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는 김광한의 팝스다이얼
김광한 지음 / 북레시피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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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라디오 키드 시절이 있을 것이다.

나는 한때 클래식 마니아가 될 뻔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내가 속한 반이 합주 반이었는데 요한 슈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 시내 초등학교 합주 경연 대회가 있는데 학교 대표로 이 곡이 우리의 출전 곡이었던 것이다. 난 좀 억울했다. 내가 속한 반이 어쩌다 그런 막중한 사명을 떠안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빨갱이 공산당도 아니고 모든 반 아이들이 합주에 참여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때 나는 멜로디혼을 연주했는데, 다른 반 아이들이 수업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갈 때 우리 반은 꼼짝없이 남아서 거의 두 시간 가까이를 합주 연습을 해야 했다. 나도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고, TV에서 하는 만화 영화도 보고, 숙제도 해야 하는데 허구헌날 이게 뭐란 말인가? 그 울분을 참느라 10년은 늙어버릴 것만 같았다그때까지 거의 듣보잡이었던 클래식. 그것도 요한 슈트라우스의 곡이라니!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3등의 성적표를 받고 대회는 끝이 났는데 거참 묘하다. 할 때는 멀미가 날 지경이었는데 끝나고 나니 그때가 그립고, 그 그리움을 달래느라 그때부터 내가 클래식을 듣기 시작했던 거다. 그것이 아마도 나에게 추억의 생성이었나 보다. 그때부터 난 밤낮으로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클래식이 이렇게 좋은 것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아니, 그것이 나의 라디오 키드 입문이 될 줄은 나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그렇게 좋아 보이던 것도 질릴 때가 있고, 더 좋은 게 보이면 당연 그쪽으로 옮겨가기 마련이다. 클래식은 들으면 들을수록 어렵고, 고전이란 틀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비해 그 시절 팝송은 그 인기가 기하급수 팽창 일로에 있었다. 그것은 자고 일어나면 새롭게 변신의 변신을 거듭했다. 또한 팝송 가수들은 어쩌면 그리도 세련되고 멋있던지. 이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시절 우리나라에선 70년대 중반 무렵부터 대학가요제를 중심으로 가요계의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지만 팝송을 따라가기엔 아직은 역부족이었다. 난 그때 대중음악은 딱 두 가지만 있는 줄 알았다. 팝송과 대학가요. 어떤 장르의 음악이든 굳이 들으려하지 않는데 어느 순간 귓가에 들리고, 애인처럼 다시 듣고 싶어지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요한 슈트라우스 할배는 나의 선택을 받지 못한 비운의 애인쯤으로 해 두는 것이 좋을 듯 했다.

 

굳이 들으려하지 않는데 어느 순간 귓가에 들리고 애인처럼 다시 듣고 싶은 것이 가능했던 건, TBC가 언론 통폐합으로 KBS로 넘어가기 전 황인용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라는 음악 프로를 들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건, TBCKBS로 이전한다고 예고가 있었고, 실제로 그날이 왔을 때 나는 잠을 자지 않고 TBC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보리라 다짐했었다. 그때 황 아저씨의 그 프로가 10시에서 12시까지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버지가 사 주신 시계겸 라디오를 여느 때처럼 켜놓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난 그저 눈을 잠깐 감았다 떳을 뿐인데 12시가 지나있었다. 역시 학교를 다녀야 하는 학생으로서 12시 넘어서까지 두 눈을 뜨고 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좀 아쉽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일을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황 아저씨의 밤을 잊은 그에게는 그 다음에도 여전히 건재해 TBC가 사라진 사실이 실감이 안 났다. 방송국은 그렇게 사라질지 몰라도 음악은 영원한 것이다. 난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안도할 수 있었고, 위로받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KBS 2 FM김광한의 팝스다이얼을 듣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책을 보니 그 프로는 82년도에 시작해서 무려 11년 동안 진행했었다고 한다. 김기덕의 두 시의 데이트가 먼저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원래 라이벌 경쟁 구도가 사람의 이목을 끌기가 가장 좋은 법. 그때까지 TBCMBC와 좋은 경쟁 상대라고 생각했다. 그때 KBS는 국영과 공영의 의미가 강했던 만큼 어린 나도 감히 경쟁에 끼워줄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런 TBC가 사라졌으니 김기덕의 두 시의 데이트를 능가할만한 대항마가 있을까 했다. 그때 나타난 것이 그의 이름을 딴 팝스다이얼이 나온 것. 그것도 똑같은 두 시에. 그 시절 두 방송을 동시에 접수하느라 주파수 맞춤의 달인이 될 지경이었다. 물론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지만. 밤은 밤대로 행복했다. 이종환과 황 아저씨가 밝혀줬으니.

 

아마도 이 두 쌍의 쌍두마차에 의해 그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DJ와 팝칼럼니스트란 직업이 각광을 받지 않았을까? 물론 그 이전에도 음악 프로그램과 그것을 이끌었던 DJ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김광한과 김기덕 또 그들 때문에 덩달아 주목을 받았던 팝컬럼니스트의 위상이란 건 가히 하늘을 찌를만 했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라 경쟁적으로 누가 팝송 가수와 노래 제목, 레코드판을 더 많이 알고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보는 눈빛이 달라지는 시대이기도 했다. 나 역시 이 두 방송을 오고 가면서 누가 부른 무슨 노래가 인기가 많은지, 새로 나온 곡은 뭔지 수첩에 적어놓고 다닐 정도였다. 또 그 곡이 좋으면 레코드판을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샀다. 광한 아저씨는 DJ가 되기 위해 되고난 후에도 엄청난 공부를 했다고 하지만 난 그저 얻어 들을 뿐 덩달아 공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학교 공부만이 공부지 그것 말고 다른 공부도 있단 말인가?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건, 그때 80년대는 DJ가 직접 틀어주는 음악다방이라는 게 유행이었다. 그때 살던 동네에도 음악다방이 있었는데(지금도 어느 특정 지역을 가면 있는 것 같긴 하다만), 대학을 갓 들어가서 친구 두 명과 함께 그곳에 갔다. 난 그저 친구들을 그곳에서 만날 것만을 생각했지 음악까지 신청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내 친구들은 그걸 꽤 하고 싶었나 보다. 친구들은 뭐 할까, 뭐 할까 끙끙거리기만 할뿐 나만큼 팝송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나서서 그때 한창 인기 있었던 록그룹 퀸을 비롯해 생각나는 대로 서너 곡을 더 추가해 DJ 박스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 얼마 후, 우리가 아니 내가 신청한 음악 중 한 곡이 선곡이 됐다. 그러면서 DJ가 그런 칭찬도 한다. 음악을 꽤 들을 줄 아는 분 같다고. 그러니까 그때까지 나 같은 신청자는 없었던 말이 될 것이다. 어깨 뽕이 남산만 하게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그게 알고 보면 다 김광한과 김기덕 키드로 자란 덕분일 것이다. 정말 그때는 그들의 음악을 하루라도 듣지 않으면 목에 가시가 돋을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내고, 고독한 청춘을 맞이한 때 아닌가?

 

나 개인적으론 김기덕 보단 김광한을 조금 더 좋아했다. 라디오는 보이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목소리에서 판가름 날 때가 많다. 짙은 중저음의 남성미 느껴지는 것으로야 김기덕이 좀 더 우위인 것 같긴 하다. 전달력도 좋고. 하지만 다소 가벼움이 느껴진다. 즉 중저음의 장점을 극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고나 할까긴 안목으로 봤을 때 깊이와 여유, 질리지 않는 건 김광한이 조금 더 앞서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우리의 광한 아저씨는 그것도 알고 보면 다듬고 노력한 결과라고 책에서 밝히고 있다. 자신은 원래 허스키 했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 끝에 그 자리에서 김기덕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그의 연보를 보면, 그는 11년 동안 팝스다이얼을 진행했다. 이후 다른 타 방송국에서도 음악 프로를 진행했지만 진정한 전성기는 팝스다이얼이라고 고백한다. 또 그런 만큼 이 시기 TV 프로에도 출연하기도 했는데, 특히 기억에 남든 건 그 시절 당대 유명했던 개그(우먼)맨들과 함께 진행했던 <쇼 비디오자키>는 대단히 유명했다. 그때 어깨를 들썽거리며 진행했던 그를 처음 봤을 때 예상은 했지만 솔직히 목소리에 비하면 좀 많이 뒤처지는 외모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생김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결정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태도, 인격, 입담, 이미지 등이 결정할 때가 많다. 그는 그 모든 것에서 우위를 차지하기에 충분했고, 그의 타고난 성격도 한몫했다. 또한 그 특유의 성실함으로 그는 국내 최초 비디오자키 1호란 칭호를 얻기도 한다.

 

내가 알기론, 김기덕이 아나운서로 시작해 DJ로 자리를 굳힌 걸로 알고 있다. 그도 김광한만큼이나 열심히 방송 출연도 했더라면 그에 못지않은 아성을 쌓았을 것이다. 그런데 뭐 때문인지 시작은 김기덕이 먼저였을 모르지만 역시 김광한이 대중에 더 많은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여한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갑작스런 죽음은 어쩌면 박수칠 때 떠나라의 전형은 아니었을까?

 

책이 상당히 재미있다. 그가 본격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썼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그런데 지나친 겸손이었을까? 자전에세이에 머물렀다. 그래도 그의 인생 스토리를 읽으면서 사람은 평소 삶을 대하는 자세와 비전이 결국 그 사람을 결정하는구나 싶다. 그의 삶은 음악에 바쳐진 삶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고진감래와 와신상담으로 이루어진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가 팝스다이얼을 맡은 첫날 첫 번째로 튼 곡이 존 마일즈의 ‘Music’이란 곡이었다고 한다. ‘Music was my first love, and last love...’ 즉 음악은 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라고 고백하는. 또한 마지막 방송 마지막 곡도 그 곡이었다고. 그의 아내 꽃님 씨가 알면 섭섭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청취자로서 나는 그런 그의 마지막 방송을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는 게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는 자유인이었다.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슬퍼할 수는 있어도 좌절하지 않았다. 매번 어려운 순간을 걱정하고 주저하기보다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돌파했다. 주변에 늘 많은 친구와 이성을 몰고 다녔다. 읽으면서 얼핏 조르바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마냥 자유만을 추구하진 않았다. 그는 그가 좋아하는 음악을 위해 자신을 벼릴 줄 아는 지조와 청렴을 지니기도 했다. 음악을 좋아하니 자유라는 이름하에 일탈을 꿈꿔 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잘 있으란 인사도 없이. 70을 앞에 두고. 조금 더 살아도 좋았을 나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됐다. 그의 연보를 보니 새삼 상복도 지지리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한줄 무슨 상을 받았다고 나와 있지 않다. 하나 못해 공로상도 없다. 우리나라 DJ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사람에게 이렇게 박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개척기와 황금기를 동시에 이끌던 이종환 씨도 세상을 떠났다. 이 시기 DJ와 팝칼럼니스트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았을 자료들이 어딘가에 잘 보관되어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이것도 알고 보면 우리나라 대중문화사에 중요한 자료가 될 텐데 말이다.

 

누구라도 이 두 사람에 대한 평전도 써 줬으면 한다. 이 책은 재밌다고 한 번 읽고마는 책이 아니었으면 한다. 알고 보면 나름의 김광한 자신의 대중문화에 대한 증언이 들어있고, 소중한 우리의 추억이 배어 있기도 하다. 너무 사랑스럽고 소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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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19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김팝으로 쇼 비디오 자키로
뮤직 비디오 잠시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진짜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쉽네요.

이젠 팝송 인기가 예전만 못하고 들을 만한
노래도 없어서 점점 잘 안 듣게 되더라구요.

stella.K 2018-07-19 18:49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도 오래 전에 팝송이 시들해졌어요.
그게 제 개인적 성향만은 아니었군요.
듣는다면 올드팝으로 들었겠죠.
그렇게 우리가 팝송을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새삼 고맙더라구요.
그때 우리가 팝송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말할 수나 있었겠어요?
그저 추억은 아름다워입니다.ㅋ

2018-07-19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7-19 18:54   좋아요 0 | URL
아, 제가 리뷰에 다 쓰지 못했는데,
우리 부모님 세대는 클리프 리차드였잖아요.
우리 땐 레이프 가렛이었지요.
그 인기가 엄청났어요.
이런 표현이 좀 그렇지만 그 이름만 들어도
오줌을 질질 싼다고 했죠.
그가 내한 공연을 가졌을 때가 광주 민주화 운동이 터지가
바로 며칠 전이라더군요. 공연 못할 뻔 했는데 말입니다.
그걸 이책에서 읽는데 아찔하더군요.
광한 아저씨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저렇게 기억하는구나.
그 시절 우리는 뭐했을까 싶어요.ㅠ

hnine 2018-07-19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디오 DJ로 전파를 탄것은 김광한보다 김기덕이 훨씬 먼저이긴 했지요.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써 저도 대부분 기억이 나는 사람들, 프로그램, 노래들인데, 저는 그저 조각조각의 기억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을 이렇게 한 줄에 꿰어 쓰시는 것이 바로 stella 님의 내공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stella.K 2018-07-19 18:59   좋아요 0 | URL
제 리뷰를 다시 읽어보니까 좀 들쑥날쑥 하네요.ㅋ
그런 실험이 있다잖아요. 지금 7,80 어르신을 20대를 재현한
공간으로 그 시절 옷을 입고 이동하면
뇌가 그때를 인지하고 세포가 젊어진다는 얘기 말이어요.
저는 이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때를 추억할 뿐만 아니라
젊어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h님도 꼭 읽어보시기 바래요.
정말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