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스트, 이번호는...
악스트의 장점이라면 가격이 파격적으로 싸다는 것과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이나 질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밥 한끼 먹으려면 보통 7,8천원 줘야하는데 그런 와중에도 천원, 이천원하는 밥집이 있다고 한다. 그럼 눈물나게 고맙고 정감이 가는데 이를테면 악스트도 그런 것 같다.
보통 문학잡지가 권당 만원이 넘는데 이렇게 정이 가는 가격의 잡지가 있다니. 내가 만일 훗날 작가로 등단한다면 작가가 되는데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받은 책 목록을 묻는다면 거기에 악스트를 포함시키겠다.ㅋ
물론 두께에선 다소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잡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사람 별로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면 슬림하다고 할 수 있다(하긴 난 이 슬림한 잡지도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 않지만).
그런데 여전히 단점은 글씨가 너무 작다는 것. 그나마 창간호는 전체적으로 깨알 같은 것에 비해 이번호는 어떤 지면은 크기가 컸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냥 큰게 아니라 어떤 지면에 상대적으로 크다는 것뿐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작다는 느낌이다. 눈 나쁜 사람도 악스트를 읽을 권리가 있는데 그 점은 악스트가 시급히 해결해야할 점이 아닌가 한다.
아직 읽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요즘 핫한 작가 중 한 사람인 장강명의 기사였다. 그도 전업작간데 전업작가가 그렇듯 그 역시 시간을 허투로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꼭 만날 사람이 아니면 한가하게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물론 전업으로 글을 쓰느니만큼 그가 선택한 삶이니 각오한 일이겠지만 새삼 대한민국에서 작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또 한 번 스산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요즘엔 부지런히 쓴 덕에 예전만큼 각종 문학상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도 하는데 그 말에서 괜히 착한 흥부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건 배수아가 번역을 맡은 한 장 짜리 소설 두 편이다. 난 한 장짜리 소설은 쓸 엄두도 안 날 것 같은데 상당히 인상적으로 잘 썼다. 앞으로 계속 실릴 모양인가 본데 기대가 된다.
그런데 역시 악스트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는 작가와 나눈 인터뷰가 아닐까 한다. 창간호에선 천명관이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는데 이번에는 박민규다. 독자인 나로선 나름 적절한 대상이란 생각이 들고, 벌써부터 다음 호 인터뷰 대상자는 누가될지 궁금하다(개인적으로 김경욱이 됐으면 좋겠다. 요즘 내가 이 작가에 꽂혀 있는 관계로 ).
역시 민규 형님은...
천명관 때도 그렇게 느꼈지만 박민규 역시 후배 작가들은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과부가 과부의 심정을 안다고, 작가의 길이 그리 쉽지 않으니 선배로서 후배를 챙기는 마음이야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박민규의 별스러움이야 그의 작품 보다 더 잘 알려진 사실이고(어느 핸가 동인문학상 수상식 때 타이거 마스크 쓰고 찍은 사진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인터뷰 기사를 보니 나름 포복절도할 내용도 나온다. 그것은 언젠가 이곳 알라딘이 내 인생의 책을 선정해 달라고 했단다(이런 건 또 언제했나?). 그런데 그의 답이 걸작이다. 자신의 인생의 책이 <허슬러>란다. 허슬러가 무엇인가? 도색잡지 아니던가? 처음엔 웃었지만 역시 박민규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때 부연 설명에서, 어렸을 때 자신은 책만 펴면 잠부터 밀려오곤 했단다. 그런데 처음으로 허슬러를 통해 책을 골똘히, 끝까지 보는 습관을 기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책 덕분에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또 뭐,, 지금도 비스마르크를 읽고, 노자, 장자를 읽고... 그러고 나서도 갑자기 <허슬러>를 보면 우와, 엉덩이다! 하는...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나라는 인간의 모순을 늘 깨우쳐주기 때문에 내 인생의 책이라고 생각한다... (134p) 고. 뭐 끝까지 본거야 이해할 수는 있다고 쳐도 그게 뭐라고 골똘히 보기까지 했을까?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뭐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이상적인 조화를 추구했을까?
그런데 이런 별스러움은 박민규 한 사람으로 족했으면 한다. 혹시라도 작가 꿈나무 중 박민규 코스프레 하겠다고 할까 봐.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문학 대들보가 나온다면야 말릴 건 아니겠지만 그러다 삼천포로 빠진다면 그 안타까운 인생을 어찌할 것인가.
참고로 난 초등학교 5학년 여름 처음으로 말로만 듣던 도색잡지를 보았다.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갔던 오빠가 가방에 넣고 다니던 걸 엄마의 눈에 띄어 보게 되었는데, 놀랍고 야릇하기도 했지만 나 보다 2살 많았던 오빠가 갑자기 훌쩍 커 보인 느낌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노는 차원이 달라졌구나 싶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제 겨우 1학년이다. 1학년 짜리가 벌써 그런 거나 밝히고. 엄마로선 이놈의 자식이 이담에 커서 뭐가 되려고 할까 한심했을 것이다. 지금은 도색잡지가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보고 느낀 건 왜 도색잡자는 여인만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남자도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박민규, 그가 말하는 한국문학
올해 한국문학계를 뜨겁게 달군건 역시 표절이다. 그도 얼마 전 표절의 도마위에 올랐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터뷰 기회가 왔으니 한마디 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표절에 대체로 온건한 입장이란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의 양상을 보면 표절에 대해서는 작가들 보단 독자들이 더 공분했고 강경한 인상이다. 마치 뭐에 사기 당한 양. 하지만 독자도 표절에 대한 다양한 입장과 반응을 들어봐야 할 것 같다. 그것에 대해 박민규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문학에 대해서 '순수'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표절에 대한 규정 내지는 가이드라인조차 마련되 있지 않다고 한다. 도작, 위작, 모방, 인용, 차용, 도용...어느 하나도 세부 협의된 기준이나 범위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막연한 '표절'한 단어에 의지한 채 지금까지 왔다는 얘기지. 이는 곧 교육을 할 수 없었다는 얘기기도 하다. 나도 문창과를 다녔지만 그런 교육을 받아 본적이 없다. 더 놀라운 것은 지금도 여전히 이에 대한 교뉵이 없다는 사실이다. 글을 잘 쓰고, 등단을 하고 작가가 될 훈련만 받을 뿐 이에 따르는 위험 내지는 안전수칙에 대해서 어떤 준비도 대책도 없다. ...... 표절이란 명사엔 '남의 문장을 훔쳐 쓴 것' 외에는 다른 뜻이 없다. 예컨대 천 매가 넘는 소설에서 한 문장만 같아도 표절은 표절인 것이다. 나는 이것이 18세기에나 적용될 판단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저작물의 수가 현저하게 적고 '3434/3444/3543 詩歌가 문학의 기준일 때를 말하는 것이다. 한 문장이 전체 작품의 3분의 1을 차지하던 시대니까.(141~142p)
정말 어느 것을 가지고 표절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저작물이 워낙에 많은 세대에 살고 있으니 내가 누구의 것을 나도 모르게 표절했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 반대로 표절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고, 적용의 문제에 감정의 문제가 끼어들 수도 있고, 이젠 여기저기서 하도 표절, 표절하니 또 그런가 보다고 무뎌질 것도 같다. 하지만 의도성이 있느냐 없느냐 또는 표절을 그렇게 한 단어로만 하지 않고 여러 동의어로 적용할 수 있다면 표절은 그것을 한 사람의 양심의 문제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표절을 했느냐 안 했느냐를 가려내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이 표절 작가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바라 볼 것이냐도 중요하지 않을까? 얼마 전 작가 신경숙 씨가 미국에서 작가 활동을 재개하겠다고 했다. 우린 신경숙 씨가 표절의 도마위에 올랐을 때 이 사람 작가 인생 끝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문제가 수그러들자 그녀의 그런 보도를 접하게 됐다. 하긴, 그녀가 도덕적으로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작가 인생을 정리할만큼인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평생 그것으로 밥 먹고 살았을 텐데 그 일을 접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그렇다고 또 한쪽으로 생각하면 자성을 촉구하는 정도로는 부족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녀를 옹호하는 사람이야 그녀의 작가활동 재개를 환영하겠지만 너무 성급한 결정은 아닌가 하는 우려의 시각도 없지 않을 것이다. 작가도 어차피 매문가다. 글을 써서 팔아야 먹고 사는 존재. 상인에게 상도가 있듯 매문가에게도 매문의 도가 있지는 않을까? 만일 그게 있다면 표절에 대한 교육과 함께 이것도 교육을 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저작이 많은 세상에 살면 살수록.
문학은 섹스 같은 것이라구?
앞서 박민규는 문학에 대해 순수의 감옥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했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표절의 문제와 문학계의 카르텔을 지켜보면서 대중은 문학 너 마저 ...?하며 통탄했다는 말을 들었다. 문학 청정의 이미지가 손싱된 것마는 틀림없다.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무 보다 문을 숭상해왔던 민족성과 관련이 없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엄밀히 생각해 보면 문학은 그렇게 성스럽지마는 않을 것이다. 문학이 뭐라고 그렇게 성스러워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이런 이미지를 강요해 왔던 건 작가들 자신이 이니었을까? 문은 천한 것일 수가 없으니까. 자기가 자기 발등을 찍은 꼴은 아닌지. 각종 문학상이 그 권위를 얼마나 뽐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가? 그래서 문학상을 못 받은 작가는 작가라고 명함도 못 내민다. 이에 대해 박민규는, 이제라도 '순수'의 감옥을 벗어나야 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자칫 순수라는 창살에 '순결'이라는 창살마저 덧씌워질까 우려가 들어서다. 작가에게 문학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섹스의 대상이어야 한다(144p)고 말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크긴 하다. 문학 스스로가 지고 있는 권위의 갑옷을 벗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속되고 B 급 언어로 가득 채워진 문학은 문학이 아닌 양 바라보는 시각도 좀 덜어낼 필요도 있어 보인다. 그런데 우리의 민규 형님 뭔가 좀 어버하는 느낌도 든다. 문학이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섹스의 대상이라니. 뭐 그 나름대로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왜 하필 비유를 그렇게 했을까?
그가 섹스라고 말할 때 섹스는 오늘 날 배설, 쾌락, 카타르시스의 의미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문학이 관연 그런 건가? 하지만 섹스도 알고 보면 상당히 복잡한 철학과 윤리학, 생리학을 왔다갔다 하는 문제다. 고전적 기독교 진영에서는 섹스는 오늘 날 그렇게 타락했지만 알고 보면 섹스는 원래 거룩한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렇게까지도 말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차원은 아니지 않을까? 아무래도 허슬러의 영향이었을까?
이밖에도 우리의 민규 형님은 여러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여기서 줄인다. 창간호 천명관 때도 그랬지만 읽으면서 우리 문학과 그 나갈 바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의 민규 형님은 사진에서도 결코 기죽지 않는 카리스마를 작렬하고 있다. 꼭 홍콩 배우 같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