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26
에밀리 디킨슨 지음,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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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먼과 더불어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불린다는 유명한 시인임에도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처음 만났다. 버지니아 울프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시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양장본 겉표지의 하늘거리는 커튼이 드리워진 창가의 작은 공간이 왠지 마음에 든다. 그 공간에서 에밀리 디킨슨은 밤을 새워가며 시를 썼을까. 이 시집에 수록된 시에는 제목이 없다. 창작 연도 순서로 번호를 붙였다고 한다. 보통 존슨 넘버(Johnson Number)라고 한다는데 독자가 읽을 때 적당한 제목도 지어보고 상상하며 읽는 재미가 있다. 위대한 이 여성 시인의 시를 잘 모르지만, 재미와 강한 인상을 주었던 몇 편의 시를 내가 느낀 그대로 해석해 보려 한다.

 



36 눈송이

 

춤추는 눈송이를

실내화를 신고 도시로 뛰어내리는 눈송이를 세다가,

그 반란자들을 표현하려고

연필을 집어 들었네.

눈송이는 점점 더 신이 나 춤을 추었고

내가 점잖은 척하길 포기하자,

한때 품위를 지키던 내 열 발가락이

지그*를 추려고 늘어섰네!(p18)

*지그:(jig) 4분의 3박자의 빠르고 경쾌한 춤.

 


어렸을 때 보았던 눈 오던 날의 풍경이 바로 소환되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마루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끝도 없이 쏟아지던 눈. 하나도 같은 크기의 눈송이가 아니었다. 크고 작은 하얀 솜털 같은 구름 같은 눈이 하염없이 쏟아지는 모습은 너무나 경이로웠다. 이리 튀고 저리 튀고 마치 춤추듯이 내리던 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눈을 반란자로 표현했나. 화자의 상상력이 미소를 머금게 한다. 이런 광경을 보며 가만히 앉아 그림이나 그리고 있을 수 없었겠지. 신나게 춤추는 듯 보이는 눈을 보며 춤이라도 추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황이다. 잠깐이나마 동심의 세계로 초대해 준 시였다.

 



269

언제 고난이 - 끝날지 정해 주세요-

그래야 사람들이 견딜 수 있어요!

얼마나 피를 흘려야 하는지 정해 주세요!

생명의 주홍 핏방울을 얼마나 많이 흘려야 하는지-

수학을 다루듯이

영혼을 다루어 주세요!

 

얼마나 많은 시대를 견뎌야 하는지- 알려 주세요-

그래야-불만 없이-고통을 견딜 거예요-

해가 질 시간을 시시각각 표시하는-

노동자처럼- 고통스러워도- 노래를 부를 거예요!(p58)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간다. 개인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에 고난의 크기와 수용하는 태도는 각자 다를 것이다. 가족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벼운 고통도 있겠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걷는 듯 힘든 시간을 겪기도 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세상에서 내 고통이 제일 크다는 것. 이럴 때 그 고통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있다면 덜 힘들 것이다. 노동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노동자가 하는 일이 힘들어도 시간이 정해져 있기에 견딜 수 있다. 정확한 학문인 수학처럼 영혼을 다루어 달라고 말한다. 시인은 이 시를 왜 쓰게 되었을까. 자신의 고난을 이기려고 썼을까. 아니면 고통받는 이웃을 지켜보다가 이 시를 썼을까. 어느 편이든 인간애가 느껴진다. 노골적으로 고난이 끝나는 시간을 정해 달라고 할 만큼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이 시를 읽기만 해도 고통이 저절로 가뿐해질 것 같은 시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그저 배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통받는 다른 이웃과 나누려고 궁리한 끝에 이런 시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시인의 통찰력과 위트에 감탄하게 된다.

 


 

327

눈이 멀기 전에는

나도 눈이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보고 싶었다-

다른 식으로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오늘-

하늘을 볼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내 몸이 너무 작아, 심장이

터져 버릴 것이다-

 

초원을- 볼 수 있고-

산들을 볼 수 있고-

모든 숲들을- 무한한 별들을-

정오에 내 유한한 눈으로

보듯이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내려오는 새의 동작을-

석양으로 물든 호박색 길을-

내가- 원할 때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의 충격으로 죽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무모하게

태양을 바라보지만-

나는 영혼만 유리창에 두는 편이-

더 안전할 것 같다-(p81~82)

 



눈이 멀기 전에는 무엇이든 볼 수 있었다. 가족의 얼굴, 집안의 물건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와 꽃들 하늘과 구름도.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떤 일로 눈이 안 보이게 되었나 보다. 당연히 보여야 할 것들이 아무것도 안 보인다. 다른 사람들처럼 다른 식으로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냥 건성으로 보고 지나치는 게 아니라 따뜻한 시선으로 보면서 말도 건넬 수 있겠다. 사물을 관찰하며 어떤 영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 경지는 꿈도 꿀 수 없는 지금 볼 수 있다는말을 듣기만 해도 심장이 터져버릴 만큼 행복할 것 같다. 그만큼 간절하다. 뭔가를 잃은 후에야 우리는 그것을 절실하게 그리워한다. 그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내가 가진 것을 떠올려 보자.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 많은지.

 

 


421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얼굴에 매력이 넘친다-

숙녀는 그 매력이 사라질까 봐

감히 베일을 들추지 못한다-

 

망사 사이로 자세히 살핀 후-

베일을 들까 하다- 포기한다-

직접 보면- 베일 쓴 모습에

만족했던- 욕망이 사라질까 봐-(p102)

 



베일을 쓴 여인의 모습은 그 자체로 신비롭다. 감추고 싶은 비밀이 드러날까 봐 또는 수줍은 마음에 베일을 들까 말까 망설이는 것일까. 마치 거절 받을까 봐 겁나서 청혼을 주저하는 연인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요즘처럼 무례가 넘치는 시대에는 오히려 그리운 장면이다. 사람을 대할 때 한 번이라도 상대방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지녔으면 좋겠다. 베일을 쓴 숙녀가 조금 망설이고 주저하듯이 한 박자 느리게 하면 불협화음도 줄어들 것 같다.

 



677

살아 있는 것은- 힘이다-

존재- 자체가-

더 유능해지지 않아도-

충분히- 전지전능하다-

 

살아 있고- 의지만 있으면 된다!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더라도-

창조주인- 신만큼-

유능하다!(p169)

 


아무리 큰 고통의 시간을 지나는 중이라 해도 언젠가는 다 지나간다. 절망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도 결국은 끝난다. 위대한 선지자들은 항상 노래했다. 살아 있음은 축복이라고. 아무리 초라한 인생이라도 죽은 사람보다는 산 자가 낫다. 유능해지지 않더라도 살아 있다는 그 자체로 승리자다. 살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또 새로운 길이 펼쳐질 것이다. 유한한 인생이라는 걸 명심하고 주어진 삶을 힘껏 살아볼 일이다.

 

 


 

1263

책은 어떤 군함보다

우리를 먼 나라로 데려가고

질주하는 시 한 쪽은-

가장 가난한 사람도

돈 걱정 없이 이 마차를 탈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을 태우는 마차 삯은 얼마나 싼지.(p218)

 


책을 예찬하는 문장을 만나면 늘 반갑고 설렌다. 책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여행할 수 있고 좋아하는 저자와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영혼을 온전히 갈아 넣은 책 한 권으로 우리는 많은 지혜를 배운다. 리베카 솔닛이 도서관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성지이며 세상을 통치하는 지휘소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한 권의 책이라도 아니 한 줄의 문장이라도 더 읽으려고 애써야겠다.

 

 


 

1659

명성은 곧 치울 접시에 담긴

잘 상하는 음식

손님에게 한 번만 내놓지

두 번은 내놓지 않을 음식.

 

남은 부스러기를 까마귀가 살펴보더니

비웃듯 깍깍거리며

그 음식을 지나쳐

농부의 음식 쪽으로 간다-

사람들은 그 음식을 먹고 죽는다.(p236)

 


1763

명성은 벌이다

노래하고-

침을 쏘고-

, 날개도 가지고 있다.(p247)

 



명성에 대한 두 편의 시다. 누구나 명성을 얻기를 바란다. 성공하고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명성이 언제나 정직하게 성취한 것일까. 누군가를 착취하고 괴롭혀서 얻은 명성도 있을 것이다. 그런 명성은 주변 사람을 아프게 하는 독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벌은 같은 곳에만 머물지 않듯이 이꽃 저꽃으로 날아다닌다. 명성도 마찬가지다. 혼신의 노력으로 쌓은 명성이라도 그 사람의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면 세상이 그를 끌어 내린다. 명성을 곧 치울 접시에 담긴 잘 상하는 음식이나 날아다니는 에 비유한 시인의 통찰력이 번뜩인다.

 



19세기 영미문학의 대표적 시인 가운데 하나인 에밀리 디킨슨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시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깊숙이 파헤친 작가라는 평을 받는다. 사후 처음 90년 동안 알려진 그녀에 대한 대중적인 이미지는 수줍음이 많고 집 밖을 나가지 않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디킨슨을 연구한 여러 비평가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택한 재능 있는 시인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시 선집을 읽고 나니 전통시와 다른 독특한 리듬과 구두법이 가미된 독창적인 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인간의 내면 감정에 대한 시가 많아서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시도 많았는데 자주 소리 내어 읽어보고 음미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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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6-08-29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휘트먼요.
저의 초기 인터넷 활동명이 ‘대로의 노래‘였지 뭡니까.

에밀리 디킨슨은 직접 구운 빵을 바구니에 담아서는
동네 아이들에게 부탁해 건너 마을 친구에게 전해주곤 했다던데
사실 여부는 장담을 못드립니다.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도 그렇게 전해주었다더군요.
이 역시 전해들은 말이고, 사실 여부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왠지 그녀라면 충분히 그랬을 것만 같습니다.

시인이자 철학자라고 늘 생각했지요.
오랫만에 반가운 에밀리 디킨슨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모나리자 2026-09-01 12:38   좋아요 1 | URL
네에.. 휘트먼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으시군요. 차트랑님.^^
저는 아직 읽어야 할 작가 무궁무진하네요.
에밀리 디킨슨에 대한 일화도 잘 알고 계시군요. 디킨슨은 참 다정한 시인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를 통해서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고요.

어느새 9월이 왔네요. 정말 시간은 얼마나 빠른지요.ㅎ
게으르게 지내다 보니 시간이 정말 유수와 같다는 걸 느끼곤 합니다.
한결 시원해져서 살맛 나는 요즘이네요. 9월에도 편안하고 건강한 시간
보내시길 바랄게요. 함께 화이팅입니다. 차트랑님.^^
 
니체의 초월자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철 편역 / 히읏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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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의 타성이 고개를 내밀 때마다 니체의 책을 펼친다. 니체의 말은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다. 이미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평범한 진리 같은 것이어서 무한 공감하며 읽어나가다 보면 긍정의 마음이 차올라 알 수 없는 의욕이 되살아난다. 인생을 살아가는 일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인간관계는 점점 냉정해지고 비교와 경쟁이 만연한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그래서 위대한 철학자 니체의 말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니체는 서두에서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고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를 넘어 자신을 다시 빚어내야 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그것이 자기 극복이며 그 과정을 거쳐 도달하는 인간상이 바로 초월자(Übermensch)’라고 했다. 초월자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두려움과 타성, 편안하고 익숙한 것을 뛰어넘는 모든 인간을 뜻한다는 얘기다. 우리 보통 사람도 노력 여하에 따라 초월자가 될 수 있다는 말에 왠지 위로와 힘을 얻는다. 본문 내용은 1장 인간, 너무나 인간적인 존재 2장 내면의 길을 걷는 자 3장 초월자의 길(Übermensch의 탄생) 4Amor Fati-고통까지 사랑하라 네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 실려있는 내용이 모두 좋았지만 특히 강렬한 인상을 준 몇 가지 문장을 되새겨 보려 한다.

 



승리는 재능의 것이 아니다. 재능은 빠르게 빛날 수 있으나 오래 타오르지 못한다. 승리는 인내의 것이다. 고통을 견디고 시간을 견디고 불안을 견디는 자만이 결실을 본다. 인내 없는 결실은 없다. 버티는 자는 쓰러지지 않는다. 버티는 자는 끝내 도착한다. 버티는 자는 결국 이긴다. 인내는 삶의 가장 큰 무기다.’(p23)

 



흔히 재능이 있어야 승리한다고 믿는다. 눈부신 성공을 거둔 이들을 보면 그들이 처음부터 부자였거나 재능이 뛰어났기에 그런 성공을 거두었겠지 생각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 고통과 불안함 속에서도 꾸준하게 실천하고 인내하는 시간을 견뎠기 때문에 얻은 결과물이다. 차근차근 노력해서 얻으려 하기보다는 더 빨리 성공하고 싶다는 조급함이 성공의 길을 가로막는지도 모른다. 성공이란 자신의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을까. 오늘 하루를 어떤 루틴으로 살아야 하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문장이었다.

 



삶은 직선이 아니다. 우회와 지연, 반복과 모순으로 가득하다. 한쪽에서는 만족을 얻지만 다른 쪽에서는 좌절을 맛본다. 같은 사건 속에서도 기쁨과 슬픔이 뒤섞이고, 욕망과 환멸이 교차한다. 그 모순된 경험과 깊은 시련이야말로 우리가 성장하는 토대다. 단순히 기쁨만 얻고 적당한 고통만 얻었다면 성숙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흔들 만큼의 큰 고통이 찾아와야 내가 바뀐다.’(p72)

 



이 문장처럼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면 절대 탄탄대로만의 삶은 아니었다. 구부러진 길도 걸었고 어두운 터널을 걷는 것 같은 시절도 있었다. 물론 행복한 날이 더 많지 않았을까. 엄청난 시련이라고 할 정도의 일은 아직 경험하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할까. 그때그때 맞이한 일을 어떻게든 해결하며 살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 인생이란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했던가. 시련과 고통을 불행이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 삶에 한 번쯤 맞이해야만 하는 손님으로 여기고 대응해나간다면 힘든 순간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은 피할 수 없고 도망칠 수 없다. 결국 어떻게든 해내야만 한다. 피할수록 육체의 병으로 오든, 관계의 파탄으로 오든, 내면의 공허로 오든 결국 그 무게는 반드시 되돌려 받는다. 그 무엇이 되었든 도망치지 말라. 피하지도 말라. 삶이 맡긴 무게를 그대로 들어 올려라. 운명을 피하면 벌을 받듯 책임을 버리면 고통을 짊어지게 된다. 삶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게으름이다.’(p105)

 



내 삶에서 가장 시간적으로 여유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 직장생활을 하며 바쁘게 살 때는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고 하루 종일 책만 읽고 공부만 하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정작 그럴 수 있는 환경이 되었는데 이렇게 게으르게 살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나태하게 보내고 있으니 정말 아이러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겨 쉬엄쉬엄하자며 휴식 모드를 취하고 안주하다 보니 어느새 게으름의 타성에 젖어 살고 있었다.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분명히 짧을 텐데 아직도 게으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을 만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가장 많이 할 수 있는 시기에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니. 훗날 후회 하나라도 줄이려면 내게 주어진 황금 같은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겠다.

 



자신이 된다는 것은 정직해지는 일이다. 세상의 기대에 맞추지 않고 자기 존재의 진실에 맞추는 것이다. 자신이 된다는 것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매일 새로 자신을 발견하는 행위에 가깝다. (중략) 그 누구의 삶도 아닌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 때가 되지 않았는가. 세상이 옳다고 말하는 길이 너의 길이 아닐 수 있다. 타인의 평가, 세상의 기대, 살아온 환경, 이 모든 것을 제외한다면 지금 네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너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p212)

 



니체의 철학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남의 눈치를 보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과 자기 주도성을 가지고 당당하게 나아가는 삶이야말로 바로 초월자의 삶이다. ‘자신이 된다는 것은 정직해지는 일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완성된 상태는 아니며 매일 새로 자신을 발견하는 행위에 가깝다고 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하며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일은 얼마나 짜릿한 기쁨일까. 그런 시간은 자신에게 가장 정직한 시간일 것이다. 이런 일은 게으름 속에 빠져 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계속 배워야 한다고 했다. 늦었다고 투덜댈 일도 아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 나를 가장 살아있게 하는 일을 상기하면서 다시금 힘을 내야겠다. 지금까지 게으르게 지낸 시간은 내 건강을 위해 썼다고 치부하면 된다. 이런 핑계를 대서라도 다시 시작할 계기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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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정원 - 2025 제19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주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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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수상작품을 읽게 된 건 실로 오랜만이다. 벚꽃이 피던 4월에 읽기 시작했는데 6월 중순이 되어서야 마칠 수 있었다. 김유정 문학상 수상작인 이주란의 <겨울 정원>과 후보작 다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수상작을 포함하여 인상적이었던 후보작 한 편의 감상을 얘기해 보려고 한다.



<겨울 정원>은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마당 있는 집에서 나무를 심고 꽃들을 가꾸며 살고 싶다는 로망이 있다. 텃밭을 일구고 정원 일을 하다가 힘들면 낮잠도 자고 나만의 작업실에서 글을 쓰면 좋겠지, 상상도 해본다. 소설 속의 주인공 혜숙도 정원을 좋아했다. 막내 언니까지 다 떠나보낸 60세의 혜숙이 친구의 배려로 정원이 있는 주택에 살게 된다. 혼자 오랫동안 살다가 독립해 나갔던 딸 미래가 다시 집에 돌아오고 활력이 생기는 듯했다. 모녀의 생활은 단출하고 소박하다. 혜숙은 오피스텔 청소 일을 하고 미래는 소설을 쓴다. 어느 날 미래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고백하더니 그 사람과 첫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고 흥분했다. 행복해하는 딸을 보며 혜숙의 마음은 조금 동요가 이는 듯했다. 큰글자도서 모임에서 만난 사람과 1년 넘게 교제하며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었는데. 혜숙은 딸 미래에게 생겨난 그 마음이 내게도 다시 찾아올까 못내 아쉽고 슬퍼지는 것이었다. 화자인 혜숙의 차분하고 절제된 감정 묘사에서 어떤 연민을 느끼게 했다. 속마음을 딸에게 털어놓고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면 덜 슬펐을까.

 



김성중의 <새로운 남편>은 지금 우리 앞에 바짝 다가온 AI 시대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화자는 열린 가족 문화 조성을 위한 인공지능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프로젝트를 담당하면서 알게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프로젝트는 쉽게 말하면 인공지능 남편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화자는 새로운 남편으로 부르기로 한다. 결혼 재교육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하면서 중증의 돌봄 중독, 동반 의존증을 보이는 기혼 여성이 대상이며 내담자에게 소개하고 체험해 보게 하는 내용이다. 인공지능 남편은 프로테시스(prothesis)’ 장치 즉 문제적 남편을 치우고 그 자리에 가져다 놓은 보철물이자 전기신호다. 실제 남편과 똑같은 외형과 목소리를 하고 있는데 공격적인 말투나 통제적인 잔소리가 거세된 이빨 빠진 호랑이정도로 바뀐 모습이고 스트레스가 없는 환경 속에서의 의사소통, 이것이 핵심이다.

 



몇 명의 내담자가 체험한 인공지능 남편 이야기는 참 흥미로웠다. ‘나쁜 점이 거세된남편이었지만 원래 남편과 똑같은 모습으로 바꿔버렸다는 점이다. 육체가 없는 홀로그램과 지내면서 원래의 남편과 똑같아지다니.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진리를 증명한 셈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어떤 것에 중독이 된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중요한 일을 넘기고 시간을 낭비하고 결심해 놓고 지키지 않고 넋을 잃고 작은 일에 분개하기도 한다. 이런 타성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야 하는데.

 



자기 인생을 살라고? 그 여자들한테 물어봐. 자기 인생이라는 게 원래 있었는지 말이야. 그녀들은 남편에 관해서는 많은 정보가 있어. 언제 격분하는지, 어느 때 달아나야 하는지. 모르는 건 자신에 대한 정보야.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무얼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지……고립 속에서 의무가 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루틴이 이 자리를 잡은 거야. 노예를 풀어주고 자유롭게 살아보라고 하면 그 노예가 어디를 기웃거리겠어?’(p59)

 



화자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자신을 향해 말한 외침이다. 대개의 여성의 인생이란 거의 비슷하지 않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었다. 요즘 그야말로 AI가 초호황의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산업 로봇은 물론이고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까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머지않아 가정에서도 인간과 로봇이 공생하는 시대가 온다고 한다. 이런 소재의 소설까지 나오는 걸 보니 인공지능 시대가 마냥 두려운 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이란 흥미롭고 경이롭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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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투자의 기쁨 - 89세 현역 트레이더 시게루 할아버지의 흔들리지 않는 투자 철학
후지모토 시게루 지음, 오정화 옮김 / 다산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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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관련 방송을 보다가 알게 된 책이다. 저자는 89(2025년 현재) 현역 데이트레이더인 후지모토 시게루 할아버지다. 19세에 주식투자를 시작하여 70년이 되었다는데 그동안 모은 자산이 무려 180! 요즘 주식투자를 한답시고 정신적으로 힘든 내게 많은 위로와 용기를 준 책이다. 책 제목처럼 주식투자가 기쁨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2월 말 미국,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을 단행한 후 주식시장은 폭락과 폭등을 거듭하며 요란한 변동성 속에서 공포스럽고 불안하기만 하다. 이 책을 읽은 계기로 앞으로는 좀 더 즐거운 주식투자를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다고 투자의 비법을 알려주는 책은 아니다. 저자가 주식투자를 하면서 일상을 어떻게 보내는지 그의 루틴과 태도를 있는 그대로 알려주는 내용이어서 더욱 유익했고 재미있었다.

 



본문 내용은 1. 열아홉에 투자를 시작해, 어느덧 702. 80개 종목을 월 60억 원으로 트레이딩 3. 시게루 할아버지의 ‘1:2:6’ 법칙 4. 오르면 팔고 내려가면 산다 5. 데이트레이딩은 최고의 두뇌 트레이닝 다섯 가지 이야기가 들어있다. 본문에 앞서 시게루 할아버지의 ‘5가지 투자 기술이 소개되어 있는데 정말 놀랍다. 먼저 새벽 2시에 일어나 매매 종목을 선정하고 차트와 사업보고서를 보며 종목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등 그날의 거래를 기록하고 반성한다고 했다. 거의 펀드매니저나 다름없는 치열한 일상에 놀랐고 그렇게 부지런한 습관으로 복리의 자산을 일굴 수 있었구나, 감탄했다.

 



시게루 할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반려동물 매장에서 일하다가 알게 된 손님 덕분에 주식투자를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증권사 직원이 거래소의 입회장에서 손으로 사인을 보내야 매매가 성립되던 시절이었다고 해서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60이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컴퓨터로 주식투자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주식시장의 변천사를 몸소 경험한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내용도 있지만, 매도 타이밍과 매수 타이밍을 잡는데 테크니컬 분석 방법을 설명하는 부분은 좀 어려웠다. 나도 부지런히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역시 70년 동안이나 주식시장에서 살아남은 고수답게 전문적인 내용도 들어있다.

 



흔히 주식투자는 장기투자가 답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시게루 할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사고팔고 하는 데이트레이딩으로 180억 자산을 일구었다. 매달 월급이 들어오는 직장인이라면 주식을 계속 사서 모으는 식으로 묻어두는 투자 방식이 적당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데이트레이딩으로 수익을 늘려가는 방법이 낫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데이트레이딩 고수답게 데이트레이딩의 네 가지 매력을 알려주었는데 매우 공감할 수 있었다. 잠깐 소개해 보면, 자신의 실력을 시험할 수 있고 장기투자보다 이익을 더 얻을 수 있고 중장기 보유 리스크를 피할 수 있으며 시세 동향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에 읽은 단타 트레이더의 말이 생각났다. 주식으로 묶어두는 것이 오히려 리스크가 크고 그렇게 묶어두면 평가금액만 올랐다 내려갔다 한다는 말이. 요즘 내 투자 상황이 딱 그렇다. 여러 종목을 가지고 있는데 요즘 같은 폭락장에는 모두 동시에 떨어져서 파랗게 질려버리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게루 할아버지의 투자 방식은 정말 간단하다. 오르면 팔고 내려가면 산다고 말했다. 수익도 단 5엔만 올라도 판다고 해서 놀랐다. 어떻게든 고점에 팔려고 애를 쓰다가 그나마 번 수익을 지키지 못하고(제때 팔지 못해서) 날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욕심을 부렸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그걸 몰랐다니. 약간의 수익에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소박한 마음이야말로 오랫동안 주식시장에서 살아남은 비결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워런버핏과 비교하며 겸손해하면서도 앞으로도 눈을 감는 날까지 계속 주식투자를 하면서 자산을 늘릴 계획이라고 말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늘어나는 숫자를 보는 것이 기쁘다고 했던 워런버핏의 말이 떠올랐다. 지진과 블랙먼데이, 리먼 쇼크를 겪었고 버블 붕괴로 80억을 잃은 적도 있었는데 이에 낙담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만의 투자를 계속하여 성공한 시게루 할아버지의 성실함과 특유의 낙관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주식투자에 입문한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투자자의 자세도 배우고 위로와 용기를 얻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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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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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너무 뒤숭숭하고 불안하다. 폭사, 궤멸 등 거칠고 원색적인 언어들이 아무렇지 않게 미디어를 강타하는 요즘이다. 4차산업혁명의 꽃이라는 AI를 전쟁에 활용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인간이 만든 문명의 이기를 사람을 살상하는 데 사용하다니. 섬뜩한 공포감으로 두근두근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느릿느릿 이 시집을 읽어나갈 때만 해도 참 평화로운 세상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이란 공습으로 온 세상은 살얼음판이 된 듯하다. 계엄 후유증으로 힘들었던 날들이 겨우 진정되었나 싶었는데 이제는 힘의 논리로 한 나라를 파괴하고 수많은 초등학생이 죽었는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한 권력자의 모습을 보며 모골이 송연해진다. 무엇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다시 시집을 들었다. 예전부터 낯익은 제목인데 박 준 시인의 꽤 오래전에 나온 첫 시집이었다.

 



오랜만에 시집을 읽었고 박 준 시인의 시집은 처음 만났다. 시를 자주 읽지 않아서 그런지 시는 늘 어렵게 느껴진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나 싶기도 하고 이건 무슨 의미일까 하는 시도 있다. 어떤 시인이 시는 읽는 독자의 것이라는 말, 즉 읽는 사람 마음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면 된다는 말에 용기가 생긴다. 짧은 시도 있고 산문시도 있는데 박준 시인의 시는 그리움과 다정함이 묻어났다. 오래전 추억이 눈앞에 어른거리기도 했다.

 



어제는 책을 읽다 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은 글귀를 발견했다 대화의 수준을 떨어뜨렸던 어느 오전 같은 사랑이 마룻바닥에 누워 있다

(생략)

미인을 생각하다 잠드는 봄날, 설핏 잠이 깰 때마다 나는 몸을 굴려 모아둔 열()들을 피하다가 언제 받은 적 있는 편지 같은 한기를 느끼며 깨어나기도 했던 것이었다

(p41)-<미인처럼 잠드는 봄날> 중에서

 


봄날 낮잠을 잔 것일까. 미인은 예전의 연인이었을까. 어느 봄날 책을 읽다가 좋은 글귀를 발견했고 미인과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린다. 잘 진행은 되지 않은 모양이다. 대화는 엇나갔던 것 같고 둘의 마음도 그랬나 보다. 화자는 자신의 마음을 미인에게 분명하게 전하지 못하고 뜨뜻미지근하게 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선지 자꾸만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미인 때문에 늘 손발이 뜨겁다고 느꼈다. 그리고 언젠가 받은 편지가 떠올랐고 서늘한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버린 것이다. 늘 지나고 보면 아쉬운 일 투성이다. 그래도 되새길 추억이 있다는 건 우리를 설레게 하고 살고 싶게 만들지 않는가.

 



골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본 골목은, 왼편 담벼락과 오른편 옹벽처럼 닫혀 있다 막 올려다본 하늘이 골목처럼 어두워지고 있다

(p66)-<모래내 그림자극> 중에서

 


고등학교 시절 이 시의 묘사와 똑같은 골목을 걷다가 검고 음흉한 사람과 마주치고 소스라치며 달아난 적이 있다. 쫓아올까 봐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 시절엔 그런 사람이 어디든 있었다. 구부러진 골목길이 운치는 있지만 탁 트인 대로를 걷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이 시의 화자는 어두워지는 저녁에 친구들과 그림자극을 하며 놀았던 추억을 묘사한 것 같다. 자신의 몸보다 훨씬 길어 보이는 그림자. 내가 걸으면 계속 따라오는 그림자. 왠지 누가 쫓아오는 것만 같은 그림자. 점점 어두워지는 골목. 무서운 마음을 쫓으려고 노래를 부른다. 울지 않으려고 하나같이 고음(高音)으로 소리내어 노래를 불렀다고 화자는 회상한다. 내가 걷던 그 골목을 문득 걷고 싶어진다. 아마 벌써 사라지고 없겠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머리맡에 있던 초코파이 상자를 품에 안은 일로 그날을 기억합니다


한 여덟 시간 만의 공복이었을까요 상자의 절취선을 뜯어올라가면 으드드득 열두 개의 검은 달이 떴더랬습니다(p102)-<희망소비자가격> 중에서

 


, 이런 제목으로 시를 지을 수 있구나. 과자 포장지에 쓰여 있는 희망소비자가격. 어린 시절 무엇이든 귀하던 시절 과자도 귀한 거였다. 아마도 기억에 초코파이를 처음 먹었던 게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까만 동그라미 안쪽에 들어있는 흰색은 크림처럼 녹는 것도 아니고 씹는 느낌도 특이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맛은 좋았지만 생전 처음 먹어보았으니 뭐라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미묘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먹은 초코파이는 그 옛날의 맛과 식감이 전혀 아니었다. 처음 먹어본 처음 가져 본 그 무엇인가는 우리를 그 시절로 데려다주고 그날을 기억하도록 도와준다. 지금도 우리는 그 무엇엔가 의미를 붙이며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오랫동안 기별이 없는 당신을 생각하면 낮고 좁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울음이 먼저 걸어나오더군요(p105)-<해남으로 보내는 편지> 중에서

 


시의 첫 행이다. 이 시도 헤어진 연인을 생각하며 쓴 시 같다. 해남으로 떠난 후 오랫동안 연락이 없는 그 사람이 얼마나 야속한 마음이 들었을까. 그렇다고 먼저 연락할 용기는 없다. 그저 답답하고 서러운 마음뿐이다. 그 마음을 낮고 좁은 책꽂이에 꽂혀 있는책과 동일시하며 자신도 답답한 마음에 울음이 터진다고 표현한 시인의 통찰에 감탄하게 된다. 시를 읽는 기쁨은 이런 것인가 보다.

 



문명도 발전도 좋지만 사람들이 조금 느리게 살려고 노력하면 좋겠다. 앞만 보고 가려 하지 말고 옆도 뒤도 살피며 걸었으면 좋겠다. 나 혼자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더불어 살아갈 때 위안을 얻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 존재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꼭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소중한 생명을 살상하는 전쟁은 함부로 벌이지 않을 텐데. 영원히 살 것처럼 함부로 행동하는 이가 너무나 많다. 시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간이다. 지금 우리 세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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