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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치명적인 파괴를 가져왔고, 전후 분단모순을 극대화했다. 한국전쟁은 1953727일 휴전협정으로 끝이 났다. 말 그대로 휴전이란, 전쟁을 잠깐 쉬는 것으로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종결은 1945년부터 시작된 분단 모순을 극대화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나 1948년 정부수립 이래로부터 반복적으로 북진통일을 주장해오던 이승만 정권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도 그리고 휴전회담 이후 자유당 독재정치를 공고히 하면서도 정복주의적 통일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난 이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과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도 이승만 정권과 다르지 않게 북을 적대시하는 반공주의적 정책을 따라왔다. 따라서 반공주의라는 시대사적인 트라우마 및 부작용이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학자들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정부가 제시한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에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다면 목숨을 걸어야 하거나, 사회적 신분을 박탈당한 각오를 해야 했다.

 

1987년 민주화 투쟁으로 민주화를 이룩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던 30년의 지적·사상적 암흑기는 민중에게 한국전쟁을 국가가 제시한 시각에서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남기지 않았지만, 민주화 운동은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미약하게나마 부여했다. 특히나 1980년대 극심한 전두환 군사독재의 안티테제로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학생들은 실제로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전제를 두고 역사를 바라보기도 했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Korean War)’은 운동권에게 있어 한국전쟁을 정부가 제시한 관점과는 다르게 해석하게 되는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그러나 1987년 대한민국이 민주화를 이룩한 이후에도 친일세력으로부터 시작된 반공주의라는 망령은 민중 대다수를 지배하고 있었다. 1990년 전 빨치산 출신인 이태라는 인물이 자신의 빨치산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남부군이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되기도 했지만, 보수세력들의 극심한 저항과 항의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후에도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대체로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인식되어 왔고, 대중의 주류적 흐름 또한 대한민국 피해자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한국사회에서 우파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주제중 하나고, 다른 한편에선 역사를 인식하는 관점에 차질이 생기는데 악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주제다. 그러나 한국전쟁 또한 얼마든지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 역사학자 EH카의 주장대로 역사란 현재와 과거 끝없는 대화이기 때문에 기존 주류사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적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전쟁이 어떻게 해서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전재로 해석할 수 있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2. 한국전쟁을 인식하는 관점

 

한국전쟁을 인식하는 관점은 국가에 따라 다양하다. 우선 한국전쟁을 먼저 시작한 북한은 이 전쟁을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남조선 괴뢰 도당을 몰아내는 전쟁으로 인식하는 의미에서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명칭은 북의 대중매체나 자료들에서 자주 사용된다. 그에 비해 오히려 북한에게 공격을 받았던 대한민국의 경우는 “1950625일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 전쟁이라 하여 ‘6.25전쟁이라는 명칭을 대체로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물론 현재는 한국전쟁이라는 표현도 쓰긴 하지만, 6.25전쟁이라는 명칭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반면에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에 개입을 했던 미국과 중국 또한 명칭이 다르다. 195010월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자 군사적 개입을 감행했던 중국은 미국에 맞서 조선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항미원조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 명칭은 지금도 중국에서 한국전쟁을 부르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은 한국전쟁이 지금까지 미국이 치른 전쟁에 비해 잊혀졌다 하여 소위 잊혀진 전쟁(Forgotton War)’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한국전쟁(Korean War)’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의미에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곧바로 개입한 미국은 이 전쟁은 자신들이 지키고자 했던 국가 한국이라는 이름을 따서 부르는 의미가 존재한다. 이런 미국의 인식은 2013년 한국전쟁 휴전협정 60주년을 맞아 워싱턴 한국전쟁 메모리얼(Korean War Memorial)에서 연설을 했던 버락 오바마의 한국전쟁은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승리라는 발언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2016년 임기 마지막에 베트남에 가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오바마의 발언과는 큰 차이가 있다.

 

오바마의 발언이 보여주듯이 이런 발언은 대체로 민주주의 국가 남한은 세계 경제력 10위의 강대국에 올랐지만, 전체주의 국가 북한은 사회주의의 실패로 인하여 최빈국이자 최악의 독재국가로 전락했다는 생각에서 발현됐다. 이와같은 관점이 1990년대 미국을 향해 대화와 수교를 요구했던 김일성의 시도를 듣지 않게 만들었고, 1994년 한반도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으며, 20029.11 테러라는 충격과 공포를 또 다른 폭력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부시의 소위 악의 축(Axis of Evil)’발언과 북에 대한 경제재제로 이어졌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우월주의에 심취한 사상과 생각이 점철된 폭력성을 간과한다면, 한반도의 위기는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런 반공주의적 관점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이런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국방력을 강화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것이 바로 북한 핵무장의 맥락이다.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서방에서 인식하는 한국전쟁의 시각은 대체로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가 분명 내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과 서방의 역사학자들은 한국전쟁을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많이 해석했다. 후버 연구소 출신의 영국인 우파 학자 로버트 서비스는 자신의 저서 스탈린 강철권력에서 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칫하면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전면적인 충돌이 일어날 수 있었고, 그 책임은 많은 부분 스탈린에게 있었다. 그가 만일 김일성에게 재정 지원을 하지 않고 무장도 시키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그렇게 치열한 내전이 또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스탈린 강철권력 p.937~938)라고 할 정도다. 로버트서비스가 자신의 책에다 쓴 비슷한 맥락으로 미국 또한 한국전쟁을 그렇게 본다. 미국학자들이 인식하는 한국전쟁은 “1950년 스탈린과 김일성이 시작했고,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625일 버튼을 눌렀다는 것이다. 미국의 반공주의 학자 애덤 울람은 1990년대까지 한국전쟁을 스탈린의 전쟁(Stalin's War)’라고 불렀을 정도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북한에게 공격을 받았던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미국과 서방에서도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해석되어 왔던 것이다.

3. 한국전쟁의 기원

 

위에 상술한 것처럼 미국과 서방 그리고 한국이 인식한 한국전쟁은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와 함께 하고 있다. 이는 한국전쟁의 시작을 1950625일 북한군이 대대적으로 진격한 시점부터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런 관점은 1945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맞은 것과 미국과 소련의 38선 분단을 예시로 들기도 하지만, 해방 이후의 한반도 상황이나 그 이전의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놓여있던 상황은 항상 생략되면서 한국전쟁을 바라보게 되기 마련이다.

 

1980년대 한국 운동권에 큰 영향을 준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전면적인 전쟁이 시작된 날인 1950625일부터 보지 않고, 일제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한국전쟁이 이미 초기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얘기한다. 이것을 알기 위해선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던 김일성의 이력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던 친일파들에 대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1912년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김일성은 1931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시기부터 소규모 독립군대를 조직해 중국 공산당과 더불어 항일투쟁에 나섰던 인물이었다. 1933년 둥닝 전투에서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 유격대 2개 중대의 지원을 받아 이 도시에 전에 없이 대규모로 공세를 퍼부었고, 김일성의 부대는 이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 스중헝을 구하며 그 일대에서 유명해졌다. 이 때문에 피바람이 불었던 민생단 사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김일성은 백두산을 근거지로 하여 여러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본격화 되기 1달 전인 19376월 김일성 부대는 만주 국경지대에 있는 식민지 조선 치하의 보천보 지역을 습격하여 유격전을 벌이다 후퇴했고, 이후 간삼봉 전투에서 일본군 수십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김일성의 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착수했고, 김일성과 그의 부대들은 이른바 고난의 행군에 나섰다. 그러던 1940년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 부대는 홍기하 지역에서 대략 100~120명 이상의 일본군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고, 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번지던 그해 말 쯤에 소련으로 넘어가 이후 소련군 제88여단에 소속된다. 그러나 남아있던 잔존 항일 유격대는 1942년까지 작전을 전개했고, 1945년 소련 연해주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후 김일성과 그의 항일 독립군 동료들은 소련의 푸가초프 함을 타고 귀국하여 평양에서 기반을 다졌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북한의 김일성과 그의 만주 빨치산 부대 동지들의 삶이었고, 그들이 북한 정권의 핵심이 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 만주에서 김일성과 그의 항일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는데, 이러한 독립군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인 출신들로 만든 부대가 활동했었다. 이들이 바로 간도 특설대였다. 당시 간도특설대에는 대한민국에서 소위 명장 내지는 나라를 구한 위인으로 알려진 다부동 전투의 지휘관 백선엽도 있었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이들 중에는 일본이 김일성을 추적하여 죽이기 위해 이용했던 군 장교 김석원도 있었다. 당시 그의 일본 이름은 가네야마 샤쿠겐으로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일본군 대좌로 복무했던 인물이었다. 이렇게 독립군을 토벌하러 나섰던 이들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군의 핵심이 되었고, 대한민국 군부를 장악한 이들은 한국전쟁에서도 독립운동을 했던 김일성과 항일연군 출신의 장성들이 지휘하는 군대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말하는 한국전쟁의 가려진 진실이었다. 국내에서 주장된 김일성 가짜설은 김일성이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치민처럼 숨어 지내던 시절이 있어서 지어진 음모론일 뿐 이를 증명할 구체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으며, 심지어 박정희 정권 시기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이후락마저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 김일성이 독립운동가 김일성이 맞다고 인정했을 정도다.

 

또한 1945년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미군이 접수하게 된 한반도 이남은 민중의 불만이 들끓었다. 1944년부터 일제의 패망을 준비했던 여운형은 해방 후 자신의 조직이었던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족하여 새나라 건설을 위한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서울에 입성한 미군정은 여운형이 이끌던 건국준비위윈회와 그가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과거 조선 총독부의 행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친일 세력들을 이용했다. 이는 19458월 대일선전포고 이래로 한반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며 제국주의 군대를 무찔렀던 소련군의 군정 통치하고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거기다 미군정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를 도왔고 미군정의 지원을 받는 이승만은 친일세력인 한민당과 결탁하여 사회의 더 나은 사회와 임금인상 그리고 친일파 청산을 바라던 민중을 상대로 빨갱이 척결에 나섰다. 심지어 몽양 여운형과 우사 김규식이 전개했던 좌우합작운동도 이승만 세력의 공격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이후 남한 사회에서 전국적인 노동자 투쟁을 벌이던 세력들은 결국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 진압당했다. 194843일에 시작된 제주 4.3 봉기는 미군정과 우익세력의 잔인함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는 사건이었다. 제주4.3 봉기와 이에 반대하여 좌익 성향의 군인들이 일으켰던 여순 민중항쟁은 미군정과 우익 세력들에 의해 아주 잔인하게 진압당했고, 민간인 학살을 야기했으며, 이 봉기를 진압한 이들은 채병덕과 같은 친일세력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이라는 게 1930년대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시점에서 시작된 것이었고, 해방 이후 민중들의 투쟁과 미군정의 폭압 통치로 인해 민중들이 이들에 맞서 싸우는 투쟁의 형태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1950년 북한에서 일으켰다고 알려진 한국전쟁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세력과 이들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이승만 친일 친미 제국주의 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4. 민간인 학살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에는 미국과 한국정부가 한반도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도 있다. 위에서 한국전쟁의 기원을 설명하며 예시로 든 제주 4.3 항쟁과 여순민중항쟁은 수많은 민간인 피해를 초래했다. 4.3 항쟁에서 학살 당한 민간인은 최소 3만 명에서 45000명에 해당되는데, 이들 중 최소 80% 이상이 진압을 감행했던 친일 출신의 우익 경찰들과 이북의 친일 지주 출신의 자식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의 저지른 짓이었다. 이들이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 노인 아이었고, 1살 내지는 2살짜리 갓난아기들도 매우 많았다.

 

제주4.3 항쟁의 진압을 반대하여 좌익성향의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여순민중항쟁 또한 최소 수천 명에서 1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는데, 여수와 순천에서 해방구를 형성하여 지주와 자본가들을 대상으로 인민재판을 했던 좌익 성향의 게릴라들과는 달리, 봉기를 진압하러 온 토벌군인들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형했다. 여순민중항쟁에서 진압군으로 나섰던 인물 중에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파푸아뉴기니와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군 장교로 전투를 치렀던 김종원이라는 인물도 있었는데, 그는 체포한 민간인들을 모아놓고 일본도로 민간인들의 목을 배는 것을 즐겼으며, 이런 일본군 출신의 지휘관의 명령을 따르는 진압군들에 의해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고, 학살당한 이들 대부분은 여자와 아이 그리고 노인이었다.

 

이런 잔인한 민간인 학살은 1950년 한국전쟁 초기에도 남한 전역에서 일어났다. 특히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좌익 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만든 국민보도연맹은 전쟁이 시작되면서 학살의 대명사가 됐다. 전쟁 초기 인민군이 신속하게 진격을 하자, 후퇴하던 한국군은 보도연맹원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보도연맹원들 대다수가 그저 쌀이나 보리 조금 더 준다는 이유로 가입하거나, 가입하면 어떤 경제적인 혜택을 기대하고 어려운 삶을 자력으로 극복하고자 가입했던 인물들이 대다수였다는 점에서 엄연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승인으로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로 최소 30만 명에서 50만 명이 학살당했고, 많게는 100만 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민간인 학살은 1950915일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이 진격하면서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서울을 수복하고 난 이후에는 인민군 부역자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고, 지리산에 고립된 빨치산들을 토벌하면서도 일어났다. 1951년에 일어났던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보면 이 또한 학살당한 이들 대다수가 여성, 노인, 아이라는 점에서 한국군의 양민학살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전쟁 초기 북한의 인민군에 의한 학살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이 저지른 학살은 인민재판과 같은 형식이었고, 주로 지주나 자본가 친일파들 그리고 남한 군경의 가족들을 대상으로 벌어졌다. 쉽게 말해 인민군은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것이다. 2000년대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도한 진실화해조사위원회는 한국전쟁 시기 좌익과 우익의 학살을 조사했는데, 조사 결과 인민군의 학살은 전체 사례에서 1/6에 불과했다.

 

한국전쟁에서 초기에 신속히 군사개입을 감행한 미국도 민간인 학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1968316일 베트남의 미라이라는 마을에선 30명의 미군이 504명의 민간인을 잔인하게 학살했는데, 1950726일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 마을에선 미군 제1 기병사단에 의해 3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또한 미군은 한국전쟁 당시 우익 군경들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을 전혀 말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이 좌익 소탕한다는 것을 옹호하며 이를 전적으로 도왔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전쟁범죄는 역시 무차별 폭격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초기에 개입했을 때부터 제공권을 장악했는데, 폭격 또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드레스덴이나 도쿄 폭격 같이 대규모의 융단 폭격은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다. 석기시대라는 단어를 쓰기 좋아했던 커티스 르메이의 폭격 방식으로 인하여 한국전쟁에선 무수히 많은 남북한 민간인들이 미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의 난민이 생겼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 전역에서 미군이 사용한 폭탄의 양은 50만 톤이고, 그 중 16~20만 톤이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데 사용됐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전쟁 기간 3년 동안 전쟁에서 사용한 폭탄의 양은 635000톤이었다. 이것은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사용한 네이팜 폭탄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로, 사용한 네이팜 폭탄의 양까지 합치면 총 665000톤이 된다.

 

미군의 폭격은 비단 북한만을 대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북한의 피해가 가장 커서 수도 평양은 쑥대밭이 되었고, 원산은 달이 표면으로 변했다. 심지어 미군의 B-29 폭격기는 북한 뿐만 아니라,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에게도 행해졌다. 중국의 단동이나 심양같은 곳도 미군의 폭격에 시달렸다. 또한 이런 미군의 무차별 폭격은 남한에서도 일어났다. 전쟁 초기 인민군의 진격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을 때, 미군은 북한이 점령한 남한 땅 전체를 대상으로 폭격을 감행했다. 1951년 한국전쟁이 다시 38선 부근에서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도 미군은 남한에서 폭격임무를 수행했다. 이 폭격 임무는 지리산에 숨어든 빨치산들을 대상으로 행해졌다. 미군은 북한과 남한 내의 공산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세균전을 감행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선 유엔군 총 사령관이던 리지웨이 장군의 프랑스 입국을 거부하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었다. 이처럼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한국군은 민간인 전체를 적으로 규정하고 싸웠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5. 결론: 한국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의 명칭, 인식하는 관점, 전쟁의 기원, 민간인 학살까지 살펴보았다. 이런 역사적 맥락과 한국 현대사적 흐름을 보았을 때,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사실 남한 정부가 정부 수립 초기에 임정 독립운동가들과 남로당 출신이었다가 박헌영과의 노선 갈등으로 전향한 조봉암을 초기 내각에 구성하긴 했지만, 사회에서의 큰 권력은 미군정과 결탁하여 살아남은 친일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이 문화계와 군, 대한민국 행정을 장악했다. 이승만 본인이 독립운동가였을지는 몰라도(이것도 매우 논란이 많지만), 그의 정권은 친일파 정권이나 다름없었다.

 

해방 이후 여론조사에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다는 사실에서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가 반민중적 정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했던 이들이 일반 양민에서 민간인이 되가는 과정은 베트남 전쟁에서 일반적인 민간인이 베트콩에 가입하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폭격이나 수색과 섬멸 작전으로 가족은 잃은 이들이 베트콩에 가입했듯이, 한국전쟁 시기 양민에서 빨치산에서 활동하게 된 이들 대다수가 미국과 이를 추종하는 반민중세력에게 가족을 잃거나 극심한 탄압을 받아, 복수심을 가지고 혁명군에 가입을 했던 이들이었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의 탄압을 받으면서 펜으로 군사독재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가 리영희 선생은 그 시기 전환시대의 논리를 집필하여 미국의 침략전쟁이던 베트남 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했다. 1776년 건국 이래 미국이 최초로 패배한 전쟁인 베트남 전쟁은 현재 미국에서도 정통성을 북베트남과 호치민 정권에게 대도록 주고 있고, 대체로 전쟁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이나 플래툰, 플 메탈 자켓, 74일생 등의 영화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각을 대변하고 있다.

 

주제를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전쟁으로 돌리면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미국인들이 상당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잊혀진 전쟁이라는 점이 한몫 하지만, 미국 언론에서 얘기하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상당히 대한민국 우익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크게 다를 거 없다. 잊혀진 전쟁이라는 사실에서 한국전쟁은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미국과 서방세계에 민족해방전쟁으로 기억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의 맥락을 민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나 다름 없었다. 한국의 지배계급은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한 친일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북한의 지도부는 항일 빨치산에 두고 있었다. 굳이 당시 북한정권의 균형을 이루었던 박헌영 계열의 남로당과 연안파 그리고 소련파까지 합치면, 만주항일 빨치산과, 일제시기 경성 트로이카로 대표되는 국내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 중국 공산당과 연합했던 독립운동 세력 그리고 소련의 붉은 군대의 일원으로 독일과 일본에 맞서 싸웠던 반파시즘 세력까지, 항일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일본에서 신속히 투입한 스미스 부대가 맞닥뜨린 인민군 부대는 중국의 마오쩌둥으로부터 받은 조선족 사단이었다. 이 조선족 사단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큰 공로를 세웠던 혁명 군대였다. 따라서 한국전쟁이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고, 브루스 커밍스의 시각이 틀리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지금까지도 한국의 수구세력들에 의해 미화되고, 반공주의적으로 해석되는 주제다. 그래서 이 전쟁을 민족해방전쟁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상당히 민감하고 심한 반감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브루스 커밍스를 포함하여 한국전쟁을 다르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관점 또한 근거가 매우 타당하고, 기존의 반공주의적 해석을 얼마든지 뒤집고 남을 정도로 실증주의적 사관이라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한국전쟁은 분명히 반민중적 정권에 맞선 민족해방전쟁이었다. 현재 남과 북의 상황이 어떻든 역사는 정직한 것이다. 약산 김원봉 서훈이 논란이 되는 시점에서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 공개적으로 말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이겠지만, 나중에 시대가 변했을 때 이 전쟁의 성격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따라서 역사의 진실과 정직함을 추구한다면 한국전쟁이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이 부정당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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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오바마의 연설)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Korean War)은 참혹하고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대략 200~300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초래한 이 전쟁에 미국은 즉각적으로 개입했고, UN군이라는 이름으로 대규모의 지상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하여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권을 지키고자 했다. 당연히 UN군에서 압도적인 병력을 차지한 것은 미군이었고, 19537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미국은 크고 작은 전투를 이어나갔다. 3년간의 전쟁에서 36000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했고, 2150대의 항공기를 잃었으며, 항공모함·전함·구축함·순양함 등을 포함한 371척의 함대를 한반도 주변 해역에 배치했었다. 그러나 미국은 승리하지 못했다. 설사 빈말로라도 그것이 승리라고 말한다 치더라도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권을 유지한 절반의 성공이었을 뿐이었다. 무승부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2013년 미국의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은 수도 워싱턴 DC에서 열린 정전협정 60주년 기념식에서 한국전쟁은 미국과 대한민국이 승리한 전쟁이다.”라고 하며 지극히 반공주의적인 연설을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바마와 미국과 한국의 소위 보수주의자들이 믿고 싶어 하는 하나의 믿음이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믿음은 소위 오바마를 포함한 미국의 반공주의자들과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이 생각일 것이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패배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전쟁이 1953년 휴전협정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필자는 이 전쟁 자체가 무승부이거나 양측의 반쪽짜리 승리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선 한국전쟁에서 누가 최종적으로 지고 이겼냐를 따질 생각이 없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진짜목적은 미국의 오만함 혹은 정세판단 부족으로 빚어진 전쟁 초기의 패배 및 후퇴를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전쟁 시작부터 인천상륙작전 이전까지의 미군의 전황을 다룰 생각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대량생산 체제를 통해 소련과 견줄만한 군사력을 길러낸 미국이 한국전쟁 초기 신속한 개입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동맹국인 한국에서 사실상 끝자락까지 후퇴한 것은 20세기 미국 전쟁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패권을 휘두르게 된 것은 19459월이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를 패망시킨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기점으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분단시켰다. 한반도 이남에 절반의 패권을 장악했던 미국은 미군정이라는 형태로 통치를 했고, 일제시기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승만을 지원했다. 이런 미군정의 지원으로 1948년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됐다.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 T-34 탱크)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미군정기 전라도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발언을 했던 인물로 확실히 한반도 분단론자였다. 여기에 더 나아가 단독정부 수립을 통해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소위 북진통일론(北進統一論)’을 주구장창 주장했다. 북진통일론이란 말그대로 무력을 통해 북한정권을 정복해서 통일을 이룩하자는 주장이다. 1950년 미국은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이라는 것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선언이었다. 이에 따라 미군 또한 한반도에서 점진적인 철수를 감행했고, 한반도 이남에 주둔하는 미군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시기 한반도 이남에 남아있던 미군사고문단 500명뿐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대포나 트럭같은 군수물자들을 한국군에게 지원했는데, 스탈린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북한군과 비교해보았을 때 매우 열악했다. 이것은 결국 한국군과 북한군의 전력에 큰 공백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를 모르고 있던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다.

 

19506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군대의 규모나 훈련, 장비, 기술 면에서 떨어져 있던 한국군은 인민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인민군은 38선에 있던 한국군 주력부대를 궤멸시키고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이승만 정부가 도망치면서 폭파해 놓은 한강 다리를 가설하는데 시간을 지체하긴 했지만, 단기간에 한국군 측 중부전선군을 무너뜨리고 춘천과 홍천을 점령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즉각적으로 개입했다. 1950627일 미국의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은 유엔 안보리에서 북의 군사적 행위를 침략으로 규정했다.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던 628일 미극동공군은 작전을 개시했고 629일에는 172회나 출격했다. 629일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일본 도쿄를 떠나 비행기를 통해 전선을 둘러본 뒤, 수원에 도착하여 이승만과 회담한다. 195072일에는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하게 된다.

(한국전쟁 최초로 전투에 투입된 지상부대인 스미스 부대)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인민군 측 Yak 전투기들이 대다수 파괴되었고, 제공권은 미국이 장악하게 됐다. 19507월 초 미군이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서 B-26 폭격기와 F-80 전투기가 한반도 상공을 뒤덮었다. 72일 미군의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한 이후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이 지휘하는 제24 보병 사단 1개 대대가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오산으로 보내졌다. 75일 미국의 스미스 부대는 제107전차연대를 앞세운 인민군 제4사단과 전투를 치르게 되었는데,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스미스 부대의 전투원 504명 중 최소 150명이 전사했고, 31명이 실종됐다. 결국 스미스 부대는 T-34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에 밀려 후퇴했다.

(대전 전투당시 포격 지원을 하는 미군)

 

거침없는 진격을 해나가던 인민군은 해방 5주년인 815일까지 임시수도 부산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었다. 그들에게 있어 충청도에 있는 대전을 점령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1950710일 미군과 한국군은 대전에 방어선을 구축해 놓았다. 그로부터 4일 뒤는 714T-34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 4개 사단이 포병의 지원하에 공격을 했고, 미군이 가지고 있던 2.36인치 바주카포는 소련제 탱크를 파괴하는데 역부족이었다. 716일 한국군과 미군이 구축해 놓은 대전 방어선은 무너졌고, 19일에는 인민군이 미 제24사단의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대전에 투입되었던 미군 사단을 붕괴시켰다. 여기서 미군 지휘관이던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소장을 포로로 붙잡았고, 최소 2000명 이상의 미군 사상자가 속출했다.

(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던 윌리엄 딘 소장)

 

대전을 함락시킨 인민군은 그 기세를 몰아 한국군과 미군을 전선 전역에서 밀고 내려갔다. 대전 점령 이후 인민군은 전주를 점령하고, 전라남도 광주를 점령했으며, 726~27일 여수까지 점령했다. 이렇게 되면서 한국군과 미군은 경상도와 낙동강 쪽으로 후퇴하게 됐다. 19507월 말 경북 상주에 투입되었던 3600명 규모의 흑인 병사들은 인민군과의 전투에서 무기와 장비를 버려둔 채 도망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19507월 말 미군과 한국군은 전선에서 92000명 규모(이중 절반은 미군이다.)로 인민군보다 병력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했지만, 그런데도 계속 퇴각했던 것이다. 병력 규모 면에서 인민군을 압도하게 되었던 것은 부산항을 통해 병력과 물자지원을 끊임없이 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렇게 지원받은 병력 중에는 미국의 제1기병사단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끊임없는 병력과 물자지원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한국군은 19508월 워커 라인(Walker Line) 즉 낙동강 전선을 형성하게 됐다.

 

8월 초 낙동강 전선이 형성된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9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그곳에서 교착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즉 미군과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전세를 뒤집을 반격 한번 거의 해보지 못 해봤다는 얘기다. 인민군이 수도 서울을 점령한 이후부터 낙동강 전선이 형성될 때까지의 전투 과정은 미군의 작전 실패 및 패배의 기록이다. 이런 미군의 실패는 인민군의 전투능력을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에 빠져 과소평가했다는 점에 기인한다. 위에서 상술했던 스미스 부대 같은 경우에는 인민군이랑 교전하기 전 인민군은 공포에 떨면서 후퇴할 것이다.”라고 대다수의 미군은 생각했었다. 실제로 오산에서 공포에 떨면서 후퇴하게 된 쪽은 인민군이 아니라 미군이었다.

(낙동강 전선)

 

백인이 대다수이던 미군의 경우 북한군을 열등한 노란색 인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유색 인종과 그 문화를 비문명적이라고 생각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항복시켰던 역사적 경험도 작용했다. 그리고 이런 인종차별은 미군내에도 있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12%가 흑인이었지만, 미군은 흑인들의 부대를 백인들과 분리했다. 그랬기에 인종차별을 당한 흑인 부대는 전투력이 매우 저하된 상태에 놓여 위에서 상술한 상주 전투에서처럼 후퇴하기 바쁜 경우도 있었다. 또한 미군은 후퇴하는 과정에서 노근리라는 마을에서 대량 30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동양에 대한 무지도 여기에 반영되었다.

 

거기다 초반에 미군이 마주했던 인민군 병력은 전투 경험이 많은 정예부대였다. 한국전쟁 초기 인민군 선봉대에 섰던 부대는 과거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편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공산당 측 부대였다. 이들은 중국의 민족해방투쟁에서 일본 제국주의 군대와 미국의 지원을 받던 중국 국민당군 부대에 맞서 싸워 혁명에 승리하는데 큰 기여를 했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인민군에게 밀렸던 이유는 허술한 군대를 보낸 이유만은 아니었다. 이처럼 미군 내부 문제가 심각하게 존재했던 것과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에 빠졌던 것도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소위 보수세력들이 많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렇기에 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실책이나 과오를 비판하는 건 색깔몰이 당하기 아주 쉽다. 따라서 브루스 커밍스와 같이 한국전쟁을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보는 시도도 필요하다. 그 시도 중엔 전쟁 초기 미군의 실책과 오만함을 분석하는 것도 필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참고자료

 

미국의 6.25 전쟁사, 정길현, 북코리아, 2015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현실문화, 2017

한국전쟁, 박태균, 책과 함께, 2005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 하루끼, 남기정, 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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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브루스 커밍스 지음, 조행복 옮김 / 현실문화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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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들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통령 문재인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난 뒤, 잠시 50% 중후반의 지지율에서 다시 70%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남북회담을 아주 극찬했다. 이로써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2018년인 올해는 남북한 정부가 수립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48815일에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194899일에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됐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분단은 계속되고 있으며 아직까지는 휴전 상태다. 남북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지만, 일반 국민들의 인식하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아직까지는 크게 달라지고 있지 않다. 즉 미국과 한국의 공식 견해인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1950625일 전쟁을 시작했는데 미국이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대한민국을 지켰다는 것이다.”로써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무조건 악으로만 간주되어야 하고, 대한민국은 선으로 간주돼야만 하는 시각에서만 바라보는 것 같다. 대체로 우리 국민들이 이해하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이 아직은 거기까지 밖에 안 된다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국내에서 출판된 논문이나 서적들 중에는 대체로 우익적이고 보수적인 시각이 반영된 것들이 많다.

 

작년 12월 한국전쟁에 대한 권위 있는 연구자이자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비판적인 브루스 커밍스의 새 책이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됐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80년대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가 2010년대 들어서 쓴 한국전쟁 서적이다. 분량은 그리 많지 않지만 한국전쟁의 핵심을 아주 잘 정리했고, 기존의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많이 벗어났다.

 

1. 미국에게는 잊혀진 전쟁

 

우리에게 있어서 6.25라고 불리는 한국전쟁은 19506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됐다. 한국전쟁은 19537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전쟁이다. 즉 어느 누구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라는 얘기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전쟁에 대한 명칭은 각 나라마다 다르다. 대한민국의 경우 북한군이 T-34탱크를 몰고 내려온 날인 625일에 시작됐다고 하여 6.25전쟁이라고 부른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곧바로 개입한 미국은 이 전쟁은 자신들이 지키고자 했던 국가 한국이라는 이름을 따서 한국전쟁(Korean War)라고 부른다. 이 전쟁을 먼저 시작한 북한의 경우 이 전쟁을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남조선 괴뢰 도당을 몰아내는 전쟁혹은 민족해방전쟁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북한은 이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 칭한다. 반면 북한의 멸망할 위기에 놓이자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기치를 내걸고 100만 대군을 참전시킨 중국은 이 전쟁을 항미원조전쟁이라 부른다. 이렇듯 한국전쟁의 주축이 되었던 국가들 마다 이 전쟁을 부르는 명칭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점부터 사실상 참전했던 미국은 19537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까지 전쟁에 참전했다. 많은 병사들이 한반도에 파병되었고, 전쟁기간동안 약 36천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수많은 병력이 동원되고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게 있어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다. 미국사회는 한국전쟁에 대해 그다지 크나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한국전쟁이 잊혀졌다는 얘기는 미국 민중의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던 제2차세계대전이나, 미국 민중의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던 베트남 전쟁에 비해 잊혔다는 얘기도 된다.

 

저자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에 따르면 체계적인 억압과 검열 때문이라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미국 사회는 매카시즘이라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빠져있었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자들로 낙인찍힐까봐 두려움에 떨던 시대였다. 따라서 그 전쟁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큰 위험이 뒤따랐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소련의 핵개발로 인하여 미국사회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있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한국전에 큰 장애물 없이 참전할 수 있었다. 매카시즘 덕분에 미국은 한국전쟁 반대세력을 크게 형성하지 않을 수 있었고, 한국전쟁도 1951년 춘계공세 이후 다시 38선 부근에서 벌어지는 고지 쟁탈전 위주의 전투로 바뀌고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미국 사람들 관심사에서 사라졌다.

 

따라서 한국전쟁 시기 한반도에서 미국의 벌인 만행과, 19452차세계대전 이후 조선반도에 들어온 미군정이 저지른 만행이 미국 내에서 크게 논쟁거리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 속에서 냉전 이후 미국은 북한이라는 나라를 악의 축으로 결정하는 실책을 범하였다.

 

2. 전쟁의 기원과 남북한 각 정부의 수립 과정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은 한국전쟁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 한국근현대사를 책에 아주 잘 정리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으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지원 받은 김일성이 1950625일 대한민국을 기습했다.”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한국전쟁 이전인 남북분단정부 수립과 해방 후 분단의 비극을 매우 잘 조명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식민지 통치 시기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세력과 만주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세력이 나중에 분단 속에서 남북한 분단 정권을 수립했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브루스 커밍스는 북한의 지도자이자 독재자이기도한 김일성과 북한 초기 내각 거두들의 항일무장투쟁을 잘 재조명 했다. 김일성이 후에 저지른 과오를 떠나서 그의 항일무장투쟁을 과장 없이 충실하게 재조명한 건 분명 대단하다. 커밍스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의 주류 정치세력들은 만주항일무장투쟁 세력들로 구성된 반면 대한민국의 주류 정치 세력들은 대체로 친일파들이었다. 이와 같은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은 일리가 없는 주장이 절대 아니지만, 한 가지 놓친 부분이 있다.

 

대한민국 초대 내각이 꼭 친일파들로만 구성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임시정부의 주석이라 할 수 있는 백범 김구가 대한민국 초대내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 외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적잖게 대한민국 초대 내각에 들어갔다. 신익희, 이범석, 이시영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적잖게 대한민국 초대 내각에 참여했고, 사회주의자였던 죽산 조봉암도 대한민국 초대 내각에서 농림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책에 서술하지 않은 부분은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계열 세력들이 큰 힘을 발휘했던 것은 아니었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뭉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친일파들을 웬만큼 처벌했던 데에 비해 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을 하나도 청산하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북한은 대한민국의 친일파 청산을 문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책 저자인 브루스 커밍스가 이 점을 놓치긴 했지만, 분단과 한국전쟁의 본질을 잘 파악했다는 점에선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해방 이후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만든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미군정이 해산한 것부터 시작하여 친일파들을 앞세워 각종 노동자 농민 투쟁을 피로 물들이고 대구와 제주도 그리고 여수 순천을 피바다로 물들인 미군정의 잘못을 아주 정확히 지적했다. 김종원을 비롯한 우익 파시스트들과 친일파들이 벌인 악행도 아주 잘 정리했다. 즉 미군정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일목요연하게 비판했다. 이와 같은 커밍스의 해석은 아주 정확하고 훌륭하다.

 

3. 전쟁의 성격과 민간인 학살

 

3년간 지속되던 한국전쟁은 민간인 학살로 얼룩져 있다. 전쟁 초기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에서 벌인 최악이 민간인 학살인 보도연맹 학살로 인하여 최소 30만 명이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학살됐다. 저자 커밍스는 미국의 동맹국 대한민국이 벌인 민간인 학살을 낱낱이 밝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군과 이승만 정부에 의해서 학살당한 사람이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의 학살로 인하여 죽은 사람의 숫자를 훨씬 능가한다고 한다.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인민군의 양민학살 또한 책에서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그 또한 전쟁 시기 인민군의 저지른 양민 학살 또한 잘못된학살이라는 사실이라 책에서 알려주고 있다.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사람(민간인뿐만 아니라 포로도 포함된다.)은 한 몇 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다만 인민군의 학살은 국군이나 미군에 비하면 어느 정도 기준이 있었다. 2000년대 만들어진 진실화해위원회는 북한이나 남한의 좌익에 의한 처형도 똑같이 다루었는데, 그들의 조사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의 잔학 행위가 전체 사례에서 대략 1/6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이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고 한다. 한 예로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과 그 협력자들은 서울, 대전, 청주 등지에서 수백 명씩 살해하여 전부 1100명을 살해했는데 대개는 억류되어 있던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 회원들이었다. 반면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한 국군학살에서 수천구의 시신을 찾아냈는데, 이중 10살 미만의 어린이의 시신도 수십 구씩이나 발견되었다.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자국인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 또한 낱낱이 밝혔다. 19507월 미국 제1기병사단에 의해서 200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노근리에서 학살되었다. 그리고 미군은 한국군의 노골적인 학살을 하도록 방지했고, 절대 막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제거하고자 했던 대상을 포로로 잡아 대책없이 넘기며 그들의 학살을 돕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이 저지른 최악의 민간인 학살은 무차별 폭격이라 할 수 있다. 2차세계대전에서 태평양전쟁 구역 전체에 투하된 폭탄 총량이 503000톤이었다. 이중 20만 톤은 일본본토에 떨어졌다. 그러나 1950~53년까지 미국이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퍼부은 폭탄의 량은 635000톤이다. 거기다 북한에 쏟아 부은 네이팜 폭탄은 32000톤이고, 이걸 다 합치면 667000톤이 된다. 네이팜탄의 파괴적 효과는 베트남보다 북한에서 더 힘을 발휘했다. 그것은 북한 인구가 조밀한 도시와 도시 산업 시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2차세계대전에서 일본 도시 60곳이 평균 43퍼센트 수준으로 파괴된 반면, 북한 도시와 마을이 파괴된 정도는 40~90퍼센트까지로 추산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북한을 무차별 폭격하며 북한이라는 땅을 달의 표면과 같은 땅으로 만들었다. 당시 미공군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의 증언에 따르면 100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폭격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 수치가 과장이든 아니든 간에 미국의 인정사정 없는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죽은 것은 사실이다.

 

4. 이제는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가 아닌 '한국전쟁이 왜 일어났는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한국전쟁을 보아야할 때이다.

 

책의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이 책을 통해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으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지원 받은 김일성이 1950625일 대한민국을 기습했다.”와 같이 한국전쟁을 누가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는 시각이나 견해에 반대하여 한국전쟁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리고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지난 한국전쟁 시기 북한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미국이 저지른 무차별 폭격에 대해 조리 있게 비판했다. 이와 같이 그가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분명 미국의 주류역사학계가 가지고 있는 시각과는 완전히 상반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국내에 있는 알라딘 인터넷 서점의 책 평점과 amazon(미국의 인터넷 소매점)에 나와 있는 이 책의 평점을 잠깐 찾아보았다. 두 사이트에서 이 책에 대해 평점을 매우 낮게 준 사람들이 이 책에서 문제 삼는 공통점은 이 책이 좌편향 적이다.’라거나 저자가 빨갱이라는 것이다. 이렇든 이 책은 한국이나 미국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하고는 사뭇 다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을 평가 절하하는 세력들은 기존의 반공주의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이후 전쟁의 위협은 한반도를 맴돌았다. 그리고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 뻔 했다. 19681,21사건과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때, 1994년 클린턴 정부가 북폭을 준비했을 때,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부시 정부 안에서 북한도 공격해서 없애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2010년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2017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은 화염과 분노에 휩싸일 것이다.’라고 했을 때 말이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긴장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늘상 일어났고, 한반도에 사는 국민들을 긴장관계로 몰아넣었다.

 

최근 들어 한반도는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전쟁을 불사하겠다던 북미관계도 차츰 완화되어 2018612일에는 사상최초로 북미정상회담이 싱가폴에서 개최되기 까지 했다. 소위 보수 꼴통으로 유명한 도널드 트럼프가 김정은과 북한에게 보인 반응은 정말 의외였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과 남한의 대통령 문재인을 극찬했다. 그리고 얼마 전인 2018918에는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이어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 회담은 잘 진행되었다. 이번 정상 회담에서 김정은은 조만간 서울을 방문할 것이라 입장을 표명했다. 미국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이번 회담에서 보인 반응은 아주 긍정적이었다. 작년의 북미관계를 고려해보자면, 생각하기 힘들었던 일이 올해 들어 일어났다. 이렇듯 한반도는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즉 한반도 관계가 다시 변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아직까지 일반 사람들이 인식하는 한국전쟁의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지극히 우익적인 관점에 빠져있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가 바뀌듯이 한국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도 앞으로 보다 더 넓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선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과 같은 책들이 앞으로 더 많이 나와야 할 거고, 그런 책들이 대중들에게 많이 읽혀야 할 것이다. 이번 남북관계과 개선되는 것을 보면서 희망을 한번 가져본다.

 

분단적폐 물리치고 가자 평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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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9-27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국은 건국 이래 국지적 전투에서는
졌어도 전쟁에서는 진 적이 없는 나라
였습니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처음으로 이기지
못한 전쟁이었습니다.

미국에게는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어쩌면 잊고 싶은 전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NamGiKim 2018-09-27 10:08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미국이 최초로 이기지 못한 전쟁이죠. 그리고 미국은 베트남에서 깨지죠. 이후 미국은 승리하지 못했던 트라우마에 빠졌지만, 걸프전쟁으로 자존심을 회복했죠.

겨울호랑이 2018-09-27 19: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Ho Chi Minh 님 글을 읽다보니, 두 사람이 싸울 때 ‘누가 먼저 주먹을 휘둘렀느냐‘보다 ‘왜 싸웠는가?‘가 중요함에도 한국전쟁에서 이 질문은 제기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NamGiKim 2018-09-27 20:03   좋아요 1 | URL
오 그랬군요.ㅎㅎㅎ 사실 그런 질문이 던져지지 못한 것은 분단이라는 현실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라 봅니다. 지금까지 분단이라는 모순속에서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계속 키워왔고, 그 상황에선 생각치 못한 것이겠죠. 그리고 울나라 사람들은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미국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넘기는것 같습니다. 김칫국 부터 마시는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한반도의 정세가 더 좋아지면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좀 더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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