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눈물로 자란다
정강현 지음 / 푸른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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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긴 해도 저자는 눈물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그러니까 제목을 그렇게 지었겠지. 요즘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자랄 때만해도 남자가 눈물이 많으면 안 된다고 했다. 오죽하면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고 했을까? 그만큼 인생에 있어 중요한 때를 간과하지 말고 울라는 뜻도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좀 바꿔도 되지 않을까? 울고 싶으면 수시로 울되 중요한 세 번은 지나치지 마라. 뭐 그런 뜻으로 말이다.(더구나 여자는 울어도 되고 남자는 울면 안 된다면 그건 사회적으로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불행한 사회인가.) 솔직히 어찌 어찌하다 보니 때를 놓치는 때도 많지 않은가.

 

저자는 기자면서 왜 그렇게 눈물에 관심이 많은 걸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서는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온다. 하긴, 우리가 세월호를 어찌 있을 수 있을까? 저자는 기자로써 세월호를 취재하기도 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슬픈 소식을 들으면 그냥 울어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소식을 전하는 기자나 앵커는 울면 안 된다. 그러나 그 사건을 취재할 땐 아마도 우리 보다 몇 배의 눈물을 흘리고 삼키지 않았을까? 그것을 소회처럼 남겼다.

 

언젠가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돌이켜 보면 김대중이나 김영삼 대통령 때도 국가적으로 세월호만큼 재난이고 슬픈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땐 그냥 하나의 사건으로만 취급되어 건조하게 보도만하고 지나간 경우가 많았다고. 그래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보다 개인의 책임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삼풍백화점 붕괴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로부터 거의 20년 만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물론 그 사이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을 대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이 달라진 것이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더 이상 그것을 개인적 사고로만 보지 않게 된 것이다.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자각이 생긴 것이다.

 

세월호는 분명 가슴 아픈 사건이지만 그 토록이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슬퍼했다는 건 내 이웃의 아픔을 끌어안았다는 말도 될 것이다. 이렇게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일에 같이 아파하고 울어주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그 사회는 분명 좋은 사회고, 건강한 사회가 될 확률이 높다고 믿는다.

 

이 책 어딘가 에도 저자가 그런 말을 한다. 눈물방이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피시방, 비디오방처럼 눈물방이라는 걸 만들어서 편히 몸을 기댈 수 있는 소파에다 각 티슈 몇 통 갖다놓고, 종업원은 손님의 울고 싶은 심경을 건드리지 않게 최소한의 안내만 한다. “한 시간 동안 우는 데 삼천 원입니다. 필요하시면 함께 울어드리는 서비스도 있습니다.”라고. 현실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법 그럴 듯하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 지하철을 타고가다 어떤 젊은 아가씨가 전동차 출입구에 기대서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럽게 우는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게 벌써 10년쯤 된 일이었던 것도 같은데, 그녀는 왜 우는 걸까? 아는 사이라면 어깨라도 빌려줬을 텐데, 오히려 무심한 척 외면하려니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성경에도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했고, 잔칫집 가기를 바라지 말고 초상집 가기를 더 바라란 말도 있다. 모든 사람이 지하철과 버스만 타면 다 스마트폰만 보고, 졸고 있는 것 같아도, 또 많은 사람이 안구건조증에 시달리는 것 같아도 누군가는 그렇게 울고 있는 것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상상해 보라. 백만 년 후의 사람들은 눈에 눈물샘이 퇴화되어 웃기는 하는데 우는 것을 모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지.

 

저자는 기자란 직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기자라는 완장을 떼고 온전히 인간으로 돌아가 쓴 저자의 에세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그것도 이제 40대에 든 남자의 인생 고백이 들어있다.

 

나도 40대 이전을 생각해 본다. 20대는 좌충우돌이 많았고, 그나마 30대쯤 되니 비로소 세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30대 때 세상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자존심이 팽팽했던 시절이었다. 나만 세상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세대를 살고 있는 선후배들 역시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으니 그 안에서 얼마나 자존심의 싸움이 치열했던가. 그게 언제까지나 계속 된다면 난 오늘 이렇게 한가하게 이 책의 리뷰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40대는 확실히 꺾였다. 옛날 같이 피터지게 싸울 힘도 자존심도 없다. 뭔지 긍휼에 눈이 뜨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평생 미워할 것만 같은 사람도 (물론 여전히 밉겠지만)너도 사느라 힘들겠구나 조금은 한숨 지어줄 생각이 드는 나이가 40대는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거기에 계셔줄 것 같은 부모가 정말 늙으셨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나이도 40대다. 그래서 저자는 세월호에 대한 단상 못지않게 부모에 관한 속내를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저자가 부모가 되고 보니 자신의 부모가 더 선명히 보이는 것이다.

 

인생은 살아지는 것 같아도 사느라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지 때로 미친 척이라도 해서 짐을 털어버리고 일탈을 꿈꿔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으련만, 꾸역꾸역 살아내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 힘들게 살지 말라고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냥 말없이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도 40이란 나이에 들어서면서부터가 아닐까. 40대를 이 책에서 발견하고, 독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잘 건너오시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밖에 책이 못지않게 할애한 건 문학과 음악에 대한 단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3분의 1씩을 할애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월호를 빙자해 자신의 일에 관한 이야기/ ()부모와 가장으로서의 이야기/ 취민지 투잡인지 모를 팟캐스트 운영자로서 문학과 음악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중간 중간 끼어드는 저자의 단상들로 구성된. 그렇게 되면 4분의 1이 되는 건가? 아무튼.

 

기자가 문학에 관한 글을 쓰면 꽤 흥미롭다. 작가나 기타 문학 종사자들이 문학 작품을 쓰는 것 하고는 확실히 다른 맛이 있다. 이 책도 그랬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한때 작가를 꿈꾸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문학에 관한 애정이 느껴지고 실제로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작가는 무엇으로 글을 쓰는가? 나는 오래도록 분노가 너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 것이라던 나의 사부님의 말씀을 철석 같이 믿었고, 나는 그것으로 세례를 받았다. 나는 여전히 그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요즘은 좀 달라졌다. 분노만이 글을 쓰게 만드는 건 아닌 것 같다. 길은 여러 가지가 있지 않을까? 그중 하나가 분노겠지.

 

저자는 작가를 꿈꾸기 전에, 기자가 되기 전에 오래 전부터 독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소설과 시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는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게 좋은 소설이란 가장 잘 아파하는 소설이다. 그러니까 타인의 고통을 잘 느끼는 작가가 등장인물의 아픔 속으로 깊이 들어간 소설이, 나는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 그렇게 인물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는데, 좋은 소설은 그 이해의 공감대가 넓고 깊게 형성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106~107p)

 

이 말을 후에 유안진 시인과의 인터뷰에서 뒷받침 해주고 있기도 한데, 유 시인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시인은 져야 합니다. 져줘야 이기는 게 시거든요. 지는 건 진실이고 이기는 건 사실이죠. 역사(사실)는 승자의 기록이고 문학(진실)은 패자의 기록이잖아요. 진실을 아름답게 지켜내는 게 문학이죠.” 그리고 저자는 이 말 끝에 이런 말을 남긴다. 진실이 패자의 기록이란 말은, 진실이란 결국 패배한 이들에게서 길어낼 수 있다는 뜻일 테다. 또한 좋은 소설에는 좋은 대화가 있다고 했다. 좋은 대화는 소설의 이야기를 확장시키면서, 동시에 삶의 진실을 가장 나긋나긋한 방식으로 일러주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저자는 베스트셀러는 잘 읽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온전한 책의 힘이 아니라, 잘 설계된 기획의 산물처럼 여겨져서라고 한다. 출판시장에서, 잘 기획된 책은 잘 쓴 책을 자주 이긴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취향에서, 잘 쓴 책은 잘 기획된 책을 항상 이기고야 만다고 했다. 이게 다 책은 단순한 글 묶음 상품이 아니라, 글 그 자체여야 한다는 편견 때문이며 당분간 그 편견을 고칠 생각이 없다고 단언한다.

 

이런 독자를 단 한 사람만 알고 있어도 작가는 글을 쓰는데 힘이 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작가(지망생)들이 자신의 글을 쓰기도 전에 세상의 잘 기획되고 편집된 글에 목을 매는지. 또한 독자는 요즘 잘 나가는 책이 뭔지를 알아 스스로의 선택을 유보하거나 불신하는지. 작가도 글을 쓰는데 자기 철학이 있어야하듯, 독자도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자기 철학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그러면 더 좋은 책 세상이 될 텐데. 너무 우주적인 바람을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안진 시인의 말처럼, 기자 역시 승자의 기록이나 쓰는 역사가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약하고, 소외되고, 문제 많은 곳을 건드려주고 보여주는 게 기자 정신에 더 부합되지 않을까? 저자는 그런 낮은 곳을 볼 줄 아는 따뜻한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같아 흐뭇했다. 또한 이곳저곳 밑줄 긋다 나중엔 그것을 포기했다. 공감하고 생각할 문장들이 얼마나 많은지.

 

다시 세월호로 돌아가서, 마침 오늘 세월호가 똑바로 세워졌다는 뉴스 속보를 보았다. 무려 4년의 일이다. 기울어졌던 세월호를 바로 세우는데 왜 그처럼 많은 세월이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앞서 같이 흘릴 수 있는 눈물이 있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좋은 사회, 건강한 공동체로 나가는 징조라고 믿는다고 했다. 하지만 우린 그 사건으로 인해 이미 너무 많은 가족들이 상처를 받았다. 국가가 국민과 가족의 안위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함께 흘리는 눈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난 4년 동안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난 아무런 답도 달지 못했다. 사실은 그런 불행한 일에 함께 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나눌 좋은 일이 더 많아 함께 웃을 수 있으면 그게 더 좋은 일 아닌가. 함께 누릴 수 있는 행복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 글제목은 줄리아하트 밴드가 부른 <당신은 울기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 제목을 그대로 옮겼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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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5-10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물만큼, 아픈 만큼 사유가 깊어질 것이라 해도 역시 우린 행복의 길을 지향하죠.
더 이상 슬픈 사고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국민이 흘린 눈물 중 세월호로 흘린 눈물이 가장 많지 않았을까 싶어요.

stella.K 2018-05-11 15: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전에도 이후에도 사건 사고가 많았는데
유독 세월호는 쉬 잊히지 않는 건 왠지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미처 다 피워보지 못한 아이들이 많이
희생되서 일까요?
함께 나눌 수 있는 행복과 기쁨이 충만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ㅠ

hnine 2018-05-10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인용한 유안진 시인의 말이 명언이네요.

stella.K 2018-05-11 15:48   좋아요 0 | URL
h님 좀 생뚱맞지만 나중에 기회되시면
<미스티>라는 드라마 한 번 보세요.
거기서도 보면 사실과 진실이 뭐냐는 사유가
미스터리하게 펼쳐지는데 정말 잘 만든 드라마예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