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력

태양의 운행을 기준으로 한 현재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용되는 표준력으로 ‘그레고리력‘이라고도 한다. 약300년에 하루 정도의 오차만 발생할 정도로 정확하다. - P15

중국 고대 철학의 하나고, 십이지와 결합해서 달력이나 운세를볼 때도 영향을 미친 음양과 오행설을 합친 음양오행설.
음양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상반되는 음과 양 2개의 기운으로 성립한다고 보는 사상이다. 오행설은 만물은 목·화·토·금·수5원소로 성립된다는 사상으로, 각각의 원소가 소장을 반복한다. - P19

다양한 사물들이 오행의 성질에 해당한다고 여겨졌고, 아래의표에서 보는 것과 같은 특성이 있다고 한다. 목이 토가 되고,
토에서 수가 발생한다는 창조 사이클(상생)과 목이 불에 타서화가 되고 결국 토가 된다는 파괴 사이클(상)로 성립된다. 이것이 음양설과 결합되어 음양오행설이 되었다. - P21

농경과 자연이 낳은 자연 신앙과 풍속

태곳적부터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경 민족이던 일본 사람들은 자연 속에 사람의 지혜를 뛰어넘는 신이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연이 일으키는 은혜와 재해대한 대처 방법으로 신을 숭상하고 신에게 기원하여 풍년이 들면감사의 예를 다하면서 다음에도 풍작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의 삶이 반복되는 것처럼 이러한 기도나 감사도 생활 속에서되풀이되면서 지금까지 계승되어왔다. - P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통의 일본 성은 혼마루本(중심 성곽), 니노마루(제2성곽), 산노마루(제3성곽)의 3중 구조인데, 히메지성은 여기에 니시노마루(서쪽 성곽)와 데마루(방어 성곽)까지 더한 5중 구조다. 더불어완벽한 방어를 목적으로 들어선 많은 건물이 완벽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어 히메지성이 보유한 국보만 8채에다 중요문화재(우리로 치면 보물)는 74채에 이른다(성 안의 건물 대부분이 국보 아니면 보물인 셈이다. - P119

•창건 당시의 아스카데라는 지금처럼 작은 절이 아니었다. 사방 2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사찰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아스카데라 건설•에 백제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찰 건립 계획을 세운 소가 씨가 도움을 요청하자, 백제는 승려는 물론이고 건축과 토목기술자, 기와 장인, 화공까지 보냈다. 거의 ‘국가대표급 공사 팀‘을 보낸 것이다. 일본 국왕의 사찰도 아니고, 아무리 실세라지만 일개 귀족가문의 요청으로 이런 드림 팀을 파견했다는 것이 놀랍다.
- P130

더불어 아스카 문화가 백제의 강력한 영향 아래 생겨났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불교를 전한 것도, 최초의 사찰을 지어준 것도 백제였으니 말이다. 당시 일본의 기술 수준은 보잘것없었다. 지금은 터만 남은 아스카의 궁전들도 나무 지붕 건물이었단다. 그때까지 일본은 기와를 만들어낼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아스카데라는 일본 최 - P131

초의 기와지붕 건물로도 알려져 있다.
이렇게 여러 개의 ‘일본 최초‘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아스카데라는나라 시대 이후 잊힌 절이 되었다가, 가마쿠라 막부 초기에 벼락을맞고 불타버렸다(그러고 보니 오사카성 천수각을 불태운 것도 벼락이었다. 이렇듯벼락은 일본 옛 건물의 주된 화재 원인 중 하나다). 지금 보이는 건물은 수백 년뒤 에도 시대에 재건된 것으로, 규모도 모양도 분위기도 그 옛날의것은 아니다. - P133

일본 고대사의 핵심 인물, 1984년까지 발행된 1만엔권 지폐 속인물, 지금도 일본인이 존경하는 역사인물로 손꼽힌다는 쇼토쿠 태자가드디어 등장한 것이다(심지어 많은 학자는 쇼토쿠 태자가 섭정이 되는 593년•을 아스카 시대의 실질적인 시작이라고 본다). 이 중요한 인물에 관해서는 그가 세웠다는 ‘아스카 문화의 꽃, 호류지로 가서 이야기를 이어나가기로 하자. - P1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렇듯 오사카는 전성기를 맞았지만, 오사카성은 벼락을 맞아 천수각이 불타는 등 시련에 시달렸다. 소실된 천수각은 수백 년 동안방치되었다. 평화로운 에도 시대에는 난공불락의 성이 필요 없었던탓이다. 천수각은 에도 시대와 메이지 시대까지 지난 1931년이 되어서야 다시 지어졌다. 여기에는 당시 오사카가 도쿄를 제치고 명실공히 일본 제1의 도시로 올라섰다는 자부심도 한몫했다. - P92

쓰루하시 시장의 왁자지껄한 활력 뒤에는 80만 재일교포들의 고단했던 역사가 숨어 있다. 비극의 시작은 일제의 조선 강점이었다.
한반도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일본제국의 국민, 그것도 차별받는 2등 국민이 되었다. 일본 ‘본토‘의 1등 국민들이 몰려오자 식민지의 2등 국민들은 땅도 집도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야 했다.  - P109

이렇게 늘어난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자이니치조센징)의 수는 태평양전쟁 종전 당시 200만 명에 달했다. 해방 후 그중 140만 명가량이 조국으로 돌아갔지만, 나머지 60만 명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본에 남았다. 특히 군수공장이 몰려 있던 오사카에는 20만 명이나 되는 재일조선인이 남아 있었다. - P109

하루아침에 무국적자가 되어버린 자이니치를 향해 각종 차별이 시작되었다(사실은 차별하기 위해 무국적자로 만든 것이다). 의료보험이나 연금에 가입할 수도, 공무원이 될 수도, 취직할 수도, 심지어 집을 임대할수도 없었다. 자이니치의 역사는 ‘차별을 없애기 위한 투쟁사‘라 해도과언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진전이 있었으나 일본에서 자이니치로 사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 - P1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기서 잠깐, 일본과 백제의 관계를 알아보고 넘어가자. 기원전 - P79

300년 무렵 도래인이 일본에 문명을 전해준 이후 한반도와 일본은활발히 교류했는데 그 중심에는 백제가 있었다(일본에 처음 한자를 전해준 왕인 백제 사람이다). 당연히 일본 조정에 친백제계 세력이 생겨났고 사이메이 덴노 또한 친백제계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파견된 총 4만 명의 일본군은 백강(지금의 금강으로 추정)에서 나당 연합군과맞붙었지만 참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많은 백제 귀족이 일본에 망명했고, 이들 덕분에 일본 사회는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 P81

도쿠가와의 에도 시대에 오사카는 ‘천하의 부엌‘으로 불리며 전성기를 맞았다. 전국에서 생산한 쌀과 특산물, 다양한 상품들이 오사카에 모였다가 에도로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물자의 이동이 주로 강과바닷길을 통했기에 ‘물의 도시‘라는 별칭도 붙었다. 오사카阪: 큰 언 - P83

라는 이름이 생긴 것도 이 시기였다.
‘천하의 부엌‘이라는 별명은 ‘맛있는 음식이 많다‘는 의미보다는
‘천하를 먹여 살릴 만큼 물산이 풍부하다‘는 뜻에 가깝다. 에도가 정치의 중심이라면 오사카는 일본 최고의 경제도시였다. "모우카리맛카?"(벌이는 좀 위) 하는 오사카 특유의 사투리) 인사말이생겨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 P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를 바탕으로 메이지 정부는 법률, 교육, 금융, 군대, 교통부터 옷과 음식 등 일상생활까지 서양식 근대화를 추진했다. 헌법을 만들고의회를 구성하는 등 덴노 중심의 근대국가 체제를 갖춘 일본이 가장먼저 한 일은 해외 침략이었다. 이들이 따라 배운 국가들이 모두 서양 제국주의 국가였으니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 P57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 경제의 황금기를 가져왔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전쟁을 하는 동안 일본은 전쟁 물자를 만들어 팔았으니까 - P57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끝이 보이지 않는 대공황을 탈출하기 위해 일본이 선택한 것은 전쟁이었다.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태평양전쟁(1941)을 연달아 일으키며 일본은 전쟁에 올인했고, 결과는 파국이었다. 전쟁 말기의 도쿄 대공습으로 10만 명,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수십만 명의 일본 민간인이 죽었다. 마지막까지 덴노를 지키기 위한 ‘옥쇄 작전‘(후퇴 없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작전이 펼쳐진오키나와에서는 전체 인구 중 4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은 일본인뿐 아니라 아시아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재앙이었다.  - P59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멈췄던 일본의 공장은 한국전쟁의 군수물자를 대기 위해 다시 가동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후에도 일본에서는 해마다 10퍼센트 이상 경제가 성장하는 ‘진무경기‘가 이어졌다(진무는 일본의 첫 덴노로, 우리로 치면 단군 같은 존재다. 즉 ‘진무경기‘란 ‘단군 이래 최대 호황‘과 같은 뜻이다). 일본의 고도성장은 도쿄 올림픽(1964년)과 오사카 엑스포(1970년)를 거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 P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