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쓰기의 유혹 - 에코의 즐거운 상상 3
움베르토 에코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5년 9월
평점 :
2011년 10월 23일, 카페 과제로 쓴 글입니다.
선생님이 패를 깠다. (‘까셨다’는 아무래도 이상하니까..)
선생님의 의중을 적중하리란 야무진 꿈은 꿔보지도 않았지만, 당황스럽다.
그러니까 일종의 블러핑으로 보인다.
에코라는 이름은 쓰지 말 것.
책의 구절은 인용해도 상관은 없지만, ‘에코’라는 단어는 쓰지 말 것.
어떤 이탈리아 학자 혹은 어떤 소설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봐주겠음.
(기본적으로는, 이 책을 모티브로, 에코와는 아무 상관없는 글을 쓰는 연습임.)
나는 진짜 에코와는 아무 상관없는 글을 2편이나 썼다.
그러면서도 왜 굳이 선생님이 두 권의 책을 지정하셨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글을 쓰고 보니, 그 책들을 읽었건 안 읽었건 별반 상관없는 글을 썼다는 생각을 잠깐 했을 뿐이다.
‘출제의도’라는 건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출제의도’ 같은 것과 별 상관없이 살았다.
이공계열이 흔히 그렇듯 고등학교뿐만 아니라 대학교에서도 곰곰이 헤아려봐야 할 출제의도 같은 것은 없었다.
문제는 분명하게 주어졌고, 나는 적절한 실험을 하거나, 계산을 하거나, 추론을 하거나, 기억을 되살리면 됐다.
물론 깊이 있는 학문을 하게 되면 그렇지 않겠지만, 슬렁슬렁 대학교를 졸업한 나는 그렇게 단순하고 표면적인 공부로, 공부라는 것을 마감했다.
은희경과 김사과 때부터 왜 하필 은희경인가? 하는 의문은 있었고,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 역시 이건 무슨 뜻? 따위의 즉각적인 의문은 있었지만, 그리고 매번 선생님의 의도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지만, 이렇게 블러핑까지 하실 줄은 몰랐다.
가진 패를 전부 다 보여 주어도 판판이 잃을 학생들인 것을 도대체 왜 저런 함정을 파 놓으셨단 말인지, 왜 ‘에코’의 ‘에’자도 꺼내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신 것인지, 나는 그저 한 붓에 써야 한다는 것에 혹해서 허리가 끊어지도록 책상머리에 붙어있었다.
숨겨진 문재를 찾는 선생님만의 독특한 취향이라 생각해야겠지만, 헛 다리를 짚어도 너무 심하게 짚어 놓고는, 마감 안에 과제를 다 했다고 혼자 좋아라한 것이 혼자 생각해도 쪽 팔려서 뭔가 생떼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서 나는 쪽글 8을 다시 쓰기로 했다.
선생님이 패를 다 까놓았으니, 나도 규칙에 관계없이 ‘에코’라는 말을 마구마구 써버릴테다 우기며 말이다.
일단 에코의 <글쓰기의 유혹>에 나오는 “63그룹”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선생님을 슬프게 했다는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를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
물론 선생님의 <샌드위치 위기론의 허구> 초판 서문도 찾아 읽어야 했다.
그런데 아람누리 도서관에 선생님의 책은 없었다.
나는 다시 조금 더 멀리 있는 다른 도서관으로 책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다른 도서관에는 <샌드위치 위기론의 허구>가, 그것도 초판 발행본으로 소장되어 있었다.
서문은 그다지 길지 않아서 도서관에 앉아서 읽고 올 수 있었다.
아쉽지만 본문은 다음에 읽기로 했다.
우선 쪽글을 써야 하니까, 그것도 에코, 에코 하면서 써버릴 거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이 쪽글을 다시 쓰기로 한 것이 다만 무안수세 때문만은 아니다.
왜 에코인가에 대한 선생님의 글들과 63그룹에 대한 에코 자신의 분석은 왜 내가 하필 여기서 쪽글을 쓰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곧바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재밌으니까’ 혹은 ‘심심하니까’ 따위의 대답으로 뭉기적 거리기에는 이제 다들 느끼다시피 이 쪽글들이 그렇게 만만한 소일거리가 아니다.
선생님의 목표는 처음부터 일반인 저자를 키워내는 것이었지만, 나는 한 번도 내가 저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도서관이나 서점에는 책이 넘친다.
읽을 책이 없는 것은 읽을 만한 책이 없는 것이지, 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직장인들이 점심때마다 먹을 것이 없어 고민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쨌든 쏟아지는 책들 때문에, 정작 10년이든 100년이든 읽혔으면 하는 책들은 자리를 빼앗겨 어느 지하서고에 처박혔는지 알 수도 없고, 읽어도 고만 안 읽어도 고만인 신간들이 온통 도서관의 서가를 차지한다.
내가 일반인 저자라는 말에 별로 귀를 쫑긋하지 않는 이유도 그렇게 거치적거릴 책을 쓰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선생님을 비롯해서 책을 준비하는 분들 모두 그런 책을 내놓으려고 하지는 않으실 거다.
어쨌든 나의 문제를 정리하면 이렇다.
내가 만약 책을 쓴다면 나는 적어도 ‘읽을 만한 책’을 쓰고 싶다.
나는 지금 그럴 능력이 없다.
선생님의 훈련을 제대로 따라가면 그런 자질을 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확신도 없다.
그렇다면 이 만만하지 않은 과정을 계속할 명분이 있을 것인가.
그런데 이 과제들이 나는 좋다. 자꾸 내 안의 뭔가를 건드린다.
문제는 재빨리 찾아냈지만(아직 2페이지도 못 채웠다), 답은 천천히 풀어야 한다. (그러니까 아직 8페이지가 남았다.)
일단 선생님에게서 시작한다.
선생님은 우리를 선택한 이유를 여러 번 밝히셨다.
“ 결론부터 말하면, 에코의 63그룹은 실패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을 기점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이 68 전에 모여서, 이탈리아를 살려보자, 그렇게 모였다.
일단 실패. 그 실패의 원인을 찾는 게, 경제 대장정을 준비하면서 내가 처음으로 가졌던 질문이다.
그게 아방가르드라서 실패한 게 아니라, 예술가 등 너무 지식인 중심으로 모여서 했던 게 아닐까, 그 생각을 했다.
지금 습작당 그리고 그 원형이 되었던 학생들과의 모임, 혹은 또 다른 일반인 모임, 이런 방식으로 63그룹과는 다른
포맷 실험을 계속해보는 게, 내가 지금 귀하들과 여기서 이러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다. ”
이 글을 뜯어보면 이렇다.
선생님의 궁극적 목표는 “대한민국을 살려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지식인” 은 안 된다, 이탈리아의 63 그룹이 그걸로 망했다, 그래서 선생인 나는 “일반인”인 여러분과 실험하기로 했다.
일단 목표가 어마어마하다.
졸지에 국민교육 헌장에서 외웠던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오늘에 되살려야 할 임무를 맡은 것 같다.
작은 어깨로 감당할 무게가 아님이 분명하지만, 일단 동의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하는 것이 마땅하고, 해야만 하는 것이니 또 하는 것이 마땅한, 그런 훌륭한 목표인데 동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능력의 문제는 차후의 일이다.
선생님도 우리 모두가 ‘나라를 살릴’ 수 있으리라 믿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일단 ‘살려 보자’ 는 것이지 반드시 목숨 걸고 살리겠다는 혈서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살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등등으로 논의를 이어가야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사실 자명한 것이 제일 어렵다) 여기서는 이 정도로 해두고 다음 문제로 넘어간다.
내가 주목하는 가장 큰 문제는 지식인과 일반인의 대립 구도에 있다.
선생님은 아방가르드라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지식인 중심이라서 실패한 것 같다고 이탈리아의 63 그룹을 진단했다.
지식인이라서 실패했다는 근거는 무엇일까?
나는 아직 선생님 자신으로부터 여기에 대한 답을 찾아보지 못했다.
부끄럽게도 그리고 죄송하게도 나는 <88만원 세대> 외에는 선생님 책을 읽어 보지 못했다.
그리고 선생님의 강의를 직접 들어 본 적도 없다.
분명히 어디선가 그 이유를 밝히셨을 것 같은데, 오늘에야 부랴부랴 그걸 찾아보기에는 선생님이 쓴 책이 너무 많고, ...그렇다.
<샌드위치 위기론의 허구> 서문에도 그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이 서문은 63그룹이 왜 19C 영국에 천착했는지를 설명하는데,
19C 영국은 단순히 제국의 심장부가 아니라, 그 당시 세계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아방가르드적 탐구가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이 영국과 미국의 차이점이고, 미국에서 대부분의 선진 지식을 배워 오는 우리 사회가 아무런 철학 없이 표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했다. (요렇게 기억한다;;)
여하튼 지식인의 문제로 다시 돌아와서,
혹시 에코의 논문 <63그룹>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에코는 먼저 63그룹이 아방가르드 집단인지 실험주의 집단인지를 질문한다.
“의문의 여지없이 63그룹 내에는 이 두 영혼 즉 아방가르드적 영혼과 실험주의적 영혼이 공존해 있었으며,
이 그룹의 기본적인 성격이 그처럼 애매모호해 보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선생님은 63그룹을 특별히 세분하지 않고 아방가르드로 총칭하고 계신 것 같은데, 그것이 아니라면 아방가르드로서의 63그룹에만 관심이 있으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에코에 의하면 아방가르드로서의 63은 실패했다.
그것은 아방가르드라는 개념 자체에 존재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 모든 아방가르드 집단은 의식적으로 자신들의 붕괴를 재촉한다는 원칙대로,
63그룹 또한 <퀸디치>의 폐간과 함께 스스로를 해체했다 ”
에코의 설명을 조금 더 보태자면 이렇다.
“ 역설적인 것은 전혀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 보자. <퀸디치>는 새로운 자유공간이 되어, 이 그룹과 발기인들의 원래의 ‘문화적’ 요구와 체제 전복을 추구하는 ‘정치운동’의 요구를 동시에 표현해야 했다. 그러나 막상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이 그룹은 자신들이 아무런 이데올로기적 통일성도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그 순간 이 그룹은 누구를 위해 그리고 누구에 맞서 투쟁해야 하는지 전혀 의견이 통일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방가르드그룹으로서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문제가 점점 복잡해져 간다.
이제 영영사전을 볼 때처럼 한 단어를 찾기 위해, 또 다른 단어를 줄줄이 찾아야 하는 연쇄의 사슬로 빠지는 듯하다.
아방가르드란 도대체 무엇인지?
실험적 집단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63그룹이 아방가르드나 실험적 집단 중 하나로만 구성되었다면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인지?
어쨌거나 그들에게 공유된 이데올로기적 통일성이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인지?
63그룹에 대한 애증이 남다를 에코라면 마땅히 연구해야 할 문제겠지만 내가 여기서 에코의 설명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거나 에코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은 문제까지 머리를 쥐어뜯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뜯어 봐도 답 나오기는 힘들다. 아차차...주어가 빠졌다. 물론 주어는 ‘내가’ 이다. 에코에게 혐의를 두지 마시길...)
다만 실험적 집단으로서의 63과 아방가르드로서의 63을 대략 비교해 보는 것은 필요할 듯하다.
63그룹은 ‘일군의 작가, 비평가, 화가, 그리고 음악가들’이 주류인 ‘3~40대의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그룹을 ‘지적-실험적 서클’로 바라보면서 ‘문화적 과제’를 저항의 주된 형식으로 간주하는 실험적 집단과 문화적 혁명주의와 테러리즘을 특징적 요소로 하는 아방가르드 집단이 혼재해 있다.
실험적 작가가 규칙을 파괴하는 것은 그 들의 새로운 규범이 ‘수용되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이고, 아방가르드적 태도는 도저히 수용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제도 자체’를 파괴하려는 것에 있다.
내가 보기에는 마치 개혁과 혁명의 차이처럼 보인다.
에코의 태도는 아방가르드에 조금 더 애정이 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잘은 모르겠다.
다만 이미 1969년에 스스로 청산해 버린 아방가르드로서의 63 그룹을 20년이 지나서 기이할 정도로 과도하게 축하하고 칭찬하는 것은 너희들이 아방가르드를 아방가르드가 아닌 그 무엇으로 변질시켜 아예 그 문화 자체를 청산해 버리고자 하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어쨌거나 나는 에코를 통해서도 분명한 답을 얻어내지 못했다, 혹은 읽어내지 못했다.
이 논문에서의 에코는 특별히 ‘지식인’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처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일반인의 어투로 말하자면, 맨 땅에 해딩이 필요한 순간이다.
지식인은 무엇이 문제일까?
어제 밤에 침대에서 눈을 감았는데 언뜻 몇 가지가 떠올랐다.
지들끼리 논다.
더럽게 어려운 말만 한다.
습속(그들 말로는 아비투스)이 이질적이다.
용서하시라.
무릇 거추장스러운 것을 내려놓고 잠이 들 때는 교양이라든지 예절이라든지 그런 것들도 벗어 던지기 마련이다.
내가 주관적으로 본, 혹은 주관적 직관으로 본 지식인의 결점은 이런 것이다.
지식인들이 학계를 터전으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물론 학계와 생활세계를 통섭 불가능한 것으로 분리하는 태도에 있다 .
예전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늘 엄마가 하시던 말이 있다.
공자왈, 맹자왈...하면 밥이 나오요, 돈이 나오요!
실상 공자든 맹자든 돈 벌어 밥 먹고 사는 세상의 이치와 그 태도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일 텐데, 아버지는 밥 벌어 먹는 현실을 모두 엄마에게 맞기셨다.
우리는 무지 아버지를 원망했는데, 그렇게 하신 공부로 일가를 이루시거나, 후학을 교육하지도 못하셨으니, 아버지 자신의 심정도 오죽 답답하셨을까 마는, 어쨌든 자식 된 심정으로 지금 돌이켜 보아도 무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를 살리건, 세상을 바꾸건, 천하를 경영하건, 일단 세상 속으로 들어와 세상과 함께 해야 할 것이니, 세상을 공부하는 지식인들은 먼저 세상과 소통해야 할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속이 뒤집힐 때가 참 많다.
머리를 쥐어뜯기로 하면, 안 그래도 얼마 없는 머리카락이 삽시간에 흔적도 없어질 판이다.
최근에 나는 헤겔의 <정신 현상학>을 읽었다.
이런 책을 감히 내가 읽으려 했다는 것이 가당치 않은 짓일지는 몰라도, 왜 그걸 읽어야 했는지는 나중에 하소연하기로 하고, 읽다가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세 달은 족히 걸린 것 같은데, 다 읽고 난 지금도, 그래서 “정신은 뼈다” 란 말을 헤겔이 긍정한 것인지 부정한 것인지도 헷갈릴 지경이다.
긍정했다고 그것이 긍정이 아니요, 부정했다고 그것이 또 꼭 부정은 아닌 것이 헤겔의 악명 높은 변증법인 것 같은데, 웬만한 머리로는 오독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구조이다.
거기에다가 학계의 식민지라는 우리나라의 특성이 보태지면 점입가경이다.
이것이 한글인지 영어인지 독어인지, 문장 구조는 차지하더라도, 일단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다.
원문의 ‘not' 이 어디에 붙었는지 확인할 길 없는 독자로서야 문맥이 아무리 이상해도 번역자가 부정해 놓은 곳을 부정으로 읽어 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주어, 술어, 목적어 순서가 완전히 다른 우리나라 언어로 번역될 때 발생하는 번역자의 실수일 수도 있고, 물론 독자가 엿가락처럼 길고 긴 번역문을 어디에서 끊어 읽어야 할지 몰라서 발생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사정이 이러니 지식인들의 언어가 무지하게 어렵게 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떨 때는 이게 바벨탑을 보시고 하느님이 했다는 바로 그것과 똑 같은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인간들이 더 이상 지식을 습득하지 못하도록 종족 마다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도록 장벽을 치셨다는 그 치사한 이야기 말이다.
전지전능한 하느님께서 인간들이 알아봤자 얼마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 짓까지 하셨다는 건지 나는 오히려 그 이야기가 인간들이 꾸며낸 하느님에 대한 음해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여하튼 지식인들이 설마 그럴 리야 하겠는가만, 쓰는 말이 하나같이 어려워, 독자는 서럽다.
습속, 습관, 체화된 태도 등으로 부를 수 있을까... 아비투스란 나도 누군가에게 얻어 들은 단어다.
그가 습관을 굳이 아비투스라고 하는 것은 아마 그것이 가장 정확한 의미이고, 습관이라는 평이한 단어로는 그 뉘앙스와 그것의 사회학적· 철학적 의미를 온전하게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지식인에게서 보는 나의 이질감은 딱 이런 아비투스에 있다.
상대방이 알아듣든 모르든 아비투스는 아비투스여야 한다.
어쨌거나 여기서 아비투스가 무엇인지 검색창에서 찾아와 보자.
위키 피디아는 너무 딱딱해서 검색 창의 맨 위에 올라온 어느 블로거의 설명을 빌려왔다.
http://neigeblue.blog.me/40035409593
“ 아비투스란 습관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다....그런데, 이런 문화적 취향 즉 아비투스는 부르디외에 따르면 위계화된 사회문화 공간 속에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경계를 가르는 요인이다....우리는 흔히 문화에 대한 선호도가 개인의 특성이자, 선천적인 끌림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고급문화를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으며, 같은 그룹들의 사람을 만나 교류함으로써, 고급예술에 대한 자신의 문화적 취향을 더 발전시킨다. 즉 이들의 취향은 교육을 풍부히 받은 지배집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당한 취향(Legitimate taste)’에 속한다. 중산층 사람들은 이들 보다는 질이 조금 떨어지는 예술작품에 대한 취향을 가지며 이를 ‘중류층 취향(Middle-Brow taste)’이라고 한다..그리고 대중적 취향(Popular taste)’ 이 있다.”
나는 최근 어떤 진보 지식인의 이런 아비투스에 좀 당황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이런 쪼잔한 걸로 뭐라고 해서는 안될 만큼 훌륭한 지식인이다.
지금 이 글의 사정이 여기까지 온 바람에, 생생한 사례을 전달하기 위해 결례를 무릅쓰니 부디 용서하시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고 트윗을 팔로우하고 있는데, 행동하는 좌파 지식인이다.
그의 트윗은 농성현장의 상황이나 소속 정당의 행동 강령, 이념에 대한 해석 같은 것들이 주를 이루는데 그는 가끔 개인적 소회를 트윗에 올리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 매우 감성적이고 음악을 사랑하고 문학적 표현력도 뛰어난 분이다.
예를 들어 물대포 앞에서 반값 등록금 시위를 하다가 돌아 온 밤에, 그는 이런 트윗을 올린다.(사후적으로 구성된 예다)
“poetica virtute"
이게 어느 나라 말일까?
나는 갑자기 내 코 앞에서 창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는다.
그가 거리에서 묻은 온갖 먼지를 떨어내고 장미향 가득한 욕조에 앉아 깔바도스를 옆에 놓고 스트라빈스키를 듣고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나는 그의 ‘정당한 취향(Legitimate taste)’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취향이라곤 ‘대중적 취향(Popular taste)’이 전부인 나로서는 그저 말할 수 없는 이질감과 거리를 느낄 뿐이다.
아비투스라는 것은 어쩌면 공기와 물처럼 자신이 속해 있는 계급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획득된 것이라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고급문화에 대한 대중의 몰이해일 뿐 아니라, 대중적 취향에 대한 지배계급의 이해 불능일 수도 있다.
어쨌든 문제는 이질감이다.
언뜻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취향‘의 문제가 사실은 감성의 영역에서 가장 강력하게 대중을 움직이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강남 좌파’에게서 느끼는 이질감도 비슷한 문제이다.
나는 강남 좌파를 존중한다.
그들은 필요하고 그리고 훌륭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여간에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와인의 원산지를 구분해 내고, 이탈리아 본고장의 스파게티 맛을 논하고, 차가 쌩쌩 달리는 찻길 옆이라도 굳이 햇볕이 쪼이는 테라스를 고집할 때, 유럽의 문화를 종횡무진으로 꿰뚫으며 책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고 온 것들을 그저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할 때, 겨우 9박 10일의 여정으로 관광지 문화재 앞에서 사진만 잔뜩 찍고 돌아 온 ‘대중적 취향(Popular taste)’인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지식인이 모두 그런 아비투스를 가졌는가에 대한 질문이 남았다.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도 지식인은 지배계급 출신이 다수이다.
19C 영국이든, 20C 미국이든 선진 지식을 위해 떠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되어야 한다.
눈물 나는 유학생의 고생담도 사실 일반 서민에게는 호사에 불과하다.
그들의 고생과 먹기에만도 하루하루가 힘겨운 고생을 비교하는 것은 한 급에 놓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족 같지만, 강조하거니와 일반론일 뿐이니 개념치 마시길 바란다.)
그렇다면 지식인은 민중의 적인가?
나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지식인을 버리고 일반인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것이 지식을 버렸다는 뜻이 아님을 모두들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지식을 버렸다면 왜 굳이 일반인들을 데리고 저자 만들기 작업을 하고 계시겠는가?
다만 선생님이 지식인이기 때문에 잘 할 줄 아는 것이 그것 밖에 없어서 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우리 카페에도 올라 온 슬라보예 지젝의 이야기를 해보자.
지젝은 사실 학계의 이단아라고 할 수 있다.
정통 학계에서는 학자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엔터테이너나 광대로 조롱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는 1988년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발표한 이후 생각하는 속도 보다 책을 쓰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방대한 양의 저술 활동을 해왔다.
그의 목표는 분명하다.
자본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체제를 주장하는 것이고, 내가 아는 한 그것은 실패한 과거의 공산주의에서 그 공산주의가 실현하지 못했던 공산주의적인 그 어떤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이 스탈린 체제냐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그는 스탈린이 실패한 곳에서 반드시 구원해 내어야 할 공산주의적인 가치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최근 월 스트리트 현장에서 그것을 ‘공통적인 것 혹은 공통성 commons' 이라고 표현했다.
이 개념은 지젝이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 이미 밝힌 바가 있다.
첫째는 ‘문화의 공통성’으로 직접적으로 사회화된 ‘지적’ 자본을 말한다. 언어, 공공 운송, 전자 통신, 우편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만약 빌게이츠에게 독점권이 허용된다면 우리는 특정 개인이 우리의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망의 소프트웨어 토대를 문자 그대로 소유하게 되는 부조리한 상황에 처해지게 된다.
둘째는 ‘외부 자원의 공통성’ 이다. 석유, 숲, 자연 서식지 자체가 오염과 착취로 위협받고 있다.
셋째는 ‘내적 자연의 공통성’ 이다. 인간의 유전자 같은 것을 말한다.
지젝은 이것들의 사유화는 그것 자체가 사회적 존재에 대한 폭력 행위이므로, 필요하다면 폭력을 통해서라도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산주의의 부활이 정당화되는 근거가 바로 이 ‘공통성’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젝이 이런 것들을 주장하는 방식은 헤겔과 라깡, 맑스를 통해서이다.
즉 그의 작업은 다분히 이론적이다.
그는 구호로 민중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 좌파 지식인 사회에서 폐기된 공산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지식인들과 끊임없는 이론 싸움을 해왔다.
그러나 지젝은 그 싸움을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진행해 왔다.
그의 책은 히치콕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와 소설, 구 동구권을 떠도는 무수한 농담들로 가득 차있다.
지젝의 용어가 한 때 씨네21에 그렇게 많이 등장했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지젝이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다.
학문이 그렇게 만만할 리는 없다.
더구나 까다롭기로 유명한 헤겔, 명료한 언어가 거의 불가능한 라깡이 아닌가.
그러나 헤겔과 라깡, 맑스는 그의 이론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고, 그는 그것을 대중화하기 위해 지적 엔터테이너의 오명을 무릅쓰고 거리의 비속한 농담들까지 책 속에 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지젝이 금융자본주의의 운명을 손에 쥔 바로 그 월 스트리트의 ‘사건’ 현장에서 군중의 환호와 지지를 받으며 유투브에 널리 회자될 명연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20년이 넘는 그의 학문적 탐구와 투쟁의 결과인 것이다.
지젝의 연설은 역사의 현장에서 감정에 겨워 곧바로 튀어 나온 즉흥적 주장이 아니다.
그는 민중의 요구에 대해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주입해 온 ‘불가능하다’란 주장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대안적 세계를 모색하기 위하여 치밀한 이론적 작업을 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지젝은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가 꿈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백일몽을 꾸는 이들은 지금과 같은 방식이 무한히 계속될 수 있으리라 믿는 그들 자신이다.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점점 악몽이 되고 있는 꿈에서 깨어나고 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젝이 이루어낸 오랜 기간의 학문적 성과 없이는 오늘날 저 월 스트리트의 지젝 또한 없다는 것이다.
지젝이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의 언어가 알아듣기 쉽고 호소력 있는 비유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유와 철학이 그의 언어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자본주의가 점점 악몽으로 변하자 이제 사람들은 ‘공통성 commons’이라는 공산주의적인 것들을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의 언어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지식인의 역할을 현실을 해석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 것들은 일반인이 쉬이 해낼 수 없는 것이다.
남편 친구 중에 몇 년 전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로 지내다가 최근에야 겨우 매형이 운영하는 작은 회사를 다니고 있는 친구가 있다.
그 사이 그 친구는 녹즙 대리점도 해보고 이것저것 손을 댔지만 모두 실패했다.
처음 그 친구는 모든 것을 자신의 무능으로 돌렸다.
그런데 실업자로 지내던 그 몇 년 동안 아고라를 비롯한 인터넷 사이트를 열심히 돌아다니던 그 친구는 남편의 말에 의하면 열렬한 사회 비판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해 주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다.
물론 최전방에서 이런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조금 덜 학문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조금 덜 엄밀할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 지식인의 활동 영역도 여러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어떤 단계로 나누어진다고 분명하게 밝힐 수도 없지만, 선생님만 하더라도 스스로를 B급이라고 하시는 걸 보면 하여간 그렇게 느껴진다.
학문적 엄밀성 보다는 현실적 유용성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지식인도 있다.
그렇다고 학문적 엄밀성이 지식인의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학문이란 혼자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지젝이 말하는 이른바 ‘공통적인 것’ 의 영역에 있다.
엄밀한 학문의 성과 위에서만 그 지식은 현실적 유용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다양한 역할을 하는 다양한 지식인이 필요하다고 본다.
헤겔이 필요한 만큼 지젝이 필요하고, 그리고 지젝을 더욱 쉽게 읽을 수 있는 어떤 매개자 또한 필요하고, 아고라의 그 복마전에 속에서도 여론의 흐름을 제대로 주도할 지식인 역시 필요하다고 나는 본다.
이것이 선생님이 지식인이 아니라 일반인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저자를 발굴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선생님의 의도가 따로 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내가 해석하는 이 프로그램의 의의는 그러하고, 결론적으로 내가 여기에서 끙끙대며 이 쪽글을 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반인이란 생활인이다.
우리는 무엇을 읽거나 볼 경우, 학자적 엄밀성을 발동하여 논리를 정치하게 따지기 보다는, 곧 바로 우리의 일상에 비추어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우리가 이해하는 형상으로 그려내고,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생활 언어로 번역한다.
그것들이 때로는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
개념의 엄밀성에 발목 잡혀 자유로운 표현을 하지 못하는 지식인 보다, 거칠고 때론 불안하지만 큰 틀에서 보아 오류가 없다면, 편안하고 쉬운 언어를 사용하는 일반인이 더 깊은 감동을 줄 수가 있다.
물론 결정적으로 치명적인 오류가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여기서 이렇게 훈련을 받는 의의가 또한 여기에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일반인과 동일한 습속(아비투스)을 가진 일반인들의 공감 능력이 지식인들의 그것을 능가할 수도 있음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읽힐만한 책을 쓸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능력이란 그렇게 쉽게 획득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싹수란 것도 있어야 하고, 열정도 있어야 하고, 노력도 있어야 한다.
다만 지금은, 10매씩 써야하지만 이것이 그다지 힘들지 않고, 사실을 말하자면 살짝살짝 흥분이 되기도 하고, 그리고 이 모든 도전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내게 어떤 변화가 올 수도 있다는 기대감은 있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정말 할 수 있을까요?”란 히스테리컬한 의문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있다”는 신념, 그 신념을 지렛대 삼아 이 의문의 강을 도약하는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작가 노트>에서 꼭 새겨두고 싶은 문장 하나를 기억하고 싶다.
“ 그러나 새로운 소설, 전혀 다른 종류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쓰려고 할 경우 작가는, 독자가 드러낸 요구를 분류하는 시장 동향 분석가가 아닌, 시대정신의 흐름을 간취하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작가는, 대중이 원하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원해야 하는>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설사 작가 자신이, 대중이 원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런 작가는 자기를 독자에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자기에게 드러내고자 한다.”
여러분 모두, ‘대중이 원해야 하는 것을’ 대중의 가슴을 파고드는 감동으로, 대중 앞에 드러내는 작가가 되시 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