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 프롬 - 개정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4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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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16일에 썻던 글입니다.

 

  이디스 워튼의 <이선 프롬>과 <겨울>을 함께 읽었다. 지난 달에는 <순수의 시대>와 <기쁨의 집>을 함께 읽었는데,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이 “쌍”들의 연관성이 꽤나 긴밀해서 오히려 놀라웠다. <순수의 시대>와 <기쁨의 집>이 뉴욕 상류 사회를 배경으로 한데 반해 <이선 프롬>과 <겨울>은 미국 하층 계급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디스 워튼이 뉴욕 상류 계급의 손꼽히는 가문 출신이라는 점에서는 물론 <이선 프롬>과 <겨울>이 의외의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디스 워튼은 잘 알지도 못하는 세계를 피상적으로 그렸다는 비판에 대해 10년 동안이나 작품의 배경이 되는 뉴잉글랜드의 산간 지방에 거주하며 그들의 삶을 자세히 알게 된 후에 쓴 글이라고 반박했다. 하층 계급에 대한 워튼의 묘사가 얼마만큼 사실적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사실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다. 흥미로운 것은 다만 그 소설들의 문제 의식이 현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선 프롬은 가난한 시골 농부이다. 한 때는 엔지니어나 화학자의 꿈을 가졌지만 잇따른 가정의 불행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산골 마을에 붙박혀, 나이 많은 아내와 살고 있다. 아내는 이선 프롬의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함께 살게 된 먼 친척인데, 어머니가 죽은 후 혼자 남게 된 프롬과 결혼을 했다. 병간호를 할 때는 무엇이든 척척해내든 아내는 정작 결혼 후 1년 남짓 만에 자신이 환자가 되어 이선 프롬을 옭아매는 짐이 되어 버린다. 아내의 요청으로 아내를 대신해 집안일을 할 여자 아이를 불러 오는데, 이선 프롬은 곧 아내의 친척인 이 처녀를 사랑하게 된다. 오갈데 없는 고아인 이 처녀는 비록 하녀의 신분인 셈이지만 이선 프롬의 다정함 속에서 은밀한 행복을 누린다. 그런데 둘의 관계를 눈치 챈 아내가 이 처녀를 쫒아 내다시피 돌려보내려고 한다. 그러나 이 처녀가 돌아갈 곳은 사실상 없다. 이선 프롬은 이 처녀를 데리고 서부로 도망가려 하지만, 그들의 현실은 기차표를 살 돈도 없이 암담하다. 결국 처녀를 돌려보내려고 마차를 타고 가던 중 둘은 예전에 약속한 눈썰매를 타기로 하는데, 언덕에서 가파르게 내려오던 썰매는 커다란 느티나무를 향해 돌진한다. 이십 사년 전에 일어난 이 이야기를 방문자에게 전해 주는 이선 프롬은 다리를 절룩이는 늙은 노인이다. 그의 집에는 두 명의 노파가 있는데, 한 명은 그의 아내이고, 또 한 명은 척추를 다쳐 불구가 된 그 처녀이다.

  이선 프롬의 집을 떠나 갈 곳이 없는 처녀는 무섭게 내달리는 눈썰매의 황홀경 속에서 이선 프롬과 함께 죽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유일하게 열려 있는 그들의 탈출구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한다. 그리고 삶에 대한 모든 욕구를 잃은 늙은 이선 프롬과 갑자기 생기를 되찾아, 불구가 된 처녀를 이십 사년 동안 간병한 늙은 아내와 의자에 파묻힌 채 온갖 불평을 해대는 노파가 된 처녀가 폐가 같은 집에서 유령처럼 살고 있다.

이디스 워튼은 <이선 프롬>에서 가장 잔인하다. <기쁨의 집>의 릴리에게는 허용되었던 죽음마저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죽지 못한 이선 프롬은 자신이 사랑했던 그 처녀가 실제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것일 뿐임을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그 처녀는 아내의 반복이다. 결혼 이전에는 그토록 눈부신 능력을 가진 것으로 보였던 아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환자임이 드러난 것처럼, 그 처녀의 거부할 수 없던 매혹의 빛 역시 사고와 함께 사라지고 남은 것은 아내와 똑 같은 불평 덩어리의 불구일 뿐이다. 멀리서 보았을 때 숭고했던 그 대상은 가까이 다가 왔을 때 그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사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 처녀를 그토록 아름답게 보이게 했던 그 매혹의 중핵은 그 처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선 프롬은 그 처녀와 함께 죽거나 그 처녀를 보내야 했다. 그 처녀는 상실됨으로써만 영원히 이선 프롬에게 살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 그 처녀는 상실됨으로 인해 이선 프롬의 숭고한 대상으로 영원히 살아 남아 이선 프롬의 삶을 지탱하는 은밀한 보충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처녀에 대한 추억이야말로 아내와의 불행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지지대이다. 그러나 그 처녀는 살아남아 또 하나의 아내가 되었고, 그래서 이선은 살아 있는 유령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환상에 의지해 살거나, 혹은 환상을 빼앗긴 유령이 된다.

 

  그러나 하나의 질문이 남아 있다. 환상 없는 유령의 삶이 나쁜 것인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 모두는 환상 없는 유령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턱없는 과장이라면, 우리 결혼한 부부는 모두 환상 없는 유령이라고 해두자. 결혼 6개월 혹은 일 년이 못되어 우리는 우리 배우자에게 “그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것, 우리를 도취시켰던 그것, 우리가 알지 못한 채 한 없이 끌렸던 그것, 그 미지의 X. 그것은 그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보았던 그것, 바로 그들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그것. 그토록 눈부신 광휘를 뿜어내던, 손 안에 잡히지 않아 더 눈 부셨던 그 보석은 그저 하나의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음이, 어느 차가운 아침에 오롯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나는 답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윤리적인 것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나? 우리의 돌덩어리가 빛을 잃었다면 우리는 새로운 빛나는 또 다른 돌을 찾아 떠나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것인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것이 진정으로 윤리적인 것인가? 욕망이란 그런 것인가? 역시 답을 알지 못한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선택한 돌덩어리를 끝까지 인내하고 견뎌내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윤리라고. 차가운 돌덩어리의 공허를 견디기 위해 눈부시게 빛나 보이는 새로운 돌을 찾아 헤매는 것은, 혹독한 현실을 대면하지 않으려 끝없는 마약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중독자와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어지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있다. 모든 결혼은 혹은 모든 최초의 선택은 끝가지 무조건 지켜져야 하는 것인가? 다시 한번 그것이 윤리적인 태도인가? 여전히 그들의 답은 이해의 너머에 있다. 다만 그들이 보여 준 어떤 예를 하나만 들어 보자. 다스 베이더가 되기 직전 아나킨은 오비완 커노비와 마지막 대결을 한다. 명백히 패배가 보이는 곳에서, 그것도 선이 아니라 악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나킨은 선의 길로 돌아오라는 오비완의 마지막 요청을 거절한다.

“아나킨은 이를 거부하고, 비록 이미 치명적으로 부상을 입었지만 마지막 힘을 모아 다시 그를 공격하려 한다. 나는 아나킨의 고집을, 석상의 구원에 대한 마지막 제안을 거절하는 모차르트의 돈조반니와 유사한, 본격적인 윤리적 입장으로 인식하고자하는 마음을 거둘 수가 없다. 두 경우 모두 내용적인 층위에서 악의 선택으로 보이는 것이 형식적 차원에서는 자신의 윤리적 일관성을 주장하는 행동이다. 즉 그들은 모두 실용적인 자기중심적 계산의 관점으로는 악을 거절하는 편이 적절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모두 생의 최후의 순간에 악의 선택을 고집하는 것이 어떤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괴할 만큼 윤리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도전적인 행동으로 그들은 용기 있게, 어떤 물질적인 또는 정신적인 이익에 대한 약속 때문이 아니라 원칙에 따라 자신들의 선택에 충성을 다한다.”

  이선 프롬이 처녀와 함께 도망가지 않은 것은 다만 기차 삯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선 프롬은 자신이 떠남으로 그의 아내가 어떤 곤궁에 처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늙은 이선 프롬이 입을 다문 채, 그의 아내와 불구가 된 그 처녀를 이십사년 간 묵묵히 지켜온 것 또한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모든 이혼이 비윤리적인 것도 아니고, 모든 결혼의 유지가 윤리적인 것도 아니다. 단순히 경제적 사회적 이익 때문에 결혼을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비윤리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최초의 선택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최초의 선택과 그 선택의 유지와 폐기 사이에 있는 어떤 것들의 관계가 그것을 윤리적인 것으로도 혹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도 만드는 것이 아닐까? 모든 이혼이 비윤리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모든 가정의 유지가 윤리적인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를 매혹시켰던 그 빛남이 우리 상대들의 소유가 아니었던 것처럼, 그 빛의 사라짐 역시 그들의 책임이 아니다.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고, 그 책임을 그들에게 물으며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 그것이 사랑에 윤리가 개입하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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