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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마녀들 -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김태우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평점 :
한국전쟁 당시 북한은 전쟁 초기부터 1953년 휴전협정을 조인할 때까지, B-29 폭격기를 포함한 미공군의 최신식 항공 폭격에 시달렸었다. 수도 평양을 포함하여, 원산, 청진, 함흥, 신의주 등의 도시들은 말 그대로 ‘달의표면(Surface of the Moon)’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미공군의 폭탄세례를 받았었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현재까지 제공권에서만큼은 단한번의 헤게모니를 잃지 않았던 미국의 전쟁방식은 바로 이와 같은 압도적인 화력공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은 전쟁 3년기간 동안 북한을 폭격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을 폭격하기 위해 태평양 전쟁에서 사용한 폭탄의 양은 20만 톤에 불과했다. 여기에는 소이탄과 같이 터질 때 2,000도에서 3,000도의 폭발력을 지닌 폭탄들이 대거 투하됐으며, 1945년 3월에 있던 단 하루 동안의 폭격만으로도 10만 명의 민간인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터뜨린 폭탄은 전쟁 3년 기간 동안 총 63만 5,000톤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본토 공습 당시 미국이 투하한 폭탄에 3배 이상에 달했다. 물론 이런 폭격은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 지역에서도 있었으며, 여기에 사용한 네이팜 폭탄의 양까지 합치면 총 66만 5,000톤이 된다.
사실 전쟁 초기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미국방부의 기본 지침이었던 군사시설만을 폭격하는 것을 목표로 했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 이후 맥아더는 폭격의 전략전술을 바꿨고, 그로 인해서 미국은 단순히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군사시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시설들까지 대규모 융단 폭격을 감행하게 된 것이었다. 1950년 11월 8일 미공군이 북한의 도시 신의주를 폭격했었다. 대략 100대의 미군 항공기가 투입되어 신의주를 집중폭격했는데, 이날 총 3017호에 달하는 공공건문들 가운데 2,100호가 파괴되었고, 5,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었다. 충격적이게도 폭격으로 죽은 민간인 5,000명 중 80%에 달하는 4,000명 이상은 여성과 어린이라는 점에서 소름끼치는 학살극이었다.
이처럼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폭격은 잔인했으며, 당시 미공군 사령관이던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의 표현을 빌리자면,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죽였고 700만 명 이상을 난민으로 만들었다.” 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학살당했다는 얘기다. 비극적이게도 이후 베트남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미군에 의한 대량의 민간인 살상 혹은 대학살이 일어났다 사실에서,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똑같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군의 폭격이 한참이던 1951년 용감한 여성들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고 참혹한 전장의 한가운데에 자발적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덴마크, 체코슽로바키아, 네덜란드, 영국,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동독, 서독, 벨기에, 캐나다, 쿠바, 아르헨티나, 튀니지, 알제리, 중국 그리고 베트남으로 이루어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남북아메리카를 아우르는 인종과 국적을 뛰어넘는 용감한 여성들의 연합체였다. 총 18개국으로부터 온 21명의 외국인 여성들이었으며, 여성차별이라는 시대적인 한계를 자신들의 역량과 능력으로 극복한 이들이기도 했다. 이들이 바로 국제민주여성연맹(Women's International Democratic Federation) 단원들이었다.
서방세계에서 이른바 반공주의(Anti-Communism)가 팽배하던 냉전시기 이 단체는 소련의 어용단체라는 비난과 오명에 휩싸였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전쟁 시기 북한지역을 조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들어간 인사들 중에는 당시 사회주의권 국가들만 있었던 것이 절대 아니었으며, 당시 영국 노동당 신분으로 참가했던 모니카 펠턴(Monica Felton)의 경우 좌파와는 거리가 먼 인사였으며, 덴마크에서 온 이다 바크만(Ida Bachmann)은 조사위원들 중 가장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여성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전쟁정보국에서 일했던 미군 고위급 장교였었다. 물론 소련 대표단이었던 마리아 디미트리예브나 옵샨니코바(Maria Dmitrievna Ovsyannikova)의 경우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대령으로 복무한 인물로 열혈 친소주의자였지만, 상대적으로 단체의 성격은 보수주의 보단 당연히 반식민주의와 반파시즘 성격을 뗬다.
1951년 이들이 북한에 들어가서 보고 조사하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거나, 쉽게 부정하지 못하는 전쟁의 참혹함이었다. 이 전쟁의 참혹함에는 미군의 폭격, 폭격으로 인한 죽음과 파괴, 미국과 이승만 정부에 의한 대량 민간인 학살의 흔적, 전시 성범죄 그리고 궁핍한 경제적 현실 등이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군의 폭격을 실로 파괴적이고 잔혹했다. 이 국제여맹 조사단은 이와 같은 현실을 조사하기 위해 시민들을 취재했는데, 여기서 부정하기 힘든 이야기를 들었다. 예를 들면 유엔군과 한국군의 점령 시기 북한에서는 이들에 의해 만긴인 학살이 일어났다는 증언들을 이들은 들었고, 실제로 조사에 나섰다. 황해도 지역에서만 대략 12만 명의 민간인이 이 시기에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학살 생존자들이 이들에게 증언한 이야기는 믿기 힘들 정도로 추악하고 잔혹했다.
물론 20세기 역사에서 이러한 학살과 잔혹행위는 전쟁에서 많이 발발했으며, 21세기 미국이 치르고 있는 전쟁에서도 보고가 된다. 예를 들면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은 테러리스트들을 잡는다는 명분하에 이라크측 포로를 포로 대우도 하지 않으며 온갖 가학적인 잔혹행위를 일삼았었고,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미군 병사들이 시체에 오줌을 누는 등의 행위를 보이기까지 했었다. 예를들면 국제여맹 측 조사단에게 북측 민간인 학살 생존자들의 증언한 것들 중에는 미군이나 한국군이 여성의 유방을 도려내거나, 민간인의 목이나 신체부위를 절단하는 행위를 수도없이 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이 자행되었었다.
한국전쟁 시기 남한과 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에서도 이러한 잔혹행위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특히나 이승만 정부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일어났던 제주4.3항쟁이나 여순민중항쟁에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소름끼치는 학살과 잔혹행위를 저질렀다. 국제여맹 조사단이 북측 여성들에게 들었던 유엔군과 한국군의 잔혹행위들과 똑같은 일이 거기서 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과 한국전쟁 초기 남한에서 일어났다. 국민보도연맹 학살로 최소 30만에서 40만 이상이 집단 학살당했으며, 1951년 거창양민학살에서도 갓난아기 어린이 노인 여성 할 거 없이 일본군 출신 김종원이 지휘하는 군대에게 무차별 학살당했다.
따라서 그런 잔혹한 민간인 학살이 북한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대표적으로 신천양민 학살 사건의 경우 총 3만 5,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됐고, 북한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국제여맹 조사단 또한 미군과 그의 하수인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결론 내렸었다. 신천양민 학살은 북한에서 얘기하는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로 미군과 미군 휘하의 한국군이 한 것으로 북한에서는 주장하고 있는 반면,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서북청년단과 같은 현지 우익 청년단 등이 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나 또한 이 학살은 우익이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미군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과 미군이 이들을 도와주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미국이 학살은 한 것이라 봐도 맥락적인 의미에서 크게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국제여맹 조사단이 조사했던 중에는 전시 성범죄도 있었다. 적잖은 북한 여성들이 유엔군과 한국군에 의한 성폭력을 증언했었고, 일부는 북한 지역에도 그들을 위한 성노예 즉 위안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증언들을 했다. 사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 위안부나 유엔군 측 위안부 등은 일본군 위안부만큼 심각한 전시 성범죄의 영역에 있는 문제다. 즉 북한 지역에서도 이들이 진주하는 동안 여성들은 강제로 납치되어 감금된 뒤 원치 않은 성관계를 했어야 했고, 일부는 군대가 습격하여 강간당하는 사례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점에 있어서 한국전쟁 시기 유엔군과 한국군에 의한 북한 지역의 성폭력은 매우 심각했으며, 당연히 여기에는 제국주의라는 문제가 빠질 수 없다.
한국군 위안부의 진실을 최초로 학술적으로 밝혀낸 김귀옥 교수는 “반공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월남인들이 자신의 고향인 북한지역에서 일어났던 일을 회고할 때면 인민군과 한국군에 대해정반대의 증언을 하였다.”고 주장했는데, “인민군의 경우 강간사건을 경험한 경우가 거의 없었던 반면, 한국군의 경우 내가 조사했던 월남인들이나 대부분의 한국전쟁 관련 구술자들로부터 거의 빠짐없이 증언되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김귀옥 교수는 “중국군의 경우 여성에 대한 강간은 즉결 처분감.” 이었지만, “미군은 광범위하게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 강간을 자행하였다.”고도 주장했다.
이와 같은 김귀옥 교수의 주장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닌 것이, 실제로 쿠바 혁명 시기 카스트로나 체게바라의 혁명군이나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민이나 베트콩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빨치산 등은 아녀자를 강간할 경우 그날로 총살이었다. 이는 한국전쟁 시기 빨치산도 마찬가지였으며,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부군>에서도 이러한 빨치산의 현실이 아주 잘 묘사된 바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책에서 강조하는 김귀옥 교수의 주장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에 근거한 주장이다.
국제여맹 조사단 또한 북한 지역을 조사하면서 미공군의 폭격을 경험했다. 중국에서 북한국경을 넘으면 이들은 평소에 걸리는 시간보다 목적지에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주간에는 미공군의 폭격으로 차량이 이동할 수 없었고, 야간에도 조명을 끄고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일부는 미군의 극심한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을 받았던 원산을 방문했었는데, 조사하는 와중에도 미공군의 폭격에 직면해야 했었다. 책을 읽으면서 항공 폭격의 무서움이 어떠한 것인지 나도 모르게 몰입했었던 것 같다.
이 책은 <폭격>의 저자이자 한국 현대사학자인 김태우 교수가 올해 집필한 책이다. 특히나 냉전에 의해 한국사회와 서방세계에 은폐되고 감추어진 국제여맹의 북한에서의 활동을 재조명했다. 즉 많은 이들이 모르는 감추어진 역사를 재조명하는 하나의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집필함으로써 김태우 교수는 지금까지 반공주의적 콤플렉스가 외면해온 또 다른 역사를 사실관계에 입각하여 밝혀냈다.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우리 사회에서 상당히 우익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게 되는 주제다. 즉 한국 정부 피해자론에서 한발자국 나아가기 힘든 주제다. 지금도 한국사회는 북한의 남침을 강조하는 한편, 그 이면에 있는 역사적 현실은 얘기하지 않으려 한다. 따라서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서 미군의 폭격과 전시 성범죄 그리고 민간인 학살 등을 조사했던 국제여맹 조사단의 활동은 당연히 레드컴플렉스에 의거하여 왜곡되거나 은폐되기 십상이다. 이런 점에서 김태우 교수는 상당히 훌륭한 연구작을 내놓았고,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나의 대중서로 내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크게 지적하고 싶었던 점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전시 강간에 관한 이야기다. 책에서는 성폭행 부분을 다루면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와 그 이후 소련군의 강간을 다루고 있다. 또한 그 수치가 200만이나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 출처를 확인해본 결과, 우익성향의 전쟁사학자인 앤토니 비버(Antony Beevor)였다. 앤토니 비버의 저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나 <D-Day> 그리고 <스페인 내전>등을 포함하여 국내에도 상당수 번역됐다. 그러나 비버의 경우 기본적으로 우편향 성향의 학자로 그의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 저작들은 학계에서도 상당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소련군이 200만이나 되는 독일 및 동유럽 여성을 강간했다는 주장의 1차 출처는 독일 극우성향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으로 그것이 앤토니 비버에 의해 재생산된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보복성 전시 강간이 하나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스탈린과 소련 정부가 강간을 막으려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강간당한 그 수치는 다소 각색되고 과장되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아나톨리 칼린(Anatoly Karlin)이 쓴 ‘붉은 군대의 독일 여성 강간은 괴벨스의 작품이다.’라는 자료에 따르면, 벨라루스 제1전선의 경우 4월 22일부터 5월 5일까지 90만 명의 붉은 군대 가운데 총 124건의 범죄 중 72건만의 강간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스탈린이 소련군의 강간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1945년 1월 19일 스탈린이 소련의 붉은 군대에게 내린 명령에서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강간은 반공주의적으로 과장 및 각색되었다는 사실은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서방 연합군의 강간사례가 많았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독일의 게브하르트 교수의 경우 소련군 전시 강간 피해자가 50만이었던 반면 서방 연합군에 의한 강간은 86만 명이었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따라서 소련군의 전시강간은 맥락적으로 이러한 근거와 같이 봐야할 문제이며, 그러한 주장에 서방의 오리엔탈리즘의 영향도 받았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생각한다.
서평에서 책에 나온 소련군 강간 사례를 다소 길게 얘기했는데, 이러한 얘기를 서평에 언급하는 것은 그래도 이 책이 나름 진보주의적 관점에서 집필된 책이기에 언급한 것이다. 물론 이런 약간의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나는 김태우 교수가 쓴 책이 아주 훌륭한 작업을 했다고 생각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국제여맹의 성격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책에 따르면 이 국제여맹 조직이 냉전에서 사회주의권 국가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은 국제여맹의 반식민주의적 성격 때문이었다.
당시 국제여맹은 프랑스가 베트남의 호치민 정부를 상대로 저지르고 있던 식민지 침략전쟁에 대해 아주 강력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며, 프랑스 어머니들에게 자식들을 전쟁터로 보내지 말라는 반전ㆍ반식민주의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였었다. 또한 알제리에서의 프랑스 식민 정책에도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따라서 이 국제여맹 본부가 그 시기 파리에서 동베를린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치른 전쟁 즉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혹은 프랑스-베트민 전쟁) 또한 호치민이 한국전쟁 시기 북한의 김일성과 연대를 표명했다는 사실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미국이 프랑스 전쟁비용의 80%를 부담했던 역사를 생각해 보았을 때, 국제여맹이 조사하고자 했던 한국전쟁 또한 식민지 해방전쟁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즉 한국전쟁 또한 반식민지 투쟁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맑스-레닌주의를 추구하는 좌파라면 이 책을 통해 그런 식민지적 모순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따라서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