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안경을 마쳐야지 해놓고 해를 넘기고, 달을 넘기고 있다.
눈이 나빠지니 내가 앞으로 책을 몇 권이나 더 읽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뭐가 어떻게 될 것도 아니고 눈이야 노화에 따른 것이니 슬퍼할 것도 없다. 이 나이 먹도록 안경 안 끼고 살았으면 잘 산 거 아닌가.
작가 보루헤스옹은 그의 지독한 독서 때문에 시력을 잃었다. 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보루헤스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무슨 사고를 당하지 않고 또 혹사시키지만 않는다면 나의 눈은 나의 노화와 함께할 것이다.
하긴 보루헤스는 독서로 시력을 잃었지만 그 반대의 케이스도 있다. 중국의 어느 교수는 자기 집 부엌에까지 책을 쌓아놓고 해가 져 깜깜한데도 불을 킬 생각도 안하고 책을 읽었다고 한다. 모르긴 해도 다른 것을 할 때 해가 떨어졌다면 그도 어둡기 전에 불을 켜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런 어둠속에서도 책을 읽은 것을 보면 그건 확실히 무아의 경지였을 것이고, 그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능력일 것이다.
며칠 전, <생활의 달인>을 보니 순 옛날 방식으로 수의를 만드는 9순의 할머니가 소개되었다. 나이가 9순이니 눈이 얼마나 안 좋겠는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직도 누구의 도움 없이 손수 바늘귀에 실을 꿰어 바느질을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할머니는 며느리와 PD 셋 중 가장 먼저 바늘귀에 실을 꿰는 기염을 토하기까지 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사람은 어느 경지에 오르면 육체의 감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모르긴 해도 그들은 그 일만 잘 하지 않을까? 어둠속에서 책을 읽으라면 읽겠는데 바닥에 떨어진 밥숟가락을 찾으라고 하면 못 찾을 것이고, 9순의 할머니도 바늘귀에 실을 꿰라면 하겠는데 머리카락을 주우라고 하면 못 줍지 않을까?
어쨌거나 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니 그런 신선 같은 재주는 없을 것 같고, 이제부터는 (시간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눈이 더 나빠지기 전에 읽어야 할 책 목록이라도 만들어야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랬더니 (요즘 작가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요즘에 나오는 신간은 웬만해선 눈길이 가지 않는다. 사춘기 때 미처 다 읽지 못한 또는 이미 읽었더라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고전에 마음이 간다. 학교 때 고전을 읽으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자랐건만 그땐 정말 귀 밖으로 들었다. 그땐 세상에 읽을 책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케케묵은 고리짝 책을 읽으라는 건가 한심하게 들었다.
한다하는 독서 고수들은 말한다. 그런 책들은 적어도 200년 이상 시간을 견디며 살아남은 책들이다. 뭔가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그러니 고전을 읽으라고 일축한다. 그런데 이 시대 낭만 호사가 김갑수는 그의 책에서 고전을 아주 간단하게 정의했다. 재미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특히 제인 오스틴 같은 책은 너무 재밌다는 것이다. <작업인문학>에서). 과연 그도 그렇겠다 싶다.
적어도 200년 전, 사람들은 무엇으로 재미를 추구하며 살았겠는가. 뭐 사랑을 추구하며 산다지만 잘 알다시피 사랑의 유통기한은 6개월에서 길어야 1년 내외다. 스포츠도 내가 좋아야 하고 재능이 있어야 한다. 그 시절 볼만한 영화있었겠는가?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고 추구하는 존재라고 한다. 그러니 그것은 아무리 추구해도 물리는 법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순전히 상상력에 의존에서 썼을 테니 그 시대의 작가들의 상상력과 구성력이란 요즘의 기고, 뛰고, 나르는 어떤 작가 보다 고도화되지 않았을까. 거기다 오래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역사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니 고전이 된다는 건 아무 거나 되는 것이 아니겠지. 그 가치를 시력이 나빠지고서야 깨달으니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눈이 더 나빠지기 전에 읽어야할 책목록을 만들어야 한다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러다 나도 눈이 더 나빠져 보루헤스옹처럼 골로 가던가 아니면 신선이 되던가 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내가 그렇게 책목록을 만들고 죽을 때까지 실천한다면 지금부터 읽는 나의 책읽기는 역전의 책읽기다.
눈이 더 나빠지기 전에 읽어둬야 할 책으로 제일 먼저 고른 책은 <장 크리스토프>다. 중학교 무렵에 같은 반 아이가 이 책을 가지고 있어서 처음 알았다. 얼핏 베토벤의 생애를 다뤘다고 알고 있어서 마침 난 그때 예술가의 생애와 삶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언제고 꼭 한 번 읽어봐야지 해 놓고 세월이 이렇게나 많이 흘렀다. 당시로도 5백 페이지가 넘어 “억!” 소리가 나올 정도였는데 이 책은 두 권 다 합쳐서 그것의 3배쯤 된다. 물론 “억억!” 할 것 같지만 그러다 턱이 빠질지도 몰라 안으로 삼키고 그냥 읽어야겠다 생각했다.
이책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또 지금도) 만원이 넘는 가격으로 팔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 출판사에서 작년에 새판을 찍었는데 만원의 저렴한 가격으로 팔고 있다.
그런데 난 이책을 못 살뻔 했다. 사실 난 1권을 어제 늦게 Y 서점에서 샀는데 원래 예정대로라면 수요일 날 받아볼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다. 한 달 전쯤 그런 얘기를 했지만, 요즘 은근 나의 책 구입을 탄압하는 엄마 때문에 그것을 피할 수 있는 확실한 날이 수요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화요일 오후에 주문을 해야 하는데 그만 인터넷이 고장이 나 주문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되면 이것저것 행사로 그러모은 한 장에 천 원 하는 상품권 3장 중 하나를 그냥 날려버리고 만다. 물론 아직 2천원의 상품권이 남아 있으니 8천원에 사는 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잘 알지 않은가? 우리 같은 서민형 장서인들은 1천원에 웃고 우는 거. 이건 아무래도 이번엔 책을 사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구입을 미루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다. 인터넷을 고치고 다시 보니 사멸되었을 줄 알았던 상품권이 아직 유효했다. 게다가 오늘은 엄마가 병원을 가는 날이다. 이는 잘만 하면 엄마가 없을 때 책을 받을 수도 있다는 뜻. 그렇게만 돼 준다면.....
그런데 오전에 병원 가신 엄마가 오후 1시 무렵이 되자 돌아왔다. 아무래도 이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으려나 보다 했다. 그리고 나는 조금은 허탈하게 엄마가 옷을 갈아 입으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한 소리 들으려나 보다 했다. 그런데 또 이게 웬일인가, 그 절묘한 타임에 택배가 우리집 문을 두드리고 내 책을 두고 갔다. 당연히 엄마는 옷을 갈아입느라 물건을 받을 수 없었고, 나는 다롱이를 내 방으로 몰아넣고 냉큼 그 책을 끄잡아 들였다. 캬, 책 구입하기 정말 어렵다. 이번 주 초에 책을 받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절묘해지지 않아도 되는 건데. 이 정도면 나의 책 구입은 거의 전생의 업보요, 원죄에 가까운 일은 아닐까? 아무래도 전생에 엄마가 내 딸이었나 보다. 책을 무척 좋아하는. 그래서 내가 구박을 엄청 하지 않았을까? 오, 주여, 주님은 어찌하여 저를 시험하시나이까? 흑흑.
어쨌든 오늘도 무사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