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초상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7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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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헨리 제임스가 누군지 몰랐다. 지인이 ‘제임스’, ‘제임스’ 할 때마다 제임스 조이스가 떠올랐으며, ‘제임스’란 단어가 이름도 되고, 성도 되는 그들의 문화가 영 낯설 뿐이었다. 헨리 제임스는 19C 미국의 대표 작가라는데 우리나라에 번역된 작품이 얼마 없었다. 도서관에서 찾은 <여인의 초상>은 총 세권 중 한권이 분실되고 없었다. 1997년 ‘인화’ 출판사에서 발간한 그 책은 이미 절판 상태였다. 나는 친구를 통하여 어느 대학 도서관을 통해 이 빠진 한권을 마저 구해서 어렵게 <여인의 초상> 전권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한 4년인가 5년쯤인가 전이었다.

 

  작년 말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7,298권으로 <여인의 초상>이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 연이어 <레미제라블>도 5권이 완역되었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열풍을 타고 빅토르 위고의 원작도 엄청나게 팔렸다. 물론 성급하게 5권을 한꺼번에 구매한 독자들이 그 길고 지루한 책을 다 읽었을지 조금 의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도 그 덕에 <레미제라블>을 읽을 수 있었다. 영화에 감동한 새언니와 오빠를 부추겼는데, 오빠는 아직도 2권의 워털루전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고, 그걸 본 새언니는 입시공부라도 할 마음의 준비가 되기 전에는 손을 댈 수 없노라 선언했다.

  <레미제라블>은 1862년, <여인의 초상>은 1881년에 출간되었다. 20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지만, 물론 프랑스와 영국(혹은 미국)이라는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이 두 소설의 배경과 주제는 완전히 다르다. <레미제라블>이 프랑스혁명의 혼돈기를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여인의 초상>은 대륙의 상류사회에 편입하다 좌초하는 미국 상류층 아가씨의 쓰라린 인생담이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소설을 가져다 놓고, 왜 이렇게 다르냐고 따진다면 어처구니가 없겠지만, <레미제라블>을 읽은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다시 <여인의 초상>을 읽으니 자연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거의 동시대를 사는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유럽을 휩쓸고 있는 혁명인데. 혁명이란 그저 ‘red'가 주는 숭고한 아름다움이나 감동이 아니라, 그 시대의 대다수가 얼마나 가난하고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야 했는지에 대한 분노이자 웅변인데. 1861년, 영국에는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도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헨리 제임스가 무슨 죄가 있을까만, 하여튼 이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여인의 초상>이 흥미롭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여인의 초상>을 한마디로, 속되게 표현한다면 이렇다. 지적이고 독립적인 정신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아름다운 미국인 처녀가 유럽에 건너가서 우연찮게 막대한 유산을 받고 거의 ‘완벽한 여인’이 되었으나,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믿음으로 인해, 스스로 최악의 선택을 하고 인생을 쫄딱 망쳤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이 여인은 어떤 결심을 하고 끔찍한 남편에게 되돌아간다.

  우리 고향 천박한 속담으로 ‘지 눈까리 지가 찔렀다.’고 하는 딱 그런 상황이다. 순진하고 착하고 똑똑한 처녀가 흔히 겪는 비극이다. 세상물정 모르고 당했다가 앗 뜨거 할 때는 대부분 이미 늦었다. 문제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에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은 환타지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는 ‘그 깨달음 이후’의 ‘여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물론 대중적이면 대중적일수록 여인은 수퍼우먼이 되어 성공하고, 그 성공으로 복수한다는 스토리에 가깝다. 어떻게 갑자기 수퍼우먼이 될 수 있는지 그 비결은 항상 궁금하지만, 뭐 어쨌든 대강 그렇게 되어 해피앤딩이 되면, 환타지든 뭐든 속이 조금 개운한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화장실 갔다가 물 안 내리고 나온 느낌은 안 드는 정도는 된다. 그러면 또 우리는 그 소설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뭐가 됐든 까맣게 잊어버리고, 새로운 판타지를 맞이할 수 있다. 현실은 영원히 유예된 채로.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의 결말은 기이하다. 이사벨은 남편에게 속았다는 것을 안 후, 사촌 오빠 랠프의 임종을 위해 로마에서 런던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사벨은 랠프의 장례를 치르고 난후, 오래 전부터 그녀에게 구혼해왔던 워버튼경과 캐스파 굿우드를 물리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간다. 왜?

  작가 헨리 제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1,000쪽에 가까운 장편 소설의 마지막까지 이사벨은 혼란 속에 갈팡질팡하는데, 딱 두 페이지를 남겨놓고, “그녀는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녀 앞에 똑 바른 길이 보였던 것이다.” 는 문장이 나온다. 그리고 다음 날 굿우드가 이사벨의 친구로부터 이사벨이 로마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는 장면으로 이 긴 소설은 끝이 난다. 이사벨은 도대체 어떤 길을 보았던 것일까?

 

 물론 ‘인습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꿈꾸는 한 여인이 현실의 시련 속에서 성숙해 가는 과정을 정교하게 그린 19C 미국 소설의 걸작’, ‘20C 현대 소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모범 작품’ 이니 만큼, 그 분석과 해석에 관한 엄청나게 훌륭한 글들이 많이 있을 것이고, 그 각각에 이사벨의 ‘똑바른 길’에 대한 모범 답안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모른다. 다만 민음사판 작품해설은 살짝 읽어보았다. 작품해설을 쓴 사람이 옮긴이인지 민음사 편집진인지 누군지 명기되어 있지 않아 모르겠으나, 이 책의 결말에 대한 해설은 이렇다. “이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과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성숙된 자아에 도달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 자신의 진정한 초상이 완성되는 길인 것이다.” 본문이나 해설이나 모호하긴 마찬가지다.

  현대적 관점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지적인 여성의 선택은 당연히 ‘이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혼이 스스로 선택한 결혼에 대한 책임 회피라는 논지는 설득력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벨의 선택이 ‘똑바른 길’ 일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1880년대와 2010년대의 차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소설 속 주변 인물들의 태도로 볼 때, 1880년대 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이사벨에게 로마로 돌아가지 말 것을 권유한다. 그렇다면 이사벨은 도대체 왜 돌아간 것일까?

 

 로마로 돌아간 이사벨이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고 싶다. 아마도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사벨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남편과 대립할 것이고, 남편으로부터 의붓딸 팬지를 지키려고 할 것이다. 이사벨은 결코 인습으로 굳어진 유럽을 상징하는 남편 오스몬드를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헨리 제임스의 몇몇 소설 중 <데이지 밀러>와 <아메리칸>은 고풍스럽고 아름답지만 폐쇄적인 유럽의 벽에 부딪혀 좌초하는 자유롭고 활달하고 싱싱한 아메리칸들의 실패담이다. 이사벨 역시 실패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극소차이’라고 불리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아무 차이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차이. 실패한 선택 속에 당황하며 좌절하는 삶과 실패한 선택임을 인정하고 싸우며 좌절하는 삶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이 ‘극소차이’일 것이다. 나는 물론 이사벨이 로마로 돌아가는 것만이 선택에의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사벨이 이혼을 하고 독립하는 것 역시 자신의 실패한 선택에 대한 당당한 인정일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드러난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가 바로 선택에 대한 책임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 태도란 타인의 눈으로는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벨의 선택 앞에 어리둥절한다. ‘암흑의 집, 침묵의 집, 질식의 집’ 으로 다시 걸어 들어간 이사벨 앞에, 캐스파 굿우드처럼.

  그러나 이사벨은 그 집 앞에서 아마도 다른 어떤 것을 보았으리라, 이전에도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그 어떤 것을. 。。。하지만 이사벨은 여전히 이해되기 어렵다, 이 시대에는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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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2월 27일에 쓴 글입니다.

 

 

  몇 달째 드라마와 살고 있다. 외출하지 못하고 책도 읽기 힘드니 자연 드라마와 친해졌다. 물론 그 전부터 매니아는 아니라 해도, 봐야하는 드라마는 꼭꼭 챙겨보는 드라마 친구이긴 했다마는. 여하튼 VOD라는 것 덕분에 예전에 못 봤던 드라마, 띄엄띄엄 봤던 드라마, 열심히 봤던 드라마 할 것 없이 한꺼번에 좌~악 연결해 보면서 드라마를 보는 안목이 조금 훈련되었다는 나름의 성과도(ㅋㅋ) 있었다. 그렇게 지붕뚫고 하이킥도 다시 보고, 선덕여왕, 발리에서 생긴 일도 다시 봤다. 또 고현정이 강력계 형사로 나온 히트, 김현주가 변호사 역을 한 파트너 같은 숨어 있던 명작도 찾을 수 있었고, 미남이시네요나 성균관스캔들 같이 가슴을 콩닥거리게 할 줄 아는 로맨스물도 재미있게 보았다. 물론 ‘콩닥거리게 하기’라면 요즘은 시크릿 가든의 현빈을 따라올 놈이 없지만 말이다.

 시크릿 가든의 작가는 ‘영리한’이라는 말을 좀 듣는 편인 것 같은데, 가령 분명히 신데렐라 스토리인데도 인어공주를 차용해 와서 어짜피 뻔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와 스토리를 변주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따위의 호의적 평가를 얻어낸다. 잘생기고 알고 보면 인간성까지도 괜찮은 재벌 2세 혹은 3세가 가난한데다 특별히 예쁘지도 않고 성격도 별로인 여자를 멀쩡한 정신으로 죽자살자 좋아한다고 뻥치기에는 이제 너무 낯간지러울만큼 영악한 세상에 발빠르게(?, 한참 늦었다고 해야겠지만, 이왕 신데렐라 외길 멜로가 우리 드라마와 작가의 앞날이라면..) 대처하는 작가의 순발력이 아닌게아니라 뛰어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어공주는 몇달전 방영됐던 내 여자 친구는 구미호에서 먼저 차용되었다. 물론 구미호의 인어공주가 정통성을 따라갔다면(결과는 해피엔딩이었다만), 시크릿 가든의 인어공주는 변종이라고 할 수 있다. 자발적 인어공주가 아니라 하지원에게 인어공주가 되길 강요했다가 또 현빈 자신이 인어왕자가 되겠다고 나서기도 하고. 물론 해피앤딩이 아니라면 하지원이 결과적으로 자발적인 인어공주가 될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대목이 제일로 문제적인 것은 사실이다. 현빈은 자신의 계급적 위치 때문에 죽었다 깨어나도 인어왕자가 될 수 없다. 현빈이 거품처럼 꺼지는 것은 그냥 하지원을 버리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빠득빠득 자기가 인어왕자를 하겠다고 우긴다. 가지고 놀다 버리겠다는 말을 참으로 사회적 지위에 걸맞게도 품격있게 하신다. 우리 지원이는 그 놈의 사랑이 뭔지 차마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못하고 혹은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그 말에 홀라당 넘어가 버린다. 하긴 돈 많고 잘 생긴 놈이 허구헌날 찾아와 내가 인어왕자라고 하는데 안 넘어갈 정신 멀쩡한 여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시크릿 가든이 재미있기는 하다. 화려한 볼거리, 현란한 말솜씨에, 인어공주를 선고받은 신데렐라의 달콤쌉싸름함까지. 그렇거나말거나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오늘의 드라마는 시크릿 가든이 아니라 지난주에 종영한 즐거운 나의 집이다. 서설이 좀 심하게 길었다만 ㅠ.ㅠ

 

 즐거운 나의 집은 뜯어보는 재미가 쏠쏠한 드라마에 속한다. 스토리도 탄탄하고 인물들의 내면적 갈등도 흥미롭고 드라마의 메시지도 다면적이고 연기도 훌륭하다. 대중문화 평론가처럼 그런 것들을 다 아울러 드라마에 대한 평가를 내려야 할 부담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내가 맨 처음 이 드라마에 흥미를 갖게 된 지점에서 이야기를 할까 싶다.

 진서는 정신과 의사이다. 그녀가 쓴 책은 ‘나만 모르는 내 남편’ 이다. 진서의 남편 상현을 호시탐탐 유혹하는 윤희는 진서에게 이 책을 들먹이며 야릇한 웃음을 날린다. 즐거운 나의 집은 이런 면에서 보았을 때에는 ‘진서만 모르는 남편 상현’에게 얽힌 사건들로 구성된다. ‘나만 모르는 내 남편’ 을 쓸 때 정신과의사인 진서는 그 보편적 제목 속에 자신도 포함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 보편적 진실을 알고 있는 주체로서 자신만은 예외로 두었을까?

 이 드라마에서 진서가 정신과의사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신과의사로서의 진서는 드라마 속에서 그리고 드라마 밖 관객에게도,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든다.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의 역할을 맡은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진서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하나하나 드러난다. 진서는 남편 상현의 외도를 몰랐을 뿐 아니라 외도에 이르게 한 그 불안함의 정체와 그것이 자신에게 기인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윤희가 왜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는지도 몰랐다. 드라마 내내 윤희는 진서에게 말한다. 너는 아직도 모른다, 내가 왜 이러는지를. 진서는 남편 상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윤희가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윤희의 진정한 대상은 상현이 아니라 진서 자신이다. 윤희는 진서 때문에 상현의 곁을 맴돈다. 그것을 알아 내지 못하는 진서에게 윤희는 비웃는 듯 답답한 듯 속삭인다. 나는 정신과 의사라는 네 직업이 참 우스워. 그리고 심지어 환자로서 찾아 온 윤희의 남편 성은필에 대해서도 진서는 알지 못한다. 6개월간 일주일에 두어번 씩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왔다고 생각한 성은필마저 진서를 속이지만 진서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진서는 사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의 자리를 떠맡아 혼돈 속에 빠진다.

 그러나 이것이 진서가 무지를 은폐한 채 앎을 가장하고 있다는 식의 기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 로서의 진서의 위치 없이는 사건이 진행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서가 맡은 앎의 역할이 오히려 진서를 혼돈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진서를 둘러 싼 사람들은 진서가 그것을 알아 낼 것이라는 기대 혹은 믿음에 의해 자신의 욕망을 펼쳐 보인다. 윤희 역시 진서가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알아 낼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에 혹은 믿기 때문에 진서의 남편 상현을 유혹한다. 상현은 윤희의 은밀한 대상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단서이다. 진서와 윤희의 관계는 진서가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 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이 드라마는 불륜 치정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학재단의 비리를 대놓고 까발린다거나, 교수 사회의 권력 다툼과 시간 강사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거나, 강제로 학교를 빼앗은 친일파 일족이 독립운동가로 둔갑하여 재단이사장이 되었다거나 하는 사회 정치적 측면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갈등 구조가 전형적인 불륜 드라마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갈등을 일으키는 주요 인물인 윤희가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상현이 아니라 진서이다. 상현은 하나의 수단일 뿐 윤희가 진정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기를 원하는 대상은 오로지 진서이다. 윤희는 상현을 사랑한다기 보다는 진서를 부러워하고, 상현 때문에 아파하기 보다는 진서에게 입은 상처에 평생을 집착한다. 윤희는 상현의 사랑이 아니라 진서의 이해와 용서를 통해 비로소 안식에 든다. 그래서 즐거운 나의 집은 발리에서 생긴 일을 떠올리게 한다. 발리...의 하지원 역시 즐나집의 상현과 같이 궁극적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계기일 따름이다. 조인성과 소지섭의 갈등은 하지원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열등감과 동경에 기인한다. 어떤 소통도 불가능했던 발리의 두 남자는 비극을 맞았지만, 즐나집의 두 여자는 이해를 통해 화해하며 행복한 결말을 맞았다. 윤희는 진서를 통해 증오했던 아버지와 남편이 사실은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성은숙에게 이쁨받고 싶었다고 고백하며 평안하게 죽을 수 있었다. 즐거운 나의 집의 이 해피앤딩은 진서가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의 역할을 맡았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윤희는 진서가 자신을 알아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발리에서와는 다르게 즐나집은 처음부터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작년에 읽었던 책에는 이런 수수께끼가 있었다. 다섯 개의 모자가가 있고 죄수 세 명이 각각 하나씩 모자를 쓰고 있다. 둘러앉은 죄수들은 상대방의 모자는 볼 수 있지만 자신의 모자 색깔은 알 수 없다. 다섯 개의 모자는 흰색 세 개, 검은색 두 개인데 자신의 모자 색깔을 가장 먼저 맞춘 죄수는 감옥을 나갈 수 있다. 문제 나간다...

첫 째, 검은 모자 두 개, 흰색 한 개의 경우

흰색 모자를 쓴 죄수의 눈에 두 개의 검은 모자가 보인다. 답은 간단하다. 총 두 개의 검은 모자를 두 사람의 죄수가 각각 쓰고 있으니 자신의 모자는 당연 흰색이다. 이건 쉽다. ‘응시의 순간’ 만 있으면 된다.

둘 째, 검은 모자 한 개, 흰색 두 개의 경우

흰색 모자를 쓴 죄수 A의 눈에는 검은색 하나, 흰색 하나가 보인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자는 흰색일 수도 있고 검은 색일 수도 있다. 만약 자신의 모자가 검은색이라면 흰색 모자를 쓴 죄수 B의 눈에는 검은 모자 두 개가 보일 것이다. 그러면 그 즉시 죄수 B가 일어나 자신의 모자가 흰색일 것이라고 외칠텐데, 죄수 B가 주저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의 모자는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다! 조금 어렵다. 나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해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세 째, 흰색 모자 세 개의 경우

흰색 모자를 쓴 죄수 A의 눈에 흰색 모자 두 개가 보인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자는 흰색일 수도 있고 검은색일 수도 있다. 만약 내 모자가 검은색이라면? 죄수 B는 흰색 하나, 검은색 하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죄수 B는 죄수 A인 나 자신이 두 번째 경우에서 유추한 과정을 밟아 흰색 모자를 쓴 죄수C가 주저하는 것을 보고(최초의 지연) 자신의 모자가 흰색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일어나 외칠 것이다. 그런데 죄수 B는 움직이지 못한다. 세 명의 죄수 모두 움직이지 못하고 서로 쳐다보고만 있다. (두 번째 지연) 그렇다면 내 모자는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다. 딴 놈들이 일어나기 전에 얼른 일어나야한다! ... 만일 세 죄수의 지능이 모두 동일하다면 이 세 명의 죄수는 동시에 일어나 흰색이라고 외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사실 이 죄수들은 끝내 자신의 모자 색깔을 확신하지 못한 채 성급히 일어나 외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의 머뭇거림이 내 모자 색깔이 검기 때문에 일어난 최초의 지연인지, 흰 색이기 때문에 일어난 두 번째 지연인지를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수수께끼를 예시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에서 S1으로의 이행, 즉 내가 무엇인지에 관한 근본적 불확실성으로 축약되는 주체성의 공백으로부터 상징적 정체성의 떠맡음 -그것은 나다- 으로의 이행이다..... 우리는 촉박한 주체적 제스처를 통해 “우리가 그것인 그 무엇이 된다” 이 촉박한 동일화는 대상에서 기표로의 이행을 내포한다. 모자는 내가 그것인 대상이며, 내가 그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은 내가 “내가 대상으로서 그것인 그 무엇”에 대한 통찰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즉 $와 대상a는 위상학적으로 불가능하다) 내가 나는 하얀색이라고 말할 때 나는 나의 존재에 관한 불확실성의 공백을 메우는 상징적 정체성을 떠맡는다. 이 예기적anticipatory 앞지르기를 설명해 주는 것은 인과사슬의 비결정적 성격이다. 상징적 질서는 “불충족이유율 principle of insufficient reason”에 의해 지배된다. 상징적 상호주체성의 공간 내부에서 나는 내가 무엇인지를 단지 전혀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인데, 바로 이 때문에 나의 객관적 사회적 정체성은 주체적 예기를 통해 확립된다. 」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OO입니다”를 떠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떠맡음에 끝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히스테증자이다. 「 히스테리적 질문은 “왜 나는 당신이 나라고 하는 그 무엇인가요?” 이다. 즉 나는 주인이 내게 부과한 상징적 정체성에 의문을 던진다. 나는 “내 안에 있는 나 자신 보다 더한” 어떤 것, 즉 대상a의 이름으로 그것에 저항한다. 」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 주로 정신분석가가 그 역할을 담당하는, 역시 사실은 알고 있지 못한다. 단지 그 위치를 떠맡음으로 해서 질문을 던지는 자가 스스로 찾는 길의 조력자가 될 뿐이다.

 

 즐거운 나의 집은 역설이면서 동시에 사실적 진술이다. 이 드라마의 첫 회는 남편 상현이 진서와의 즐거운 한 때를 보낸 직후, 다급하게 걸려온 윤희의 전화를 받고 진서가 잠든 틈을 타 빗속을 뚫고 윤희에게 달려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회, 상현과 진서는 또 다시 행복한 식탁에서 웃음과 반찬과 사랑을 함께 나눈다. 즐거운 나의 집은 그렇게 위태로운 동시에 즐겁다. 사실 조금 충격적이게도 첫 회의 그 행복한, ‘즐거운 나의 집’이 화면에 펼쳐지기 이전에 이미 진서는 남편 상현의 외도로 위태로움을 겪고 있었다. 진서는 즐거웠지만 동시에 즐거운 척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윤희의 유혹으로 마치 즐거운 나의 집에 위기가 찾아 온 것 같았지만 사실 이 즐거운 나의 집은 이미 벌써 위기 위에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찾은 즐거운 집 역시 그것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윤서도 상현도 그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또 다시 즐겁고 그것은 영원히 즐거울 것처럼 그렇게 행복해 보인다.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우리는 아무도 모르지만 내가 그 누구임을 떠맡음으로 인해 우리는 아주 단단히 세상에 뿌리박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때때로 그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버려도 우리가 다시 세상에 뿌리를 내리는 이유는 그 땅이 그렇게 단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뿌리 없이 우리가 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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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22일 쓴 글입니다.

 

   비가 오면 하지원과 현빈의 영혼이 몸을 바꿔치기하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은 “나는 네가 되고 싶어.”로 요약되는 연애하는 자들의 욕망을 결정(結晶)한 판타지다. 만약 그리만 된다면, 첫 목련의 개화나 혜성의 꼬리를 목격하며 “당신이 여기 함께 있다면!”(그 많은 카드에 새겨진 “Wish You were Here”)이라고 안타까워할 일 따위는 없어지겠지. 나는 때때로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판단내릴 때의 기분과 사랑의 감정을 또렷이 구분하는 데에 곤란을 겪는다. 이를테면 우리는 아름답다고 느끼는 상대를 사랑하는 것일까, 사랑에 빠진 대상한테서 미를 찾아내는 것일까. 아예 그 사람이 되어버리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처럼 아름다움도 복제의 충동을 부른다. 예쁜 소녀를 보면 연필을 들어 그리고 싶고, 카메라로 찍어두고, 글로 옮겨놓고 싶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눈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손은 그걸 그리고 싶어 한다”고 했다. 시각은 그처럼 촉각으로 전이된다. 현빈과 하지원은 시선으로 더듬던 상대의 피부 안에서 사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아이를 갖는 일은, 아름다움을 복제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능이 이르는 극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실은 다음과 가깝다. 정작 당신이 그가 되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를 멈출 것이다. 레나타 살레클이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에 쓴 대로, 사랑은 제약 속에 있다. “의례 때문에 억제된 사랑을 찾으려는 건 쓸모없는 일이다. 사랑의 일체는 그 의례들 속에 있다.” 그가 지금 여기 없기에, 있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씨네21 김혜리 기자의 글이다.

“정작 당신이 그가 되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를 멈출 것이다.” 를 읽으며 나는 불현듯 영화 <아바타>를 떠올렸다. 그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나비족과 그들이 타고 다니는 이크란이 서로를 교감하는 방식이다. 나비족의 긴 머리채와 이크란의 꼬리(같은 것)를 서로 잇대면 그들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도 서로를 직관할 수 있다.

  언어가 없이도 서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일까. 언어는 우리를 충분하게 대변해 주지 못한다. 내 생각을 전달해야 하는 언어는 늘 나를 넘어서 있거나 혹은 뒤쳐져 있어 한 번도 나를 명중하지 못한다. 더구나 생각이란 것 자체가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니 나의 생각이 온전한 나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잘 해봐야 왜곡된 그 무엇을 전달할 뿐인 언어라는 굴절판 없이 나와 네가 직관으로 통한다면 세상에는 오해나 거짓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언어 없는 세계는 없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신 철학자도 있단다. 인간이 시를 쓰는게 아니라 시로 쓰여진 것이 인간이라는 말도 들은 것 같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언어 없는 인간은 동물의 한 종에 불과할 뿐이라고들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말하고 또 말하고 진짜로 다 드러내놓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도 우리는 도저히 정직하게 말할 수 없다. 언어가 우리를 대표하는(represent) 한 그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사랑의 불가해함은 바로 그것, 완전한 소통의 불가능함에 있다. “정작 당신이 그가 되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를 멈출 것이다.” 사랑은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 안에 있지만 그녀 보다 더한 어떤 X",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를 매혹하는 그 미지의 X에 기인한다고 한다. 이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결혼한 남녀면 누구나 3개월에서 3년 사이에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 안에 있던 그 미지의 X가 결국 방구나 트림, 똥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그 순간 그녀는 연인에서 진정한 가족으로 승화된다.

 

 

   그러므로 영혼을 바꾸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가 그녀가 된다고 해서, 그가 온전한 그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 자신이 스스로 온전한 그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녀 안에 있는 그녀 보다 더한 어떤 X’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영혼을 바꾸어 그녀가 된다고 해서, 그가 그녀 안의 X와 온전히 합일할 수 없다. 그 X는 오똑한 그녀의 콧날이나, 귀엽고도 슬픈 동그란 그녀의 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월세 30의 깨진 문짝과도 상관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혼이 바뀐 후에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다. “정작 당신이 그가 되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를 멈출 것이다.”의 불길한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불가능성이 그 안의 X를 X로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다시 그러므로, 우리는 판도라를 그리워할 필요가 없다. 완벽한 교감, 직관적 지성이 궁극적 행복인 그 곳에는 미지의 X가 없기 때문이다. 영혼의 불투명성이 없는 곳에는 사랑도 없다. 나비족과 이크란은 교감할 수 있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나비족들 역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곳은 홈트리를 통한 완벽한 상호교감이지 않은가     ... 다행히도 혹은 나비족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때문에 필연적으로, .... 그 홈트리는 파괴될 수밖에 없었지만.  더 이상 판도라는 없다.  인간이 그들을 발견한 한 혹은 이미 말씀이 있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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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월 17일에 쓴 글입니다.

 

 

나는 내가 잉태되는 순간을 볼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은 설정이다.

  터미네이터, 백튜더 퓨처 같은 벌써 오래된 영화들이 그런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고 요즘은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그런 형태를 가끔 볼 수 있다.

 

 

  작년에 나는 지인과 함께 방자전을 보았다. 대체로 야한 영화였음에도 팝콘이 떨어지자 지인은 잠에 빠져들었고, 나는 송새벽의 독특한 대사를 키득거리는 맛으로 그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저렇게 비틀어대기만 하고 뭐가 어쨌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도통 종잡을 수 없이 끝나 갈 즈음, 나는 이 영화가 기원에 관한 영화라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 양반 자제 이몽룡이 기생 딸 성춘향을 오매불망 사랑하여 정실로 맞아들인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그 속에서는 뭐든지 다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글자 그대로의 ‘이야기’- 허구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속의 non-fiction으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기원 설화 같은 것으로 말이다. 춘향전의 잉태를 지켜보는 방자전이라고나 할까. 방자는 자신의 사랑 혹은 삶에 의미meaning를 주기 위해, 이몽룡과 성춘향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춘향전을 만들어 낸다. 춘향전을 비틀어서 탄생한 것이 방자전이 아니라, 방자전이 낳은 것이 춘향전이다. 춘향전의 방자가 잉태되는 것을 지켜보는 방자전의 방자, 그것이 영화 방자전의 구조이다.

.... 라는 허무맹랑하지만 또 그럴 듯도 한 것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드라마 선덕 여왕은 조금 더 분명하게 자신의 잉태를 지켜보는 눈으로서의 자신이라는 그림을 보여 주었다. 드라마의 마지막, 막 신라에 도착한 어린 덕만은 슬픈 눈을 한 어떤 여인과 마주치는데, 그 여인이 바로 선덕여왕이다. 어린 덕만이 거쳐야 할 무수한 고난의 길은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바로 선덕 자신이 선택한 운명이라고 말하려는 듯이.

.....라는 생각도 했었다.

 

 

  어제 종방한 시크릿 가든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회 지도층과 소외된 이웃의 불꽃같은 사랑도 아니고, 심지어는 애 셋을 주렁주렁 낳고도 서로 좋아 죽는 그런 이야기를 작가는 저렇게 묘하게 현실화시키는구나....라고. 그 마지막은 그냥 내용 그대로 주원이 라임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 준다고 봐도 되고, 이 모든 이야기가 하이틴 로맨스물에 푹 빠진 여고생 라임의 한바탕 꿈이었다는 암시로 봐도 되고, 그건 보고 싶은 사람들의 취향이라는 듯이 작가는 그렇게 선심을 쓰는 듯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파리의 연인’에서 이미 뻥이요!를 써먹은 작가가 그걸 그대로 자기 표절하기는 아무래도 거시기할 것이고, 그렇다고 왕자님과 공주님은 행복하게 살았더래요 하기도 민망할 터인 참에 꽤나 훌륭한 샛길을 발견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기원에 집착하게 되는 걸까? 뭔가 우리를 설명해 줄 그럴듯한 서사가 없이는 삶이 너무 어리둥절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어디선가 뚝 떨어졌다. 그렇게 어느 날 문득 이건 너야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렇지만 나는, 선고받은 대로 그저 살았을 뿐이야, 씨앗이 자라서 열매가 되듯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그런 것과는 뭔가 다른 것이 분명히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나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프로그래밍 된 로봇이 아니다. 어쩌면 로봇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로봇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우리는 ‘의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무의식이라는 것도. 설령 로봇의 것이라 해도 이 의식은 프로그램과 별개의 것이다. 매트릭스 식으로 하자면 일종의 버그처럼.

  그래서 우리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유전자나 프로그램과는 다른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내가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뭔가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나의 자리가 있다. 내가 선택했다는 것, 나의 자유 의지였다는 것, 비록 그것이 운명처럼 보일지라도 언젠가,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 어느 때에 나는 나의 탄생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나의 운명은 나의 책임이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을 어찌할 수 없는 사람에게 삶은 그 자체로 부조리하다. 그러나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 한 자신의 삶은 자신의 책임이다. 왜 나는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가.... 그 대답은 칸트와 셸링에게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 삶은 실제로 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맞고, 선택한 후에 그 선택의 행위 자체가 무의식으로 가라앉았을 뿐이다.

 

  아직 나는 접수하지 못한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나의 삶이 과연 누구의 책임일 수 있을까, 나말고?

 

 

  ....... 드라마 시크릿 가든을 보면서 이런 연상을 줄줄이 했다. ‘내 삶의 자유로운 선택’ 은 나의 오랜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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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월 5일에 쓴 글입니다.

 

어느 순간 나는 이놈이 진짜 ‘개자식’ 이라는 걸 알았다.

 

  '개자식 이지훈’은 황정음이 핸폰에 저장한 이지훈의 이름이다. 연애초반의 아웅다웅이 끝나고 본격적인 사랑이 시작되었는데도 황정음의 핸폰이 울리면 어김없이 거기엔 ‘개자식 이지훈’이 떴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조금 지나선 왜 아직 ‘개자식’일까, 단순 애칭일까 슬쩍 궁금하기도 했는데 드라마의 후반부에 가자 왜 그가 끝까지 ‘개자식 이지훈’인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이지훈의 배신이다. 지훈은 뒤늦게 깨달은 세경의 사랑에 마음이 흔들린다. 물론 흔들리기만 했을 뿐 끝내 세경의 손을 잡지 못했지만 말이다.(그래서 더 나쁜 놈이기도 하다) 어쨌든 집은 쫄딱 망했고, 아빠는 쫒겨다니고, 엄마는 갈 곳도 없는 정음이 밤낮으로 알바를 뛰어 다니는 그 상황에 애인 지훈의 작태는 ‘개자식’ 의 그것임이 분명하다. 비록 정음이 사실을 숨기고 일방적 결별을 선언했다고 해도 말이다. 연인에게 모호한 이유로 이별을 당한 남자가 식음을 전폐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을 것 같은 시늉이라도 해야 할 판에 다른 여자의 사랑에 시선이 머문다는 것 자체가 어쨌든 정음에게는 개자식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퍼붓는 비속에 세경은 희미하게 웃으며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 “아저씨는 개자식이예요”라는 말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왜? 그렇게 멋지고 따뜻한 키다리 아저씨를..

 

  늦은 밤 어두운 부엌에 홀로 서서 자신을 맞는 세경을 지훈은 늘 안쓰러워한다. 세경은 영화 속의 프리티 우먼처럼은 아니지만, 지훈이 사 준 옷과 목도리, 핸폰 그리고 따뜻한 눈길 속에 사랑을 느낀다. 밥을 하면서도 빨래를 하면서도 청소를 하면서도 세경은 지훈을 생각하며 붕 뜬 마음으로 행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훈의 따뜻함은 거기까지. 세경을 소개시켜 달라고 조르는 동료 의사들에게 지훈이 화를 내며 말한다. “자신 있어? 그 애 우리 집 가정부야. 동생 데리고 어렵게 사는 애야. 불쌍한 애 제발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냅둬.” 세경은 현실을 차갑게 깨닫는다. 물론 지훈은 여전히 따뜻하다. 세경의 검정고시를 도와주고, 세경에게 열심히 노력해서 신분 상승을 하도록 격려한다. 그러다가 문득 지훈은 깨닫는다. 세경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자신 역시 세경을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나 지훈은 세경을 붙잡지 못한다. 아이티로 이민을 가겠다는 세경을 붙잡으려던 지훈은 내밀던 손을 멈춘다. 아마도 지훈이 소리내어 말하지 못했지만, 식모 세경을 책임지고 함께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경이 자신의 세상으로 편입되지 않는 한 세경과 함께할 수는 없다. 그런데 세경은 말한다. 그 신분의 사다리를 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타지 않겠다고. 비록 패배자의 자기변명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세경은 자신의 의지로 지훈의 세상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한다. 자기가 그 사다리를 한 칸 한 칸 오르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이 그 사다리의 아래 칸에 남게 될 것이라고. 세경은 사다리로 이루어진 세상 대신 가진 것 없이도 신애가 자신처럼 쪼그라들지 않고 살 수 있는 아이티를 선택한다. 그것이 아이티로 가야할 이유다. 그러나 아이티로 가지 않을 가장 큰 이유인 아저씨 지훈이 여기 남아 있다. 그래서 세경은 말한다.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모든 말들을 마지막에 또박또박 쏟아내며 스스로 조금 자랐다고 웃는 세경은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라고 지훈에게 말한다. 그리고 시간은 그대로 멈춘다.

 

 

  지훈은 이른바 PC, Political Correctness 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정음의 서운대도 서울대와 차별하지 않고(따라서 정음이 학교를 속인 것도 문제 삼지 않는다), 신애의 도둑질(해리의 인형을 훔쳤다)도 약자에 대한 배려로 감싸주고, 세경을 식모라고 차별하지 않으며 오히려 계급 상승의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검정고시를 위해 공부를 가쳐준다) 그런데 이러한 PC적인 태도에는 완강한 하나의 고집이 있다. 자신의 위치, 자신의 태도가 표준이고 기본이라는 고집이 그것이다. 이것을 정치적으로 비판한 글을 잠깐 인용하면 이렇다.

 

「...정치적 올바름 속에서 타자의 폭력은 그것이 아무리 잔인하고 괘씸한 것이라도 그들을 추방하고 억압했던 우리 자신의 ”기원적 죄“(백인의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행위)에 대한 반작용일 뿐이다. 우리 백인들은 죄를 지었고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 타자는 단지 희생자로서 대응한(reaction)것뿐이다. 우리는 벌 받아 마땅하며 타자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도덕의 세계에(도덕적 책임) 살고 있지만 타자는 사회학적 세계에(사회적 이유) 산다. 물론 이런 자기 책임과 자기 비하의 가면 뒤에 뭐가 있는지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와 같은 참으로 윤리적인 마조히즘의 입장은 바로 그 형식 안에서 인종주의를 반복한다. 우리 백인은 부정적인 ‘백인의 짐’을 지고 있지만 그런 만큼 역사의 주체이다. 이에 반해 타자는 우리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반응할 뿐이다. 달리 말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도덕적 자기 비하의 진정한 메시지는 만약 우리 백인이 민주주의와 문명의 모델이 되지 못한다면 최소한 악의 모델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PC적 태도가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전제는 자신이 주체이고 역사의 모델이라는 것이다. 이때 타자의 반응은 글자 그대로 re-action일 뿐 action이 될 수 없다. 지훈이 아무리 사려 깊고, 따뜻하고, 관용적이라고 해도 지훈은 세경에게 사다리를 올라와야 한다고 말 할 수 있을 뿐이다. 지훈은 사다리가 없는 아이티 같은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그 곳은 세경이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는 절망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거기서 넌 무엇을 할 거야?”라고 묻는 지훈은 세경이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대학을 가는 것 외에는 의미 있는 삶이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세경은 자기 말대로 그 동안 좀 자랐다. 사다리 없는 세상을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래서 지훈은 “개자식 이지훈”이 맞다. 엄친아 같은 PC적 태도의 이면은 바로 “개자식” 인 것이다.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굳게 믿으면서도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소통한다고 생각하는 태도야말로 진정으로 개자식적인 태도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 지훈의 세계는 끝이 났다는 듯 세경은 시간을 멈추고 지훈은 안경 아래 눈물을 흘린다. 그 정지된 화면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지훈의 눈물이 무엇이었는지는 각자 생각해 볼 것이지만 말이다.

  지훈에게 너무 억울한 것일까? 그렇다면 시크릿 가든의 주원으로 돌아가 볼까? 그 전에 다시 인용문을 하나 가져와 보자. 알라딘의 로쟈에게서 빌려 온 것이다.

 

  「...남녀관계에서 정치적 올바름이란 서로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니 못생긴 슈렉과 아름다운 공주는 어울리는 커플이 아니다. 못생긴 슈렉이 아름다운 왕자로 변신한다면 완벽한 조정이 되겠지만 이 영화에서 좀 비틀어서 아름다운 공주를 슈렉에게 어울릴 만한 못생긴 소녀로 만들었다. 덧붙여 슈렉은 현대의 사회적 관습과 대중문화에 대한 풍자와 여러 가지 뒤집기도 시도한다. 하지만 지젝의 평가는 냉정하다. “우리는 이런 전치와 재기입을 전복이 가능한 것으로 너무 쉽게 칭송하는 대신에 또한 슈렉을 또 하나의 저항 장소로 격상시키는 대신에 이런 모든 전치를 통하여 동일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에 초점을 둬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런 전치와 전복의 진정한 기능은 정확히 전래의 이야기를 우리의 포스트모던 시대와 관련시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요점은 슈렉을 전복적이면서 저항적인 영화로 칭송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변형과 뒤집기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론 낡은 이야기를 똑 같이 반복하고 있기에 그렇다. 단지 그런 구닥다리 이야기를 포스트모던 시대에 맞게 재조정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새로운 서술로 대체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낡은 것을 대체할 새로운 서사다.」

 

가난한 여자를 신데렐라로 만들기를 거부하는 남자, 자신이 그 여자의 인어 공주가 되겠다는 남자, 그 여자의 가난을 이해하기 위해 ‘왜 지구의 절반은 가난한가?’를 읽는 남자.... 는 여전히 슈렉만큼도 못된다. 여자의 가난 속으로 들어가는 대신 가난한 여자의 머리속으로만 들어갔다가 다시 안전하게 자신의 부유한 세계로 돌아오는 왕자가 아닌가, 주원은. 그러니 그 변형과 뒤집기조차 진정한 전치와 전복이 될 수 없고, 그러니 또한 여전히 낡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단지 조금 색다르고 감미롭게...

 

그러므로 지훈을 끝까지 “개자식 이지훈”으로 만들어 버린 지붕 뚫고 하이킥이야말로 어쩌면 낡은 것을 대체할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은 아닐까? 왕자와 공주님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도 아니고, 괴물과 뚱뚱한 소녀는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도 아니고, 거품처럼 인어공주만 사라진 슬픈 이야기도 아니고, 개자식 이지훈은 자신이 가르치려던 식모의 손에 이끌려 알 수 없는 어둠의 세계로 눈물을 흘리며 떠났습니다 혹은 끌려갔습니다로 끝이 난 이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그 역시 성급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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