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1월 5일에 쓴 글입니다.
어느 순간 나는 이놈이 진짜 ‘개자식’ 이라는 걸 알았다.
'개자식 이지훈’은 황정음이 핸폰에 저장한 이지훈의 이름이다. 연애초반의 아웅다웅이 끝나고 본격적인 사랑이 시작되었는데도 황정음의 핸폰이 울리면 어김없이 거기엔 ‘개자식 이지훈’이 떴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조금 지나선 왜 아직 ‘개자식’일까, 단순 애칭일까 슬쩍 궁금하기도 했는데 드라마의 후반부에 가자 왜 그가 끝까지 ‘개자식 이지훈’인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이지훈의 배신이다. 지훈은 뒤늦게 깨달은 세경의 사랑에 마음이 흔들린다. 물론 흔들리기만 했을 뿐 끝내 세경의 손을 잡지 못했지만 말이다.(그래서 더 나쁜 놈이기도 하다) 어쨌든 집은 쫄딱 망했고, 아빠는 쫒겨다니고, 엄마는 갈 곳도 없는 정음이 밤낮으로 알바를 뛰어 다니는 그 상황에 애인 지훈의 작태는 ‘개자식’ 의 그것임이 분명하다. 비록 정음이 사실을 숨기고 일방적 결별을 선언했다고 해도 말이다. 연인에게 모호한 이유로 이별을 당한 남자가 식음을 전폐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을 것 같은 시늉이라도 해야 할 판에 다른 여자의 사랑에 시선이 머문다는 것 자체가 어쨌든 정음에게는 개자식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퍼붓는 비속에 세경은 희미하게 웃으며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 “아저씨는 개자식이예요”라는 말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왜? 그렇게 멋지고 따뜻한 키다리 아저씨를..
늦은 밤 어두운 부엌에 홀로 서서 자신을 맞는 세경을 지훈은 늘 안쓰러워한다. 세경은 영화 속의 프리티 우먼처럼은 아니지만, 지훈이 사 준 옷과 목도리, 핸폰 그리고 따뜻한 눈길 속에 사랑을 느낀다. 밥을 하면서도 빨래를 하면서도 청소를 하면서도 세경은 지훈을 생각하며 붕 뜬 마음으로 행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훈의 따뜻함은 거기까지. 세경을 소개시켜 달라고 조르는 동료 의사들에게 지훈이 화를 내며 말한다. “자신 있어? 그 애 우리 집 가정부야. 동생 데리고 어렵게 사는 애야. 불쌍한 애 제발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냅둬.” 세경은 현실을 차갑게 깨닫는다. 물론 지훈은 여전히 따뜻하다. 세경의 검정고시를 도와주고, 세경에게 열심히 노력해서 신분 상승을 하도록 격려한다. 그러다가 문득 지훈은 깨닫는다. 세경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자신 역시 세경을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나 지훈은 세경을 붙잡지 못한다. 아이티로 이민을 가겠다는 세경을 붙잡으려던 지훈은 내밀던 손을 멈춘다. 아마도 지훈이 소리내어 말하지 못했지만, 식모 세경을 책임지고 함께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경이 자신의 세상으로 편입되지 않는 한 세경과 함께할 수는 없다. 그런데 세경은 말한다. 그 신분의 사다리를 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타지 않겠다고. 비록 패배자의 자기변명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세경은 자신의 의지로 지훈의 세상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한다. 자기가 그 사다리를 한 칸 한 칸 오르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이 그 사다리의 아래 칸에 남게 될 것이라고. 세경은 사다리로 이루어진 세상 대신 가진 것 없이도 신애가 자신처럼 쪼그라들지 않고 살 수 있는 아이티를 선택한다. 그것이 아이티로 가야할 이유다. 그러나 아이티로 가지 않을 가장 큰 이유인 아저씨 지훈이 여기 남아 있다. 그래서 세경은 말한다.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모든 말들을 마지막에 또박또박 쏟아내며 스스로 조금 자랐다고 웃는 세경은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라고 지훈에게 말한다. 그리고 시간은 그대로 멈춘다.
지훈은 이른바 PC, Political Correctness 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정음의 서운대도 서울대와 차별하지 않고(따라서 정음이 학교를 속인 것도 문제 삼지 않는다), 신애의 도둑질(해리의 인형을 훔쳤다)도 약자에 대한 배려로 감싸주고, 세경을 식모라고 차별하지 않으며 오히려 계급 상승의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검정고시를 위해 공부를 가쳐준다) 그런데 이러한 PC적인 태도에는 완강한 하나의 고집이 있다. 자신의 위치, 자신의 태도가 표준이고 기본이라는 고집이 그것이다. 이것을 정치적으로 비판한 글을 잠깐 인용하면 이렇다.
「...정치적 올바름 속에서 타자의 폭력은 그것이 아무리 잔인하고 괘씸한 것이라도 그들을 추방하고 억압했던 우리 자신의 ”기원적 죄“(백인의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행위)에 대한 반작용일 뿐이다. 우리 백인들은 죄를 지었고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 타자는 단지 희생자로서 대응한(reaction)것뿐이다. 우리는 벌 받아 마땅하며 타자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도덕의 세계에(도덕적 책임) 살고 있지만 타자는 사회학적 세계에(사회적 이유) 산다. 물론 이런 자기 책임과 자기 비하의 가면 뒤에 뭐가 있는지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와 같은 참으로 윤리적인 마조히즘의 입장은 바로 그 형식 안에서 인종주의를 반복한다. 우리 백인은 부정적인 ‘백인의 짐’을 지고 있지만 그런 만큼 역사의 주체이다. 이에 반해 타자는 우리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반응할 뿐이다. 달리 말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도덕적 자기 비하의 진정한 메시지는 만약 우리 백인이 민주주의와 문명의 모델이 되지 못한다면 최소한 악의 모델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PC적 태도가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전제는 자신이 주체이고 역사의 모델이라는 것이다. 이때 타자의 반응은 글자 그대로 re-action일 뿐 action이 될 수 없다. 지훈이 아무리 사려 깊고, 따뜻하고, 관용적이라고 해도 지훈은 세경에게 사다리를 올라와야 한다고 말 할 수 있을 뿐이다. 지훈은 사다리가 없는 아이티 같은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그 곳은 세경이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는 절망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거기서 넌 무엇을 할 거야?”라고 묻는 지훈은 세경이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대학을 가는 것 외에는 의미 있는 삶이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세경은 자기 말대로 그 동안 좀 자랐다. 사다리 없는 세상을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래서 지훈은 “개자식 이지훈”이 맞다. 엄친아 같은 PC적 태도의 이면은 바로 “개자식” 인 것이다.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굳게 믿으면서도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소통한다고 생각하는 태도야말로 진정으로 개자식적인 태도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 지훈의 세계는 끝이 났다는 듯 세경은 시간을 멈추고 지훈은 안경 아래 눈물을 흘린다. 그 정지된 화면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지훈의 눈물이 무엇이었는지는 각자 생각해 볼 것이지만 말이다.
지훈에게 너무 억울한 것일까? 그렇다면 시크릿 가든의 주원으로 돌아가 볼까? 그 전에 다시 인용문을 하나 가져와 보자. 알라딘의 로쟈에게서 빌려 온 것이다.
「...남녀관계에서 정치적 올바름이란 서로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니 못생긴 슈렉과 아름다운 공주는 어울리는 커플이 아니다. 못생긴 슈렉이 아름다운 왕자로 변신한다면 완벽한 조정이 되겠지만 이 영화에서 좀 비틀어서 아름다운 공주를 슈렉에게 어울릴 만한 못생긴 소녀로 만들었다. 덧붙여 슈렉은 현대의 사회적 관습과 대중문화에 대한 풍자와 여러 가지 뒤집기도 시도한다. 하지만 지젝의 평가는 냉정하다. “우리는 이런 전치와 재기입을 전복이 가능한 것으로 너무 쉽게 칭송하는 대신에 또한 슈렉을 또 하나의 저항 장소로 격상시키는 대신에 이런 모든 전치를 통하여 동일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에 초점을 둬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런 전치와 전복의 진정한 기능은 정확히 전래의 이야기를 우리의 포스트모던 시대와 관련시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요점은 슈렉을 전복적이면서 저항적인 영화로 칭송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변형과 뒤집기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론 낡은 이야기를 똑 같이 반복하고 있기에 그렇다. 단지 그런 구닥다리 이야기를 포스트모던 시대에 맞게 재조정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새로운 서술로 대체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낡은 것을 대체할 새로운 서사다.」
가난한 여자를 신데렐라로 만들기를 거부하는 남자, 자신이 그 여자의 인어 공주가 되겠다는 남자, 그 여자의 가난을 이해하기 위해 ‘왜 지구의 절반은 가난한가?’를 읽는 남자.... 는 여전히 슈렉만큼도 못된다. 여자의 가난 속으로 들어가는 대신 가난한 여자의 머리속으로만 들어갔다가 다시 안전하게 자신의 부유한 세계로 돌아오는 왕자가 아닌가, 주원은. 그러니 그 변형과 뒤집기조차 진정한 전치와 전복이 될 수 없고, 그러니 또한 여전히 낡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단지 조금 색다르고 감미롭게...
그러므로 지훈을 끝까지 “개자식 이지훈”으로 만들어 버린 지붕 뚫고 하이킥이야말로 어쩌면 낡은 것을 대체할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은 아닐까? 왕자와 공주님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도 아니고, 괴물과 뚱뚱한 소녀는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도 아니고, 거품처럼 인어공주만 사라진 슬픈 이야기도 아니고, 개자식 이지훈은 자신이 가르치려던 식모의 손에 이끌려 알 수 없는 어둠의 세계로 눈물을 흘리며 떠났습니다 혹은 끌려갔습니다로 끝이 난 이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그 역시 성급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