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원래 우격다짐보다는 대화와 협상을 좋아하는 천상민주주의자였다. 자신은 민주주의자가 확실한데 너희 엄마는 고집 센 것으로는 공산주의자, 맘대로 하는 것으로는 자유주의자라고 아버지가 우리 앞에서 엄마 흉을 본 적이 있다. 공산당과자유당을 번갈아 오가는 엄마인지라 이름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만만치 않게 나왔다. - P21

"분필가루는 이제 그만 마실란다."
그러고도 아버지는 시내 학원가에서 몇 년을 더 ‘분필가루‘를마셨다. 이제 그조차도 그만두려는 것이 분명하다. 아니, 이미그만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도 용돈 타 쓰는 일을 삼가야하리라. 무엇보다 내 나이 스무 살이 아닌가. 부모의 도움 없이스스로 살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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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곤 해도 불은 쬐지 마시게 눈사람이여

야마자키 소칸 - P121

소리로 죄다 내질러버렸구나 이 매미 허물

마쯔오 바쇼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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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것을 빼더라도 「닮은 방들」은 매력적이다. 최근 이 단편을 다시 읽고 두 번 놀랐는데, 하나는 40년 전에 수록된 이 단편 속 풍경과 2000년대내 데뷔작 「노크하지 않는 집 속 현실이 여전히 비슷하다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감히 견줄 바 못 되나그럼에도 불구하고 「닮은 방들」의 이야기가 훨씬 생생하고 젊게 느껴졌다는 거였다.  - P180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끝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경청이,
공감이 아슬아슬한 이 기울기를 풀어야 하는 우리가 할 일이며, 제도를 만들고 뜯어고쳐야 하는 이들역시 감시와 처벌 이전에, 통제와 회피 이전에 제일먼저 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 P269

그리고 문학이 할 수 있는 좋은 일 중 하나는타인의 얼굴에 표정과 온도를 입혀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니 ‘희망‘이란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용기있는 사람들이 발명해내는 것인지도 모르리라.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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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노래

창문 가까이 댓잎을 희롱하는 바람 소리에
너무나도 짧았던 선잠의 꿈이었네

쇼쿠시 공주 - P87

드넓은 하늘 가리킨 그 사람의 손가락 끝엔
달도 눈도 꽃들도 가을 단풍도 있네

카라쯔마루 미쯔히로 - P91

사랑 노래

너무 그리워 님 계신 쪽 하늘을 바라다보니
안개를 헤치고서 봄비만 내리누나

후지와라노 토시나리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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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수록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쥐게 된답보다 늘어난 질문이 많다. 세상 많은 고통은 사실무수한 질문에서 비롯된다는 걸, 그 당연한 사실을글 쓰는 주제에 이제야 깨달아간다. 나는 요즘 당연한 것들에 잘 놀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려 한다. - P124

그러니 만일 제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린 제게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지금 네가 있는 공간을,
그리고 네 앞에 있는 사람을 잘 봐두라고. 조금 더오래 보고, 조금 더 자세히 봐두라고. 그 풍경은 앞으로 다시 못 볼 풍경이고, 곧 사라질 모습이니 눈과마음에 잘 담아두라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을 만난대도 복원할 수 없는 당대의 공기와 감촉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 P133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책을 읽을 땐 시간이든다. 하지만 그 시간은 흘러가거나 사라질 뿐 아니라 불어나기도 한다. 위에 김숙년 할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독서 중에는 시간끼리 접붙어 현재의 크기가 늘어나는 일이 적지 않다. 김연수 선배는 그렇게 생긴 공간의 너비를 나무 안듯 팔로 재어 그 ‘폭‘
을 우리에게 넘긴다. 문장 가까이서 볼 부비고 껴안는 대신 몸으로 잰 ‘품‘을 건넨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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