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12월 27일에 쓴 글입니다.
몇 달째 드라마와 살고 있다. 외출하지 못하고 책도 읽기 힘드니 자연 드라마와 친해졌다. 물론 그 전부터 매니아는 아니라 해도, 봐야하는 드라마는 꼭꼭 챙겨보는 드라마 친구이긴 했다마는. 여하튼 VOD라는 것 덕분에 예전에 못 봤던 드라마, 띄엄띄엄 봤던 드라마, 열심히 봤던 드라마 할 것 없이 한꺼번에 좌~악 연결해 보면서 드라마를 보는 안목이 조금 훈련되었다는 나름의 성과도(ㅋㅋ) 있었다. 그렇게 지붕뚫고 하이킥도 다시 보고, 선덕여왕, 발리에서 생긴 일도 다시 봤다. 또 고현정이 강력계 형사로 나온 히트, 김현주가 변호사 역을 한 파트너 같은 숨어 있던 명작도 찾을 수 있었고, 미남이시네요나 성균관스캔들 같이 가슴을 콩닥거리게 할 줄 아는 로맨스물도 재미있게 보았다. 물론 ‘콩닥거리게 하기’라면 요즘은 시크릿 가든의 현빈을 따라올 놈이 없지만 말이다.
시크릿 가든의 작가는 ‘영리한’이라는 말을 좀 듣는 편인 것 같은데, 가령 분명히 신데렐라 스토리인데도 인어공주를 차용해 와서 어짜피 뻔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와 스토리를 변주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따위의 호의적 평가를 얻어낸다. 잘생기고 알고 보면 인간성까지도 괜찮은 재벌 2세 혹은 3세가 가난한데다 특별히 예쁘지도 않고 성격도 별로인 여자를 멀쩡한 정신으로 죽자살자 좋아한다고 뻥치기에는 이제 너무 낯간지러울만큼 영악한 세상에 발빠르게(?, 한참 늦었다고 해야겠지만, 이왕 신데렐라 외길 멜로가 우리 드라마와 작가의 앞날이라면..) 대처하는 작가의 순발력이 아닌게아니라 뛰어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어공주는 몇달전 방영됐던 내 여자 친구는 구미호에서 먼저 차용되었다. 물론 구미호의 인어공주가 정통성을 따라갔다면(결과는 해피엔딩이었다만), 시크릿 가든의 인어공주는 변종이라고 할 수 있다. 자발적 인어공주가 아니라 하지원에게 인어공주가 되길 강요했다가 또 현빈 자신이 인어왕자가 되겠다고 나서기도 하고. 물론 해피앤딩이 아니라면 하지원이 결과적으로 자발적인 인어공주가 될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대목이 제일로 문제적인 것은 사실이다. 현빈은 자신의 계급적 위치 때문에 죽었다 깨어나도 인어왕자가 될 수 없다. 현빈이 거품처럼 꺼지는 것은 그냥 하지원을 버리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빠득빠득 자기가 인어왕자를 하겠다고 우긴다. 가지고 놀다 버리겠다는 말을 참으로 사회적 지위에 걸맞게도 품격있게 하신다. 우리 지원이는 그 놈의 사랑이 뭔지 차마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못하고 혹은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그 말에 홀라당 넘어가 버린다. 하긴 돈 많고 잘 생긴 놈이 허구헌날 찾아와 내가 인어왕자라고 하는데 안 넘어갈 정신 멀쩡한 여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시크릿 가든이 재미있기는 하다. 화려한 볼거리, 현란한 말솜씨에, 인어공주를 선고받은 신데렐라의 달콤쌉싸름함까지. 그렇거나말거나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오늘의 드라마는 시크릿 가든이 아니라 지난주에 종영한 즐거운 나의 집이다. 서설이 좀 심하게 길었다만 ㅠ.ㅠ
즐거운 나의 집은 뜯어보는 재미가 쏠쏠한 드라마에 속한다. 스토리도 탄탄하고 인물들의 내면적 갈등도 흥미롭고 드라마의 메시지도 다면적이고 연기도 훌륭하다. 대중문화 평론가처럼 그런 것들을 다 아울러 드라마에 대한 평가를 내려야 할 부담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내가 맨 처음 이 드라마에 흥미를 갖게 된 지점에서 이야기를 할까 싶다.
진서는 정신과 의사이다. 그녀가 쓴 책은 ‘나만 모르는 내 남편’ 이다. 진서의 남편 상현을 호시탐탐 유혹하는 윤희는 진서에게 이 책을 들먹이며 야릇한 웃음을 날린다. 즐거운 나의 집은 이런 면에서 보았을 때에는 ‘진서만 모르는 남편 상현’에게 얽힌 사건들로 구성된다. ‘나만 모르는 내 남편’ 을 쓸 때 정신과의사인 진서는 그 보편적 제목 속에 자신도 포함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 보편적 진실을 알고 있는 주체로서 자신만은 예외로 두었을까?
이 드라마에서 진서가 정신과의사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신과의사로서의 진서는 드라마 속에서 그리고 드라마 밖 관객에게도,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든다.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의 역할을 맡은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진서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하나하나 드러난다. 진서는 남편 상현의 외도를 몰랐을 뿐 아니라 외도에 이르게 한 그 불안함의 정체와 그것이 자신에게 기인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윤희가 왜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는지도 몰랐다. 드라마 내내 윤희는 진서에게 말한다. 너는 아직도 모른다, 내가 왜 이러는지를. 진서는 남편 상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윤희가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윤희의 진정한 대상은 상현이 아니라 진서 자신이다. 윤희는 진서 때문에 상현의 곁을 맴돈다. 그것을 알아 내지 못하는 진서에게 윤희는 비웃는 듯 답답한 듯 속삭인다. 나는 정신과 의사라는 네 직업이 참 우스워. 그리고 심지어 환자로서 찾아 온 윤희의 남편 성은필에 대해서도 진서는 알지 못한다. 6개월간 일주일에 두어번 씩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왔다고 생각한 성은필마저 진서를 속이지만 진서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진서는 사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의 자리를 떠맡아 혼돈 속에 빠진다.
그러나 이것이 진서가 무지를 은폐한 채 앎을 가장하고 있다는 식의 기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 로서의 진서의 위치 없이는 사건이 진행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서가 맡은 앎의 역할이 오히려 진서를 혼돈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진서를 둘러 싼 사람들은 진서가 그것을 알아 낼 것이라는 기대 혹은 믿음에 의해 자신의 욕망을 펼쳐 보인다. 윤희 역시 진서가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알아 낼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에 혹은 믿기 때문에 진서의 남편 상현을 유혹한다. 상현은 윤희의 은밀한 대상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단서이다. 진서와 윤희의 관계는 진서가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 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이 드라마는 불륜 치정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학재단의 비리를 대놓고 까발린다거나, 교수 사회의 권력 다툼과 시간 강사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거나, 강제로 학교를 빼앗은 친일파 일족이 독립운동가로 둔갑하여 재단이사장이 되었다거나 하는 사회 정치적 측면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갈등 구조가 전형적인 불륜 드라마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갈등을 일으키는 주요 인물인 윤희가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상현이 아니라 진서이다. 상현은 하나의 수단일 뿐 윤희가 진정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기를 원하는 대상은 오로지 진서이다. 윤희는 상현을 사랑한다기 보다는 진서를 부러워하고, 상현 때문에 아파하기 보다는 진서에게 입은 상처에 평생을 집착한다. 윤희는 상현의 사랑이 아니라 진서의 이해와 용서를 통해 비로소 안식에 든다. 그래서 즐거운 나의 집은 발리에서 생긴 일을 떠올리게 한다. 발리...의 하지원 역시 즐나집의 상현과 같이 궁극적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계기일 따름이다. 조인성과 소지섭의 갈등은 하지원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열등감과 동경에 기인한다. 어떤 소통도 불가능했던 발리의 두 남자는 비극을 맞았지만, 즐나집의 두 여자는 이해를 통해 화해하며 행복한 결말을 맞았다. 윤희는 진서를 통해 증오했던 아버지와 남편이 사실은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성은숙에게 이쁨받고 싶었다고 고백하며 평안하게 죽을 수 있었다. 즐거운 나의 집의 이 해피앤딩은 진서가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의 역할을 맡았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윤희는 진서가 자신을 알아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발리에서와는 다르게 즐나집은 처음부터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작년에 읽었던 책에는 이런 수수께끼가 있었다. 다섯 개의 모자가가 있고 죄수 세 명이 각각 하나씩 모자를 쓰고 있다. 둘러앉은 죄수들은 상대방의 모자는 볼 수 있지만 자신의 모자 색깔은 알 수 없다. 다섯 개의 모자는 흰색 세 개, 검은색 두 개인데 자신의 모자 색깔을 가장 먼저 맞춘 죄수는 감옥을 나갈 수 있다. 문제 나간다...
첫 째, 검은 모자 두 개, 흰색 한 개의 경우
흰색 모자를 쓴 죄수의 눈에 두 개의 검은 모자가 보인다. 답은 간단하다. 총 두 개의 검은 모자를 두 사람의 죄수가 각각 쓰고 있으니 자신의 모자는 당연 흰색이다. 이건 쉽다. ‘응시의 순간’ 만 있으면 된다.
둘 째, 검은 모자 한 개, 흰색 두 개의 경우
흰색 모자를 쓴 죄수 A의 눈에는 검은색 하나, 흰색 하나가 보인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자는 흰색일 수도 있고 검은 색일 수도 있다. 만약 자신의 모자가 검은색이라면 흰색 모자를 쓴 죄수 B의 눈에는 검은 모자 두 개가 보일 것이다. 그러면 그 즉시 죄수 B가 일어나 자신의 모자가 흰색일 것이라고 외칠텐데, 죄수 B가 주저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의 모자는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다! 조금 어렵다. 나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해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세 째, 흰색 모자 세 개의 경우
흰색 모자를 쓴 죄수 A의 눈에 흰색 모자 두 개가 보인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자는 흰색일 수도 있고 검은색일 수도 있다. 만약 내 모자가 검은색이라면? 죄수 B는 흰색 하나, 검은색 하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죄수 B는 죄수 A인 나 자신이 두 번째 경우에서 유추한 과정을 밟아 흰색 모자를 쓴 죄수C가 주저하는 것을 보고(최초의 지연) 자신의 모자가 흰색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일어나 외칠 것이다. 그런데 죄수 B는 움직이지 못한다. 세 명의 죄수 모두 움직이지 못하고 서로 쳐다보고만 있다. (두 번째 지연) 그렇다면 내 모자는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다. 딴 놈들이 일어나기 전에 얼른 일어나야한다! ... 만일 세 죄수의 지능이 모두 동일하다면 이 세 명의 죄수는 동시에 일어나 흰색이라고 외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사실 이 죄수들은 끝내 자신의 모자 색깔을 확신하지 못한 채 성급히 일어나 외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의 머뭇거림이 내 모자 색깔이 검기 때문에 일어난 최초의 지연인지, 흰 색이기 때문에 일어난 두 번째 지연인지를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수수께끼를 예시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에서 S1으로의 이행, 즉 내가 무엇인지에 관한 근본적 불확실성으로 축약되는 주체성의 공백으로부터 상징적 정체성의 떠맡음 -그것은 나다- 으로의 이행이다..... 우리는 촉박한 주체적 제스처를 통해 “우리가 그것인 그 무엇이 된다” 이 촉박한 동일화는 대상에서 기표로의 이행을 내포한다. 모자는 내가 그것인 대상이며, 내가 그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은 내가 “내가 대상으로서 그것인 그 무엇”에 대한 통찰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즉 $와 대상a는 위상학적으로 불가능하다) 내가 나는 하얀색이라고 말할 때 나는 나의 존재에 관한 불확실성의 공백을 메우는 상징적 정체성을 떠맡는다. 이 예기적anticipatory 앞지르기를 설명해 주는 것은 인과사슬의 비결정적 성격이다. 상징적 질서는 “불충족이유율 principle of insufficient reason”에 의해 지배된다. 상징적 상호주체성의 공간 내부에서 나는 내가 무엇인지를 단지 전혀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인데, 바로 이 때문에 나의 객관적 사회적 정체성은 주체적 예기를 통해 확립된다. 」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OO입니다”를 떠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떠맡음에 끝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히스테증자이다. 「 히스테리적 질문은 “왜 나는 당신이 나라고 하는 그 무엇인가요?” 이다. 즉 나는 주인이 내게 부과한 상징적 정체성에 의문을 던진다. 나는 “내 안에 있는 나 자신 보다 더한” 어떤 것, 즉 대상a의 이름으로 그것에 저항한다. 」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 주로 정신분석가가 그 역할을 담당하는, 역시 사실은 알고 있지 못한다. 단지 그 위치를 떠맡음으로 해서 질문을 던지는 자가 스스로 찾는 길의 조력자가 될 뿐이다.
즐거운 나의 집은 역설이면서 동시에 사실적 진술이다. 이 드라마의 첫 회는 남편 상현이 진서와의 즐거운 한 때를 보낸 직후, 다급하게 걸려온 윤희의 전화를 받고 진서가 잠든 틈을 타 빗속을 뚫고 윤희에게 달려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회, 상현과 진서는 또 다시 행복한 식탁에서 웃음과 반찬과 사랑을 함께 나눈다. 즐거운 나의 집은 그렇게 위태로운 동시에 즐겁다. 사실 조금 충격적이게도 첫 회의 그 행복한, ‘즐거운 나의 집’이 화면에 펼쳐지기 이전에 이미 진서는 남편 상현의 외도로 위태로움을 겪고 있었다. 진서는 즐거웠지만 동시에 즐거운 척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윤희의 유혹으로 마치 즐거운 나의 집에 위기가 찾아 온 것 같았지만 사실 이 즐거운 나의 집은 이미 벌써 위기 위에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찾은 즐거운 집 역시 그것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윤서도 상현도 그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또 다시 즐겁고 그것은 영원히 즐거울 것처럼 그렇게 행복해 보인다.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우리는 아무도 모르지만 내가 그 누구임을 떠맡음으로 인해 우리는 아주 단단히 세상에 뿌리박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때때로 그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버려도 우리가 다시 세상에 뿌리를 내리는 이유는 그 땅이 그렇게 단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뿌리 없이 우리가 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