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나치는 자신들의 인종적 이데올로기인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전 사회적인 영역으로 확산시켰다. 1920년부터 나치당을 창당하여 독일 총통자리에 오르게 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젊은 시절부터 반유대주의에 심취한 인물로 그 반유대주의를 항상 노골적으로 표출했던 인물이었다히틀러로 대표되는 독일 파시즘(German Fascism)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시에 비판했었는데독일 파시즘의 두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에는 반유대주의적인 관점이 있었다히틀러가 주장한 파시즘에서 자유주의는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여 민족 공동체를 파괴하는 유대인들의 사상이었고사회주의는 계급투쟁으로 민족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유대인들의 사상이었다이러한 히틀러의 사상은 1928년 그가 했던 연설에 아주 잘 드러난다.

 

첫째우리 민족은 희망도 질서도 없는 국제주의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하며열광적인 민족주의에 의해 단호하고도 열정적으로 재조직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둘째우리는 의회주의라는 광기에 맞서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고 권위와 명령의 필요성을 깨닫게 함으로써 우리 민족을 의회주의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떼어 놓을 것입니다.”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발생한 이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는데이 기회를 틈타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로부터 대대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1933년에 집권할 수 있었다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의 경제는 단기간에 실업을 해소하고생활의 질이 급격히 개선되었다그러나 이 이면에는 다른 인종 혹은 민족에 대한 인종주의적 탄압이 항상 존재했으며그 주된 타겟은 히틀러가 항상 혐오하던 유대인이었다.

 

1933년부터 나치는 학교에서부터 유대인들을 차별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반유대주의 정책은 전 사회적인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시점에는 국제적인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그러한 억압적인 조치를 잠시나마 풀기도 했지만올림픽 이후에는 그러한 움직임이 더 활발해졌다. 1935년부터 반유대주의는 나치 정부의 정책이 되었으며, 3년 뒤인 1938년 뉘른베르크 인종차별법을 통과시켰다뉘른베르크 인종차별법에 따라 유대인들은 공공 공원수영장콘서트홀교통수단 등도 이용하지 못하게 되었고독일 시민권도 박탈당했다또한 특정 직종에 취업할 수 없게 되었고교육도 못 받게 되었으며독일인과의 결혼도 불법화되었다신분증과 여권에는 유대인을 뜻하는 ‘J’자가 찍혔다이러한 과정 속에서 유대인의 탄압이 더 강도 높아지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수정의 밤(Kristallnacht)’이었다.

 

1938년 11월 9일에 시작된 수정의 밤은 독일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벽마다 방수 페인트로 유대인이라고 적혀 있게 되고나치스 돌격대가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과 유대인 상점 등에서 파괴와 방화를 저질렀다나치독일의 경찰들도 이러한 행위를 그저 지켜만 보았다오히려 이것을 빌미로 유대인들을 체포했다당시 미국측 특파원 오토 톨리슈스는 뉴욕타임스지에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독일 방방곡곡에서 파괴약탈방화가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대다수 군중이 침묵 속에 지켜보았고경찰들은 그저 교통 통제만 하거나 보호 명목으로 유대인을 전부 체포해갔다.”라고 썼다.

 

수정의 밤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유대인 시설들과 가게가 파괴됐다공식 집계에 의하면 814개의 상점과 171개의 가옥이 파괴됐고, 191개의 유대교 회당이 불에 탔다. 36명의 유대인이 죽었으며또 다른 36명이 중상을 입었다또한 11월 12일까지 최소 2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다하우나 부헨발트 등과 같은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그러나 이것은 유대인 탄압을 향한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시작이었을 뿐이다수정의 밤에서 보였던 광기는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면서 더 극심해지게 된다.

 

참고자료

 

히틀러의 아이들수잔 캠벨 바톨레티손정숙지식의풍경, 2008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II, 존 톨랜드민국홍페이퍼로드, 20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