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가까이 위장약을 먹고 있다.

김치도 못먹고, 밀가루 음식도 안먹고,

밥하고 김, 밥하고 계란말이, 시금치죽, 양배추죽, 미역국죽

같은 것들만 먹고 있다.

이제 속쓰려 새벽에 일어나는 일도,

하루 종일 꺽꺽거리며 가슴을 치는 일도,

물을 먹고도 목이 메는 일도

없어져 간다.

 

두 달 동안 살이 많이 빠졌다.

20대 이후 없어져 버린 허리 라인도 생기고,

바지가 줄줄 흘러내릴만큼 허리 둘레도 줄었다.

무엇보다 몸이 가벼워졌다.

 

조금만 먹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많이 먹으나 조금 먹으나 활동하는 데 별반 차이가 없다.

한창 속이 힘들 때는 입맛도 없었다.

규칙적인 식습관을 위해 때가 되면 의무적으로 찾아 먹었을 뿐이다.

이제 상태가 좋아지니 입맛이 돌아온다.

먹고 싶은 것도 생기고,

한 번 입에 넣으면 위가 당기는지도 모르고 먹으려고 한다.

과식이 제일 나쁘다.

줄어든 위의 용량 보다 많이 먹으면, 바로 탈이 난다.

문제는 시간 차다.

위는 항상 입 보다 늦다.

입에서 당기는대로 먹고 나면, 뒤늦게 위가 신경질을 낸다.

 

나이를 먹으면서 체념하는 것들이 늘어간다.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몸에 맞춰 몸을 달래며 산다.

위가 무능해지면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하고,

허리가 삐긋거리면 일 욕심을 버려야 하고,

이가 흔들거리면 딱딱한 것을 먹지 말아야 하고,

눈이 침침하면 책 보는 것을 삼가야 하고...

 

마음은 날아가는데, 몸은 기어가는 그 불일치의 고통이

이제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다.

아스팔트 틈새로 피어나는 들풀처럼

고통 속에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 간다.

 

 

오늘은 치즈케잌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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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레스토랑』과『라캉 카페 』세트가 도착한 것이 8월 7일이니

두 달이 넘어서야 겨우 한 권을 다 읽었다.

『헤겔 레스토랑』이 895쪽에서 끝나고, 하드 커버니 꽤 무거운 편이다. 그래서 늘 하는 것처럼 이렇게 분철했다.

 

 

책을 나누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그냥 문구용 칼로 몇 번 그으면 잘 떨어져 나온다. 깨끗하게 잘라내면 낱장으로 떨어져 나오는 것도 거의 없이 잘 붙어 있다. 괜찮은 잡지 사진 뜯어내서 표지 대신 입히면 작은 책 한권이 된다. 이렇게 나눠 세 권을 만들었다.

 

 

다 읽고 나면 넓은 테잎으로  다시 붙여 표지 속에 끼워 넣으면 된다. 물론 조금 더 두툼해져 표지 바깥으로 삐죽 튀어나오지만, 가지고 다니며 읽기에는 좋다. 책을 아끼는 분들이 보시면 눈살을 찌푸리지만 뭐 ㅎ. 책으로 서가를 꾸밀 욕심이나 취미나 심미안 같은 것은 예전에 버렸거나 애초에 없었다.

 

 

『헤겔 레스토랑』은 생각 보다는 잘 읽혔다. 너무 어렵지 않을까 잔뜩 긴장했지만, 지젝의 다른 철학서 보다 더 어렵지는 않았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르기』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시차적 관점』보다 차라리 쉬운 편이다. 그래도 지젝의 책들을 꼼꼼이 읽어 온 덕에 이제 꽤 익숙해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쉽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고 ㅎ;

 

각 장과 절들의 제목을 하나로 엮어서 전체적인 논지를 그려가며 읽고 싶었지만 여전히 그것은 어렵다. 가령 <6장, 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에서 지젝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고 하면, 여전히 앞이 캄캄하다. 왜 지젝은 '구체적 보편성' → '헤겔, 스피노자....그리고 히치콕' →  '헤겔적 주체' → '절대적 앎' → '이념의 변비' → '나, 즉 동물'  이란 순으로 6장의 각 절들을 구성했는지, 이것이 헤겔의 "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를 설명하는데 어떤 개연성을 갖는지, 그런 것들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한 문장 한 문장의 의미를 쫒아가는 것도 벅차 그런 생각은 애초에 해보지도 않았지만, 조금 익숙해지고 나니 앞, 뒤도 좀 맞춰보고  싶고, 제목을 보면 요점도 생각나고 그랬으면 좋겠다 싶다. 욕심이지만 ㅎ.

 

이 책은 원래 『Hegel : Less than nothing』이란 한 권의 책을 두 권으로 나누어  출간한 것이라, 『라캉 카페 』는『헤겔 레스토랑』의 7장에 이어 8장부터 14장까지로 구성되어 있다.  라캉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라캉을 통해 헤겔을 읽는 책이 될 것이다. 그래서 『라캉 카페 』를 올 해 안에 읽고 나면, 이제 지젝의 눈이 아닌 다른 철학자들의 눈으로 헤겔을 읽어보고 싶다. 아직 헤겔 원전을 읽을 자신은 없고. 예전에 『정신현상학』을 읽을 때, 참 무참했다. 책장을 넘기기는 하는데, 도통 이해를 못했다. 좋은 입문서나 비평서를 좀 더 읽고 다시 도전해야 할 듯 하다. 지젝이 해석하는 헤겔은 정통이 아니라고 그렇게들 비판하시니, 정통 해설은 무엇인지도 궁금하고.

 

갑자기 어릴 때 엄마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책 읽으면 밥이 나오니 돈이 나오니!"   그 때는 엄마만 몰랐지 나올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탕이 되어 대학가고 알바하고 취직하고 했으니까. 전공과 직접 관련은 전혀 없지만. 그런데 지금은 그렇다. 이렇게 지젝을 그리고 헤겔을 읽어 어디에 쓸까.... 남편이 가끔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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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07_

헤겔의 한계들

 

 

1. 하나의 목록

 

  헤겔을 ‘총체성’ 의 철학자로 본다면, 헤겔은 ‘비전체’라는 라캉의 개념을 사유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헤겔적 총체성의 진정한 본성을 고려한다면 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헤겔적 총체성은 “전체적인 것 더하기 그것의 모든 ‘증상’을, 그것의 틀에 맞지 않는 초과를, 그것의 정합성을 무너뜨리는 적대성 등등을 가리킨다.”

  어쨌거나 헤겔이 사유할 수 없다고 알려진 일련의 목록이 있다. “반복, 무의식, 중층결정, 대상a, 수학소/문자(과학과 수학), 언어, 적대성(시차), 계급투쟁, 성적 차이가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렇죠, 헤겔은 할 수 없었죠.”라고 딱 부러지게 긍정할 수 없게 만드는 미묘하고 지각 불가능한 뭔가가 있다.

  이 절의 내용은 “그렇죠.” 다음에 지젝이 덧붙이는 “하지만....” 들이다. 헤겔이 무능해 보이기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헤겔에 대한 비판들에 이미 헤겔의 대답이 맹아의 형태로 들어 있다는, 뭐 대충 그런 말인 듯하다.

 

 

2. 자기지양된 우연성으로서의 필연성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최종성의 관점’ 을 비판했다. 현재를 마치 과거인 것처럼 바라본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지젝은, 헤겔의 관점이 “정확히 미래가 과거로 열려있음을 재도입하는 것을, 존재했던 것을 생성 과정 속에서 파악하는 것을, 지금 존재하는 필연성을 낳았던 우연적인 과정을 보는 것” 이라면 어쩔래? 라고 응수한다.

  여하튼 이쯤에서 지젝의 주 레파토리 중 하나인 ‘벤야민의 혁명 개념’이 나온다. : ‘과거의 반복을 통한 구원’

 

  「마르크스의 요지는 기본적으로 자코뱅파의 터무니없는 혁명적 희망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열광적인 해방의 수사학은 단지 천박한 상업적 자본주의의 현실을 수립하기 위해 역사적인 ‘이성의 간지’가 이용한 수단일 뿐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처럼 배신당한 철저한 해방적 잠재력들이 어떻게 혁명의 기억을 계속 사로잡는 역사적 ‘유령들’로 끈질기게 살아남아 그러한 잠재력의 실현을 요구하는지 -그리하여 후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또한 이러한 과거의 유령들까지 구원해 했다-를 설명하는 것이 마르크스가 기본적으로 하려 했던 것이다. 유령 같은 형태로 지속되는 과거에 대한 이러한 대안적 버전들이 역사적 과정의 존재론적 ‘열림’을 구성하는데... p827」

 

  프랑스 혁명을 반복하자고 할 때, 그 반복을 부르주아 집권을 되풀이 하자고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자본주의 수립에 의해 배신당한 자유·평등·박애를 구원하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레닌을 반복하자고 할 때 그 반복은 우리가 경험했던 소비에트 체제가 아니다. ‘commons’ 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지젝이 Ooccupy Wall Street' 현장에서 역설했던 그런 ‘공통적인 것’ 말이다. 과거가 고정된 채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반복함으로써, 과거를 구원하는 것은 미래다. 그것이 벤야민의 혁명 개념이다. 그러므로 자유와 필연의 관계는 다시 사고되어야 한다.

 

  「상식적인 의미에서 자유와 필연의 ‘변증법’은 마르크스의 『브뤼메르 18일』의 서두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과 같은 의미로 양자의 접합 방식을 파악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상황 하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 하에서 만든다.” 우리는 전체적으로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우리는 자유의 공간을 갖고 있지만 객관적 상황에 의해 부과된 좌표들 내부에서 그러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견해는 우리의 자유가 소급적으로 객관적 조건을 창조하는 것(‘정립하는 것’)을 고려하지 못하고 만다. 그러한 조건은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행위의 전제로서 출현한다. p829~830」

 

  과거는 반복에 의해 소급적으로 구성되고, 그렇게 구성된 과거가 바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 즉 필연이다.

 

  「그렇다면 필연과 우연에 대한 헤겔적 변증법의 핵심적 통찰은 무엇인가? 헤겔은 우연성의 필연성 - 즉 이념이 필연적으로 진정 우연적인 현상들 속에서 어떻게 외화되는지- 을 연역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측면은 종종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소홀히 되고 있는데) 그와 정반대의, 이론적으로 훨씬 더 흥미로운 명제를, 즉 필연성의 우연성이라는 명제를 발전시킨다. 즉 ‘외적인’ 우연적 현상으로부터 ‘내적인’ 필연적 본질로의 진전, 자기반성을 통한 현상의 자기내화를 묘사할 때 헤겔은 그것을 통해 어떤 선-재하는 내적 본질, 이미 거기 존재하고 있던 것의 발견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 구조화되는 ‘수행적’ 과정을 묘사한다. 헤겔 본인이 『논리과학』에서 표현하고 있는 대로, 반성 과정에서 잃어버린 또는 숨겨진 근거로의 복귀 자체가 그것이 복귀하고 있는 것을 생산한다. p831~2」

 

  필연성의 우연성, 또한 반복과 마찬가지로 소급성과 관련된다. ‘근거’가 먼저 있고 그것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복귀라는 행위 자체가 ‘근거’를 소급적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필연성은 우연성, (자기)부정의 방식으로 자신의 진리에 도달한 우연성의 ‘진리’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헤겔이 변증법적 과정에서 사물은 항상 이미 전에 있었던 것대로 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분명히 그러한 이야기를 완전한 존재론적 폐쇄에 대한 주장으로 읽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변증법적 운동 속에서 출현하는 것은 단지 이미 잠재적으로 존재하던 것, 또는 존재하던 것의 완전한 실현일 뿐이다. 하지만 이 동일한 진술은 또한 훨씬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읽힐 수도 있다. 즉 변증법적 과정에서 사물은 ‘항상 이미 전에 있었던 것’이 된다. 즉 어떤 사물의 ‘영원한 본질’은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출현하며, 열린 우연적인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 - 영원히 지나간 본질은 변증법적 과정의 소급적 결과이다. 칸트가 사유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소급성이었으며, 헤겔 본인도 오랫동안 힘들게 고생한 끝에 그것을 개념화할 수 있었다. p834」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근거 즉 필연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연성의 소급적 결과라는 것이 이 절에서 주~욱 역설되고 있는 지젝의 주장인 것 같다. 프로이트 역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데.

 

  「내적 필연성은 증상의 우연성을 통해서만 자신을 분절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즉 이러한 필연성은 오직 그러한 분절화를 통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도 또한 필연성은 말 그대로 우연성보다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억압과 억압된 것의 복귀는 하나의 동일한 과정의 앞뒤라는 말로 라캉이 암시하고자 했던 바로 (억압된 내용의) 필연성은 (증상들 속에서 그것의 분절화의) 우연성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비판자들은 첫 번째 측면만, 즉 우연적 표현들을 지배하는 내적 원리로서의 필연성만 강조하고, 두 번째 측면, 즉 이 필연성 자체가 우연성에 달려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다름 아니라 필연성의 형태로 끌어올려 진 우연성에 다름 아니라는 것은 무시된다. p839」

 

 

3. 자기 관계 맺기적 부정의 이형태들

 

  말도 참 어렵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자기 관계 맺기적 부정’ 이란 끙끙 읽고 나니, ‘부정의 부정’ 이다. 그 다양한 형태들의 예로 ‘라비노비치-모체’, ‘아도르노-모체’, ‘이르마-모체’를 꼽고 있는데, 요약하긴 그렇고 직접 읽어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4. 형식적 측면

 

  「들뢰즈의 가장 급진적인 반헤겔적 주장은 이 순수 차이와 관련되어 있다. 즉 헤겔은 동일성 또는 모순의 지평 바깥에 놓인 순수 차이를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p857」

 

  순수 차이, 극소 차이, 최소 차이. 뭐가 됐건 헤겔에게 차이는 모순이고, 이 모순은 변증법을 통해 해결된다는 것이 통념이기 때문에 순수 차이는 가장 반헤겔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젝은 여기에 순순히 수긍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헤겔적 반박은 아마 이러할 것이다. 즉 ‘순수한’, 잠재적 차이는 현실적인 자기동일성을 가리키기 위한 이름 자체가 아닐까? 그것은 현실적인 동일성을 구성하고 있지 않은가? 보다 정확하게,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순수 차이는 현실적 동일성의 잠재적 토대 또는 조건이다. 즉 존재자는 그것의 잠재적 토대가 순수 차이로 환원될 때 (오직 그럴 때만) (자기)동일적인 것으로 지각된다. 라캉식으로 표현하자면, 순수 차이는 잠재적 대상(라캉적 대상a)의 보충과 관련되어 있다. p858」

 

  순수 차이는 아마 들뢰즈의 개념인 듯한데, 그의 대표작 『차이와 반복』과 관련된 진술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최소 차이는 순수 반복 속에서 출현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대상a의 보충과 관련 있다는 말은 이렇게 적용된다.

 

  「라캉을 헤겔로부터 분리시키는 차이는 최소 차이, 작고 거의 감지할 수 없는 특징이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헤겔 대 다른 인물이 아니라 헤겔과 그의 유령 같은 분신이다. - 헤겔로부터 라캉으로의 이행에서 우리는 하나의 헤겔에서 또 다른 하나의 라캉으로 이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헤겔+그의 대상a이다. p856」

 

  이것들이 ‘순수차이가 자기동일성의 토대이자 조건’이라는 까다로운 언명을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여기서는 그냥 헤겔과 들뢰즈가 예상 외로 훨씬 가깝다는 것을 수긍한 척하고 넘어가자. 여하튼 차이는 반복 속에 출현하므로, 새로운 것 역시 오직 반복으로부터 출현한다. 그런데 이 새로운 것은 사물의 현실적 측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오직 사물의 현실적 측면과만 관련된 변화들은 정말 새로운 어떤 것의 출현이 아니라 오직 기존의 틀 내에서의 변화일 뿐이다. - 새로운 것은 오직 현행적인 것의 잠재적 토대가 변할 때만 출현하며, 이 변화는 정확이 어떤 것이 현행성 속에서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는 반복 형태로만 일어난다. 다시 말해 사물들은 A가 B로 변형될 때가 아니라 A가 현실적 속성들과 관련해 정확히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알아차릴 수 없게 ‘완전히 변할’때 정말로 변한다. 이 변화가 최소 차이며, 이론의 과제는 주어진 다수성의 장에서 이러한 최소 차이를 빼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빼내기는 또한 헤겔적 지양 또는 부정의 부정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p859」

 

  이제 헤겔과 들뢰즈의 관계가 조금 더 분명히 드러난다. 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부정의 부정은 정·반·합이 아니다. 첫 번째 부정은 사물의 현실적 측면과 관련된 변화다. 기존의 틀 내에서 내용만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부정 즉 부정의 부정은 첫 번째 부정의 내용을 다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현실적 측면은 그대로 둔 채 형식적 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부정으로 보았던 것 혹은 불가능으로 보았던 것을 단순히 관점을 바꾸어 긍정성으로 혹은 가능성으로 보는 것이 부정의 부정이다. 현실적 속성들과 관련해서는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틀을 보지 않고 현실적 속성들만 보는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틀 자체를 뒤집어 보는 눈에는 모든 것이 완전히 뒤바뀐다. 이것이 헤겔적인 지양, 부정의 부정이며 들뢰즈의 극소 차이다. 그러나 물론 들뢰즈와 그 의 후계자들은 들뢰즈의 반복과 차이가 헤겔의 지양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헤겔 이후는 오히려 “지양의 지배로부터의 반복의 해방” 이다.

 

  한편 헤겔과 프로이트 사이의 관계는 훨씬 복잡하다. 비슷하다고 했다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했다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통에 결론이 뭔지 헛갈리지만, 결국 헤겔은 ‘죽음 충동’을 사유할 수 없다고 보는 것 같다. 부정의 부정 보다 더 끈질기고 무시무시한 것이 아마 죽음 충동인 듯하다.

 

  「헤겔과 프로이트의 유사성을 위치시켜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수준에서이다. 만약 헤겔이 이성의 한가운데서 비이성(모순, 모든 합리적 질서를 동요시키는 대립물들의 미친 춤)을 발견한다면 프로이트는 비이성(말실수, 꿈, 광기)의 한 가운데서 이성을 발견한다. 헤겔에게서 일자는 그것의 상실의 소급적 효과로, 잃어버린 일자로의 복귀 자체가 그것을 구성한다. 그리고 프로이트에게서는 억압과 억압된 것의 복귀가 일치하며, 억압된 것은 그것의 복귀의 소급적 효과이다. p862」

 

  이성과 비이성의 일치, 그리고 소급적 효과가 헤겔과 프로이트에게 공통적이다. 뿐만 아니라 더 흥미로운 것은 ‘무의식’ 의 공통성이다. 헤겔에게도 프로이트처럼 무의식의 개념이 작동한다. 그러나 이 둘은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이러한 프로이트적 무의식과는 분명히 반대로 헤겔적 무의식은 형식적이다. 그것은 언표된 내용 속에서는 보일 수 없는 언표의 형식이다... 즉 말실수 속에서 드러나는 우연적인 ‘병리적’ 욕망이 아니라 주체가 부지불식중에 의지하는 보편적인 상징적 형식 속에 있다. 헤겔의 무의식은 자기의식 자체의 무의식, 자기 자신의 필연적 비투명성, 자신이 직면하는 내용 속에서 자기 자신의 형식을 필연적으로 간과하는 것이다. 무의식은 특수한 내용의 보편적 형식이다. 진리는 내가 의미하려는 바가 아니라 내가 말하는 것 속에 들어 있다는 헤겔의 말의 의미는 진리는 특수한 의도와는 반대로 말의 의미의 보편성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p862」

 

  그러나 프로이트적 무의식 또한 형식적 측면을 갖고 있다. 프로이트는 꿈의 진정한 비밀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 자체에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해몽을 통해 꿈의 내용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지, 즉 꿈 사고가 무엇인지 알아내려 하지만, 꿈의 진짜 비밀은 꿈-작업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프로이트와 헤겔의 무의식이 동일하지는 않다고 지젝은 다시 말한다. 그러므로 보통 질문은 ‘헤겔은 프로이트적 무의식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이지만 그 역인 ‘프로이트는 헤겔적 무의식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역시 필요하다고 한다.

 

  「헤겔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갈등, 투쟁, ‘자기모순’, 내재적 적대성의 사상가이다. 하지만 헤겔과는 분명히 반대로 프로이트에게서 갈등은 자기모순이 극단화되어 자기 은폐되는 식으로, 그리하여 새로운 차원이 출현하는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갈등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모순’은 정점에 이르지 않으며, 오히려 지연되며, 타협의 형성물이라는 형태로 일시적으로 멈춘다. 이러한 타협은 ‘부정의 부정’ 이라는 헤겔적 의미에서의 ‘대립물의 통일’이 아니며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실패한 부정, 방해된, 탈선된, 왜곡된, 뒤틀린, 옆길로 새버린 부정, 일종의 부정의 클리나멘이다. 다시 말해 헤겔을 빠져나가는 것은 중층결정이다. 헤겔적인 변증법적 과정에서 부정성은 항상 철저하거나 철저화되며 정합적이다. p866~7」

 

  뭔가 프로이트보다 헤겔이 낫다는 것도 같고, 반대로 프로이트가 헤겔보다 낫다는 것도 같다. 부정의 클리나멘 즉 실패한 부정이 부정의 부정 보다 못하다는 것 같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헤겔은 중층결정을 사고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헤겔과 프로이트가 어쨌건 이 구불구불 복잡한 길을 계속 따라갈 필요가 있을까 살짝 짜증이 나지만 기왕에 온 것 계속 가보자.

 

  「따라서 프로이트는 추가적 비틀기, 나사로 다시 한 번 꽉 조이는 것으로써, 즉 부정을 철저화 한다는 , 그리하여 그것이 자기 관계 맺기에 도달하도록 한다는 헤겔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좌절시키고 부정적인 것의 완전한 전개에 장애물을 도입한다는 의미에서 ‘부정 자체’를 부정해버림으로써 헤겔의 부정을 한층 더 복잡한 것으로 만든다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할까? 부정성과 관련해 헤겔과 프로이트 사이의 차이는 헤겔이 부정성을 자기 파괴적인 극단으로까지 철저화 하는 반면 프로이트는 부정성을 중간에서 차단하는 타협-형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로 환원될 수는 결코 없다. p870~1」

 

  프로이트가 ‘타협’ 한다고 볼 수는 없단다.

 

  「여기서의 주요한 요점은 프로이트에게서 부정성의 완전한 전개를 막는 장애물들의 수렁은 추상적인 개념적 규정들에 저항하는 풍부한 경험적 현실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부정적인 것의 개념적 힘에 대한 현실의 외적 초과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부정성’ 그 자체,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이 가리키는 수준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헤겔적 변증법의 부否를 보충하는 프로이트적인 Ver-시리즈(억압, 폐제, 부정, 부인)는 단지 그러한 부의 복잡화인 것이 아니라 보다 철저한 부, 헤겔을 빠져나가고 순수 반복에 대한 헤겔 이후의 여러 상이한 버전들에 흔적을 남긴 부정성의 핵심을 가리키고 있다. p871~2」

 

  속되게 말해 프로이트가 이긴 건가? 여하튼 조금만 건너뛰거나 정신을 놓아도, 뭐라는 건지 알기 힘들게 둘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고, 여하튼 헤겔 부정성의 핵심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바로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이라는 말씀인 듯.

 

 

5. 지양과 반복

 

  헤겔이 죽음충동을 사유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헤겔이 직접 주제화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충동이란 헤겔적 변증법의 핵심이다.

 

  「즉 헤겔 본인에게는 접근 불가능한 헤겔적 변증법의 핵심은 헤겔 이후의 단절에서나 가시적으로 된 반복적인 (죽음)충동이다. 하지만 변증법의 토대에 변증법과 변증화될 수 없는 그것의 핵심 사이의 긴장이 존재하지 말아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의미에서 죽음충동 또는 반복강박은 헤겔이 채 주제화하지 못한 전제인 부정성의 핵심이다. p876」

 

  헤겔 이후의 단절에는 두 측면이 있다. “개념적 매개와는 대립적인 것으로서의 현실적 존재의 실정성에 대한 주장과, 지양이라는 관념론적 운동 속에는 담길 수 없는 순수 반복에 대한 주장이다.” 첫 번째가 훨씬 주목받았지만, 진정한 철학적 혁명은 두 번째에 있다.

 

  「반복은 직접적인 적극적 긍정의 봉쇄에 기반하고 있다. 우리가 반복하는 것은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p877」

 

 

6. 반복에서 충동으로

 

  라캉 정신분석의 틀에서 설명할 때 지젝은 늘 ‘욕망에서 충동으로’ 를 강조했다. 그런데 이 절의 제목은 ‘반복에서 충동으로’이다. 헤겔의 부정의 부정은 순수 차이와 상관적이고, 차이는 반복을 통해 출현한다. 그러므로 이 제목은 헤겔에서 라캉으로의 이행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7장은 ‘2부 헤겔’의 마지막 장이며, 8장부터는 ‘3부 라캉’이 시작된다. 한국판으로 하자면 ‘헤겔 레스토랑’ 에서의 식사가 끝나고 ‘라캉 카페’에서의 차 한 잔이 준비되어 있다. 잔뜩 집어넣은 배속이야 물론 소화도 못 시킨 채 부글거리지만, 여하튼 이제 마무리 할 때이다.

 

  「실제로 욕망과 반대로 충동은 규정상 만족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충동 속에서 만족은 대상에 도달하려는 반복된 실패 속에서, 대상 주위를 반복해서 빙빙 도는 가운데 획득되기 때문이다. 밀레를 따라 여기서 결여와 구멍 사이의 구분을 도입해야 한다. 결여는 공간적이며 공간 내부의 공백을 가리키는 반면 구멍은 보다 철저한 것으로 그러한 공간적 질서 자체가 (물리학의 ‘블랙홀’에서처럼) 무너지는 지점을 가리킨다. 바로 거기에 욕망과 충동의 차이가 있다. 즉 욕망은 자신의 구성적 결여에 근거하는 반면 충동은 구멍 주위를, 존재의 질서 속의 간극 주위를 빙빙 돈다. p882」

 

  칸트에서 헤겔로의 전환과 욕망에서 충동으로의 전환은 비슷한 면이 있다. 욕망은 만족될 수 없다. 물 자체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에게 물 자체는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간극 자체이다. 충동의 목적은 표적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 표적 주위를 반복해서 도는 것 자체에 있기 때문에 만족될 수 있다. 자본의 순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본으로서의 돈의 순환이 목적 그 자체가 되는 순간 충동의 양식에 들어간다. 가치의 확대는 오직 부단히 갱신되는 이러한 운동 내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충동은 어떤 특수한 개인에 속하지 않는다. - 오히려 자본의 직접적 ‘대리인들’ (자본가들 자체, 최고 경영자들)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드러내야 한다. p883」

 

  욕망과 충동의 관계는 라캉의 대상a를 통해 더욱 분명히 살펴 볼 수 있다.

 

  「...욕망의 대상-원인으로서의 대상a의 경우 우리는 원래 잃어버렸으며, 자신의 상실과 일치하며, 잃어버린 것으로 출현하는 대상을 갖게 되는 반면 충동의 대상으로서의 대상a의 경우 ‘대상’은 직접적으로 상실 그 자체이다. - 욕망으로부터 충동으로의 전환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대상으로부터 대상으로서의 상실 그 자체로 이동한다. p884」

 

  인간적인 차원은 바로 이 충동에 있다.

 

  「인간들은 그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초과해서 즐기려는 이상한 충동에 사로잡히며, 눈에 띄며 사물의 일상적 흐름을 탈선시키는 잉여에 열정적으로 매달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본적 역설은 특별히 인간적인 차원 -본능과는 대립적인 충동- 은 원래는 단지 부산물에 불과했던 것이 자율적 목표로 격상될 때 출현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좀 더 ‘성찰적인 것’ 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인간은 동물에게는 아무런 고유한 가치도 없는 것을 직접적인 목표로 지각한다.... 우리는 동일한 제스처를 반복하며, 거기서 만족을 찾는 폐쇄된, 자기추진적인 고리에 사로잡히게 될 때 ‘인간’ 이 된다. p886~7」

 

  지젝은 헤겔의 한계를 단순히 무시해 버려도 되는 어떤 것으로 버려두지 않는다. 헤겔 이후의 사상인 키르케고르-프로이트적인 순수 반복에 대해서 말하자면, 오직 헤겔적 문제 틀 안에서만 제대로 위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헤겔은 단순히 무시될 수 없다. 헤겔을 무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몹시 고되게 헤겔을 돌파한 연후에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지젝은 말한다. “헤겔을 반복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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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다하다 별 거지같은 수를 다 쓴다 싶었다. 캔디 이야기의 관건은 별 볼일 없는 캔디에게 왕자님이 폭 빠지게 되는 그럴듯한 사연을 만드는데 있다. 캔디가 얼마나 밝고 예쁘고 씩씩하건 캔디 그 자체는 평범한 여자들의 범주 안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캔디’라는 일반명사의 정의이자, 시청자들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다만 왕자님의 트라우마가 캔디를 빛나는 태양으로 만들뿐이다. 캔디의 별것 없는 특성은 트라우마로 왜곡된 왕자님의 눈에만 태양처럼 빛난다. 그러므로 캔디 드라마의 승패는 왕자님의 트라우마와 캔디의 특성이 얼마나 딱 맞아 떨어지느냐에 있다. 이 똑떨어지는 궁합을 맞추는 것이 우리 시대 로맨스 드라마 작가의 과업이다.

 

  드라마 〈주군의 태양〉은 궁합 맞추기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도 있고, 갈 데까지 간 한계를 드러냈다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을 배반하고 죽어버린 옛 사랑과 그 죽은 귀신을 볼 수 있는 캔디. 왕자 주군의 트라우마와 주군 앞에 귀신을 데리고 나타난 캔디는 똑 떨어져도 너무 똑 떨어지게 맞아 떨어진다. 남은 건 귀신을 매개로 서로 알콩달콩 밀고 당기는 작업의 정석이다. 소지섭의 어색한 듯 멋진 자태와 공효진의 자연스러워도 너~무 자연스러운 캔디는 더 보탤 말도 뺄 말도 없게 만든다. 거기다 홍자매라면 진짜 더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현란한 기교에 가슴은 콩콩거리고, 목울대는 따끔 거리고, 눈물은 소리 없이 잘도 흐른다. 가끔 정신이 살짝 돌아 올 때면 우리가 귀신까지 봐가며 신데렐라 스토리에 넋을 놓는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되나 싶기도 하지만 70여분의 시간은 잘만 지나간다. 어린 시절 불량식품처럼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바로 그 맛이다. 박근혜 정권이 4대악으로 규정한 그 불량식품, 어른들도 끊어야 되지 않나 싶지만, 과연 불량식품 근절이 가능할까? 입 안에 착착 감기는 그 맛이라도 없으면 세상은 너무 고달프고 막막한데 말이다.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전부 그 나물에 그 밥은 아니다. 요즘은 신데렐라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그 ‘캔디’는 사실 신데렐라 스토리의 계보로 보면 엄청난 도약이다. 점진적인 발전이라기보다는 한 번에 바꾸어 버린 변이, 양자역학의 전자처럼 도약하는 것이다. 잠깐 삼천포로 빠져서 EBS 다큐프라임의 <빛의 물리학> 은 진짜 흥미롭다. 학생 때 보았더라면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좋았을 텐데, 이제는 따라가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너무 재밌다. 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보기에 최상의 교재가 아닐까 싶다. 거기에 양자역학이 나온다 ㅋ. 다시 신델렐라로....

  고전적 신데렐라는 그냥 착하고 순종적인 여자다. 왕자님은 왕자라는 이름자체가 그 실체를 보증해주는 완전한 존재고. 신데렐라는 순종의 대가로 마녀의 도움을 받아 왕자님과 행복하게 맺어진다. 캔디는 환경에 순응하지 못한 변이형이다. 예쁘지도 않고, 순종적이지도 않다. 그런 캔디가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신데렐라가 되기 위해서는 왕자님 또한 변종이 되어야 한다. 테리는 귀족 아버지의 혼외아들이자 배우 엄마의 숨겨진 자식이다. 고전적 왕자가 되기에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상처받은 왕자다. 그런데 살아남은 것은 이들 변이다. 다아윈은 진화가 점진적인 발전이 아니라 변이라고 했다든가 어쨌다든가, 들은풍월이므로 정확성은 없다. 하여튼 변종 신데렐라와 왕자가 살아남아 드라마 세상을 평정했다. 환경이 변했기 때문이리라. 왕국이 아니라 민주공화국 아니 시장 자본주의에서 생존우위는 괴팍하고 불안한 왕자와 잘난 것은 없어도 자존심 하나는 드센 캔디에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캔디 드라마는 여전히 신데렐라 드라마다. 도약이 있긴 했으나 좌표 자체를 뒤바꿔 놓는 혁명적인 변화는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항이 다시 자본주의에 흡수되어 은밀하게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것과 같이 신데렐라에 대한 탈주 역시 다시 신데렐라의 자장 안으로 포섭되었다. 괴물이나 설국열차 같은 봉준호의 영화가 그렇듯이 말이다. 내용은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있으나 그것이 만들어지고 상영되는 방식은 자본주의의 첨단 기획과 마케팅에 의해 이루어진다.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신데렐라들은 결국 하나같이 사장님의 직함을 단 왕자님의 품으로 달려간다. 자본주의 시대에 딱 맞는 로망이다. 책을 사랑하는 왕자님, 정의로운 왕자님 따위의 왕자님은 없다. 왕자님의 핵심은 돈이다. 사랑과 행복을 보증하는 은밀한 손은 자본이다. 뭐 딱히 은밀할 것도 없지만.

  시청률이 높았고 화제가 무성했던 캔디 드라마들은 이 신데렐라의 자장 안에서 튀어 오르거나 그것을 벗어나려고 애를 써온 것은 사실이다. 일 년에도 몇 편씩이나 만들어지는 신데렐라 드라마에 질리지 않게 시청자를 사로잡으려면 딱히 다른 생각이 없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이긴 하다. 생각나는 것들을 꼽아보면 <내 이름은 김삼순> <시크릿 가든> <청담동 앨리스> 정도다.

 

 

  내 기억으로 <내 이름은 김삼순>의 가장 큰 특징은 ‘이라이자’의 변화다. 사랑을 방해하는 이라이자가 나쁜 년에서 그럴 만한 사연이 있는 괜찮은 년으로 변신했다. 그것이 드라마에서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내가 봤던 드라마가 그렇게 많다고 할 수는 없으니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여하튼 삼식이를 버리고 간 이라이자 희진의 배신은 배신이 아니라 일종의 배려였다. 그러나 사랑은 이미 변했다. 기억은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삼순은 말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돌아온 희진이 삼식이의 기억 속 희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희진이 변한 것이 아니다. 삼식이 희진 속에서 보았다고 믿었던 그 무엇은 희진이 가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랑은 그렇다고 한다. 사랑을 매개하는 것은 서로가 가진 것이 아니라, 서로가 가지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눈에는 보이는 그 무엇, 그 X라고. 삼식의 기억 속에서 그 X는 자라고 커졌지만, 돌아온 희진에게서 삼식은 더 이상 그 X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그 X는 삼순에게 가 있었기 때문이다. X는 상대방에게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신의 눈이 보고자 하는 그 무엇이니까.

 

  <시크릿 가든> 은 서로의 영혼을 바꾼 드라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과 내 영혼이 하나가 되면서 둘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각자의 영혼이 바라보는 것은 마주하고 있는 각자의 몸이다.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상대의 눈에 비친 자기를 바라본다. 어쩌면 이 드라마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라 나르시시즘에 가깝다.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길라임의 꿈이라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버지를 잃은 소녀가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왕자님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끔찍한 욕망이 잠재된 꿈이다. 왕자님의 트라우마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므로, 그가 라임을 보는 순간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다음은 그저 신데렐라 스토리의 정석을 밟기만 하면 된다. 외톨이가 되어 장례식장 바닥에 쪼그려 잠들어 버린 소녀의 이 잔혹 동화는 애처롭다. 왕자님도 없이 혼자 헤치고 나가기에 소녀의 미래는 너무 어두울 것이기 때문이다. 소녀는 꿈속에서도 두렵다. 인어공주가 되어 사라져 주어야 할까봐. 세상이 자신마저 빼앗으려 할까봐. .... 뭐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니 생각이 이상한 곳으로 뻗친다. 이렇게 봐도 신데렐라 드라마가 맞기는 맞다. 가장 비참한 곳에서 꿀 수 있는 유일한 꿈, 그것이 신데렐라 스토리다. 그저 드라마라고 생각하며 보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이미 신데렐라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이 아니고는 더 이상 꿈꿀 그 무엇이 여기, 오늘에는 없기에.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것이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겠는가?

 

  <청담동 앨리스>는 신데렐라의 자장 밖으로 가장 멀리 도약하려 했던 신데렐라 드라마다. 신데렐라는 흑조가 된다. 그물을 치고 왕자님을 유인한다. 이 시대에 순박한 신데렐라는 없다고 말한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더 이상 꿈이 아니라 계략의 산물이다. 왕자님이 지배하는 냉혹한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욕망을 버릴 수도 없다면, 신데렐라가 바뀌어야 한다. 세경과 인찬은 세상의 벽에 부딪힌다. ‘노력이 나를 바꾼다’ 는 신조로,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 온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빚더미와 시간제 비정규직뿐이다. 인찬이 먼저 사랑을 버리고, 세경은 버려진 사랑에 오히려 안도하며, 신데렐라가 되기로 결심한다. 윤주의 약점을 잡아 신데렐라 되기 작업을 꾸미고, 그 작업은 실패하지만, 뜻하지 않은 우연이 혹은 예정된 필연이 결국에는 세경을 왕자님의 품으로 데려다 준다. 드라마는 내내 신데렐라 스토리를 전복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안전하게 신데렐라 스토리 안에 머물며 행복하게 끝난다. 세상은 바뀌지 않고, 왕자님은 건재하고, 신데렐라를 만들어 주는 것은 여전히 계략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이다.

 

 

  <주군의 태양>은 캔디가 아니라는 태양의 반복된 부정에도 불구하고, 너무 착실한 신데렐라 드라마다. 신데렐라 스토리에 로맨틱 코미디를 버무려 놓았으니 어차피 갈 곳이 없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 보여준 사랑에 대한 고찰도 없고, <시크릿 가든>의 역설도 없다. <청담동 앨리스>의 전복적 시도는 애당초 싹수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 달달하고 사랑스러워 흠뻑 빠졌다 깨어나면 그것으로 좋은 그런 신데렐라 스토리다. 이대로도 ‘좋지 아니한가?’ 이지만, 자기 변주만 되풀이하기에는 홍자매의 능력이 참으로 출중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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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간주곡 3

왕, 천민, 전쟁 ..... 그리고 섹스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 중 하나가 헤겔의 ‘왕’ 이다. 프랑스는 왕의 목을 잘라버렸는데, 헤겔은 군주제를 지지했다. 그것도 멍청한 왕, 그냥 서명만하는 왕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질서가 확고하게 잡혀있어 법률로 모든 것이 처리되는 국가에서 왕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왕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왕의 혈통 때문이다. (하긴, 프랑스의 루이 16세도 그가 한 일 때문이 아니라 그가 왕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죽었다.)

  순전히 형식적인 이 결단의 주체는 라캉의 주인기표와 같다고 지젝은 설명한다. 주인기표 없이 하나의 장場은 누벼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하필 왕이란 말인가? 그것이 헤겔의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젝은 왜 그것을 누누이 강조할까? 헤겔주의자이기 때문에? 물론 지젝이 현대에 군주제를 부활시키자는 의미로 되풀이 ‘왕’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왕’은 여전히 의문스럽다. EBS 라디오 인문학 강의를 들으니,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제일 덕목이 ‘지식’ 이라고 했다는데, 헤겔은 그런 것 하나도 필요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대통령에게 도대체 지식은 필요한 걸까, 아닐까?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정치제제는 18~9C 헤겔이 생각한 군주정에도 미치지 못하고, 차라리 16C 피렌체 공화국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헤겔과 플라톤은 왕에 대해 전혀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톤은 철인-왕을 최고로 생각했다. 현명한 지식을 가진 왕이 통치하는 국가가 최고의 정치체이다. 헤겔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흔히 군주제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군주가 교양을 제대로 갖추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국가의 정점을 차지할 만한 값어치가 없을 수도 있으니, 국가가 어떤 운세에 처하느냐는 군주로 인한 우연에 좌우된다느니 하면서 그와 같은 상태를 이성적인 상태로 현실에 존재하게끔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등의 주장이 내세워지곤 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성격의 특수성에 중점을 두는 이러한 전제는 지금 여기에 전혀 합당치 않다. 실로 완성된 국가 조직에서는 오직 형식적 결단을 행하는 정점만이 중요할 뿐이며, 오직 군주의 최측근에 있는 단 한 사람만이 ‘그렇습니다’ 라는 한마디로 끝마무리하는 점을 찍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국가의 정점에 이르러서는 결코 성격의 특수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확고한 질서가 잡혀 있는 군주제에서는 객관적인 면은 오로지 법률에만 귀속되어 있고 군주는 다만 이 법률에 주관적인 입장에서 ‘나는 의지한다’라는 것을 덧붙이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p762~3」

 

  헤겔의 ‘실로 완성된 국가 조직’ 이 무언지 모르지만, 조금 짐작은 된다. ‘확고한 질서’ 가 잡혀 있고 ‘객관적인 면은 오로지 법률에 귀속’ 되어 있으니, 사실 왕은 있으나마나다. 그런데도 헤겔은 왜 굳이 ‘덧붙이기만’ 하는 왕의 존재를 역설할까?

 

  라캉적 용어로 말하자면 S2와 S1의 차이이다. 플라톤의 철인정치가 전적으로 S2 즉 지식담화라면 헤겔의 군주정은 S2에 S1 즉 주인담화을 덧붙인 것이다. 본래 S1이란, 권위란, 어떤 이유도 필요 없는 것이다. “내가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다.” 이다. 아버지에 복종하는 것은 아버지가 유능하고 정직하고 선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며, 진정한 부권에 대한 부인이다. 종교적 의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학담화는 ‘이유’들을 필요로 한다.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대학담화의 문제점은 그것이 정치가 아니라 ‘기술 관료적’ 인 권력을 낳는다는 것이다. 세계사가 겪은 관료제의 가장 큰 재앙은 전체주의 정권이다. 헤겔은 이 문제를 통찰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주인담화와 대학담화 사이에서 독특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라캉적 용어를 빌리자면, ‘자연적’ 권위로부터 이유들에 의해 정당화되는 권위로의 이러한 이행은 물론 주인의 담화로부터 대학의 담화로의 이행이다. 정당화된 권력 행사라는 이러한 세계는 또한 대단히 반정치적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기술 관료적’ 이다. 즉 나의 권력 행사는 모든 합리적인 인간 존재에게 접근 가능한 그리고 그들에 의해 승인된 이유들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나는 권력의 대리인으로서 전적으로 대체 가능하며, 나는 모든 사람이 내 입장이라면 행동했을 것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 경쟁적인 투쟁의 영역으로서의 정치, 환원 불가능한 사회적 적대(성)의 명료화로서의 정치는 직접적으로 보편적 이익을 구현하는 합리적 관리〔행정〕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p768」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심지어는 ‘르브륀’ 이라는 ‘헤겔의 최상의 독자’마저 헤겔의 ‘국가 관료제’라는 개념을 위와 같이 해석했다. 이런 관점은 헤겔을 플라톤의 ‘철인-왕’ 전통에 줄 세운다. 그러나 지젝은 헤겔이 ‘정당화된 권위’ 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헤겔은 진정한 권위는 항상 동어반복적인 자기주장을 담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지 않았는가? “내가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다.” 권위의 행사는 찬반의 이유를 하나하나 따져보는 무한한 연쇄를 깨뜨리는 우발적 결정의 ‘비합리적’ 행위이다. 바로 이것이 헤겔이 군주제를 옹호하는 근본적 이유 아닌가? 합리적 총체성으로서의 국가는 정상에 ‘비합리적’ 권위라는, 자질에 의해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권위의 형상을 필요로 한다. 다른 모든 공복〔공무원〕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해야 하지만 왕은 바로 왕이라는 사실 자체에 의해 정당화된다. 보다 현대적인 용어로 이를 표현하자면, 국가 행위들의 수행적 측면은 왕을 위해 남겨진다. 국가 관료제는 국가의 행위의 내용을 준비하지만 그것을 실현해 사회에 강요하는 것은 왕의 비준이다. 헤겔은 ‘전체주의적’ 유혹에 맞서 사회체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국가 관료제 속에 구현되어 있는 ‘지식’과 왕 속에 구현되어 있는 주인의 권위 사이의 이러한 거리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전체주의 정권’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인이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권위를 강요하고 합리적 지식의 제안들을 무시하는 정권이 아니라 지식이 즉각 ‘수행적 권력’을 떠맡는 정권을 말한다. -스탈린은 주인이 아니었으며(그렇게 자임하지 않았으며), 지식과 능력에 의해 정당화되는 인민의 최고의 공복이었다. p769」

 

  여기서 전체주의 정권은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식의 왕조정권이 아니다. 그리고 헤겔의 군주제 역시 그런 전근대적 왕조정치가 아니다. 물론 우리가 겪었을 뿐 아니라 제3세계 빈곤국이 겪고 있는  일인 독재의 유형과도 다르다. 스탈린은 인민의 의지를 직접 대변하는 최고의 관료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주인이 없는 국가 관료제는 왜 전체주의가 되는 걸까? 여기서 지젝이 명료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내 생각에는 완전한 ‘지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민의 의지를 완전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여기서 전도가 일어난다. 영도자가 인민의 의지를 완전히 구현할 수 없기 때문에 역으로 영도자의 의지가 곧 인민의 완전한 의지가 되는 것이다. 대학담화의 불행은 여기에 있다.  

  그런 면에서는 헤겔 역시 마찬가지 오류를 범했다고 볼 수 있다. ‘실로 완성된 국가 조직’ 이나 ‘확고한 질서’ 가 가능할까? 객관적인 면들이 완전히 ‘법률에 귀속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헤겔의 왕은 실로 불가능한 국가의 불필요한 왕이 아닌가? 여하튼 조금 더 인용해 보자.

 

  「헤겔의 이러한 통찰은 그가 (전통적 권위의) 주인의 담화와 (이유들에 의해 또는 주체들의 민주적 동의에 의해 정당화되는 근대적 권력의) 대학의 담화 사이에서 독특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헤겔은 주인의 권위의 카리스마는 가짜이며, 주인은 사칭자라는 것을 간파했다. - 그를 주인으로 만드는 것은 단지 그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했다(그의 신민들이 그를 주인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헤겔은 또한 만약 그러한 초과를 제거하고 전문가적 지식에 의해 완전히 정당화된 자기투명한 권위를 부여하려 한다면 결과는 훨씬 더 나빠질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즉 ‘비합리성’은 국가의 상징적 수반에 국한되는 대신 사회적 권력의 몸체 전체로 확산될 것이다. 카프카의 관료제란 바로 그처럼 주인의 형상을 박탈당한 전문적 지식 정권이다. -벤야민이 일기에서 보고하고 있듯이 카프카가 ‘유일하게 진정 볼세비키적 작가’라는 브레히트의 주장은 옳다. p769~770」

 

  헤겔의 왕은 말하자면 ‘단독성’ 이다. 우연성이 필연성의 핵심 자체에 기입되는 지점인 주인 기표다. 민주주의적 선거가 보편적인 현대에도 이런 우연성은 작동한다.

 

  「그리고 뒤피가 지적하듯 선거에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즉 선거 과정에서도 또한 우연성, 운, ‘인기몰이’의 계기가 핵심적이다. 완전히 ‘합리적인’ 선거는 도대체 선거가 아니라 투명한 객체화된 과정일 것이다. 전통(근대적) 사회는 이 문제를 결과를 ‘입증해 주며’, 그것에 권위를 부여하는 선험적 원천(신,왕)을 환기시킴으로써 해결했다. 바로 거기에 근대성의 문제가 있다. 즉 근대 사회들은 자신을 자율적이며, 자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즉 더 이상 외적인 (선험적) 권위의 원천에 의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거 과정에서는 ‘운’ 이라는 계기가 여전히 작동해야 하는데, 정치 해설가들이 툭하면 ‘비합리성’을 역설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약 영원한 여론조사로 환원된다면 민주주의는 결코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기계화되고 양화되며 ‘수행적’ 성격을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p766」

 

  우리가 선거제도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지켜주는 핵심이 된다. 그 우연성이 없다면 선거는 그냥 여론 조사에 불과하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끝이 나지 않는다. S2들의, 지식의 끝없는 연쇄이다. 상황은 너무 복잡하고, 항상 설명되어야 할 것들이 남고, 찬반을 따지는 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S1, 주인기표는 여기에 폭력적으로 개입한다. “내가 그랬으니 그런 것이다.” 는 끝없는 찬반 논쟁에 마침표를 찍는 행위다. 그 내용의 결과는 축복일 수도 있고 재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우연성이 없이는 ‘행위’ 역시 없다.

 

  「르포르가 지적하듯이 투표는 (희생적) 의례로, 의례를 통한 사회의 자기파괴와 재탄생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 운 자체가 투명해서는 안 되며, 최소한으로 외부화되고/물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인민〕의 의지’는 고대인들이 헤아릴 수 없는 신의 의지 또는 운명의 손으로 간주했던 것의 현대적 등가물이다. 사람들이 직접적인 자의적 선택의 결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즉 순수한 운의 결과를 사람들은 만약 그것이 최소한의 ‘실재’를 가리키면 받아들일 수 있다. - 헤겔은 오래전에 이것을 알고 있었으며, 군주제를 옹호하는 그의 논점은 이것이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p767」

 

  헤겔의 왕이나 선거의 결과는 모두 이 최소한의 ‘실재’ 이다. 순수한 ‘운’을 운이 아닌 것으로 여기게 해 줄 수 있는 실재, 그것이 ‘왕’ 에게 필요한 것이 오직 혈통뿐인 이유이다. 자연적이고 직접적인 혈통이기 때문에 토를 달 수 없는 ‘실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여기까지 오면, 왜 헤겔이 다만 ‘덧붙일’ 뿐인 왕을 필요로 했는지 조금 이해가 간다. 역사가 말하듯 그것이 오로지 왕일 필요는 없지만, 그런 역할을 할 무언가는 항상 존재해야 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우리는 전체주의를 경험한다. 그러나 헤겔이 말하는 ‘합리적인 이성 국가’ 역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역으로 지젝이 헤겔의 ‘왕’을 강조하는 이유는 아마도 완전히 투명한 합리적인 이성국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헤겔이 구상한 이상적인 국가에서 조차 그 정점에 불합리한 요소인 ‘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이 불합리한 요소는 바로 체계의 ‘초과’ 이다.

 

  그런데 지젝은 여기서 헤겔의 한계를 지적한다. 체계의 불완전성을 구현하는 그 ‘초과’는 최상위의 ‘왕’의 존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최하위의 ‘천민’에도 있다는 것을 헤겔이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헤겔이 ‘천민’을 규정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보편성이 되는지를 인식하지 못했다. ‘섹슈얼리티’ 역시 마찬가지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천민은 잉여, part of no part 이다.

 

  「여기서 쉽게 천민과 섹슈얼리티 사이의 유사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헤겔은 (국가 관료제 보다는) 천민 속에서 ‘보편적 계급’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적 열정 속에서 문화도 또 자연도 아닌 초과를 인식하지 못한다. 비록 이 두 가지 경우에서 각각의 논리는 다르지만 (천민과 관련해 헤겔은 초과적/불협화음적 요소의 보편적 차원을 간과한다. 섹스와 관련해 그는 초과 그 자체, 자연/문명이라는 대립의 기반이 침식되는 것을 간과한다) 이 두 실패는 연결되어 있다. 초과는 보편성의 자리, 보편성 자체가 자신의 특수한 내용의 장 속으로 자신을 기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p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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