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자이너
나오미 울프 지음, 최가영 옮김 / 사일런스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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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모르는 사람은 이젠 페미니즘이 하다 하다 버자이너 가지고 울거 먹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외설스럽다고, 창피하지도 않냐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건 정말 멋모르고 하는 말이다. 여성 문제의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거 아닌가?

 

저자는 먼저 자신의 문제에서부터 이 문제를 접근하기 시작했다. 전엔 잠자리에서 오르가슴을 느끼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뭔가 모를 이상 증세를 느끼기 시작했고, 자신의 주치의를 찾아가 이 문제를 상담하고 그 방면의 권위 있는 의사를 소개 받아 치유를 받으면서 전에 알지 못했던 버자이너가 뇌와 서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해냈다. 그리고 그것은 창의력, 자신감 심지어 성격까지 형성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나아가 저자는 버자이너를 말초적 감각이 아니라 제2의 중추라고까지 주장한다. 또한 버자이너를 우린 간단하게 구멍으로까지 부르기도 하는데 그보단 여신의 형상을 한 구멍이라고 불러 달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린 이 여신의 형상을 한 구멍을 어떻게 대해 왔을까? 굳이 이 책을 리뷰한답시고 여기에 구구하게 설명하는 것도 새삼스럽다. 그런데 한 가지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건 역시 강간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이 여신의 형상을 한 구멍에 직접 위해를 가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과연 강간과 버자이너를 따로 떼어놓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린 보통 강간이라고 하면 단순히 어느 사이코가 겁탈하는 정도로 알고 있는데, 책은 거기서 더 나아가 끔찍하고 잔인한 표현을 하고 있다. 그 부분을 읽고 있노라면 짐승 수컷이 자신의 오줌 가지고 여기 저기 묻히며 영역 표시를 하다더니, 강간범은 여자의 몸 그것도 버자이너를 난자하므로 자신의 존재를 문신처럼 남기는 걸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더 놀라운 건, 그렇게 강간을 당한 여성들은 불구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길을 걷다가 넘어지는 일이 많으며, 멈추는 일을 잘하지 못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누가 비로소 멈추라고 해야 멈춘다는 것이다. 나는 이 새로운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자 오래 전 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어느 건달 세 명에 술집 여자를 기어이 쫓아가 어느 후미진 곳에서 차례로 윤간하는 장면이었다. 당연히 그 영화의 감독은 남성이었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에피소드의 한 장면이긴 했지만 보기에 불편했던 것도 사실이다. 감독이 어떤 의도로 그 장면이 필요했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지만, 전후 문맥을 따져 볼 때 건달은 이렇게 개 같이 논다? 뭐 그런 리얼리티,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삽입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여자의 대사다. 여자는 쫓겨봐야 별 수 없으니 결국 결심한 듯 돌아서서, “좋아. 한 사람씩...”하며 체념해 버린다.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는 하지만 강간에 윤간이 없을 리 없고, 아무리 천한 여자고 자신을 체념했다고는 하지만 그녀 역시 강간의 흔적이 없을 거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내 기억으론 이민용 감독의 <개 같은 날의 오후>이었던 것도 같은데 정확하진 않다.) 물론 이건 영화의 한 장면이고, 지금의 페미니즘과 미투 운동이 들끓기 전에 나온 오래된 영화라 관대할 필요가 있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문제적 장면은 그 영화만이 아니다. 난 과연 이것을 언제까지 표현의 자유로만 볼 것인지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어쨌든 이런 걸 볼 때 저자는 중요한 문제를 지적한 건 사실이지만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편견을 갖게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내 주위에도 드물게 유난히 길가다 잘 넘어지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도 강간 피해자로 의심해야 하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이 같은 지적은 중요하게 생각해 볼만 하다.무엇보다 강간을 당한 여성은 아무리 치료를 해도 강간 이전의 상태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저자는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사실 버자이너는 한때 신성시 여겨졌던 때도 있긴 하지만 많은 부분 상처 받고 속박당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에 대한 대표적 예가 우리가 잘 아는 중세 십자군 원정 때 여자들의 정조대일 것이다. 여자들은 원정 떠난 남자들이 돌아올 때까지 정조대에 꼼짝없이 매어 있어야 했다. 마음대로 풀 수도 없고, 청결을 유지할 수 없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남자들이 돌아오면 행운이다. 거기서 죽은 사람의 아내들은 그 정조대를 평생 풀지 못하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밖에도 상처받고 수난 당한 예는 수 없이 많다.

 

무엇보다 오늘 날은 여성들이 상처받은 버자이너에서 항문열상으로 옮겨가고 있는 추세다. 항문열상이란 새로운 정조관념, 즉 기독교를 중심으로 결혼할 때까지 순결을 지키겠다는 서약과 처녀성을 지키고 싶다는 열망과 맞물려 항문성교를 한다는 것이다. 또 그렇지 항문성교는 대부분의 남성들 선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여성의 항문이 찢어지기도 하는데 그것을 항문열상이라고 한다.

 

앞서도 영화 얘기를 했지만, 포르노의 폐해는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는 포르노 산업과 그로인한 폐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난감하다. 책은 흥미롭게도 빅토리아 시대에 문학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에 관해 다루도 하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으로 유명한 D.H 로렌스를 얼른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사춘기 시절 읽었는데 물론 그 특유의 찌릿한 감흥도 있긴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참 아름답더란 생각을 하게도 된다.

 

그렇다면 에로스와 포르노의 차이는 뭘까? 안타깝게도, 알 것 같지만 실상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여자는 전희를 해야 비로소 버자이너 즉 여신의 형상을 한 구멍이 열린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성교는 여성 보단 남성이 유리하도록 맞춰졌다. 그래서 여성은 이런 전희를 과정 없이 바로 이루어진다. 남자들이 이런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지해야 하는데 오랜 세월 남자 산부인과 의사들이 여성의 버자이너에 끊임없이 오해하도록 조장되어져 왔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기도 하다.

 

이 책은 동양의 도가사상과 특별히 인도의 탄트라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서양은 이미 포르노에 점령당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저자는 이 삐뚤어지고 잘못된 성의식에 이 두 가지가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말하기도 하다. 이것의 유익이 얼마만한 것인지 여러 페이지에 걸쳐 할애하고 있다. 또한 버자이너의 진정한 해방을 위한 12가지 원리를 책의 마지막 부분에 싣기도 했는데 참고해 볼만하다.

 

이 책은 무려 500 페이지 정도 되는 두꺼운 책인데 저자는 버자이너에 대해 이만한 책 두 권을 합쳐도 못 다 할 이야기가 많다고 했다. 이는 이것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이기도 하겠지만, 바꿔 말하면 그만큼 이 부분은 꾹꾹 감춰져 있고 억압되어 있었다는 말도 될 것이다.

 

엊그제도 우리나라 문화예술에 종사하는 여성의 상당수가 남성의 성범죄에 피해를 당해 본적이 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그중 또 적지 않은 수가 말을 하지 않거나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어찌 보면 여성은 피해를 보면서 그 죄를 방조한 셈이기도 한데, 그것에 관해서는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여자 보다 힘이 세고, 세상의 모든 프레임은 남성에 유리하도록 태곳적부터 맞춰져 있다. 거기서 여성이 해 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여성조차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란 인식 없이 살아 온 세월이 얼마인가? 거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버자이너임을 저자는 당당히 고발하고 있다.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저자가 도교와 탄트라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것의 관해서는 한없는 관심을 보이면서, 남성들의 잘못된 성의식의 변화를 촉구하고, 왜 상대와의 조화가 중요한지에 관해서는 다소 설명이 미약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뭐 그런 거야 다른 책에서 보충할 수도 있고, 이 책이 의미하는 바와 성과는 결코 작지 않다고 보인다. 여성 보다는 남성이 더 많이 읽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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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6-21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성에게 변화를 촉구하는 건 옛날 방식이에요. 20세기 초 온건 페미니스트들이 이런 방식으로 여성 운동을 했어요. 이게 안 먹히니까 거리에 나가고, 목소리 높이는 페미니스트들이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

stella.K 2018-06-22 09:43   좋아요 0 | URL
그랬겠지.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은 더 시끄럽게
떠들 필요가 있어.
사람의 인식이 쉽게 바뀌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거든.
물론 그만큼 반페미니즘도 들끊겠지.
그럴지라도...ㅋ

페크pek0501 2018-06-23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이, 지적이 좋네요.
꼭 읽어야 할 사람이 사실은 읽지 않고 있는 게 안타까워요.
미투 운동도 그렇고 세상을 바꾸는 사건들은 일어나는데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게 문제예요. 인간을 변화시키는 속도는 느린지라...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지요.

참, 언제부터 말하고 싶었는데요,
서재 이미지가 보기 좋네요. 파란색이 시원해 보이고 예쁩니다. 바다인가요?

stella.K 2018-06-23 19:00   좋아요 0 | URL
ㅎㅎ 저 이미지 예전에 한 번 썼어요.
그런데 다시 봐도 좋긴하죠?
여름 한철 계속 써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