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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수업 천양희 : 첫 물음 ㅣ 작가수업 1
천양희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3월
평점 :
이 책은 ‘다산책방 작가수업’ 시리즈 중 하나인 천양희 시인의 산문집이다. 우리 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한국 대표 작가들의 문학적 체험과 삶을 담은 산문선 이라고 한다. 《도시락 편지》의 작가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천양희 시인은 이 책으로 처음 만난 셈이다. 세상에나. 나의 친정엄마와 비슷한 연배의 시인이었다. 1965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정원 한때」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등이 있고 산문집 《직소포에 들다》, 《시의 숲을 거닐다》 등이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1부 첫 물음이 내 문학의 ‘첫’이었다 2부 계속 써라! 뭔가 멋진 것을 찾을 때까지 3부 시는 나의 생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 수업’이라는 테마로 짜여진 소제목에도 문학을 향한 열정과 절실함이 느껴진다. 천생 시인이었다. 등단 50년이 넘은 것에 비하면 그다지 많은 작품을 낸 건 아니었다. 어쩌면 시인의 완벽주의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시를 사랑하는지 시인이라는 직업에 얼마나 자부심이 큰지 ‘시는 나의 생업’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말에 큰 울림과 공감대가 생겼다. 나야말로 책 읽고 글을 쓰고 공부하는 일은 나의 ‘본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인도 이렇게나 독서를 열심히 하는구나 놀랐다. 뭉클한 감동을 주는 문장에 포스트잇을 다닥다닥 붙이고 언급해준 책을 메모하며 읽었다.
천양희 시인이 문학의 ‘첫 길’이 생긴 것은 초등학교 때 작문대회에서 뽑힌 동시를 보고 “너는 앞으로 시인이 될 거야”라고 했던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 덕분이었다. 그와 더불어 책을 좋아하고 상상력과 호기심이 많은 문학소녀의 꿈을 고이 간직하며 오직 한 길만을 걸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를 쓰는 것이 내 운명일까? 생각하다 보면 운명을 걸지 않았다면 시가 재미없었을 것이라던 박용하 시인의 말이 생각날 때가 있다. 그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말을 가지고 작업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며 팔자는 끌로 파도 파지지 않는다고 하니, 시 쓰는 일을 내 운명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문학이 ’성격의 힘‘으로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성격의 힘이 바로 운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학은 결국 자기 구원을 위한 글쓰기다.’(p84)
‘시인정신은 평면에 굴복하지 않는 나무의 수직성과 같다. 어떤 훌륭한 시인이 있다면 그 시인의 시를 본받을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을 오랫동안 옷처럼 입고 살았다. 속에서는 불꽃을 피우나 겉으론 한 줌 연기로 날려 보내는 굴뚝의 정신. 세찬 물살에도 굽히지 않고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정신, 속을 텅 비우고도 마디가 굵어져도 굽어지지 않고 꼿꼿하게 푸른 잎을 피우는 대나무의 정신, 폭풍이 몰아쳐도 눈비를 맞아도 독야청청하는 소나무의 정신이 시인의 정신이라 믿으면서, 시마(詩魔)에 끄달리면서 궁하게 견뎌온 것이다.(p103)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어느 인생이 평탄한 꽃길만 펼쳐지겠는가. 시인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평생을 좋아하는 시를 지으며 살았지만, 사람으로 인해 깊은 고통을 겪었다는 얘기가 행간 곳곳에 들어있었다. 시의 정신으로 똘똘 무장한 시인이었지만 죽을 결심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산으로 들어가고 작은 새싹이 움트는 생명을 보며 마음을 돌리기도 했다. 시인은 요즘 시인들의 안일함을 비판하며 쓴소리도 한다. 쉽게 쓴 시는 독자와 소통이 될지는 몰라도 시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므로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소통보다는 공감할 수 있는 시여야 한다고 했다. 좋은 시를 쓰지 않고도 ‘살아남아’ 있고 ‘정신이 빠져도’ 살아남아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까. 어느 분야의 글쓰기든 읽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천양희 시인은 ‘천 개의 시를 쓴 후에야 명시를 알게 된다’고 했다. 젊어야 젊은 시를 쓰는 것은 아니라는 말도 했다. 시인에게는 나이가 있지만 시인이 쓴 훌륭한 작품에는 나이가 없는데도 원고 청탁이나 문학상마저도 자꾸 젊은 쪽으로 기울어가는 현실을 꼬집는다. 시를 쓸 때는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이미지가 선명해지려면 소리를 듣는 것보다 사물을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식이 달라지고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시는 ‘설명이 아니라 표현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소설 작법에서도 본 내용인 것 같다.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그려지듯이 묘사를 해야 한다고.
‘시를 쓸 때 우선 본다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이든 보아야만 느낄 수 있고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읽는 것과 같은 것이다. 책을 볼 때 읽는다고도 하고 본다고도 한다. 책을 읽고 느낄 수 있어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p191)
왜 시를 쓰느냐고 물으면 주저하지 않고 ‘잘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단다. 시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지만 오로지 시를 쓰는 동안에만 행복했다. 가장 힘들었을 때는 아파서 시를 쓰지 못할 때라고 했다. 시와 소통할 때가 가장 덜 외롭고 시 외의 어떤 삶도 시인에게는 의미가 없다고 했다. 천양희 시인의 작가수업을 읽으며 요즘 시와 문학에 뜻을 둔 사람들은 얼마만큼 그것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노시인만큼 운명처럼 여기며 절실하게 이 길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진심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오늘날은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이고 글이 아니라도 미디어 영상 등 즐길 거리가 넘친다. 작가나 작가 지망생이 읽는다면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며 문학의 ‘정신과 태도’를 배울 수 있고 동기부여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