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관한 책은 가급적 읽지 않으려고 했다.
요즘
그런 책이 얼마나 많이 나와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안다.
물론
읽어서 나쁠 리 없다.
하지만
읽으면 뭐하나?
중요한
건 내 글을 써야지.
그래서
글쓰기 강사가 될 것이 아니라면 가급적 안 읽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 책은 왠지 끌렸다.
제목이
길기도 하지만,
뭔가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는 책 같아서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지난
날 글 쓰다 엎은 적이 어디 한 두 번이랴?
왠지
그런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책인 것 같아서였다.
제목에서
풍기듯 이건 글쓰기 생초보를 위한 책은 아닐 거라고 지레 짐작한다면 걱정은 붙들어 매시라.
생초보라도
읽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표지 중앙의 그림에서 느껴지듯 이건 어려운 책이 아니라는 것쯤 빤히 알 수 있다.
(고양이를 그려 넣을
생각을 하다니.ㅋ)
(여러 번
밝혔지만)나의
꿈은 작가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꿈을 이룬 것도 같다.
오래
전교회에서 대본을 썼고,
2년
전엔 책도 냈으니.
하지만
인생이 어디 내 뜻대로만 되던가?
이건
내가 원하던 그림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그림은 소설로 데뷔하는 거였다.
사실
내가 교회에서 대본을 쓴 것도 소설을 써 보고자 하는 뜻에서 시작한 일이다.
책에서도
저자가 지적하지만,
글
쓰는 일이 지난한 것도 있지만 지지부진한 것도 많아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대본 쓰는 일이
그랬다.
소설이야
혼자 하는 작업이니 지지부진해질 누가 뭐랄 사람이 없지만,
연극이란
장르가 워낙에 여러 사람과 협업으로 해야 하는 것이니 대본은 잘 쓰든 못 쓰든 제때 나와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작가가 마감에 맞추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저자도
그런 말을 한다.
기왕이면
마감에 맞추는 작가가 되라고.
마감에
못 맞추면 기회는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간다.
그러나
마감에 맞추면 출판사나 잡지사로부터 신뢰를 얻고,
그
다음을 도모할 수가 있다.
나는
바로 이 훈련을 대본 쓰는 것으로 했기 때문에 겹쳐서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마감에 맞추는 일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그런데
저자는 책에서,
전업
작가가 좋으냐,
아니면
자기 일을 하면서 글을 쓰는 것이 좋은가 했을 때,
당연
후자에 손을 들어준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업
작가는 아마도 신이 내려준 직업일 것이다.
글만
써서 집세 내고,
공과금
내고,
생활비
한다?
이건
정말 꿈같은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자를 잘 만나거나,
부모님
집에 그야말로 잠만 자고 밥만 먹는 입주 가사도우미가 되어,
눈물에
밥을 말아먹을지언정 절대로 부모님 그늘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꿈같은 이야기지만,
본인이
금수저이거나.
결국
작가는 훌륭한 직업이긴 하지만 현실을 생각할 때 거의 수익을 보장할 수 없으니 겸업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소리다.
그렇게
생각하면 서글프긴 하다.
직업이
뭐가 됐든 그것은 자아실현과 경제적인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작가란
직업은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작가는 여타의 직업과 겸직을 하게 되는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저자는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때로는
자신의 직업이 무엇이든 직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소재로 삼을 수 있으니 좋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저자의 이력을 살펴보니,
화학자
출신이고 그래서 그런지 전작들도 과학적 요소가 많기도 하다.
아무튼
나도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나는
오래도록 교회에서 글을 썼으니 오죽 겪고 본 일이 좀 많겠는가?
그걸
책으로 써도 책 몇 권은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겸직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작가에겐 어쩌면 축복인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어느 작가도 편의점에서 일한 것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고 그러고,
우리나라
어느 법조인은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써서 그게 현재 TV
드라마로까지
방영되고 있다(말에 의하면 작가가
직접 각색까지 했다고 하는데 무슨 복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정작 원하는 소설을 안 쓰고 있다.
아니
못 쓰고 있다.
역시
저자가 지적하기도 했지만,
작가로
살아남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한
두 권의 책을 내 본 것으로 작가 딱지를 달았으니 거기에 만족하는 것이다.
거기엔
작가의 의지의 문제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야말로
생업이 발목을 잡아서 못 쓰게 되는 경우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는 좀 복잡하다.
그렇게
대본을 써 봤으니 소설도 금방 잘 쓰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대본 쓰는 일과 소설 쓰는 일은 결코 같은 게 아니다.
그동안
내가 대본을 쓰면서 소설은 안 써 봤겠는가?
그런데
꼭 실패했다.
어떤
땐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가당치 않다고 생각할 때도 많았다.
그야말로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작가란 꿈은 가져서 이런 생고생을 하나?
차라리
없었던 것으로 하려고 발버둥쳤던 때도 있고,
글
쓰는데 매번 실패를 하니 일부러 팔짱끼고 있다가 뭔가 내 안의 욕구가 빵빵해져 더 이상 못 견디겠다 싶을 때 써 보는 것은 어떨까 하던 때도
있었다.
이
책은 애석하게도 그런 심리 상태를 진단해 주는 책은 아니었다.
즉
왜 실패하는가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계속 쓸 수 있는가를 모색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해 본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먼저
저자는 베껴 쓰기가 얼마나 고역인지를 털어놓는다.
사실
베껴 쓰기는 창작을 공부할 때 빠지지 않는 수련 과정 중의 하나다.
그것에
대해 저자는,
......
아닌
게 아니라 어떤 글을 찬찬히 베껴 쓰면,
그
글의 특징과 구조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는 기회가 될 때도 분명 있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에는 베껴 쓰는 일에만 몰두하다가 정작 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일을 방해할 때가 많고 소모되는 힘과 시간도 너무
컸다.
(162p)
그
뒤 저자의 설명은 그냥 기계적으로 무의미하게 베껴 쓰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고,
글을
쓰면 내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한데 그 일에서 내가 뭔가를 했다고 만족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건
나 역시도 동감하는 바이다.
그런데
왜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나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하나같이 필사가 중요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저자의
의견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솔직히
난 내 글 쓰는 것만으로도 어떤 땐 팔이 떨어져 나갈 지경이다.
베껴
쓰느라 에너지를 쓴다는 건 너무 힘들다.
대신
저자가 추천하는 방법이 있다.
이건
나도 언젠가 한 번 해 보고 싶은 것이기도 한데,
베껴
쓰기를 아주 안 할 수는 없으니 괜찮은 영화나 드라마를 자기 식으로 베껴 써 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소설로 옮겨보는 것이다.
그것이
소설이면 시나리오나 대본으로 옮겨 써 보는 것이다.
그냥
베껴 쓰기는 단순하지만,
이
작업은 상상을 해야 하고,
문체를
다듬기도 해야 하니 좀 보람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등장인물의
심리가 어떤지 글로 표현해 보기도 하고.
저자는
그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거기서 개작을 해 보라고 한다.
즉
모작을 해 보라는 것이다.
나라면
이 작품 또는 이 장면을 어떻게 해 볼 것인가를 써 보는 것이다.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구조를 바꾸고,
구성을
바꾸고 하면서,
새로운
창작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
또
작가는,
자신이
쓰고 싶은 데서부터 글을 써 보라고 한다.
이건
꼭 소설이나 시나리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수필이든
일기든 지간에 전체 쓰고 싶은 글에서 가장 쓰고 싶은 부분부터 쓰는 것이다.
그
부분을 읽으니 갑자기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생각이 났다.
거기서보면
해리는 책을 읽을 때 맨 끝 페이지를 먼저 읽은 후 첫 페이지부터 읽는 버릇이 있다.
그러자
샐리는 왜 그렇게 하냐고 묻는다.
해리는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하면 혹시 자신이 심장마비나 사고로 죽기라도 하면 맨 마지막 페이지는 못 읽게 되니 그러는 거라나
뭐라나.(워낙 본지가 오래라
정확히 옮기는 건 불가능이다.ㅠ)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
기가 막힌 장면을 염두에 두어두고 있는데 갑자기 죽게 된다면 이건 영구미제로 남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모든 컴퓨터엔 워드 기능이 있다.
이것은
자유로운 편집이 가능하다.
아주
오래 전,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였는지,
제임스
조이스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암튼 원고를 보여주는데 그야말로 누더기였다.
노트에
메모를 길게 늘여 붙였는데 왜 그랬는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은 그렇게 글을 쓰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나도 발단 쓰고,
전개
쓰다 정작 중요한 부분을 못 쓰고 중단했던 적이 너무 많다.
사실
나 같은 사람은 귀도 얇아 남의 말은 잘 듣는 편이다.
과거
나를 가르쳤던 글 선생님은 한 번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베껴
쓰기는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고 했고,
어느
한 장면을 위해 앞뒤로 무엇인가 살을 붙이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난 이 책에서 이 두 가지만을 아는 것만으로도 자유로움이 느껴졌고,
당장이라도
해 보고 싶어졌다.
하긴,
글쓰기에
왕도가 어디 있겠는가?
내
나름대로 쓰면 그게 내 길인 거지.
그런데
작가는 또 말한다.
그렇게
못 쓰겠으면 쓰지 않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그래도 계속 쓰서 어떻게든 끝을 보는 것이 좋은지.
둘
다 나름에 일리는 있는데,
결국
저자가 내린 결론은 그래도 계속 써서 끝을 보라는 것이다.
안
쓰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글이라도 어떻게든 완성하면 후에 고칠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건
맞는 얘기다.
고칠
것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희망이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더불어
기억할 말은 그렇게라도 완성한 후에 그 다음에도 또 쓰고 싶어지냐고 묻는 것이다.
만일
또 쓰고 싶어지면 작가가 되는 것이고,
쓰고
싶지 않으면 작가는 내 길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고,
나의
사부가 했던 말씀이다(왜 그 말이 생각이
나는 것일까?).
아무튼
글쓰기에 관한 책은 정말 오랜만에 읽어보는데,
나름
알뜰살뜰 유용하게 잘 쓴 책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기력보충용으로 비타민 먹듯 한 번씩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