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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초상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7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12년 10월
평점 :
나는 헨리 제임스가 누군지 몰랐다. 지인이 ‘제임스’, ‘제임스’ 할 때마다 제임스 조이스가 떠올랐으며, ‘제임스’란 단어가 이름도 되고, 성도 되는 그들의 문화가 영 낯설 뿐이었다. 헨리 제임스는 19C 미국의 대표 작가라는데 우리나라에 번역된 작품이 얼마 없었다. 도서관에서 찾은 <여인의 초상>은 총 세권 중 한권이 분실되고 없었다. 1997년 ‘인화’ 출판사에서 발간한 그 책은 이미 절판 상태였다. 나는 친구를 통하여 어느 대학 도서관을 통해 이 빠진 한권을 마저 구해서 어렵게 <여인의 초상> 전권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한 4년인가 5년쯤인가 전이었다.
작년 말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7,298권으로 <여인의 초상>이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 연이어 <레미제라블>도 5권이 완역되었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열풍을 타고 빅토르 위고의 원작도 엄청나게 팔렸다. 물론 성급하게 5권을 한꺼번에 구매한 독자들이 그 길고 지루한 책을 다 읽었을지 조금 의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도 그 덕에 <레미제라블>을 읽을 수 있었다. 영화에 감동한 새언니와 오빠를 부추겼는데, 오빠는 아직도 2권의 워털루전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고, 그걸 본 새언니는 입시공부라도 할 마음의 준비가 되기 전에는 손을 댈 수 없노라 선언했다.
<레미제라블>은 1862년, <여인의 초상>은 1881년에 출간되었다. 20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지만, 물론 프랑스와 영국(혹은 미국)이라는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이 두 소설의 배경과 주제는 완전히 다르다. <레미제라블>이 프랑스혁명의 혼돈기를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여인의 초상>은 대륙의 상류사회에 편입하다 좌초하는 미국 상류층 아가씨의 쓰라린 인생담이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소설을 가져다 놓고, 왜 이렇게 다르냐고 따진다면 어처구니가 없겠지만, <레미제라블>을 읽은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다시 <여인의 초상>을 읽으니 자연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거의 동시대를 사는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유럽을 휩쓸고 있는 혁명인데. 혁명이란 그저 ‘red'가 주는 숭고한 아름다움이나 감동이 아니라, 그 시대의 대다수가 얼마나 가난하고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야 했는지에 대한 분노이자 웅변인데. 1861년, 영국에는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도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헨리 제임스가 무슨 죄가 있을까만, 하여튼 이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여인의 초상>이 흥미롭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여인의 초상>을 한마디로, 속되게 표현한다면 이렇다. 지적이고 독립적인 정신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아름다운 미국인 처녀가 유럽에 건너가서 우연찮게 막대한 유산을 받고 거의 ‘완벽한 여인’이 되었으나,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믿음으로 인해, 스스로 최악의 선택을 하고 인생을 쫄딱 망쳤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이 여인은 어떤 결심을 하고 끔찍한 남편에게 되돌아간다.
우리 고향 천박한 속담으로 ‘지 눈까리 지가 찔렀다.’고 하는 딱 그런 상황이다. 순진하고 착하고 똑똑한 처녀가 흔히 겪는 비극이다. 세상물정 모르고 당했다가 앗 뜨거 할 때는 대부분 이미 늦었다. 문제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에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은 환타지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는 ‘그 깨달음 이후’의 ‘여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물론 대중적이면 대중적일수록 여인은 수퍼우먼이 되어 성공하고, 그 성공으로 복수한다는 스토리에 가깝다. 어떻게 갑자기 수퍼우먼이 될 수 있는지 그 비결은 항상 궁금하지만, 뭐 어쨌든 대강 그렇게 되어 해피앤딩이 되면, 환타지든 뭐든 속이 조금 개운한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화장실 갔다가 물 안 내리고 나온 느낌은 안 드는 정도는 된다. 그러면 또 우리는 그 소설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뭐가 됐든 까맣게 잊어버리고, 새로운 판타지를 맞이할 수 있다. 현실은 영원히 유예된 채로.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의 결말은 기이하다. 이사벨은 남편에게 속았다는 것을 안 후, 사촌 오빠 랠프의 임종을 위해 로마에서 런던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사벨은 랠프의 장례를 치르고 난후, 오래 전부터 그녀에게 구혼해왔던 워버튼경과 캐스파 굿우드를 물리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간다. 왜?
작가 헨리 제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1,000쪽에 가까운 장편 소설의 마지막까지 이사벨은 혼란 속에 갈팡질팡하는데, 딱 두 페이지를 남겨놓고, “그녀는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녀 앞에 똑 바른 길이 보였던 것이다.” 는 문장이 나온다. 그리고 다음 날 굿우드가 이사벨의 친구로부터 이사벨이 로마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는 장면으로 이 긴 소설은 끝이 난다. 이사벨은 도대체 어떤 길을 보았던 것일까?
물론 ‘인습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꿈꾸는 한 여인이 현실의 시련 속에서 성숙해 가는 과정을 정교하게 그린 19C 미국 소설의 걸작’, ‘20C 현대 소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모범 작품’ 이니 만큼, 그 분석과 해석에 관한 엄청나게 훌륭한 글들이 많이 있을 것이고, 그 각각에 이사벨의 ‘똑바른 길’에 대한 모범 답안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모른다. 다만 민음사판 작품해설은 살짝 읽어보았다. 작품해설을 쓴 사람이 옮긴이인지 민음사 편집진인지 누군지 명기되어 있지 않아 모르겠으나, 이 책의 결말에 대한 해설은 이렇다. “이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과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성숙된 자아에 도달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 자신의 진정한 초상이 완성되는 길인 것이다.” 본문이나 해설이나 모호하긴 마찬가지다.
현대적 관점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지적인 여성의 선택은 당연히 ‘이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혼이 스스로 선택한 결혼에 대한 책임 회피라는 논지는 설득력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벨의 선택이 ‘똑바른 길’ 일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1880년대와 2010년대의 차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소설 속 주변 인물들의 태도로 볼 때, 1880년대 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이사벨에게 로마로 돌아가지 말 것을 권유한다. 그렇다면 이사벨은 도대체 왜 돌아간 것일까?
로마로 돌아간 이사벨이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고 싶다. 아마도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사벨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남편과 대립할 것이고, 남편으로부터 의붓딸 팬지를 지키려고 할 것이다. 이사벨은 결코 인습으로 굳어진 유럽을 상징하는 남편 오스몬드를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헨리 제임스의 몇몇 소설 중 <데이지 밀러>와 <아메리칸>은 고풍스럽고 아름답지만 폐쇄적인 유럽의 벽에 부딪혀 좌초하는 자유롭고 활달하고 싱싱한 아메리칸들의 실패담이다. 이사벨 역시 실패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극소차이’라고 불리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아무 차이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차이. 실패한 선택 속에 당황하며 좌절하는 삶과 실패한 선택임을 인정하고 싸우며 좌절하는 삶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이 ‘극소차이’일 것이다. 나는 물론 이사벨이 로마로 돌아가는 것만이 선택에의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사벨이 이혼을 하고 독립하는 것 역시 자신의 실패한 선택에 대한 당당한 인정일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드러난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가 바로 선택에 대한 책임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 태도란 타인의 눈으로는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벨의 선택 앞에 어리둥절한다. ‘암흑의 집, 침묵의 집, 질식의 집’ 으로 다시 걸어 들어간 이사벨 앞에, 캐스파 굿우드처럼.
그러나 이사벨은 그 집 앞에서 아마도 다른 어떤 것을 보았으리라, 이전에도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그 어떤 것을. 。。。하지만 이사벨은 여전히 이해되기 어렵다, 이 시대에는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