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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키 문구점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평점 :
문구점만큼 학창시절의 추억이 각인된 장소가 또 있을까 싶다. 이 소설은 문구점을 운영하면서 편지를 대필하는 이색적인 스토리다. 가나가와 현 가마쿠라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츠바키 문구점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실제 있는 장소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수국의 계절이라는 6월, 지난번 도쿄 여행을 갔다가 가마쿠라를 돌아본 적이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수국절로 유명한 메이게쓰인, 아담하고 수수한 가마쿠라 역 등 실제 지명을 언급하고 있어서 여행의 추억이 떠올랐다. 직접 밟지 못하고 스쳐간 곳의 지명이 나오면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화자인 아메미야 하토코는 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서도를 배우고 대필업을 물려받았다. (‘비둘기’란 뜻을 가진 이름 때문에 애칭 포포로 불려왔다.)
예전에 행정 업무를 대행 해주던 사무소를 본 기억이 떠올랐는데, 편지 쓰기를 대행하는 대필업 이라니. 어떤 사연들을 대필하는 걸까, 흥미로운 이야기에 금세 몰입하게 된다.
지인들에게 이혼 보고를 대신 해달라는 의뢰, 친구와 절연하기 위한 편지, 돈을 빌려 달라는 사람에게 거절의 편지 등 사연도 가지가지다. 평범한 내용의 그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는 의뢰인도 있다. 또 너무 악필이라서 걱정인 의뢰인, 천국의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기다리는 노모를 걱정하는 아들도 찾아온다. 참 난감할 것 같은데, 하나하나씩 처리해 나간다.
직접 상대를 만나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편지로도 쓰기 곤란한 상황을 대필가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전 같으면 대필이란 건 사기라며 선대의 할머니에게 대들고 반란을 일으켰던 포포는 아직 20대 후반의 아가씨 임에도 제법 당차게 해결해낸다.
편지를 쓰는 과정도 대충이라는 게 없다. 우선 의뢰자의 주소, 성명 등 신분을 확인하고 편지를 받는 사람과의 추억, 살아온 내력을 듣는다. 의뢰자의 모습, 인상 등을 종합하여 그에 어울리는 필기구, 편지지, 우표까지 세심하게 고려하여 선택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의뢰자의 마음이 최대한 전해지도록 온전히 그 당사자가 되는 것이다. 마치 배역을 맡은 배우가 연기에 몰입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곤란한 일을 대신 처리해 주고 의뢰인이 후련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한 보람을 느낀다.
엄마의 얼굴도 모르고 할머니와 자랐던 포포는 엄마를 보고 싶어 하거나 불평하지는 않는다. 할머니에게 강요당한 지난날의 청춘을 보상받기 위해 외국을 방랑했던 포포가 어떻게 대필업을 물려받을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볼 수 없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일까. 편지 대필을 의뢰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웃과 교류를 하며 행복을 느끼면서도 화해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할머니를 떠올리며 눈물을 쏟아내는 일이 잦아진다.
이웃의 남작으로부터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서히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다. 혼자서 이만큼 컸다고 생각했는데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던 어느 날 이탈리아 청년이 찾아와 할머니와 펜팔친구였던 시즈코의 편지 보따리를 주고 간다. 포포의 이야기가 가득 담긴 123통의 편지를 모두 읽어나간다. 할머니에게 외국에 펜벗이 있었다는 건 들은 적도 없었는데...
거기서 낯선 할머니를 만난다. 평소에 보여준 적이 없는 할머니의 모습이 들어있었다. 편안하거나 심각한 편지에도 모두 포포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교육을 위해 엄격한 것도 좋지만 사랑한다는 표현을 자주 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뒤늦게 깨닫고 보고 싶고 화해하고 싶지만 할머니는 이 세상에 안 계시다.
‘선대와도, 스시코 아주머니와도 이제 절대로 만날 수 없다. 언젠가 다시 만나서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희미한 기대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 무리한 일이라는 걸 오늘, 모리카게 씨를 보고 깨달았다. 나도 선대가 없는 세계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P306)
알고 보니, 아픈 과거를 안고 있는 사람은 포포만이 아니었다.
여러 사연을 갖고 문구점을 찾는 사람들, ‘묻지마 살인’으로 아내를 잃은 큐피의 아빠도 이웃들과 그 아픔을 나누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도 할머니의 사랑으로 자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처음으로 할머니에게 편지를 쓰며 철없던 지난날을 반성하고 화해한다.
이제 가마쿠라는 수국의 계절이랍니다.
그러나 수국은 꽃(정확하게는 꽃받침입니다만)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이웃에 사는 바바라 부인이 가르쳐주었어요.
바바라 부인은 여름이 되어도 수국 꽃을 자르지 않고,
그대로 겨울을 보냈답니다.
그동안 시든 수국은 초라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그 시든 모습이 또 그렇게 청초하고 아름답더군요.
그리고 꽃뿐만 아니라, 잎도 가지도 뿌리도 벌레 먹은 흔적조차도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분명 우리의 관계에도 의미 없는 계절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모리카게 씨에게 프러포즈를 받았답니다.
펜팔 친구의 아빠예요.
어쩌면 나도 당신처럼 내가 낳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길을 선택할지도 모릅니다.
주후쿠사의 정원, 예뻤어요.
칭얼대는 나를 업고 당신은 그 정원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당신 등의 온기를 오랜만에 떠올리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마워요.
그때 하지 못한 말을 보냅니다.”(P310-311)
좀처럼 편지 쓸 일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어서인지 편지를 소재로 한 이야기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누구나 과거의 아픔을 하나씩은 품고 사는 것 같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이웃과 교류 하면서 성숙해가는 포포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장인정신으로 가게를 이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반영한 듯, 이 소설에서 대필업을 설정한 소재는 사라져 가는 감성의 향수를 불러일으켜주었다. 손님을 맞이하고 차를 끓이고, 편지를 구상하고 써 내려가는 모습이 영상처럼 그려진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묵향을 맡으면서 글씨를 써내려가는 포포가 멋져 보이기도 했다. 역시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고 살아가는 존재인가보다. 가마쿠라 구석구석을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가마쿠라, 문득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