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아빠는 입을 열지 않고 일할 수 있다. 여기서 아빠는 공격을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빠는 동물들과 같이 살면서 땅을 경작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빠는 자신을 보호해주는 이 야생 환경에 이제 적응했다. - P29
떠나기 전에 어머니는 냉장고 속 물건들을 보여주며 도시로 다시 가져가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녀는 이 집이 매우마음에 들었으며 벌써 그리워지고 있다고 말한다. 아마 불안할 때나 바쁘게 일할 때 이곳이 생각날 거라고 말한다. 깨끗한 공기, 언덕, 해질녘에 붉게 빛나는 구름. - P30
그리고 나는 손에 든 책을 보고야 비로소 종일 나를 사로잡은 깊은 상실감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집을 잃어서도, 이웃을 잃어서도 아니었다. 우리가 정말 상실한 건 결국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될지 몰랐던 우리 자신이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 - P142
그러다 어느 순간 지수의 눈이 차분하게 빛났다. 그간 고민해온 문제의 답을 얻은 얼굴이었다. 지수는 자신이 이 집 말고또 갈 데가 있음을 깨달았다. 거기 수호가 있다는 것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만날 방법이 있다는 데 작은 기쁨마저 일었다. - P281
그러자 어디선가 방금 전 낙숫물에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이 집에 일부러 흘리고 간 단어마냥 툭툭. 안 된다고, 그러지 말라고, 부디 살라고 얘기하는 물소리가. 지수의 두 뺨 위로 빗방울 같은 눈물이뚝뚝 흘러내렸다. - P294
직장 일로영혼이 어둑해지거나 인간에게 자주 실망할 때면 혼자 이국의낯선 도시를 검색해보곤 했다. 태블릿 피시와 다정히 얼굴을맞댄 채 열대지방 햇볕 쬐듯 전자파를 쐬었다. - P50
실은 적는다기보다 그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동작이었다. 중간에 글씨를 자꾸 틀려 만족할 만한 모양이 나올 때까지 종이를 몇 차례 구겼다. 그러자 새삼 이 나라 사람들, 이걸로 수백 년간 뭔가 읽고, 쓰고, 기록했겠구나, 거기 내가 모르는 삶도 많이 담겨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81
나무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멀리서부터 신선한 커피 향이 오대표를 졸졸 따라오다 어느 순간 공기 중에 확 퍼졌다. - P27
실제로 이십여 년간 이연이 여러 인물에게자신의 몸을 빌려주며 깨달은 사실은 단순했다. 그건 ‘한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해와 갈등이, 드라마가 생겼다.
이제 이연은 착한 사람보다 성숙한 사람에게 더 끌렸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 P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