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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는 참 외롭다
김서령 지음 / 나남출판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치과에 다녀오는 길에 오랜만에 커피숍에 들러
진하게 우려진 아메리카노와 샌드위치를 시켰다.
그리고 가지고 갔던 책을 몇장 넘겨 읽고 있을 무렵 무릎이 시림을 느꼈다.
반바지에 티 한장 걸쳤던게 화근이였다.
고속버스를 탈때도 얇은 담요는 꼭 챙겨다녔는데,
생각지도 못한 커피숍 방문이라 챙겨넣지 못했다.
'담요는 꼭 챙겨넣자' 라는 메모를 써넣을 무렵,
앞으로 가방안에 넣어야할 물품이
얼마나 많아지게 되는 것일까 하는 서글픈 생각이 스쳤다.
주위를 둘러봤다.
나보다 시원스런 복장의 남녀 커플들.
아이와 함께온 젊은 주부들의 모임.
사람들의 밝은 표정 속에
그 누구도 시린 무릎을 감싸는 이를 보지 못했다.
문득 나이가 든다는 것,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을 갖는다.
그것은 축복이 되는 것일까. 재앙이 되는 것일까를 생각해보다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게 되었다.
'젊은 날의 시간과 쉰에 다다른 현재의 내 시간은
밀도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2,30대의 시간이 실크올처럼 촘촘하게 흘러갔다면
현재의 시간은 성글게 짠 삼베같이 허술하게 직조되어 있다.
같은 면적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섬유의 올이 젊은 날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다. 전에는 한 시간 안에
100개의 씨줄을 직조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대략 5,60개밖에
짜낼 수 없다. 그러니 2,30대의 한 시간이 지금의 두 시간과 맞먹게 되고
시간의 속도가 두배쯤 빨라졌음을 황당하게 감각한다.'p125
'성글게 짠 삼베' 라는 표현에 시선이 멎는다.
실크올 같아야할 내 젊은 시간은 성글게 짠 삼베 처럼
엉성해지고 삭혀지는 느낌이 든다.
조금 더 지나면 두툼한 안경을 써야할테고
작은 글씨와 큰 글씨를 구별해서 읽어야 할테고,
간소하게 지녔던 젊은날의 가방은
세월의 묵직한 만큼의 무게를 달고 낑낑 대며 들고 다녀야 하리라.
생각만 해도 정말 서글픈 일이다.
내가 살수 있는날을 60살로 가정했을때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은 절반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나이가 든다는 것, 그것은 축복이라기 보다 차라리
재앙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어본다.
그러니 김서령 작가의 푸념어린 회한들은 비수처럼 날아들며
마음에 깊이 박혀버린다.
' 다시 젊어진다면 내 삶의 목표는 바로 저것에 두겠다.
그러나 다시 젊어질 일이 도대체 없다는 것은
이미 너무나도 명백하다.
이를 어쩌면 좋으냐. 매사 알고 나면 너무 늦다'p124
' 나이 들기 전에 책을 읽어라.
나이 들기 전에 먼 길을 여행해라.
쉰이 넘으면 효율이 절반으로 떨어진다.
그러니 그 이전에 충분히 해두어라!'
누군가 그러게 귀에 쏙 들어오게 충고만 해줬더라도!
그러나 그건 명백한 억지다.
내 귀에 대고 숱하게 경을 읽었던 사람들이 없었다고?
가만 꼽아보면 정다운 눈빛이 줄줄이 지나간다.
그들의 충고가 마이동풍으로 흘러간 건
내가 아직 시간을 감각하기엔 너무 젊었던 탓이렷다.
어느 재치있는 사람의 말대로
과연 청춘은 철없는 아이에게 내주기엔 너무 아까운 보물이였다.p126
올 해 연초에 세웠던 계획들만 되짚어봐도 김서령 작가와 다르지 않다.
'책을 많이 읽자''여행을 다니자''공부를 하자'
순례하듯 해마다 다짐하게되는 계획들이
끝끝내 회한이 되어 비수처럼 꽂혀 버린다면
그 아픔을, 그 후회를 어이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득만권서 행만리로(得萬卷書 行萬里魯)'
하겠다는 그녀의 다짐에 나도 가만히 읊조려 본다.
아니.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걸어 인생의 의미를 깨치겠다는
그녀의 포부를 가만히 수정해 본다.
살아오면서 지키지도 못할 무수한 계획들이
비수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실행할 수 있는 포부를 지금이라도 세워본다.
득천권서 행천리로! 천 권 책을 읽고 천 리 길을 걸으리.
처음 만나본 김서령 작가의 책 < 참외는 참 외롭다>은
펼쳐들때 부터 생경한 단어들이 쏟아져 나와
며칠을 물고 늘어졌다.
생경한 단어들이 입에 찰썩 달라 붙어
마치 대사를 치듯 몇번 읊조려 보기도
했다. 그리고 사소함 속에서 위대함을 발견해내는
그녀의 매서운 눈길이 노릇 노릇 발효된 글밥이
되어 마음에 와 닿았다.
백석 시인을 향한 마음이,
윤택수 저자 향한 어린날의 연정이.
깊은 시샘을 일으키기도 했다.
책을 좋아한다는것. 그것은 책을 넘어 저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임을 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런 열렬한 마음을 담아내지 못한
내 마음이 허술하게 느껴진다.
아직까지 부족하다. 많이 부족하다.
내겐 열렬히 사랑할 책이 필요하다.
그러니 읽고 또 읽자. 득만권서. 아니 득천권서로.
나이가 든다는 것,
그것이 추억을 향유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또 '득만권서'를 향해 나아가는 삶의 추진력이 된다는 것이라면,
그리고 세상 만물의 이치를, 사소함의 위대함을, 인생을, 삶을,
가족을 매서운 눈맛으로 밝힐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재앙이 아니요. 축복이라 그리 말해도 되는게 아닐까.
나도. 김서령 작가처럼 나이가 들고 싶다.
그녀 처럼 매서운 눈맛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딸과 아들에게, 때론 남편에게 이세상의 자잘한 일들이
결코 우리의 삶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것을 함께 이야기 나누며 그녀처럼 세월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전철을 탈때면 루쉰의 얄팍한 산문집을 들고 탄다.
몇달동안 책을 바꾸지 않는다.
반복해서 읽어도 새로운게 루쉰이다.
나는 그 이유를 정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철저하게 정직한 글을 쓰는 이에게는
괴로울 수 있지만, 읽는이에게는 싱그럽다.
다시봐도 새로운 힘이 느껴진다.'p331
' 정직하게 진심을 다해 관계를 맺어라!'
'돈을 모으느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라'
'공부의 즐거움을 깨달아라'
'오래된 물건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라'
'여행을 해라'
'모험을 겁내지 마라'
'물건에 치이지 마라'
'너만의 서재를 가져라'
'이삿짐에 책보다 옷가지가 많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라'p332
'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게서 점점 열망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원하는게 뭔지 모호해졌다. 통금, 순종, 방종 모두 해당사항이
없어졌건만 나는 여전히 동해행을 망설이기만 했다.
나는 어느새 걷는걸 두려워하는 사람이 돼 있었다.
내 무릎은 10분만 걸어도 끼익거리는 경고음을 울렸다.
이래서 7번 국도를 무슨 수로?
그 따윗 것 해봤자 무슨 소용인데? 자꾸 비웃고 도망치고 주저 앉았다'p417
' 책은 말하자면 한 인간의 생명을 종이 속에 흡착해 둔 물건이다'p199
' 인생의 숨은 메타포들은 제 몸으로 겪어낸 뒤에야 겨우 맥락을 읽힌다.
어려서는 알 수 없다. 안타깝게도'p180
' 새해가 밀봉된 시간으로 내 앞에 던져졌다. 8천 7백 시간이
압축된 꾸러미다. 이 선물은 포장 상태가 정연해서 흡사 1인분씩
따로 묶인 국수 다발 같다. 24시간 짜리 묶음 중 이미 나는 다섯
개를 풀어 헤쳐 소비했다. 아니 소비라는 말은 온당치 않다.
시간이란 국수 다발처럼 먹어치워 없애는게 아니라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내는 원재료에 가까우니
차라리 털실 뭉치 같다고 할까.
새 털실 꾸러미를 헐었으니
무얼 어떻게 짜야 할지 사방에서 궁리가 넘쳐난다.
새해 나의 계획은 간단하다.
너무 어려운 무늬를 짜 넣겠다는 욕심이
부질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단순한 무늬가 더 아름답다는 것도 깨달았다.'p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