건문들 가운데 2,100호가 파괴되었고, 5,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었다. 충격적이게도 폭격으로 죽은 민간인 5,000명 중 80%에 달하는 4,000명 이상은 여성과 어린이라는 점에서 소름끼치는 학살극이었다.

 

이처럼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폭격은 잔인했으며, 당시 미공군 사령관이던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의 표현을 빌리자면,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죽였고 700만 명 이상을 난민으로 만들었다.” 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학살당했다는 얘기다. 비극적이게도 이후 베트남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미군에 의한 대량의 민간인 살상 혹은 대학살이 일어났다 사실에서,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똑같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군의 폭격이 한참이던 1951년 용감한 여성들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고 참혹한 전장의 한가운데에 자발적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덴마크, 체코슽로바키아, 네덜란드, 영국,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동독, 서독, 벨기에, 캐나다, 쿠바, 아르헨티나, 튀니지, 알제리, 중국 그리고 베트남으로 이루어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남북아메리카를 아우르는 인종과 국적을 뛰어넘는 용감한 여성들의 연합체였다. 18개국으로부터 온 21명의 외국인 여성들이었으며, 여성차별이라는 시대적인 한계를 자신들의 역량과 능력으로 극복한 이들이기도 했다. 이들이 바로 국제민주여성연맹(Women's International Democratic Federation) 단원들이었다.

 

서방세계에서 이른바 반공주의(Anti-Communism)가 팽배하던 냉전시기 이 단체는 소련의 어용단체라는 비난과 오명에 휩싸였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전쟁 시기 북한지역을 조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들어간 인사들 중에는 당시 사회주의권 국가들만 있었던 것이 절대 아니었으며, 당시 영국 노동당 신분으로 참가했던 모니카 펠턴(Monica Felton)의 경우 좌파와는 거리가 먼 인사였으며, 덴마크에서 온 이다 바크만(Ida Bachmann)은 조사위원들 중 가장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여성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전쟁정보국에서 일했던 미군 고위급 장교였었다. 물론 소련 대표단이었던 마리아 디미트리예브나 옵샨니코바(Maria Dmitrievna Ovsyannikova)의 경우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대령으로 복무한 인물로 열혈 친소주의자였지만, 상대적으로 단체의 성격은 보수주의 보단 당연히 반식민주의와 반파시즘 성격을 뗬다.

 

1951년 이들이 북한에 들어가서 보고 조사하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거나, 쉽게 부정하지 못하는 전쟁의 참혹함이었다. 이 전쟁의 참혹함에는 미군의 폭격, 폭격으로 인한 죽음과 파괴, 미국과 이승만 정부에 의한 대량 민간인 학살의 흔적, 전시 성범죄 그리고 궁핍한 경제적 현실 등이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군의 폭격을 실로 파괴적이고 잔혹했다. 이 국제여맹 조사단은 이와 같은 현실을 조사하기 위해 시민들을 취재했는데, 여기서 부정하기 힘든 이야기를 들었다. 예를 들면 유엔군과 한국군의 점령 시기 북한에서는 이들에 의해 만긴인 학살이 일어났다는 증언들을 이들은 들었고, 실제로 조사에 나섰다. 황해도 지역에서만 대략 12만 명의 민간인이 이 시기에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학살 생존자들이 이들에게 증언한 이야기는 믿기 힘들 정도로 추악하고 잔혹했다.

 

물론 20세기 역사에서 이러한 학살과 잔혹행위는 전쟁에서 많이 발발했으며, 21세기 미국이 치르고 있는 전쟁에서도 보고가 된다. 예를 들면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은 테러리스트들을 잡는다는 명분하에 이라크측 포로를 포로 대우도 하지 않으며 온갖 가학적인 잔혹행위를 일삼았었고,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미군 병사들이 시체에 오줌을 누는 등의 행위를 보이기까지 했었다. 예를들면 국제여맹 측 조사단에게 북측 민간인 학살 생존자들의 증언한 것들 중에는 미군이나 한국군이 여성의 유방을 도려내거나, 민간인의 목이나 신체부위를 절단하는 행위를 수도없이 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이 자행되었었다.

 

한국전쟁 시기 남한과 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에서도 이러한 잔혹행위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특히나 이승만 정부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일어났던 제주4.3항쟁이나 여순민중항쟁에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소름끼치는 학살과 잔혹행위를 저질렀다. 국제여맹 조사단이 북측 여성들에게 들었던 유엔군과 한국군의 잔혹행위들과 똑같은 일이 거기서 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과 한국전쟁 초기 남한에서 일어났다. 국민보도연맹 학살로 최소 30만에서 40만 이상이 집단 학살당했으며, 1951년 거창양민학살에서도 갓난아기 어린이 노인 여성 할 거 없이 일본군 출신 김종원이 지휘하는 군대에게 무차별 학살당했다.

 

따라서 그런 잔혹한 민간인 학살이 북한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대표적으로 신천양민 학살 사건의 경우 총 35,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됐고, 북한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국제여맹 조사단 또한 미군과 그의 하수인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결론 내렸었다. 신천양민 학살은 북한에서 얘기하는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로 미군과 미군 휘하의 한국군이 한 것으로 북한에서는 주장하고 있는 반면,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서북청년단과 같은 현지 우익 청년단 등이 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나 또한 이 학살은 우익이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미군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과 미군이 이들을 도와주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미국이 학살은 한 것이라 봐도 맥락적인 의미에서 크게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국제여맹 조사단이 조사했던 중에는 전시 성범죄도 있었다. 적잖은 북한 여성들이 유엔군과 한국군에 의한 성폭력을 증언했었고, 일부는 북한 지역에도 그들을 위한 성노예 즉 위안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증언들을 했다. 사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 위안부나 유엔군 측 위안부 등은 일본군 위안부만큼 심각한 전시 성범죄의 영역에 있는 문제다. 즉 북한 지역에서도 이들이 진주하는 동안 여성들은 강제로 납치되어 감금된 뒤 원치 않은 성관계를 했어야 했고, 일부는 군대가 습격하여 강간당하는 사례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점에 있어서 한국전쟁 시기 유엔군과 한국군에 의한 북한 지역의 성폭력은 매우 심각했으며, 당연히 여기에는 제국주의라는 문제가 빠질 수 없다.

 

한국군 위안부의 진실을 최초로 학술적으로 밝혀낸 김귀옥 교수는 반공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월남인들이 자신의 고향인 북한지역에서 일어났던 일을 회고할 때면 인민군과 한국군에 대해정반대의 증언을 하였다.”고 주장했는데, “인민군의 경우 강간사건을 경험한 경우가 거의 없었던 반면, 한국군의 경우 내가 조사했던 월남인들이나 대부분의 한국전쟁 관련 구술자들로부터 거의 빠짐없이 증언되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김귀옥 교수는 중국군의 경우 여성에 대한 강간은 즉결 처분감.” 이었지만, “미군은 광범위하게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 강간을 자행하였다.”고도 주장했다.

 

이와 같은 김귀옥 교수의 주장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닌 것이, 실제로 쿠바 혁명 시기 카스트로나 체게바라의 혁명군이나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민이나 베트콩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빨치산 등은 아녀자를 강간할 경우 그날로 총살이었다. 이는 한국전쟁 시기 빨치산도 마찬가지였으며,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부군>에서도 이러한 빨치산의 현실이 아주 잘 묘사된 바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책에서 강조하는 김귀옥 교수의 주장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에 근거한 주장이다.

 

국제여맹 조사단 또한 북한 지역을 조사하면서 미공군의 폭격을 경험했다. 중국에서 북한국경을 넘으면 이들은 평소에 걸리는 시간보다 목적지에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주간에는 미공군의 폭격으로 차량이 이동할 수 없었고, 야간에도 조명을 끄고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일부는 미군의 극심한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을 받았던 원산을 방문했었는데, 조사하는 와중에도 미공군의 폭격에 직면해야 했었다. 책을 읽으면서 항공 폭격의 무서움이 어떠한 것인지 나도 모르게 몰입했었던 것 같다.

 

이 책은 <폭격>의 저자이자 한국 현대사학자인 김태우 교수가 올해 집필한 책이다. 특히나 냉전에 의해 한국사회와 서방세계에 은폐되고 감추어진 국제여맹의 북한에서의 활동을 재조명했다. 즉 많은 이들이 모르는 감추어진 역사를 재조명하는 하나의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집필함으로써 김태우 교수는 지금까지 반공주의적 콤플렉스가 외면해온 또 다른 역사를 사실관계에 입각하여 밝혀냈다.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우리 사회에서 상당히 우익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게 되는 주제다. 즉 한국 정부 피해자론에서 한발자국 나아가기 힘든 주제다. 지금도 한국사회는 북한의 남침을 강조하는 한편, 그 이면에 있는 역사적 현실은 얘기하지 않으려 한다. 따라서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서 미군의 폭격과 전시 성범죄 그리고 민간인 학살 등을 조사했던 국제여맹 조사단의 활동은 당연히 레드컴플렉스에 의거하여 왜곡되거나 은폐되기 십상이다. 이런 점에서 김태우 교수는 상당히 훌륭한 연구작을 내놓았고,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나의 대중서로 내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크게 지적하고 싶었던 점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전시 강간에 관한 이야기다. 책에서는 성폭행 부분을 다루면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와 그 이후 소련군의 강간을 다루고 있다. 또한 그 수치가 200만이나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 출처를 확인해본 결과, 우익성향의 전쟁사학자인 앤토니 비버(Antony Beevor)였다. 앤토니 비버의 저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D-Day> 그리고 <스페인 내전>등을 포함하여 국내에도 상당수 번역됐다. 그러나 비버의 경우 기본적으로 우편향 성향의 학자로 그의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 저작들은 학계에서도 상당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소련군이 200만이나 되는 독일 및 동유럽 여성을 강간했다는 주장의 1차 출처는 독일 극우성향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으로 그것이 앤토니 비버에 의해 재생산된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보복성 전시 강간이 하나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스탈린과 소련 정부가 강간을 막으려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강간당한 그 수치는 다소 각색되고 과장되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아나톨리 칼린(Anatoly Karlin)이 쓴 붉은 군대의 독일 여성 강간은 괴벨스의 작품이다.’라는 자료에 따르면, 벨라루스 제1전선의 경우 422일부터 55일까지 90만 명의 붉은 군대 가운데 총 124건의 범죄 중 72건만의 강간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스탈린이 소련군의 강간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1945119일 스탈린이 소련의 붉은 군대에게 내린 명령에서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강간은 반공주의적으로 과장 및 각색되었다는 사실은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서방 연합군의 강간사례가 많았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독일의 게브하르트 교수의 경우 소련군 전시 강간 피해자가 50만이었던 반면 서방 연합군에 의한 강간은 86만 명이었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따라서 소련군의 전시강간은 맥락적으로 이러한 근거와 같이 봐야할 문제이며, 그러한 주장에 서방의 오리엔탈리즘의 영향도 받았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생각한다.

 

서평에서 책에 나온 소련군 강간 사례를 다소 길게 얘기했는데, 이러한 얘기를 서평에 언급하는 것은 그래도 이 책이 나름 진보주의적 관점에서 집필된 책이기에 언급한 것이다. 물론 이런 약간의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나는 김태우 교수가 쓴 책이 아주 훌륭한 작업을 했다고 생각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국제여맹의 성격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책에 따르면 이 국제여맹 조직이 냉전에서 사회주의권 국가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은 국제여맹의 반식민주의적 성격 때문이었다.

 

당시 국제여맹은 프랑스가 베트남의 호치민 정부를 상대로 저지르고 있던 식민지 침략전쟁에 대해 아주 강력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며, 프랑스 어머니들에게 자식들을 전쟁터로 보내지 말라는 반전반식민주의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였었다. 또한 알제리에서의 프랑스 식민 정책에도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따라서 이 국제여맹 본부가 그 시기 파리에서 동베를린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치른 전쟁 즉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혹은 프랑스-베트민 전쟁) 또한 호치민이 한국전쟁 시기 북한의 김일성과 연대를 표명했다는 사실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미국이 프랑스 전쟁비용의 80%를 부담했던 역사를 생각해 보았을 때, 국제여맹이 조사하고자 했던 한국전쟁 또한 식민지 해방전쟁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즉 한국전쟁 또한 반식민지 투쟁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맑스-레닌주의를 추구하는 좌파라면 이 책을 통해 그런 식민지적 모순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따라서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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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고서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실행했다고 알려진 세균전에 관한 보고서입니다.)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부대와 지방 항공 감시소들의 보고에 의하면 북한 169개 지역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곤충들이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15개 지역에 대한 전문가의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그곳들에서 발견된 곤충이 1952128일과 312일 사이에 확증되었다. 많은 경우에서 특별한 종류의 파리, 벼룩, 거미 딱정벌레, 빈대, 귀뚜라미, 모기와 기타 곤충들이 발견되었으며, 그 대부분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볼 수 없던 것들이었다. 곤충들은 많은 경우,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 예컨대 눈 위와 강의 얼음 위, 그리고 풀과 돌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일반적으로 곤충이 나올 수 없는 대단히 낮은 기온을 고려할 때, 또한 그 곤충들이 왕왕 한 장소에서 같이 발견할 수 없는 파리, 거미와 같은 각양각색의 곤충들로 구성된 집단임을 고려할 때 이러한 곤충들이 나타난 것은 의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전문조사 결과 곤충들이 병균에 감염되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곤충들은 인공적으로 배양된 것으로 생각된다.

 

1952223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는 산 위에 파리와 생선들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생선들은 거의 썩어 있었으며 콜레라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 생선들은 산 위에 잘못 투하된 것으로 생각된다. 발견된 세균 종류는 급성 콜레라, 파스토르, 페스트, 에비텔라, 리브스, 바칠루스, 파라브스등이었다.

 

파리는 토종의 한국 파리와는 다른 이상한 것들이었다. 발견된 파리는 날개가 길었으며 조금 벌어져 있었다. 몸집은 큰 편이었으며, 머리는 토종 파리의 그것보다 비교적 큰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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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9-02 0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트남 전쟁의 고엽제 피해는 널리 알려져 있는 반면, 한국 전쟁 당시의 생화학전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여러 의미에서 ‘잊혀진 전쟁‘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NamGiKim 2020-09-02 14:33   좋아요 1 | URL
괜히 브루스 커밍스가 Forgotten War 라고 한 것은 아니겠죠.

독서가 한량 심씨 2020-09-02 0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빨치산소설 보면 재귀열이란 병이 돌아 전력을 많이 잃어버리는데...바로 세균전이군요.

NamGiKim 2020-09-02 14:34   좋아요 0 | URL
영화 남부군(빨치산 출신 이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을 보면 재귀열로 고생했다는게 나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