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에 대한 성적보수주의적 페미니스트 관점 비판

몇몇 페미니스트들이 본인들의 가부장적인 관점에서 현재 대한민국에 있는 성매매 자체가 다 그런식으로 일어나는 줄 착각하고 계시는데, 그렇지 않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이다 보니 성매매 종사자 상위단위에 있는 포주나 업주들이 이윤을 뽑는것은 명백한 사실인데, 이들의 종사자 모집 방법이 납치나 인신매매식 방법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성매매 여성들이 성매매를 하는 이유는 결과적으로 생계의 문제인데, 결과적으로 사회주의적인 복지가 늘어나면 해결될 수 있다. 즉 자본주의 자체의 복지가 발전해야되는 문제지, 이른바 노르딕 모델과 같은 수법으로 매수자들을 조진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노르딕 모델은 사창가의 감소는 있지만, 인터넷으로 알선하는 조건만남, 오피스텔, 마사지 업소 등등은 더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이러한 방식은 해결책이 되지도 못한다.

그리고 이들이 항상 외면하는 사실이 있는데, 한국의 오피스텔을 포함한 성매매 업소 여성들이 이 일을 하는 이유에는 본인들의 사치행각도 기여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에서의 돈맛을 본 물질적 향락행위가 포함되는 것이다. 이들이 모르고서 이 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알고 선택한다. 다소 떳떳하지 못한 일이지만, 단기간에 거액을 모을 수 있기에 하는 것이다.

거기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불법화는 특히나 현종 업체에 종사하고 있는 당사자들이 매우 반대한다. 왜냐하면 본인 생계가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점들을 당사자들이 잘 알기에 소위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하는 성적보수주의적 소리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매매 자체를 범죄나 강간으로 보는 것도 논리적인 오류다. 다양한 사례가 존재하는 데, 그것을 범죄나 강간으로 묶는건 억지이다. 나는 성매매 안에서 일어나는 일부 남성들의 폭력정 행위를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성매매를 장려하자는 얘기도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무조건적으로 범죄나 강간으로만 묶어서 보려는 이들이 놓치는 부분이나 논리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지점을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오카시오 코르테즈나 다른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비범죄화 시켜서 복지를 증진하는 식으로 진행해야 한다 생각한다. 확실한건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식의 방법으론 해결시킬 수 없다. 나는 그 점을 확실히 안다. 그들이 얘기하는 노르딕 모델같은 소위 자본가 같은 위선적인 관점도 그것이 연장선상이다.

나는 페미니스트들의 여성인권 신장을 위한 노력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성매매나 포르노 리얼돌에 대한 접근이나 이른바 말이 안되는 시선강간과 같은 지극히 관념적이고 비과학적인 관점은 비판점이 필요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시선강간이나 리얼돌 등과 같은 그들의 관점은 소위 ‘페미니즘‘에서 주장하는 남녀평등을 촉진시키고자 하는 얘기가 절대아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봤을때, 이런 성적 보수주의에 나는 반대할 수 밖에 없고,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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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1-04-23 1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깊이 동의합니다.^^

미미 2021-04-23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가 그런 것은 당연히 아니라도 납치나 인신매매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아직까지 없지않아 있고 본인이 자발적으로 이 일에 뛰어드는 경우도 보수주의자들 생각보다는 많이 있겠죠. 하지만 이 일의 특성상 주변에 알리기를 꺼려하는 경우가 상당할텐데 그럼 과연 어떤 경로로 이 일을 하게 되는건지 생각해봐야 한다 봅니다.
과연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고 사회생활하던 여성이 이 일을 직업으로 선택할까요? 그리고 왜 성매매만은 유독 수요와 공급에서 남녀 위치가 고정되어 있을까요?

NamGiKim 2021-04-23 14:00   좋아요 2 | URL
구조적인 문제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인 멸시를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위 성매매라는 현상을 매수자들을 처벌하자고만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생각합니다. 성매매의 자본주의적 현상을 봐야한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지의 증진을 얘기한 것입니다. 즉 사회주의 사회에선 억압적인 구조의 성매매를 복지증진과 생계 보장으로 왠만큼 해결할 수 있다 봅니다.

얄라알라 2021-04-23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알라딘 서재 마실다닙니다. 님의 글 항상 열심히 읽는데요, 오늘 올려주신 글에서 NamGi님께서 ˝비범죄화 시켜서 복지를 증진˝ 하자는 일본 학자의 의견에 찬성하신다고 행간을 읽었습니다. ˝비범죄화˝라는 의미는 확 와닿습니다. 다만 ˝복지˝에 대한 내용은 바로 이해가 되지는 않는데 번거롭지 않으시다면 복지 수혜(?)의 대상이 누가 되는지, 왜 ˝복지˝ 개념으로 이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지 좀 부연해주실 수 있는지요? 답변 미리 감사드립니다.

NamGiKim 2021-04-23 13:56   좋아요 2 | URL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은 저학력자나 가출청소년, 질환자, 약탈금융 피해자, 빈곤층 등이 90%라서, 실업이 종식되고 보편적 사회보장(무상의료, 교육, 주택, 보육, 교통 등)의 확대로 해결해야죠. 다만 이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건 아닙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그 전쟁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두 개의 사진이 있다하나는 1972 6월 네이팜 폭탄에 화상을 입은 소녀 판티낌푹(Phan Thị Kim Phúc)이 알몸으로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소녀의 절규>이고다른 하나는 구정 공세(Tet Offensive)시기 수도 사이공에서 남베트남의 경찰이 베트콩 용의자를 재판도 없이 권총으로 즉결 처형한 사진이다베트콩 용의자는 장교인 응우옌반렘(Nguyễn Văn Lém)으로 정확히 몇 년 생인지는 모르지만구정 공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었다반대로 그를 처형한 경찰은 응우옌응옥로안(Nguyễn Ngọc Loan)으로 남베트남 경찰 총수였다.

 

응우옌응옥로안이 응우옌반렘을 리볼버 38구경 권총으로 즉결 처형하는 사진은 미국 기자들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알려졌고베트남 전쟁의 부도덕성을 공격하는 사진으로 활용되었다이 사진은 구정 공세로 미국 내에 불붙고 있던 반전여론을 더 강화시켰다오늘은 이 유명한 사진의 주인공 응우옌응옥로안이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응우옌응옥로안은 1930 12월 11일 베트남 중부 옛 응우옌 왕조 시대 수도였던 후에(Hue)에서 태어났다. 11명의 대가족 사이에서 자랐던 응우옌응옥로안은 후에 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했고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참이던 1952년 보병학교에 들어가 프랑스군에서 복무했다여기서 그가 동기로 만나게 된 인물이 바로 남베트남 공군 총사령관이자 응우옌반티에우의 오른팔이었던 응우옌 까오 끼(Nguyễn Cao Kỳ)였다.

 

1953년 그는 프랑스 공군학교에 입학하여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2년 뒤인 1955년 베트남으로 귀국하여 남베트남 최초의 폭격기 조종사로 활약했다. 1960년대 초반 나짱(Nha Trang)에 있는 제2정찰비행단장을 거쳐, 1964년 공군사령관이던 응우옌 까오 끼 밑에서 부사령관으로 복무했었다. 1965년 2월 꾸이년(Quy Nhon) 미군 숙소 폭탄테러 보복을 위한 한··남베트남 연합군의 북베트남 폭격에 지휘관으로 참여하여 승승가도를 달렸으며북베트남을 폭격하는 플레이밍 다트 작전에도 참가했다그 이후 대령으로 승진했고치안국장과 군사보안국장 지위도 얻었다.

 

그로부터 3년 뒤경찰 총수가 된 응우옌응옥로안은 이른바 구정 공세를 경험하게 되었고구정 공세가 한참이던 1968년 2월 8일 그는 베트콩 용의자인 응우옌반렘을 아무런 재판이나 어떠한 절차 없이 손에 있던 권총으로 즉결 처형했다당시 이것을 지켜보던 외신기자들은 이를 동영상과 사진으로 남겼고즉결 처형하는 응우옌응옥로안의 모습은 그대로 미국에 보도가 되었다참고로 당시 그가 응우옌반렘을 처형하는 사진은 동아빌보 기자로 와있던 한국인 기자 김용택씨가 촬영했다관련사진 4장중에 총을 발사하는 사진을 뺀 3장의 사진은 김용택씨가 찍은 사진인 것이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968년 5월 5일 그는 베트콩으로 추정되는 이에게 저격을 당해 부상을 당했다이 과정을 오스트레일리아 특파원인 팻 버제스(Pat Burgess)가 사진으로 담아냈다다리에 총상을 입은 그는 심한타격을 받았지만목숨만은 건졌다이후 그는 남베트남의 대통령 응우예반티에우로부터 훈장을 받았다이후 그는 퇴원했지만퇴원한 이후부터는 하락의 길을 걸었다그는 치안국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고뉴스에서도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그는 보트피플이 되어 미국으로 망명했다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버지니아주에 정착했다그러나 그는 즉결처형 사진의 주인공이었기에 1978년 11월 3일 미국 이민국에서 도덕적 비열함을 이유로 미국거주허가가 취소될 것임을 통보받기도 했다물론 이것은 유야무야 넘어갔고미국 버지니아에서 살게 된 그는 같이 넘어온 가족들과 함께 피자집을 운영했다피자집을 운영하던 그는 이후 암이 발병했고, 1998년 7월 14일 워싱턴 근교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그의 나이 68세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얘기할 때그가 베트콩 용의자를 아무런 형식적 절차도 없이 처형한 잔인성을 비판한다물론 올바른 비판이다그러나 그가 박정희처럼 과거 프랑스에 협력해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역사에 대해선 크게 비판이 없는 듯하다나는 이런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생각한다.

 

참고자료

 

1968212, 베트남 퐁니·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 고경태, 한겨레출판, 2015

 

https://en.wikipedia.org/wiki/Nguyễn_Ngọc_Lo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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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와 더불어 1~8 세트 - 전8권 - 김일성 항일 회고록, 계승본
김일성 지음 / 민족사랑방 / 2021년 4월
평점 :
품절


책 출판을 환영합니다. 이런 책도 얼마든지 읽혀야 합니다. 그것이 사상의 자유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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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1-04-2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가지 더 얘기하자면, 저는 세계와 더불어를 찬양하거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생각하며, 교차검증을 위한 사료비판도 필요하다 봅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책출판은 필요합니다.

Redman 2021-04-22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드디어 나오는군요 학교 도서관에서 일일이 빌려서 스캔할 필요가 없어졌네요

NamGiKim 2021-04-22 17:3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아니 스캔하셨단 말이오?

Redman 2021-04-22 18:24   좋아요 1 | URL
읽으려 해도 도저히 구할 방법이 없으니 말이오 ㅋㅋㅋ 근데 가격이 쎄서 바로 구매하지는 못할 것 같네요 ㅠ 낱권 판매는 안 할려는지

2021-04-22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난엄마다 2021-04-2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쳤구나

NamGiKim 2021-04-22 18:29   좋아요 0 | URL
누구시오? 이름을 대라우!

엔케 2021-04-22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보안법 코렁탕

NamGiKim 2021-04-22 19:58   좋아요 0 | URL
철폐 국가 보안법!

임헌구 2021-04-22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쳤구나

NamGiKim 2021-04-22 20:31   좋아요 0 | URL
이걸 코렁탕 시켜야 한다 생각하는 서북청년단이 미친거라.

최대치 2021-04-22 2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어본 결과 감동적이었습니다.

NamGiKim 2021-04-23 00:13   좋아요 0 | URL
예 우리가 외면하던 항일투쟁의 또 다른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영어가제일쉬워요 2021-04-23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북한사람 이신가요? 다른 뜻 없이 궁금해서입니다.

NamGiKim 2021-04-23 14:30   좋아요 0 | URL
서울 살아요.

정우상 2021-04-24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북 망상증 환자로군 .. 책보다는 약을 드셔야 할듯.. 당신에겐 자유가 아깝네요

NamGiKim 2021-04-24 22:27   좋아요 0 | URL
약을 드셔야할 분 약 드시고 오시오.

이루 2021-04-25 0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못하는 넘들이 많네 진짜 같은 1표라는게 개소름 ㅋㅋ

NamGiKim 2021-04-25 09:17   좋아요 0 | URL
태극기 부대가 방종.ㅋ

koy5107 2021-04-27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친 빨갱이놈의 새끼.

NamGiKim 2021-04-27 20:42   좋아요 0 | URL
소련 깃발을 높이 올리자!

잉클링스 2021-05-15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울셀렉션에서 나온 김일성도 참고해 보시오. 김일성 회고록에 대하여 저자가 말하고 있으니...
특히 상당수의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과 인터뷰하여 개관적으로 접근하고 있으니 김일성을 제대로 보게 할 것이요.
 

1933년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나치는 자신들의 인종적 이데올로기인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전 사회적인 영역으로 확산시켰다. 1920년부터 나치당을 창당하여 독일 총통자리에 오르게 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젊은 시절부터 반유대주의에 심취한 인물로 그 반유대주의를 항상 노골적으로 표출했던 인물이었다히틀러로 대표되는 독일 파시즘(German Fascism)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시에 비판했었는데독일 파시즘의 두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에는 반유대주의적인 관점이 있었다히틀러가 주장한 파시즘에서 자유주의는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여 민족 공동체를 파괴하는 유대인들의 사상이었고사회주의는 계급투쟁으로 민족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유대인들의 사상이었다이러한 히틀러의 사상은 1928년 그가 했던 연설에 아주 잘 드러난다.

 

첫째우리 민족은 희망도 질서도 없는 국제주의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하며열광적인 민족주의에 의해 단호하고도 열정적으로 재조직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둘째우리는 의회주의라는 광기에 맞서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고 권위와 명령의 필요성을 깨닫게 함으로써 우리 민족을 의회주의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떼어 놓을 것입니다.”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발생한 이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는데이 기회를 틈타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로부터 대대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1933년에 집권할 수 있었다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의 경제는 단기간에 실업을 해소하고생활의 질이 급격히 개선되었다그러나 이 이면에는 다른 인종 혹은 민족에 대한 인종주의적 탄압이 항상 존재했으며그 주된 타겟은 히틀러가 항상 혐오하던 유대인이었다.

 

1933년부터 나치는 학교에서부터 유대인들을 차별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반유대주의 정책은 전 사회적인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시점에는 국제적인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그러한 억압적인 조치를 잠시나마 풀기도 했지만올림픽 이후에는 그러한 움직임이 더 활발해졌다. 1935년부터 반유대주의는 나치 정부의 정책이 되었으며, 3년 뒤인 1938년 뉘른베르크 인종차별법을 통과시켰다뉘른베르크 인종차별법에 따라 유대인들은 공공 공원수영장콘서트홀교통수단 등도 이용하지 못하게 되었고독일 시민권도 박탈당했다또한 특정 직종에 취업할 수 없게 되었고교육도 못 받게 되었으며독일인과의 결혼도 불법화되었다신분증과 여권에는 유대인을 뜻하는 ‘J’자가 찍혔다이러한 과정 속에서 유대인의 탄압이 더 강도 높아지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수정의 밤(Kristallnacht)’이었다.

 

1938년 11월 9일에 시작된 수정의 밤은 독일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벽마다 방수 페인트로 유대인이라고 적혀 있게 되고나치스 돌격대가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과 유대인 상점 등에서 파괴와 방화를 저질렀다나치독일의 경찰들도 이러한 행위를 그저 지켜만 보았다오히려 이것을 빌미로 유대인들을 체포했다당시 미국측 특파원 오토 톨리슈스는 뉴욕타임스지에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독일 방방곡곡에서 파괴약탈방화가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대다수 군중이 침묵 속에 지켜보았고경찰들은 그저 교통 통제만 하거나 보호 명목으로 유대인을 전부 체포해갔다.”라고 썼다.

 

수정의 밤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유대인 시설들과 가게가 파괴됐다공식 집계에 의하면 814개의 상점과 171개의 가옥이 파괴됐고, 191개의 유대교 회당이 불에 탔다. 36명의 유대인이 죽었으며또 다른 36명이 중상을 입었다또한 11월 12일까지 최소 2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다하우나 부헨발트 등과 같은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그러나 이것은 유대인 탄압을 향한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시작이었을 뿐이다수정의 밤에서 보였던 광기는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면서 더 극심해지게 된다.

 

참고자료

 

히틀러의 아이들수잔 캠벨 바톨레티손정숙지식의풍경, 2008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II, 존 톨랜드민국홍페이퍼로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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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지음 / 책과함께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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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에는 왕과 신권이 있었고 이쪽에는 인민과 인권이 있었다.”

 

출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 p.139

 

1789714일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인류 역사를 바꿔놓은 하나의 시작점이었다.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나온 이른바 <인권선언>은 개인의 절대성과 자유의 존엄성 및 만인의 평등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것이었다. 이러한 선언은 19세기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주창한 사회주의의 이론적 근거의 근간이 되었으며, 온갖 영역의 모든 인간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저자의 설명대로 프랑스 혁명은 단순히 프랑스만을 근대국가로 전환시킨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은 낡은 전제주의 유럽 여러 나라에 자유와 평등, 국민주의와 자유주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새 씨앗을 뿌렸으며, 19세기 여러 유럽 국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세계사적인 의미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자체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입헌 군주주의의 시도나 민주 공화주의의 시험 심지어 보나파르티즘으로 대표되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도 궁극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혁명과 반혁명을 거듭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틀어 책의 저자는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1789년부터 파리코뮌이 진압되는 1871년까지의 과정을 프랑스의 혁명과 반혁명의 역사로 묶어 설명했다. 사실 나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잘 알지 못했었다. 단순히 프랑스 혁명이 현재 민주주의 국가에서 중시하는 인권과 기본적인 권리들의 시작점이었다는 사실 정도만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번에 노명식 교수의 개설서를 읽으면서 프랑스 혁명에 대해 아주 흥미롭게 잘 알 수 있었다. 책의 부제목은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이지만, 초반 부분에는 1789년 이전의 근대 프랑스 역사도 짧게나마 설명하고 있다.

 

미국사를 공부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프랑스는 1775년 북미대륙에서 시작된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영국에 맞서 싸웠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게 된 시점은 워싱턴 휘하의 독립군이 영국군에게 점차 반격에 나서던 1778년이었는데, 프랑스의 참전은 지배계급들 입장에선 사실은 어리석은 조치였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20억 리브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프랑스가 만성적인 재정 적자를 일으키게 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거기다 1789년 기준으로 프랑스에 있는 143명의 주교 연수입이 약 24,000만 리브르였는데, 당시 프랑스 정부의 예산액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거기다 1776년부터 1789년까지 13년 동안의 프랑스 평균 물가 상승률은 65%였다. 쉽게 말해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왜 이러한 재정적자를 내면서 이후 본인들의 시민 혁명을 앞당기게 될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생각해보면 많이 유치하다. 순전히 영국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오랜 세월 유럽에서의 라이벌 관계였는데, 18세기 북미 대륙에서도 그 라이벌 구도가 작용했다. 프렌치-인디언 전쟁이라고 불리는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영국에게 대패했었는데, 이 전쟁에서의 패배 굴욕을 잊지 못한 프랑스는 항상 복수하고 싶어했고, 결국 미국 독립전쟁에서 지원하여 영국에게 복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저자는 프랑스의 미국 독립전쟁 참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한 사건이야말로, 복수심 같은 원시적인 감정에서 나온 정책이 국가이익에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모델이다.”

 

출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 p.57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폴레옹에 대해 잘 몰랐다. 무엇보다 나폴레옹이 어떠한 것을 추구했고, 어떠한 과정을 통해 프랑스의 종진 통령에서 황제까지 등극했는지 즉 그러한 과정들을 모르고 있었다. 단편적으로 나폴레옹이 유럽 정복전쟁에서 패배하여 결국 대서양 아프리카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됐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처음부터 황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고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통해 임시 통령정부를 구성하면서 프랑스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무엇보다 1798년 이집트 정복에서의 군사적 활약과 왕당파가 일으킨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을 효율적으로 진압한 것을 통해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브뤼메르 18일을 통해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시에예스와 뒤코스랑 통령 자리에 올랐는데, 이후 이들을 축출하고 1804년 황제 자리에 등극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폴레옹은 신성 동맹 세력이 시작했다 종결된 혁명전쟁에서 프랑스의 정복전쟁으로 나섰다. 프랑스의 정복전쟁을 통해 프랑스의 영토가 확장되었지만, 가장 큰 한계를 드러냈는데 그것이 바로 러시아와의 전쟁이었다. 1812년에 시작한 러시아 침략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수도 모스크바에 들어갔다가 참패했고, 오히려 러시아와 프로이센 측에게 반격을 당했으며,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다.

 

모스크바 침략에 나섰던 60만 대군은 쓰라린 패배를 경험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1815년 벨기에의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며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당해 1821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나폴레옹의 정복주의적 침략전쟁은 다른 한편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프랑스 혁명의 기본적 성질인 자유, 평등, 우애정신을 전파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들은 나폴레옹을 평가할 때, 같이 봐야할 것이다. 거기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었고, 집권 이후 프랑스 사회에 있던 신분제적인 법적 제약을 철폐하여 능력위주의 인재들을 양성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도 같이 봐야 한다든 것이다.

 

부제목에 나온 것과 같이 책의 마지막 단락은 1871년 파리 코뮌에 대한 것인데, 나는 이 책을 통해 파리코뮌이라는 사건이 “20세기 사회혁명의 모델로 보느냐 하는 논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애국적 운동으로 보느냐 사회주의 혁명으로 보느냐하는 해석도 마찬가지였다. 이 파리코뮌 같은 경우 마르크스나 엥겔스 또한 지지했던 움직임이었고, 20세기에 등장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상당히 많이 언급되고 기억되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1960년대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 파리코뮌을 기억하며 그 정신을 연상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즉 중국 공산당에서 파리코뮌을 상징적으로 국민들에게 상기시켰다는 얘기다. 또한 파리코뮌이 경우 한국 사회에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하고도 많이 오버랩 되기도 한다. 진보적인 사상가이자 언론인인 리영희 선생 또한 파리코뮌과 광주민주화 운동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파리코뮌은 앞으로도 연구가 더 되어야하고, 진보진영에 있는 운동가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고 할 수 있다.

 

역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대목은 바로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혁명 진보의 아이콘 로베스피에르와 그 동지들이다. 자유주의 학계에선 로베스피에르에 대해 독재, 권위주의, 학살과 같은 수식어를 많이 붙였었는데, 사실 로베스피에르는 진정으로 가난한 인민들을 사랑했던 참된 혁명가의 모습을 가진 인물이었다. 물론 단두대 정치라는 공포정치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가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들은 바로 부를 독점하는 지배계층과 반동적인 자산가들이었고, 한 없이 가난한 민중의 편에 서고자 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속해 있던 산악파와 그 동료들은 실제로 방토즈 법이라 하여 반혁명 혐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애국자들에게 분배하고자 했다. 사실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혁명적 동지들을 처형했던 이들은 사실 어딘가 구린 구석이 있는 부패한 정치인들이기도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나의 유권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외쳤는데, 여기에는 민중에 대한 로베스피에르의 진심이 들어가 있다.

 

왕정은 폐지되었다. 성직자도 귀족도 사라지고 평등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자기들만을 위한 공화국을 세워 부자와 관리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려는 사이비 애국자와 평등과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공화국을 건설하려고 애쓰는 진짜 애국자를 구별하라.

 

소란과 도둑이라는 관념을 민중과 빈곤이라는 관념에 결부시키려는 구태의연한 태도를 주시하라.”

 

출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 p.134

 

이번에 내가 흥미롭게 읽은 이 책은 1980년 노명식 교수가 집필했던 저서의 2011년 개정판이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 지식이 별로 없는 한국 대학생들과 일반 독자들이 슨대 시민혁명의 전형인 프랑스 혁명과 그 이후에 전개된 19세기 프랑스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기 쉽도록 하고자하는 목적에서 기획된 작품이다. 책을 읽으면서 특히 가난한 민중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로베스피에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이유는 로베스피에르가 항상 약자의 편에 서고자 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폴레옹의 정복전쟁 이전 프랑스 혁명 이후 시작된 전쟁이 사실은 혁명 프랑스를 지키기 위한 혁명전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조금은 다른 사건이지만 1917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 이후 볼셰비키들이 치러야 했던 적백내전처럼 말이다. 프랑스 혁명을 좀 더 쉽게 접근하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혁명이 왜 혁명으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 하겠다. 프랑스 혁명 또한 수많은 유혈과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도 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적인 권리를 천명하고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 초기에 발표한 <인권선언>의 전문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국민의회를 구성하는 프랑스 인민의 대표자들은, 인권에 대한 무지와 망각 또는 경시가 공공의 불행과 정부의 부패의 원인임을 유의하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타고난, 양도할 수 없는 신성한 권리들을 엄숙한 선언을 통해 명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선언이 의도하는 바는, 사회체의 모든 구성원이 항상 이 선언에 준하여 부단히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상기하게 하고, 또 입법권과 행정권의 행사가 모든 정치제도의 목적과 부합하도록 비교할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권력의 행사가 한층 더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하며, 향후 시민의 요구가 단순하고도 이론의 여지가 없는 원칙에서만 제기되도록 함으로써 헌법의 유지와 만민의 행복에 이바지할 수 있게 함이다. 따라서 국민의회는 최고 존재 앞에서 그 가호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인권과 시민권을 승인하고 선언한다.

 

1: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 사회적 차별은 오로지 공동 이익을 위해서만 가능하다.

 

2: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시효에 의해 소멸될 수 없는, 인간의 자연적인 권리를 유지하는 데 있다. 이 권리는 자유, 재산, 안전 및 압제에 대한 저항권이다.

 

3: 모든 주권의 근원은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떤 단체나 어떤 개인도 명백히 국민에게서 유래하지 않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4: 자유는 타인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므로 저마다의 자연권 행사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에게도 같은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할 경우 외에는 제약을 받지 아니한다. 이 제약은 법률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5: 법은 사회에 해로운 행위가 아니면 금지할 권리를 갖지 아니한다. 또 법에 의하여 금지되지 않은 것은 어떤 일이라도 방해받지 않으며, 또 법이 명하지 않은 것은 누구에게도 강효할 수 없다.

 

6: 법은 일반의지의 표현이다. 모든 시민은 개인적으로 또는 대표자를 통하여 입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보호하는 경우든 처벌하는 경우든, 법은 만인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모든 시민은 법앞에서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에 의한 차별 이외에는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영예와 공공 지위와 직무에 평등하게 취임할 수 있다.

 

7: 누구도 법에 의하여 규정된 경우이거니와 법이 정하는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고소, 체포, 구금되지 아니한다. 누구든 어떠한 독재적인 명령이라도 간청하거나, 전파하거나, 실행하거나, 실행되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자는 처벌받아야 한다. 다만 법에 의하여 소환되거나 체포되는 시민은 누구나 즉각 법에 순응해야 한다. 이에 저항하는 것은 죄가 된다.

 

8: 법은 엄격히 그리고 명백히 필요한 형벌만을 요구해야 하고, 누구도 범죄 이전에 제정되어 공포될 법률이나 또는 정당하게 적용된 법률에 의하지 안니하고는 처벌받아서는 안 된다.

 

9: 유죄로 선고되기까지는 누구나 무죄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체포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도 신병을 확보하는 데 필요하지 않은 강제 조처는 법에 의하여 엄중히 제지되어야 된다.

 

10: 누구도 자신의 발언이 법률에 의하여 확립된 공공질서를 교란하지 않는 한, 종교적 견해를 포함한 자신의 의견으로 인해 신변의 불안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11: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전달은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 중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유로이 말하고 쓰고 출판할 수 있다. 다만 법률에 의하여 규정될 경우에는 자유의 남용에 대하여 책임을 저야 한다.

 

12: 인권과 시민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공권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공권력은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고, 그것은 위임받은 사람들의 개인적 이익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 아니다.

 

13: 공권력의 유지와 행정 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공동의 조세는 반드시 필요하다. 세금은 시민 각자의 재산 규모에 맞게 평등하게 부과되어야 한다.

 

14: 모든 시민은 스스로 또는 대표자를 통하여 공공 조세의 필요를 검토하고, 그것에 자유로이 동의하고, 조세의 용도를 추구하고, 또 세액과 과세의 기준과 징수의 방법 및 기간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15: 사회는 모든 공직자에게 행정에 관하여 보고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16조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어 있지 않고 또 권력의 분립이 제정되어 있지 않은 사회는 헌법이 없는 사회이다.

 

17: 소유권은 신성불가침한 권리이므로 합법적으로 확인된 공공의 필요가 명백히 요구하고 또 정당한 사전 배상의 조건하에서가 아니면 결코 침탈될 수 없다.”

 

출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 p.8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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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4-18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엔 NamgiKim 님께서 지금까지 모든 리뷰에 말씀하신 비극은 거의 프랑스 혁명에서 기초했다고 보입니다. ㅠㅠ

NamGiKim 2021-04-18 17:31   좋아요 1 | URL
그래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해석이 중요하다 봅니다. 전 자유주의 학계가 부정하는 로베스피에르의 존재 재평가가 중요하다구 생각해요.

NamGiKim 2021-04-18 17:32   좋아요 1 | URL
복학한 4학년이라 많이 바빠 책 리뷰 오랜만에 올립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04-18 17:34   좋아요 1 | URL
네, 제가 보기에도 잘못된 혁명의 대명사가 바로 ‘프랑스 혁명’ 아닌가 생각됩니다. ㅠㅠ

그레이스 2021-04-26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탁월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프랑스의 근대사 정리를 너무 잘해놓아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프랑스혁명을 1789년 이후에 연속된 혁명과 공화와 왕정이 반복되는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보아야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파리콤뮨까지...
함께 본 책으로 칼 마르크스의 <프랑스혁명>이 있습니다.

NamGiKim 2021-04-26 19:23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확실히 개설서로의 의미가 큰 작품이죠. 마르크스 선생이 쓴 <프랑스 혁명사>도 읽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