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애거사 크리스티의 <사랑을 배운다>를 조금씩 읽고 있다.
어제는 주인공 어린 로사가 나이 많은 역사학자며 다소 괴팍한 존과 친구 아닌 친구가 되면서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걸 읽었다.
... 존이 말했다. "넌 책을 어떻게 읽지? 처음부터 쭉 읽니?"
"네. 교수님은 안 그러세요?"
"안 그래." 존이 대답했다. "나는 앞부분을 보고 요지를 파악한다음 끝부분으로 가서 결말이 어떤지, 작가가 뭘 증명하려고 했는지 보지. 그리고 그후에야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그가 어떻게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무엇이 작가를 그렇게 이끌었는지 살펴 봐. 그편이 훨씬 더 흥미진진하거든."
로라는 관심은 있지만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작가는 자기 책이 그런 식으로 읽히는 걸 바라지 않을 거예요."
"당연하지."
"저는 작가의 의도대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 존이 내뱉었다. "하지만 넌 빌어먹을 법률가들이 말하는 제2의 당사자를 잊고 있어. 독자 말이다. ...... 작가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책을 쓰지. 작가 멋대로. ...... 하지만 독자에게도 자기가 읽고 싶은 대로 읽을 권리가 있고, 그건 작가도 막을 수 없어."
"마치 싸우는 것 같은데요." ......
"난 그런 싸움을 좋아해." 존이 말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노예처럼 시간에 얽매어 살지. 시간의 순서 같은 건 아무 의미도 없는 건데 말이야. 영원을 생각한다면. 우린 얼마든지 시간 속을 내키는 대로 건너다닐 수 있어. 하지만 아무도 영원을 성찰하지 않지." (71~72쪽)
이 부분을 읽으니 문득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한 장면이 생각이 났다. 정말 해리(빌리 크리스탈 분)은 그 비슷하게 읽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는 목차를 읽은 후 바로 책의 맨 끝장을 읽는다. 결론이 끝에 나와 있는데 뭐 때문에 힘들게 처음부터 읽을 필요가 있느냐며 샐리와 옥신각신 하지 않던가?
꼭 그렇지 않더라도 우린 끝부분부터 읽으면 김이 빠진다고 해서 바득바득 처음부터 중간을 거쳐 끝장에 도달하려 한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요즘 붙들고 있는 책중에 용케 이런 순서대로 완독이 이르는 책이 얼마나 될까? 한 권을 온전히 읽기가 갈수록 어려워 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반드시 그런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작가가 그것을 원해서라기 보다 소극적이고 (여태까지 한 번도 그 룰이 깨진 적이 없는)객관화된 방식으로 읽기 때문은 아닐까? 난 일단 이 존 교수의 방법이 마음에 들었고 끝에 그렇게 말하는 것도 마음에 든다.
책에서 존은 매우 까탈스럽고 고집불통에 문제적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우린 또 그런 사람을 얼마나 싫어하는가? 생긴대로 사는 사람은 대체로 무난하지만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런 것처럼 책도 작가가 정해 준 방식대로 읽으면 지는 것이다.
독자여, 작가를 거슬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