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권유로 주일학교에 남기로 했던 그해 주일학교 예배에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예배 가운데 짧은 드라마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에 내가 투입이 된 것이었다. 그 일은 주일학교로서도 획기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때 내가 연극을 잘 알고 그 일을 한 것은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그런데 왠지 내가 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 이유는, 예전부터 습작을 하면 나는 도전하는 글마다 쓰다가 중단하곤 했다. 그게 너무나 괴로워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있어도 일부러 누르고 안 쓰곤 했다. 써 봤자 또 쓰다가 말 걸 써서 뭐하나 꾹꾹 눌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맡은 이상 해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글을 쓰는 성실함을 배울 수 있겠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 글을 쓰는 세번째 방법이 있다.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나를 몰아 넣어라. 

 

기자들을 보라. 그들이 마감 시간에 맞추기 위해 얼마나 피 말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지. 그들이 기사를 잘 쓰고 못 쓰고는 둘째 문제일 것이다. 어쨌든 시간에 맞춰 기사를 쓰지 않는가? 나에게도 그런 것이 필요했다. 연극 대본을 쓰는 일은 그것을 몸에 베게하는데 최적화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난 평소 글을 쓴다면 소설을 쓸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연극 대본을 쓴다는 게 조금은 아쉬운 일일수도 있겠지만 소설이나 희곡이나 글을 쓴다는 건 같은 일이고, 나중에 소설을 쓰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나는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그 일에 최선을 다했다.

 

물론 그때 그 일은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당시 그 일에 나 말고도 두 분의 선생님이 더 계셨는데 그들은 초반에 조금 하다가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난 그 일이 얼마나 재미었던지 힘든 줄도 모르고 했다. 무엇보다 연극 대본을 쓰면 원고료를 받았는데 나는 그때 비로소 알았다. 작가와 작가 지망생을 구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원고료를 받으면 작가인 것이고, 이걸 받지 못한다면 그건 작가지망생인 것이다. 그러니 난 이제 더 이상 작가 지망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내가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했는지 소개해 보겠다.

우선 내가 맡은 일은 목사님 설교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맞는 상황을 연극으로 표현해 줘야한다. 일종의 상황극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엔 굳이 결말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저 주인공이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고민하다가 끝을 내면 나머지는 목사님의 설교에서 답을 찾는 뭐 대충이런 형식이다.

 

그런데 목사님 설교가 돌아오는 주일을 기준으로 했을 때 보통은 수요일 정도에 알 수가 있다. 그럼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날은 목금 정도가 된다. 그 이틀 동안 그에 맡는 글감을 찾아야 한다. 이 글감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으로 빨리 찾으면 빨리 쓸 수 있지만 못 찾으면 그야말로 피가 마른다. 나중에 요령이 좀 생겼는데 그 무렵 시중에 <마음을 열어주는 101 가지 이야기>나 <내 영혼의 닭고기 스프> 뭐 이런 짧막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가 유행했었다. 그게 또 그런대로 목사님 설교와 매칭이 되는 부분이 있어 도움이 많이 되었다.

 

대본은 A4용지 3장을 넘지 않으니 분량 자체는 그렇게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것을 다음 날인 토요일 오후에 아이들과 연습을 해야한다. 하지만 워낙에 짧은 시간이라 연습이랄 것도 없었다. 그냥 동선을 잡는 정도였다. 그러면 아이들은 내가 써 준 대본을 집에 돌아가 밤새도록(물론 빨리 외우면 잠도 잘 수 있겠지) 외우고 다음 날 8시, 10시 두 번 있는 예배를 위해 아침 7시에 만나 다시 한 번 대사와 동선 체크하고 올라가는 그런 식이었다. 

 

앞서 나는 이 작업을 '피 말리는 작업'이라고 했는데 정말 피가 마른다면 그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은 피가 말라도 좋았다. 너무 대본이 안 써질 땐 컴퓨터 모디터를 창문 밖으로 내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하지만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그렇게 내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마다 짜릿한 쾌감이 있었고, 연극은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미친다더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다.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좋아했냐면, 애초에 목사님이 그러셨다. 많으면 한 달에 두 번. 그저 평균 한 달에 한 번만 해달라고. 그것을 나는 한 달을 4주로 잡았을 때 세 번까지도 올린 적이 있었다. 그러리만치 난 그 일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내가 뭔가에 쉽게 미치는 그런 열정적인 성격이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 일만큼은 열정을 바쳐서 열심히 했다. 

 

누가 나에게 지금 그때로 다시 돌아가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못한다고 할 것이다. 그때 내가 하나님께 영감을 달라는 기도를 참 많이 했었다. 목사님 설교는 수요일 날이면 나오지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이틀 정도지. 그 기도 밖에 무슨 기도를 더할 수 있었을까? 사막에 정자를 짓고, 외줄타기가 따로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를 생각하면 선생님을 믿고 밤새도록 대사 외우고, 주일 날 유일하게 늦잠을 잘 수 있는 날일텐데도 그것을 포기하고 새벽에 나와 준 아이들에게 진 빚이 많다고 생각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yrus 2017-05-26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대회 마감일 하루 이틀 전에 글을 써요. 처음부터 일찍 준비해야하는데, 다른 책들을 읽다보니 시간에 쫓겨서 글을 써요. 성공 확률은 계산해보지 않았어요. 오히려 상황이 쫓기고 있을 때 글이 잘 나오는 경우가 있어요. 물론, 당첨에 실패한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마감일 1~2주일 전에 준비하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해요. ^^

stella.K 2017-05-26 16:55   좋아요 0 | URL
아, 그런 게 있다더군.
왜 시험 공부도 시험 보기 바로 전이나 몇 시간 전이
가장 잘 된다잖아. 그걸 심리학 용어로 뭐라고 하던데...
궁하면 통한다는 뭐 그런 것과 비슷한 거지.
어떤 사람은 책을 일부러 도서관에서 빌려 보잖아.
반납일까지 읽어야 한다는 명분이 생기니까 게으른 사람에게
필요한 거지.
내가 한때 서평 이벤트에 목숨 걸었던 것도 그 이유고.
배운 도둑질이라고 아주 끊지는 못하겠더라.ㅋㅋ
 

 

지금까지 난 글을 쓰는 두 가지 방법을 얘기했다(하나는 글쓰기에 관한 책을 읽고 써 보는 방법. 문화센터나 창작교실 같은 곳에 등록하는 것).  세 번째 방법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세 번째의 방법을 말하기 전에 나의 이야기를 잠시해 볼까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그전에 여기에 잠깐 잠깐씩 얘기하기도 해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는 얘기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독서를 하기 시작했고 비슷한 무렵 작가의 꿈을 자연스럽게 갖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별다른 재주는 없었고 그나마 글 쓰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제도권 그러니까 무슨 백일장이나 글짓기 대회에서 입선을 해봤다던가, 하다못해 교지에 내 글이 실리는 그런 영광 한 번 누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늘 작가의 꿈을 가지고 있었고, 꿈이 그래서 그런지 주위에서 '너 글 좀 쓰네.'라는 말을 가끔씩 듣기도 했다. (그런 내가 제도권에서 놀지 못했다는 건 어찌보면 아이러니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춘기 시절 문학 소녀가 아닌 사람이 없고, 문학 소년이 아닌 사람이 없다고 그런 나의 꿈도 한때였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 나는 나의 인생 어느 한때 작가의 꿈을 버렸던 때가 있었다.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작가의 꿈을 접었는데, 하나는 어느 날 내가 어떤 책이든 한 번 이상을 읽지 않은 나를 발견했다. 그렇다면 다른 독자도 나와 같지 않을까? 독자들이 이 한 번 읽을까 말까한 책을 내가 작가가 돼서 쓴다는 게 별로 의미있어 보이지가 않았다. 또 하나는, 당시는 민주화 항쟁이 극에 달하던 때로 한다 하는 작가들은 하나 같이 참여 문학을 했다. 나는 그들이 왜 참여 문학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단지 이제 문학은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방황하지 않았다. 대신 어느 틈엔가 나의 의식에 훅하고 들어왔던 게 심리학이었다. 학교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공부를 잘 해 본적이 없으면서도 심리학 교수가 되는 건 어떨까 꿈꾸리만큼 심리학을 좋아했다. 하지만 난 엉뚱하게도 신학교를 들어갔고 대신 목회 상담학쪽으로 졸업 논문을 쓰고 간신히 졸업을 했다.

 

그 시절 이 분야가 너무 좋아서 당시 다니던 교회 청소년 상담을 자원 봉사하기도 했는데 진짜 상담을 했던 건 아니고 그냥 허울만 좋은 상담원 노릇만 했다. 졸업하고는 (지금의) 교회를 옮겼는데 이곳엔 따로 청소년 상담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주일학교 교사를 했다. 그것도 그 어렵다던 고등학교 1, 2학년 아이들이 다니는 부서에. (지금은 그게 중2로 낮아졌지만 내가 교사를 하던 시절은 그랬다.)  

 

2년 정도 교사를 해 보니 나는 가르치는데는 젬병이라는 것을 알고 그만 접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보통 교사를 안하겠다고 하면 주일학교는 적당히 밀당을 하다가 놔주는 것이 관례인데 뭐 때문인지 당시 담당이셨던 목사님이 나를 놔주지 않는 거였다. 나중엔 너무 내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전화대고 찔찔 울기까지 했는데 그러면서도 모르긴 해도 목사님이 이러실 땐 뭔가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중에 목사님이 1년을 제안하시길래 못 이기는 척 그러겠다고 하곤 1년을 더 주일학교에 있기로 했다.

 

어찌보면 난 그 2년 동안 나름 뭔가를 열심히(하는 척) 했던 것도 사실이다. 글 쓰는 것에 관심이 많았으니 아이들과 주보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고, 집단상담에서 인간관계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으니 목사님의 입장에선 내가 뭔가 쓸모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꿇기로 했던 그 1년이 나에겐 엄청난 변화의 계기가 될 줄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5-23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교내 글쓰기 대회 입상은 여러 번 했지만, 전국구나 지역구 백일장 대회에 입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stella.K 2017-05-24 14:14   좋아요 0 | URL
ㅎㅎ 이글 어제 별로 반응이 없어서 누가 댓글 다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네가 젤 먼저 달았네. 고마워.
사실 6월에 강연 하나가 잡힌 게 있어서 내용을 정리해 보고 있는 중이야.
와, 근데 교내가 어디냐?
말했다시피 난 교지에도 실리지 못했어.
그래서 글을 차분하게 잘 쓰시는구만.^^

cyrus 2017-05-24 14:28   좋아요 0 | URL
‘교내‘라면 초ᆞ중학교입니다. 초등학생 때 제일 자신있는 글짓기 대회가 독후감 대회였어요. 그때부터 리뷰 ᆞ독후감 쓰는 걸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

stella.K 2017-05-24 14:39   좋아요 0 | URL
그렇군.^^

페크pek0501 2017-05-23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계신 건가요?

‘참여 문학‘하면 저도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한때 소설에 국가를 상대로 데모하는 장면이라도 꼭 들어가야 하던 때가 있었죠. 현실 반영이라는 차원에서 그랬다기보다 정치적인 게 들어가야 소설답다고 인식되던 때였던 것 같아요. 무슨 유행처럼 모든 소설에 정치와 관련한 글이 들어갔어요. 그런 게 들어가지 않으면 수준 이하로 평가되곤 했었죠.

나중에 알았죠. 꼭 정치적인 게 들어가야 좋은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지금도 심리학에 관심 많아서 신간이 나오면 자세히 검색해 본답니다.

stella.K 2017-05-24 14:20   좋아요 0 | URL
아뇨. 저는 가르치는 게 젬병이라 벌써 그만뒀습니다.
제가 그 시절 주일학교 연장 근무한 것도 가르치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었어요.

그죠? 참여 문학이 그런 정치적인 것과도 관련이 있어요.
그 시절 문학이 죽었다고 보는 저의 시각이 틀린 것만도 아니죠?

예전에 심리학이 좋았을 때는 정말 신천지를 보는 것 같아 좋았는데
지금은 좀 시큰둥해요. 사람을 너무 수치화하고 정형화하는 것 같아서 좀...ㅠ
 

자신이 정말로 글을 쓰고 싶다면 이건 적극 추천할만 하다. 궁극적으로 글쓰기란 혼자하는 작업이긴 하지만 처음 글을 쓰는 사람은 혼자 쓰기란 쉽지 않다. 글쓰기에 관한 책을 보고 글을 쓴다는 것도(과연 있을까 모르겠다. 이건 참고서 같은 거 아니겠는가?) 여간 독한 마음 먹지 않으면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가장 효율적인 건 문화센터나 창작을 가르쳐 주는 학원에 등록하고, 워크숍 작품을 써서 내고 합평을 받아 보는 게 도움이 많이 된다. 물론 합평을 받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받아서 좋은 소리를 들으면 기분 좋은 일이긴 하지만 별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면 의기소침해 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좋은 소리를 듣건  안 듣건 간에 그것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나 같은 경우 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원래부터 작가의 꿈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참가한 워크숍마다(물론 몇 번 되지도 않지만) 그다지 나쁘지 않은 평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있다고 가장 마지막 참가한 워크숍 작품에서 참혹한 혹평을 받았다. 어찌나 창피하고 부끄럽던지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고, 결국 눈물이 질금 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지나놓고 생각해 보면 그렇다고 해서 나의 좋은 글쓰기 위한 노력이나 관심이 조금도 사그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자양분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말하려 하는 건, 그렇게 좋은 강좌를 들을뿐만 아니라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으라는 것이다. 그래야 정보도 공유하며 좋은 경험을 쌓아 나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동호회 활동도 권유한다)   

 

그러나 이것도 어느 기간 동안만 가능할 것이다. 결국 글쓰기란 혼자하는 작업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 내가 다닌 마지막 학원에서 함께 들었던 한 수강생은 그전에도 몇 번의 수강 경험이 있었고, 이번에도 또 다시 수강하는 거란다. 그러면서 그는 남의 워크숍 작품은 열심히 읽고 리뷰는 하면서 정작 자신의 작품은 낸 적이 없으며 따라서 누구에게 평가를 받아 본 적이 없다. 물론 그런 사람이 나중에 굉장한 작품을 낼 수도 있고, 시간 있고, 돈 있어 그런다는데 뭐랄 사람은 없겠지만 언제까지 그러고만 있을 것인가 의아스럽기도 했다. 내가 그 학원과 안녕을 고했을 때 듣기론 그 수강생은 다음 번에도 수강 신청을 했다나 할 거라나. 

 

물론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 보다 나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어느 한 군데 자신을 종속시키고 더 이상 성장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해 일견 안쓰럽기도 했다.        

 

지금까지 난 좋은 글쓰기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방법과 나의 생각들을 얘기했을 뿐이다. 어떤 방법이 좋은지는 각자가 알아서 찾아 갈 일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qualia 2017-05-20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stella.K 님 잘 모릅니다. 블로그 글도 거의 못 읽었어요. 하지만 stella.K 님 화통한 게 좋습니다. 뭐랄까 여장부 같다고 할까요. 저 같은 쫌팽이는 당당하게 자기 의견 · 속내를 털어놓는 화통한 성품이 부럽기만 합니다.

stella.K 2017-05-20 19:10   좋아요 0 | URL
ㅎㅎ 아유, 왜 그러십니까? 쑥스럽게...
뭐 가끔 그런 소리도 듣긴 합니다만 그런 사람이
취약한 것도 많죠. 뒤통수도 많이 맞고.ㅋㅋ

저도 님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만,
섬세하시고, 꼼꼼하신 분 같습니다.
저에겐 별로 없는 성격이기도 하죠.
앞으로 한 수 배우겠습니다.^^

cyrus 2017-05-21 1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가를 받을 때 적당한 비판(퇴고해야 할 부분을 알리는 것)은 받을만 해요. 그런데 비판이 너무 많은 것도 안 좋아요. 상대방이 자신의 글을 퇴고할 수 있도록 조언하는 일을 해본 적이 있었어요. 그 일을 계기로 글쓴이와 친해지게 됐어요. 그 친구가 저한테 하는 말이 제가 자꾸 퇴고 지적질해서 고칠 때마다 괴롭고, 글 쓰려는 의지마저 줄어들어서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그 말 듣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지나친 지적이 상대방의 능력 향상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다행히 그 친구는 지금 기자가 되었어요.

stella.K 2017-05-22 14:52   좋아요 1 | URL
와우, 누군지 좋은 친구를 만난 거네.
이 지적질이라는 게 사람이 받을만할 때 해야
서로 좋은 거지 상대가 그걸 받아들일만한 자세가
안 돼 있으면 못하는 거야.
그런데 지절질 하는 사람도 그래. 이 사람이 정말 상대방의 글에
대해 좋은 의도라면 모르겠는데
골탕 먹일려고 의도적으로 까는 사람 있거든. 그럼 정말 기분 나쁘지.
어떻든 둘 다 그 산맥을 넘을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아.
그걸 못 이겨내면 글 쓰지 말아야지.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게 되길 바란다. 그러나 그 첫 시작을 어떻게 해야되는지를 몰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누구는 '무조건 써라'고 말한다. 이 말은 솔직히 진부하다. 누구는 그러고 싶지 않아서 못 하나? 좀 다른 말은 할 수 없나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무조건 써라'는 말은 진부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말을 대체 할 다른 말은 나로선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건 글을 쓰겠다는 사람에겐 진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글을 쓰는 것을 너무 부담스러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 써야 한다는 부담을 버려야 한다. 즉 잘 써야 한다는 부담은 버리돼, 무조건 써야 한다. 그게 진리다.

 

1일 1페이지 정도는 누구나 부담없이 쓸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글을 쓰겠다는 사람에게 일기 쓰기는 권장사항인 것도 사실이다. 요즘엔 블로그나 SNS 활동들을 많이 하기도 하니 거기에 자신의 하루를 쓰고 피드백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그리고 요즘 시중에 글쓰기에 관한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있다. 어떤 책이 나와 있는지를 알아보고 그중 좋은 책을 골라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 좀 경계해야 할 사항이 있기는 하다. 그런 책을 사 보는 것은 좋긴 하지만 깊이 빠지지는 말라는 것이다. 만일 자신이 앞으로 글쓰기 강사가 되겠다고 한다면 물론 이쪽의 책을 할 수만 있으면 많이 구해 보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자신이 (좋은)글을 쓰는 것에 있지 그런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좋은 글은 결코 써 지지 않는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난 학교 때 공부를 그다지 잘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참고서를 습관적으로 많이 사는 나를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내가 왜 이렇게 참고서를 많이 사는 거지? 그뿐인가? 여기저기 과외 공부를 바꾼 적도 있었다. 연장을 잘 못 다루는 사람이 연장 탓 한다고 공부를 못하는 이유를 내 안에서 찾지 않고 참고서가 과외 공부 같은 외부적인 요인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그런 책을 읽는다고 해서 글을 저절로 잘 써 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책에 나를 가두고 있지 않은가 돌아보고 경계해야 한다. 중독성이 있기도 하고. 

 

그래도 아주 안 읽을 수는 없겠지. 나 개인적으로는 글쓰기 강사가 매뉴얼처럼 써 놓은 책은 별로 선호하지는 않는다. 그 보단 일선 현장작가들이 직접 부딪혀 가며 쓴 책들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김탁환이나 이승우 작가가 쓴 책은 그들이 소설을 쓰면서 겪고 깨달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써 놓기도 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세계적인 작가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도 빼놓으면 섭섭할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5-19 2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05-20 11:01   좋아요 0 | URL
저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뭔가 이 책엔 공부를 잘하게 만드는 비법이 있지 않을까?
그런 호기심에 사더란 말이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알멩이는 같은데
정리를 다르게 해 놓거나 아님 장식이 다른 정돈데
그땐 왜 그렇게 집착했는지 모르겠어요.ㅋㅋ

님도 좋은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7-05-21 1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쓰신 글에 제가 남긴 댓글에도 언급했지만, 상대방의 의견을 듣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상대방이 퇴고를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어요. 글쓴이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거든요. 그래도 진심 어린 조언이나 충고가 죽은 글을 되살릴 수 있어요.

stella.K 2017-05-22 14:53   좋아요 0 | URL
오, 그럼. 결국 그걸 잘 받아 넘기면 작가로 갈 수 있는 거지만
그걸 못 참아내면 다른 걸 찾아 봐야지.ㅎ
 

눈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안경을 마쳐야지 해놓고 해를 넘기고, 달을 넘기고 있다.

눈이 나빠지니 내가 앞으로 책을 몇 권이나 더 읽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뭐가 어떻게 될 것도 아니고 눈이야 노화에 따른 것이니 슬퍼할 것도 없다. 이 나이 먹도록 안경 안 끼고 살았으면 잘 산 거 아닌가.

 

작가 보루헤스옹은 그의 지독한 독서 때문에 시력을 잃었다. 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보루헤스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무슨 사고를 당하지 않고 또 혹사시키지만 않는다면 나의 눈은 나의 노화와 함께할 것이다.

 

하긴 보루헤스는 독서로 시력을 잃었지만 그 반대의 케이스도 있다. 중국의 어느 교수는 자기 집 부엌에까지 책을 쌓아놓고 해가 져 깜깜한데도 불을 킬 생각도 안하고 책을 읽었다고 한다. 모르긴 해도 다른 것을 할 때 해가 떨어졌다면 그도 어둡기 전에 불을 켜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런 어둠속에서도 책을 읽은 것을 보면 그건 확실히 무아의 경지였을 것이고, 그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능력일 것이다.

 

며칠 전, <생활의 달인>을 보니 순 옛날 방식으로 수의를 만드는 9순의 할머니가 소개되었다. 나이가 9순이니 눈이 얼마나 안 좋겠는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직도 누구의 도움 없이 손수 바늘귀에 실을 꿰어 바느질을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할머니는 며느리와 PD 셋 중 가장 먼저 바늘귀에 실을 꿰는 기염을 토하기까지 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사람은 어느 경지에 오르면 육체의 감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모르긴 해도 그들은 그 일만 잘 하지 않을까? 어둠속에서 책을 읽으라면 읽겠는데 바닥에 떨어진 밥숟가락을 찾으라고 하면 못 찾을 것이고, 9순의 할머니도 바늘귀에 실을 꿰라면 하겠는데 머리카락을 주우라고 하면 못 줍지 않을까?

 

어쨌거나 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니 그런 신선 같은 재주는 없을 것 같고, 이제부터는 (시간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눈이 더 나빠지기 전에 읽어야 할 책 목록이라도 만들어야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랬더니 (요즘 작가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요즘에 나오는 신간은 웬만해선 눈길이 가지 않는다. 사춘기 때 미처 다 읽지 못한 또는 이미 읽었더라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고전에 마음이 간다. 학교 때 고전을 읽으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자랐건만 그땐 정말 귀 밖으로 들었다. 그땐 세상에 읽을 책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케케묵은 고리짝 책을 읽으라는 건가 한심하게 들었다.

 

한다하는 독서 고수들은 말한다. 그런 책들은 적어도 200년 이상 시간을 견디며 살아남은 책들이다. 뭔가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그러니 고전을 읽으라고 일축한다. 그런데 이 시대 낭만 호사가 김갑수는 그의 책에서 고전을 아주 간단하게 정의했다. 재미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특히 제인 오스틴 같은 책은 너무 재밌다는 것이다. <작업인문학>에서). 과연 그도 그렇겠다 싶다.

 

적어도 200년 전, 사람들은 무엇으로 재미를 추구하며 살았겠는가. 뭐 사랑을 추구하며 산다지만 잘 알다시피 사랑의 유통기한은 6개월에서 길어야 1년 내외다. 스포츠도 내가 좋아야 하고 재능이 있어야 한다. 그 시절 볼만한 영화있었겠는가?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고 추구하는 존재라고 한다. 그러니 그것은 아무리 추구해도 물리는 법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순전히 상상력에 의존에서 썼을 테니 그 시대의 작가들의 상상력과 구성력이란 요즘의 기고, 뛰고, 나르는 어떤 작가 보다 고도화되지 않았을까. 거기다 오래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역사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니 고전이 된다는 건 아무 거나 되는 것이 아니겠지. 그 가치를 시력이 나빠지고서야 깨달으니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눈이 더 나빠지기 전에 읽어야할 책목록을 만들어야 한다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러다 나도 눈이 더 나빠져 보루헤스옹처럼 골로 가던가 아니면 신선이 되던가 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내가 그렇게 책목록을 만들고 죽을 때까지 실천한다면 지금부터 읽는 나의 책읽기는 역전의 책읽기.

 

눈이 더 나빠지기 전에 읽어둬야 할 책으로 제일 먼저 고른 책은 <장 크리스토프>. 중학교 무렵에 같은 반 아이가 이 책을 가지고 있어서 처음 알았다. 얼핏 베토벤의 생애를 다뤘다고 알고 있어서 마침 난 그때 예술가의 생애와 삶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언제고 꼭 한 번 읽어봐야지 해 놓고 세월이 이렇게나 많이 흘렀다. 당시로도 5백 페이지가 넘어 !” 소리가 나올 정도였는데 이 책은 두 권 다 합쳐서 그것의 3배쯤 된다. 물론 억억!” 할 것 같지만 그러다 턱이 빠질지도 몰라 안으로 삼키고 그냥 읽어야겠다 생각했다.    

              

이책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또 지금도) 만원이 넘는 가격으로 팔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 출판사에서 작년에 새판을 찍었는데 만원의 저렴한 가격으로 팔고 있다.

 

그런데 난 이책을 못 살뻔 했다. 사실 난 1권을 어제 늦게 Y 서점에서 샀는데 원래 예정대로라면 수요일 날 받아볼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다. 한 달 전쯤 그런 얘기를 했지만, 요즘 은근 나의 책 구입을 탄압하는 엄마 때문에 그것을 피할 수 있는 확실한 날이 수요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화요일 오후에 주문을 해야 하는데 그만 인터넷이 고장이 나 주문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되면 이것저것 행사로 그러모은 한 장에 천 원 하는 상품권 3장 중 하나를 그냥 날려버리고 만다. 물론 아직 2천원의 상품권이 남아 있으니 8천원에 사는 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잘 알지 않은가? 우리 같은 서민형 장서인들은 1천원에 웃고 우는 거. 이건 아무래도 이번엔 책을 사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구입을 미루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다. 인터넷을 고치고 다시 보니 사멸되었을 줄 알았던 상품권이 아직 유효했다. 게다가 오늘은 엄마가 병원을 가는 날이다. 이는 잘만 하면 엄마가 없을 때 책을 받을 수도 있다는 뜻. 그렇게만 돼 준다면.....

 

그런데 오전에 병원 가신 엄마가 오후 1시 무렵이 되자 돌아왔다. 아무래도 이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으려나 보다 했다. 그리고 나는 조금은 허탈하게 엄마가 옷을 갈아 입으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번에도 한 소리 들으려나 보다 했다. 그런데 또 이게 웬일인가, 그 절묘한 타임에 택배가 우리집 문을 두드리고 내 책을 두고 갔다. 당연히 엄마는 옷을 갈아입느라 물건을 받을 수 없었고, 나는 다롱이를 내 방으로 몰아넣고 냉큼 그 책을 끄잡아 들였다. , 책 구입하기 정말 어렵다. 이번 주 초에 책을 받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절묘해지지 않아도 되는 건데. 이 정도면 나의 책 구입은 거의 전생의 업보요, 원죄에 가까운 일은 아닐까? 아무래도 전생에 엄마가 내 딸이었나 보다. 책을 무척 좋아하는. 그래서 내가 구박을 엄청 하지 않았을까? , 주여, 주님은 어찌하여 저를 시험하시나이까? 흑흑.

 

어쨌든 오늘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4-20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이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입니다. 이 책의 글자 크기가 작아요. 이 책을 계속 보면 눈이 피로해요. 얇은 분량의 책을 밤에 읽어도 잠이 올 정도예요. ㅎㅎㅎ

stella.K 2017-04-21 14:24   좋아요 0 | URL
난 보고 싶어도 못 보겠구나.
몇년 전까지만 해도 누워서 책을 보기도 했는데
지금은 거의 못 보겠더군.
누워서 책 보면 눈이 더 안 좋아진다는 말도 있고 해서.ㅠ

cyrus 2017-04-22 16:42   좋아요 1 | URL
오랫동안 배 깔고 누워 있는 자세는 허리에 부담을 줘요. 그래서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어요. 그런데 문제는 목이 거의 책이 있는 아래로 고정되니까 목이 아파요.. 책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자세가 없어요.. ^^;;

stella.K 2017-04-22 18:02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보고 있는 걸 보면
집념이 대단한 거야.
그런데 뭘 해도 사람은 한 자세로 오래 있을 수 없는 것 같아.
편하게 누워서 TV를 보는 것도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게 마련이거든.ㅋ

moonnight 2017-04-21 0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이 더 나빠지기 전에 읽어야할텐데 하는 조급증이 제게도 있습니다. 지금껏 늘 시력이 좋았었는데 이제는 ㅠㅠ;;
장 크리스토프가 베토벤의 생애에 관한 책이었군요;; 저도 보관함에 넣습니다^^;
저는 요즘 택배는 소화전 안에 넣어(숨겨-_-)달라고 부탁드려요. 그렇게 겨우 잔소리를 면하게 되었답니다. ㅎㅎ;;

stella.K 2017-04-21 14:30   좋아요 0 | URL
오, 소화전!
거기도 책을 둘 수 있는 공간이 있나 보죠?
동사무소에서 여성들을 위한 사물함 대여를
해 준다는데 좀 알아보고 신청해 보는 건 어떨까요?

<장 크리스토프> 아까 오전에 조금 읽어 봤는데
재밌을 것 같더군요.
사실 베토벤의 생애를 다뤘다는 건 반은 맞고, 반을 틀린 말이어요.
거기에 작가 자신의 정신을 이상화했다는군요.
언제 다 읽을런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도 전 두꺼운 책을 선호하니 문제요.
문나잇님도 그러신가요?^^

북프리쿠키 2017-04-21 0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전을 읽다보니 자연스레 베스트셀러나 신간에 손이 덜 가는것 같아요.
전 ˝소설˝분야는 되도록이면 고전문학 읽을려고 합니다~텔라님 말씀처럼 재미도 있구요ㅎ

stella.K 2017-04-21 14:31   좋아요 0 | URL
쿠키님은 저랑 취향이 비슷하신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7-04-22 1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헷갈리네요. 제가 읽은 게 몬테크리스토 백작이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베에토벤의 생애를 다룬 것도 읽었는데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어요.
기억력도 노화되고 있겠지요. 이젠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에 자신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어요.

시력은 노안 안경을 사시면 해결됩니다. 글을 볼 때만 쓰시면 됩니다.

몰래 하는 사랑이 짜릿하다고 하는데,
책도 몰래 사야 하니 짜릿하시겠는걸요.
하긴 저도 책이 배달될 때 되도록 식구들이 없을 때 받고 싶더라고요.
또 책이야? 그럴까 봐서요.ㅋ

stella.K 2017-04-22 18:47   좋아요 2 | URL
몬테크리스토는 다른 건데요.
베토벤의 생애라면 장 크리스토프가 맞을 것 같구요.
그런데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릴만한 것 같아요.

ㅎㅎ 짜릿하진 않아요.
그런데 그걸 사랑에 비유하시다니 언닌 낭만이 살아있네요.ㅋ
사실 장 크리스토프는 오래 전부터 함 읽어야지 벼르고 있었어요.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다 싶더군요.
하긴 이미 사 놓은 책도 못 읽고 있고
그만 사야지 해 놓고도 사면 왜 그리 좋은지 모르겠어요.
이래서 쇼핑 중독 이해할 것 같아요.
아주 춥거나 아주 더우면 엄마가 외출을 잘 안 하시는데
그안에 열심히 책을 사 둘까봐요. 흐흐

2017-04-26 1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26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