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에서 그 전쟁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두 개의 사진이 있다. 하나는 1972년 6월 네이팜 폭탄에 화상을 입은 소녀 판티낌푹(Phan Thị Kim Phúc)이 알몸으로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소녀의 절규>이고, 다른 하나는 구정 공세(Tet Offensive)시기 수도 사이공에서 남베트남의 경찰이 베트콩 용의자를 재판도 없이 권총으로 즉결 처형한 사진이다. 베트콩 용의자는 장교인 응우옌반렘(Nguyễn Văn Lém)으로 정확히 몇 년 생인지는 모르지만, 구정 공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었다. 반대로 그를 처형한 경찰은 응우옌응옥로안(Nguyễn Ngọc Loan)으로 남베트남 경찰 총수였다.
응우옌응옥로안이 응우옌반렘을 리볼버 38구경 권총으로 즉결 처형하는 사진은 미국 기자들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알려졌고, 베트남 전쟁의 부도덕성을 공격하는 사진으로 활용되었다. 이 사진은 구정 공세로 미국 내에 불붙고 있던 반전여론을 더 강화시켰다. 오늘은 이 유명한 사진의 주인공 응우옌응옥로안이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응우옌응옥로안은 1930 12월 11일 베트남 중부 옛 응우옌 왕조 시대 수도였던 후에(Hue)에서 태어났다. 11명의 대가족 사이에서 자랐던 응우옌응옥로안은 후에 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했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참이던 1952년 보병학교에 들어가 프랑스군에서 복무했다. 여기서 그가 동기로 만나게 된 인물이 바로 남베트남 공군 총사령관이자 응우옌반티에우의 오른팔이었던 응우옌 까오 끼(Nguyễn Cao Kỳ)였다.
1953년 그는 프랑스 공군학교에 입학하여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2년 뒤인 1955년 베트남으로 귀국하여 남베트남 최초의 폭격기 조종사로 활약했다. 1960년대 초반 나짱(Nha Trang)에 있는 제2정찰비행단장을 거쳐, 1964년 공군사령관이던 응우옌 까오 끼 밑에서 부사령관으로 복무했었다. 1965년 2월 꾸이년(Quy Nhon) 미군 숙소 폭탄테러 보복을 위한 한·미·남베트남 연합군의 북베트남 폭격에 지휘관으로 참여하여 승승가도를 달렸으며, 북베트남을 폭격하는 ‘플레이밍 다트 작전’에도 참가했다. 그 이후 대령으로 승진했고, 치안국장과 군사보안국장 지위도 얻었다.
그로부터 3년 뒤, 경찰 총수가 된 응우옌응옥로안은 이른바 구정 공세를 경험하게 되었고, 구정 공세가 한참이던 1968년 2월 8일 그는 베트콩 용의자인 응우옌반렘을 아무런 재판이나 어떠한 절차 없이 손에 있던 권총으로 즉결 처형했다. 당시 이것을 지켜보던 외신기자들은 이를 동영상과 사진으로 남겼고, 즉결 처형하는 응우옌응옥로안의 모습은 그대로 미국에 보도가 되었다. 참고로 당시 그가 응우옌반렘을 처형하는 사진은 동아빌보 기자로 와있던 한국인 기자 김용택씨가 촬영했다. 관련사진 4장중에 총을 발사하는 사진을 뺀 3장의 사진은 김용택씨가 찍은 사진인 것이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968년 5월 5일 그는 베트콩으로 추정되는 이에게 저격을 당해 부상을 당했다. 이 과정을 오스트레일리아 특파원인 팻 버제스(Pat Burgess)가 사진으로 담아냈다. 다리에 총상을 입은 그는 심한타격을 받았지만, 목숨만은 건졌다. 이후 그는 남베트남의 대통령 응우예반티에우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후 그는 퇴원했지만, 퇴원한 이후부터는 하락의 길을 걸었다. 그는 치안국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고, 뉴스에서도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그는 보트피플이 되어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버지니아주에 정착했다. 그러나 그는 즉결처형 사진의 주인공이었기에 1978년 11월 3일 미국 이민국에서 ‘도덕적 비열함’을 이유로 미국거주허가가 취소될 것임을 통보받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유야무야 넘어갔고, 미국 버지니아에서 살게 된 그는 같이 넘어온 가족들과 함께 피자집을 운영했다. 피자집을 운영하던 그는 이후 암이 발병했고, 1998년 7월 14일 워싱턴 근교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얘기할 때, 그가 베트콩 용의자를 아무런 형식적 절차도 없이 처형한 잔인성을 비판한다. 물론 올바른 비판이다. 그러나 그가 박정희처럼 과거 프랑스에 협력해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역사에 대해선 크게 비판이 없는 듯하다. 나는 이런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생각한다.
참고자료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퐁니·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 고경태, 한겨레출판, 2015
https://en.wikipedia.org/wiki/Nguyễn_Ngọc_Lo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