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카페 Less Than Nothing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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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합과 순수 차이

 

 

 

 

 

0.

 

 

  40여 년 전에 밀레와 바디우 사이에 짧은 논쟁이 벌어졌다. ‘봉합’ 개념을 둘러싼 논쟁의 배경은 주체와 구조 사이의 관계다. 결여로서의 주체와 구조 사이의 관계, 주체의 지위는, 그 자체로 ‘구조주의’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밀레는 처음으로 주체를 구조에 속한 개념으로 제안하고 정교화 했다. 주체화된 구조라는 밀레의 개념에 격렬하게 반대한 바디우는 익명의 또는 탈주체적 구조를 고수했다.

 

 

 

 

1. 차이성으로부터 팔루스적 시니피앙으로

 

 

‘주체화된 구조’라는 개념을 정교화하기 위해서는‘차이성’ 이라는 개념에서 시작해야 한다. ‘차이성’을 처음으로 정식화한 사람은 소쉬르다.

 

「그는 시니피앙의 정체성은 오직 일련의 차이들(자신을 다른 시니피앙들과 구분 지어주는 특징들)에만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 시니피앙에 긍정적인 것은 없다. 그것은 단지 일련의 무엇이 아닌 것일 뿐이다. 차이적 정체성의 핵심적인 결과는 어떤 특징의 부재 자체가 하나의 특징으로, 긍정적 사실로 간주될 수 있다는 데 있다. p1037」

 

  특징의 부재가 하나의 특징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예를 들면 셜록 홈즈의 이런 대화에서 볼 수 있다. “그날 밤 개의 이상한 행동을 놓치지 마시오.” “그날 밤 개는 전혀 짖지 않았는데요.” “그게 바로 이상한 행동이오.”

  차이성의 이런 특징은 변증법의 핵심적 특징과 동일하다. 앞 선 장들에서 되풀이 설명했던, 부정성의 긍정성으로의 전환 말이다. 그러므로 1960년대 구조주의의 폭발은 ‘변증법에 대한 재각성 또는 재발견’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고 제임슨이 강조한 것은 옳다. 제임슨은 나아가 “『정신현상학』이 미완성 상태의 심히 구조주의적인 저서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차이성만으로는 의미가 출현할 수 없다. 이것은 저것이 아니고 저것은 그것이 아니고의 연쇄를 끊어 줄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이것이 말하자면 ‘봉합’ 이다. 밀레가 말하는 봉합, 라캉의 누빔점, 주인기표, 남근기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시니피앙의 동일성이 단지 그것을 구성하는 차이들의 연속일 뿐이라면 모든 의미화의 연속은 특정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 재귀적 시니피앙에 의해 보충 -‘봉합’ -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의미의 부재와 반대되는) 의미의 현존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p1041」

 

  차이성에서 봉합으로의 이행은 현실사회주의를 풍자하는 농담을 통해 다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회주의 정권의 전략은 차이성에, 즉 모든 부정성을 긍정적인 특징으로 바꾸는 것에, 있다. “상점에 고기가 없어요.”“비만으로 죽을 염려가 없으니 얼마나 좋아!”, “영화도 책도 너무 없어요.” “ 이웃들과 풍부한 사교생활을 즐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비밀경찰이 내 삶을 통제하고 있어요.” “ 그러니 마음 턱 놓고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잖아!”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지다가 드디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다. “그런데 공장 때문에 공기가 너무 오염되어 아이들이 치명적인 폐질환에 걸렸어요.” 여기서 봉합이 필요해 진다. “아니 대체 뭘 원하는 거야. 결함 없는 체제는 어디에도 없다고!”

 

「모든 의미화의 장은 보충적인 0-시니피앙, “0의 상징적 가치 즉 시니피에가 이미 포함하고 있는 것을 넘어, 그리고 위에, 상징적 내용을 보충할 필연성을 표시하는 기호”에 의해 ‘봉합’ 되어야 한다. 이 시니피앙이 ‘순수한 상태의 상징’ 이다. 어떠한 특정한 의미도 결여하고 있는 그것은 의미의 부재와는 반대로 의미의 현존 자체를 나타낸다. p1042」

 

  기의를 갖지 않지만, 그 자체로 기의의 현존을 드러내는 기표가 ‘0-시니피앙’ 이다. 라캉이 ‘누빔점’이라 불렀고, 나중에는 ‘주인기표’로 발전시킨 개념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까 주인기표의 역할이 봉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나’로부터 ‘봉합’으로 나가는 핵심적 발걸음인 이러한 3항적 제스처는 ‘누빔점’이라는 개념 - 이 개념의 명백한 지시 대상은 분명히 봉합을 가리키고 있다. - 의 명료화로부터 시작해 라캉에 의해 서서히 완수되었다. 레비-스트로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누빔점’은 시니피앙의 장과 시니피에의 장이라는 두 장을 봉합하며, 라캉이 아주 엄밀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대로 ‘시니피앙이 시니피에에 딱 들어맞는’ 점으로 작용한다. p1043」

 

 

  이름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장미’라는 이름은 일련의 속성을 가진 대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모든 속성을 하나로 묶는 것은 오로지 그 이름이다. 사물에 이름이 필요한 이유는 이름만이 사물에 동일성(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 명사가 없다고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건망증이 생기면 가장 먼저 잊어버리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명사라고 한다. 드라마 얘기를 하다가도 연예인 이름 하나가 기억나지 않아, 한 마디로 할 이야기를 저기 옛날에 무슨 드라마에서 무슨 역할로 나왔던 그 머리 길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사태가 발생해 버린다.

 

  「이 모든 경우에 이름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 안에 포함된다는 정확한 의미에서 ‘시니피앙은 시니피에에 딱 들어 맞는다.’ - 의미의 통일(성)을 구현하기 위해 시니피앙은 시니피에 속으로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다수의 특징들 또는 속성들을 단일한 대상 속으로 통일시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의 이름이다. p1044」

 

  사회의 혼란기에 상황을 장악하는 주인의 역할 역시 ‘새로운 시니피앙’, 즉 ‘누빔점’을 고안해 내는 것이다. 주인은 현실에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시니피앙을 덧붙일 뿐이다. 히틀러가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히틀러는 독일 사회의 극심한 혼란에 단지 ‘반유대주의’라는 시니피앙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바로 거기에 주인의 마술이 있다. 긍정적인 내용 수준에서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주인이 말을 공언한 다음에는 ‘어떤 것도 전과 같을 수 없다.’ p1045~6」

 

  이름은 물物의 특수한 특징이 아니라 물物의 ‘증상’ 이다. 이름은 물을 물로 만드는 대상a, X, 거시기한 것을 나타낸다. 이 X는 ‘당신 속에 있는 당신 이상의 것’ 이다. 이름은 물의 속성들의 집합이 아니라 저 파악하기 힘든 X를 가리킨다. 속성들을 아무리 많이 갖다 붙여도 그것들은 물과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근기표, ‘팔루스’는 결여의 시니피앙이다. 그리고 팔루스적 주인기표가 주체의 상징적 동일시의 지점인 한 동일시는 궁극적으로 항상 결여와의 동일시다.

 

  「그리하여 팔루스적 시니피앙은 권력과 생식력의 상징이기는커녕 체계의 구조적 실패를 구체화하고 있다. 즉 그것은 어떤 결함이 더 이상 긍정적인 특징으로 배역을 바꿀 수 없게 되는 지점을, “뭘 원하는 거야, 결함 없는 체계는 없어!” 라고 말하는 지점을, 거세가 체계 안에 기입되는 지점을 나타낸다. 그것이 은폐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이 드러나는 것은 거세가 드러나는 것과 같다. 그것을 은폐하는 것은 “두 개의 핵심적 의지처를 갖고 있다. 벽 -이것은 공포증적 해결책이다.- 또는 베일 -이것은 물신주의적 해결책이다. - 이 그것이다.” p1057」

 

  「라캉은 팔루스는 신체기관으로서의 페니스가 아니라 시니피앙, 심지어는 ‘순수한’ 시니피앙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 따라서 그렇다면 왜 이 ‘순수한’ 시니피앙을 ‘팔루스’라고 부르는가? 하지만 들뢰즈에게는 분명했듯이 거세라는 개념은 아주 특수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즉 보편적인 상징적 과정은 어떻게 신체적 뿌리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가?가 그것이다. 어떻게 상대적 자율성 속에서 출현할까“ ‘거세’는 우리가 비신체적인 것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폭력적인 신체적 절단을 가리킨다. p1061」

 

  남근기표인 Φ(또는 -ϕ)는 ‘상상적 남근의 상징적 거세’를 의미한다. 상상적 남근이란 생물학적인 페니스의 유무와는 관련이 없다. 생물학적인 여성도 거세될 수 있다. 그렇다면 상징적 거세란 무엇인가? 왕홀이나 왕관 혹은 휘장, 법복 같은 것을 걸치는 것이다. 이것들에 의해 나는 직접적인 나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상징적인 내가 된다.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것들을 입는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 나를 ‘거세시킨다.’그것들은 직접적으로 내가 나인 것과 내가 실행하고 있는 기능 사이의 간극을 도입한다. 이것이 바로 저 악명 높은 ‘상징적 거세’가 의미하는 것이다. ...상징적 질서에 사로잡혀 상징적 권한의 위임을 받아들이는 사실 자체에 의해 일어나는 거세이다. 거세는 직접적으로 내가 나인 것과 그러한 ‘권한’이 나에게 부여하는 상징적 권한 사이의 간극이다. 정확히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권력과 정반대 것이기는커녕 권력과 동의어이다. 바로 그것이 나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p1062」

 

  언뜻 보면 p1057의 인용문과 p1062의 인용문은 상충하는 것 같다. 앞에서는 팔루스적 시니피앙이 ‘권력과 생식력의 상징이기는커녕’이라고 했는데, 뒤에서는 거세가 ‘권력과 정반대이기는커녕 권력과 동의어’라고 하니 말이다. 팔루스는 거세의 시니피앙이므로 둘 중 하나는 틀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세는 이중적이다. 주체는 거세에 의해 상징적 권한을 위임받지만, 거세되었다는 사실은 은폐되어야 한다. “뭘 원하는 거야!, 다 그런 거지” 가 튀어 나오면 상징적 권한은 무너진다. “나 원래 그런 놈이야, 그래도 내가 왕이야.”는 사실이지만, 이 사실이 공적으로 등록되는 순간 왕으로서의 상징적 효능은 사라진다. 무소불위의 독재가가 한순간 초라한 노인으로 변하는 것도 바로 이 거세가 드러나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이성으로부터 팔루스적 시니피앙으로의 이행은 ‘소외’라고 할 수 있다. 상징적 권한을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소외’된다. 그렇다면 ‘봉합’은 주체의 소외라고 할 수 있나? 다음 절의 결어를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어떤 장을 봉합하는 것은 통일적인 특징이 아니라 순수 차이 그 자체라는 역설이 나타나게 된다. 어떻게?” 일반적으로 봉합이란 주체가 실재와 대면하는 것을 가로막으며 아버지의 이름으로 체계를 닫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여기서 지젝은 봉합에 어떤 역설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 어떻게? 그리고 왜? 밀레가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에? ...

 

 

2. 팔루스적 시니피앙으로부터 대상 a로

 

  도식적으로 말하면 소외는 주체로부터 대상a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고, 분리는 이 대상a가 타자로부터도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주체가 인식하는 것이다. 주체에게 결여된 그것이 타자에게도 결여되었다는 것을 주체가 알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정신분석의 ‘분리’ 과정이다. '팔루스적 시니피앙으로부터 대상a로'는 말하자면 ‘소외에서 분리로’라는 말이다. 주인기표의 역할은 분리를 방해하는 환상을 제공하는 데 있다.

 

  「바로 거기에 주인-시니피앙의 환상이 있다. 그것은 대상a와 합쳐지며, 그리하여 주체의 타자/주인은 주체가 결여하고 있는 것을 소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소외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체가, 주체가 결여하고 있는 것을 소유한 타자의 형상에 직면하는 것이다. 소외에 이어지는 분리에서 대상a는 또한 타자로부터도, 주인-시니피앙으로부터도 분리된다. 즉 주체는 타자 또한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p1066」

 

  대상a와 일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갑자기 일자가 튀어 나와 이상하지만, 뭐 타자 혹은 주인기표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대상a는 일자에 대해 상보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보충물이다. 즉 자신이 달라붙어 있는 일자를 일자보다 더 나은 것보다는 더 못한 것으로 만들며, 그것을 내부로부터 부식시키는 이상한 보충물인 것이다. 그것은 빼기를 하는 초과이다. p1067~8」

 

  타자의 보충물이지만, 타자를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빼기의 보충물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잉여다. 잉여는 초과이자 결여니까. 그런데 헤겔은 이 개념에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모든 존재자에 그림자 같은 분신으로 들러붙어 있는 이 없음은 부정성의 0-수준으로, 그 자체로서는 헤겔에게는 접근 불가능한 것, 부정성의 완전한 전개라는 그의 논지 전체에 있어 주제화되지 않는 전제이다. 헤겔도 분명히 두 개의 결여, 주체의 결여와 실체 자체의/속의 결여라는 두 개의 결여의 겹침을 정식화한다. 하지만 그는 이 겹침(탈-소외)을 분리로는 바라보지 못하며, 그것을 결여의 취소로 바라본다. p1068」

 

  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비밀은 이집트인 본인들에게도 비밀이었다.”는 헤겔의 발언이라고 한다. 주체의 결여와 타자의 결여가 겹치는 것에 대한 멋진 비유이다. 그러나 헤겔은 대상a를 사유하지 못했다. 따라서 순수 반복 역시 생각하지 못했다. 순수 반복이란 대상a 즉 ‘없음’에 의해 지탱되기 때문이다.

 

  「순수 반복은 모든 일자를 사로잡는 대상a의 없음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일자는 자신의 그림자를 되찾기 위한 시도 속에서 자신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p1068」

 

  라캉의 유명한 네 가지 담론에는 네 가지 요소와 네 가지 자리가 있다. 담론의 유형에 따라 네 가지 요소들은 담론 구조 안의 네 자리를 바꾸어 가며 차지한다. 구조 속의 네 자리는 고정되어 있는데, 행위자 - 타자 - 생산 - 진리 이다. S1(주인기표) - S2(지식의 연쇄) - 대상a - $(주체) 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움직이는 요소들이다. 네 요소들은 각각의 고유한 속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 가에 따라 특성이 달라진다. 가장 유명한 예는 뒤샹의 변기다. 변기가 예술이 되는 것은 오직 전시관에 놓일 때뿐이다. 왕이 왕인 것 역시 왕좌에 앉았기 때문이다.

 

  「(고정된) 구조적 자리들과 그러한 자리들을 차지하는 (가변적) 항들 사이의 차이는 어떤 항이 그러한 자리와 물신주의적으로 응고되는 것을 깨뜨리고, 또 어떤 대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과연 어느 정도나 대상의 직접적 속성들이 아니라 그것이 차지하는 자리에 달려 있는지를 인식하도록 하는 데 있어 핵심적이다. p1069」

 

  그러나 일상에서 우리는 구조의 효과를 대상의 직접적 속성으로 오인하며 산다. 일종의 ‘물화의 희생자들’이다. 왕은 날 때부터 왕이다. 동화 <왕자와 거지> 그리고 그것의 사극 판이라 할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고 나와서도, 우리는 다시 오인 속에 살아간다.

 

  그런데 자리와 내용 사이의 간극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밀레는 “형식주의자에게는 형식이 있고, 세부사항은 중요하지 않다. 그와 반대로 구조주의자에게서 소재와 형식은 구분되지 않으며, 구조는 물 자체들에서 발견되며, 따라서 모든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구조와 물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 구조의 자리를 단지 차지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를 바꾸어 버리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대상a가 그토록 핵심적인 이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자신의 형식적 구조일 뿐‘인’ 어떤 대상의 본래적인 의미의 변증법적 역설을 다루고 있는 셈인데, 이 역설은 고정된 자리들의 집합 내부의 항들의 치환보다 훨씬 더 강력한 구조적 변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다. 어떤 요소가, 즉 그것의 출현(또는 사라짐)이 구조 자체를 바꾸는 요소가 개입할 때 그러한 치환이 종결된다. 그러한 요소가 라캉적인 대상a이다. 즉 그것의 지위가 철저하게 비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형식 자체가 탯줄에 연결된 것처럼 연결된 요소가 그것이다. 사회적 동역학 수준에서 그러한 요소를 보자면 바로 바디우가 사회적 건물의 ‘증상적 비틀림’ 이라고 부르는 것, 랑시에르적인 ‘비-분분의-부분’이 그것이다. 즉 이 요소는 단지 치환되어 동일한 형식적 건물 내에서 상이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만들어질 수 없다. - 위치에서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전체 건물 자체의 철저한 변형을 가져온다. 따라서 그저 봉합이라는 주제를 배경으로 ‘비-부분의 부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p1074」

 

  예를 들어 랑시에르의 ‘part of no part' 가 바로 자본주의의 구조를 확 바꿔 버릴 수 있는 요소, 대상a란 것이다. 여기서 대상a는 단지 요소가 아니라 형식에 바로 연결된 요소, 형식과 요소가 구분되지 않는 요소이다.‘part of no part'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구조이자 잉여적 요소이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 “따라서 그저 봉합~” 은 갑자기 왜 튀어 나온 것일까? 나는 여기서 봉합이 어떻게‘따라서’ 나올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 절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우리를 봉합이라는 개념의 가장 사변적인 측면으로 데려간다. 즉 어떤 요소와 그것의 자리 사이의 순수하게 형식적인 차이는 더 이상 실정적인 두 존재자 사이의 차이가 아닌 순수 차이로 기능한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러한 순수 차이는 상징적 차이성의 조건이다. 따라서 어떤 장을 봉합하는 것은 통일적인 특징이 아니라 순수 차이 그 자체라는 역설이 나타나게 된다. 어떻게? p1074」

 

 

3. 순수 차이

 

  들뢰즈의‘순수 차이’를 가장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예는 <빌리 베스게이트>라는 영화에 관한 것이다. 영화 자체는 실패작인데,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훨씬 나은 소설에 대한 기대감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원작 소설은 기대와 달리 또 하나의 실패작이다.

 

  「<빌리 베스게이트>와 관련해 영화는 그것이 각색하고 있는 소설을 ‘반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과 영화 모두 반복 불가능한 잠재적 X를, ‘진짜’ 소설 - 실제 소설에서 영화로 이행하는 와중에 그것의 유령이 생겨난다 - 을 ‘반복한다.’ 이러한 잠재적 참조점은 비록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다. 그것은 실패한 현실의 시도들의 절대적 참조점인 것이다. 유물론적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신성한 것은 바로 이런 식으로 지상의 물질적 요소들의 반복으로부터, 그러한 요소들에 의해 소급적으로 상정되는 ‘원인’으로 출현한다. 여기서 들뢰즈가 라캉을 언급하는 것은 옳다. 이 ‘더 나은 책’이 라캉이 소문자 대상a라고 부른 것, 오직 ‘결과 속에서’, 책과 영화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두 작품에서 붙잡는 방법 말고는 ‘현재 속에서는 달리 다시 붙잡을 수 없는’ 욕망의 대상-원인이다. p1097~8 」

 

  ‘더 나은 소설’이 바로 부재하는 욕망의 대상-원인인 대상a이다. 소설과 영화의 반복을 통해서 소급적으로 가정되는, 순수하게 잠재적인 요소이다.

 

  「...언제나 순환하며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해 자리를 옮기는 대상=x, 바로 이 대상=x와 관련해서 매 순간마다 각각의 항은 절대적인 자리를 갖게 되며, 또 이렇게 취해진 절대적인 자리에 의해 구조 속 계열들의 항들의 상대적인 자리가 정해지게 된다.... 말하자면 대상=x가 모든 구조 속에 차이를 분배하면서, 또 자기 자신의 자리 옮김을 통해 차등적인 관계들을 변화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차이 자체를 차이화하는 것을 구성하는 것이다. p1091」

 

  들뢰즈는 대상=x라고 부른다. 이것이 대상a와 같은 것이며, “부재하는 원인으로서 요소들을 분배하는 이 고정된 요소는 결과 속에만 현존하며 그 자체로서는 결과들에 의해 소급적으로만 가정되는 순수하게 잠재적인 요소”다.

 

  「만약 실재가 최소 차이라면 반복이 본원적이다. 실재를 상징화에 저항하는 물로 ‘물화하는 것’과 함께 억압의 우위가 출현한다. - 오직 그때에야 비로소 배재된 또는 억압된 실재가 자신을 고집하고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재는 근원적으로 어떤 물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간극, 반복의 간극에 다름 아니다.

  들뢰즈적 ‘순수 차이’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볼 때는 실제적인 속성들과 관련해 자신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반복하는 어떤 것의 순수하게 잠재적인 차이이다. p1092~3」

 

  억압이 있기 때문에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이 억압에 선행한다. 억압은 실재가 물화되면서 억압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실재는 물화될 수 없는 순수차이다. ‘더 나은 소설’은 순수하게 잠재적인 것이다. ‘더 나은 소설’의 개념에 딱 맞는 ‘더 나은 소설’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반복이 발생한다. ‘더 나은 소설’과 실제 소설의 간극이 순수 차이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서 밀레- 바디우 논쟁의 결과를 살펴보자. 누가 이겼는가? 단적으로 말하면 밀레의 ‘봉합’개념이 살아남았지만, 심각한 오해의 결과이기 때문에 승자를 쉽게 단언하기는 어렵다. 밀레의 개념과는 달리 ‘봉합’은 ‘폐쇄’와 동의어가 되었다. 내가 이 장을 읽기 전에 알고 있던 ‘봉합’이 바로 이 왜곡된 봉합인 셈이다. 여하튼 최종적 승자는 그러므로 밀레가 아니라 알튀세르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승리를 거둔 것은 주체는 구조적 필연성에 대한 상상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오)인의 자리라는 알튀세르적 개념이었으며, ‘봉합’이라는 개념은 당시의 지배적인 대중적인 수용과 용법에서는 그러한 오인의 조작자 자체로 해석되었다. 즉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경험의 장이 ‘봉합되고’, 이 장의 원이 닫히고, 탈중심화된 구조적 필연성이 비가시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조작을 가리켰다. 이러한 독법에 따르면 ‘봉합하기’는 이데올로기적 경험의 장 내의 근본적인 외부의 모든 교란적인 흔적들은 지워지고, 그리하여 이 장은 이음매가 없는 연속성으로 지각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p1106」

 

  밀레-바디우의 논쟁과 관련해 우리는 어느 편이 되어야 할까? 밀레는 최근 몇 년간 “정치는 상상적 또는 상징적 동일시의 영역이며, 그 자체로서 환상들의 영역” 임을 강조해 왔다. 이런 입장은 결과적으로 냉소적 비관주의에 이르게 된다. 모든 열정적인 집단적 참여는 낭패로 끝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환상들의 게임임을 알면서도 게임을 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다. 바디우는 이에 단호히 반대한다. 바디우는 진리-사건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오늘날 이러한 차이는 절대적으로 핵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 그것은 정치적으로 사느냐 죽느냐의 차이이며, 현재의 지배적인 탈-정치적 냉소주의를 승인하느냐 아니면 근본적인 해방적 참여를 위해 용기를 내느냐의 차이이다. p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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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세계사 창비청소년문고 5
이영숙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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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술 읽히는 책이다. 선생님 엄마의 전형적 말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쉽고 요령있는 말솜씨다.  세계사를 처음 접하는 아이들에게 유익할 것 같다. 그러나 독특한 글맛이나 깊이있는 사유의 흔적은 없다. 어디선가 듣고 읽었던 이야기들이라,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다. 다만 감자, 포도, 돼지고기 따위의 식재료를 가지고 세계사의 단면을 짚어보는 형식은 참신하다. 그러나 복잡한 사건이 너무 일면적으로 묘사되는 단점이 있다. TV 프로그램 <서프라이즈>의 에피소드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역사는 중립적이지 않다. 저자의 가치관이 항상 개입되어 있다. 어떤 사건을 선택하는가, 어떻게 묘사하는가,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다르게 기록된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시각은 중도에서 진보 사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마오쩌둥, 흐루쇼프 등에 대한 평가가 너무 안이해 보인다. 마리 앙뜨와네뜨와 루이16세에 대한 시각 역시 너무 인간주의적인 것 같다. 프랑스 혁명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왕을 처형할 수 밖에 없었다. 로베스 피에르가 말했듯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왕과 왕비라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처형당해야 했던 것이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쉽게 쓰는 얇은 책에서 10개나 되는 사건을 깊게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역사란 한낱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나 현재의 관점에서 새롭게 쓰이고 있는 것이다. 과거를 반복함으로써 미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과거를  어떻게 반복할 것인가는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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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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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읽은 책이다. 언제 읽었는지,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아마 명성에 비해 그리 감명을 받지는 못했나 보다. 약간 쓸쓸한 기분으로 책을 잡았다. 늙어서 읽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니, 슬퍼라!  

  그런데, 뜻밖에도  재미있다. 요즘 드라마의 원형이 여기 있었네.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야 말로 광적인 사랑, 삼각관계 드라마의 원형이다. 베르테르의 열정적인 사랑, 알베르트의 안정된 사랑, 두 사랑 사이에 흔들리는 롯테. 어떤 캔디 드라마도 『오만과 편견』을 뛰어 넘지 못하는 것처럼, 어떤 미친 사랑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능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문학사적으로 괴테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위치하는 자리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알베르트와 베르테르의 극명한 대립은 마치 이성에 대한 괴테의 신랄한 비판처럼 보인다.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의 방에서 우연히 권총을 발견하고, 자살에 관해 논쟁을 하게 된다. 알베르트는 자살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어리석고 나약한 행동이라고 비난한다. 베르테르는 남자에게 버림받고 물에 빠져 죽은 소녀의 예를 들어 알베르트에 열광적으로 반박한다.

  "이것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어리석은 여자야! 좀 기다렸다면, 시간이 흘러서 때가 오면 절망도 가라앉을 것이고 반드시 다른 남자가 나타나서 위로해 주었을 텐데>라고 태연자약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한심한 사람이지요.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열병을 앓고 죽다니 참 어리석은 놈이야. 체력이 회복되고 원기가 좀 생겨서 혈액의 혼란이 가라 앉을때까지만 기다려보았더라면 좋았을텐데> 하고 말이오.p83" 

 

  알베르트는 나무랄데 없이 훌륭한 성품을 소유하고 있지만 감성 보다는 이성에 따르는 인물이다. 사랑에 목숨을 버리는 베르테르의 연적으로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를 맞세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그것보다 더 뚜렷한 대비는 없을 테니까.  이성은 알베르트의 성격 구축을 위해 괴테가 부여한 특성이겠지만, 읽기에 따라서는 열정과 이성이 베르테르와 알베르트라는 인물로 의인화되어 이 소설 자체가 열정과 이성의 격렬한 논쟁처럼 보이기도 한다. 

  베르테르가 로테를 떠나 생활하던 중 만난 공작에 관해서도 이성에 대한 비판은 잘 드러나 있다.

  " 그 분은 그뿐 아니라, 내 마음보다는 내 지성과 재능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내 마음만이 유일한 자랑거리이며, 오직 그것만이 모든 것의 원천, 즉 모든 힘과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다. 아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나 혼자만의 것이다. p129" 

  "그는이지적인 인간, 그것도 아주 평범한 이지의 사람이다. 그 사람과의 교제는 잘 씌어진 책을 읽는 이상의 흥미를 자아내지 못한다. p130"

  베르테르에게 지성과 이성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고유한 것은 오직 마음이다. 

  그런데 알베르트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기 때문에 로테에게 훌륭한 남편이 될 수 없다고 베르테르는 생각한다.

  "그녀는 알베르트보다 나와 결혼했으면 더 행복해졌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알베르트는 그녀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은근한 소원을 남김없이 풀어줄 만한 그런 인물은 아니다. 감수성에 일종의 결함이 있지. 결함이라, 그 해석은 자네의 자유지만, 똑 같은 느낌으로 가슴이 뛰는 그런 마음의 공감이라는 것이 알베르트에게는 없단 말이다. p131"

  베르테르는 롯테 보다 알베르트에 관해 더 깊은 탐구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롯테는 그냥 한 눈에 빠져 버린 사랑의 대상, 숭배하는 대상, 어떻게 보면 한낱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이렇게 외친다. 

  "때때로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이다지도 외곬으로 그녀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는지,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녀 외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모르고, 그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p133~4" 

 

 

  나는 감성 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편이다. 메마른 편이고, 마음의 공감이라는 것도 떨어지는 편이다. 그럼에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슬프다.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지만, 그래도 베르테르의 비극에 나도 따라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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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카페 Less Than Nothing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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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주곡 4

미래로부터 빌려 오고, 과거를 바꾸기

 

 

 

  훌륭한 제목이다. 내용이 뭔지 딱 감이 오니, 고맙다. 2장 <아무것도 없거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로 읽어라>는 두 달 만에, 기억나는 내용이 하나도 없다. 아마 한 달 전에도 아니면 2장 리뷰를 끝낸 직후였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간주곡4의 핵심어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소급성’과 ‘반복’ 이다. 아마도 retroactivity가 소급성의 원 단어가 아닐까 싶다. 소급성은 헤겔의 ‘전제정립’의 방법(?) 이기도 하고, 원환이 닫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마 그럴...그렇지 싶다;;

 

 

  간주곡4에서 지젝은 바야르의 『예상표절』을 소개한다. “예상표절”. 이른바 형용모순이지만 잘 읽어보면 언제나 그렇듯 꽤나 그럴듯한 개념으로 들린다.   표절이란 이미 있는 작품에서 베끼는 것이지만,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의 작품에서도 표절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대번 타임머신이 연상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설명이다.

 

  「바야르는 불일치를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두 작품이 공유하는 특징들과 관련해 후자가 그러한 특징을 보다 풍부하게 발달된 형태로 담고 있는 반면 전자에는 단지 작품 전체에는 맞지 않으며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처럼 미발달된 단편들만 들어 있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면 합리적 확신을 갖고 앞선 시대의 작품이 후대의 작품을 표절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p994~5」

 

  바야르는 모파상과 프루스트를 예로 든다. 모파상의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에는 우리가 흔히 ‘프루스트적’이라고 알고 있는 특징이 섬뜩할 정도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일상적 대상과의 우연한 만남이 과거에 대한 반쯤은 잊혀진 다수의 기억들을 촉발하는지를” 그려내는 프루스트적 특성 말이다. 마들렌 과자가 불러일으키는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 본적이 없는 나도 여러 번 들어 보았을 정도로 프루스트를 대표한다. 그런 특징이 모파상의 소설에도 그대로 드러나지만 그것은 ‘모파상적’인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30년 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발표되고 나서야 모파상의 소설은 새롭게 ‘푸르스트적’인 시각으로 읽혀질 수 있다. 이것이 바야르가 “예상표절”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시간대를 살지만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영혼들의 신비로운 합일이라는 식의 뉴에이지적 주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예상표절’이라는 생각을 단순히 하나의 도발적인 생각으로 기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것이, 현재가 미리 규정된 미래를 예시하는 어떤 종류의 감추어진 목적론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그러한 생각은 심오하게 반목적론적이며 유물론적이다. - 거기에 덧붙일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는 소급성이라는 핵심적 개념이 전부다. p996」

 

  「열쇠는 반복이라는, 즉 사물들이 ‘본래의 모습대로 될’ 수 있도록 해주는 반복이라는 변증법고유의 개념에 있다. 모파상은 오직 일단 프루스트가 도착해야만 프루스트의 앞-선-표절자가 되고, 그다운 그가 된다. 헤겔적 용어를 빌리자면, 즉자 존재에서 대자 존재로 전환되는 것이다. 즉 프루스트 속에서의 반복을 통해 모파상은 소급적으로 프루스트적으로 된다. 이것은 즉자 존재로서의 모파상의 소설의 모습과 프루스트 이후 소급적으로 읽었을 때의 모습 사이에 철저한 분열을 도입해야 함을 의미한다. - 즉 프루스트의 텍스트가 또 다른 모파상, 프루스트적인 모파상을 낳는 것이다. p997~8」

 

  프루스트가 모파상을 반복하고, 그 결과 모파상은 소급적으로 다시 읽혀지면서 프루스트적인 모파상이 된다. 그러므로 세 개의 텍스트가 존재한다. 모파상의 원작 소설, 프루스트의 연작 소설들, 그리고 프루스트적 모파상.

  그렇지만 한편, 소급성이라는 것이 별 독특한 개념이 아니라 그냥 우리가 흔히 독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고 할 때의 그 재해석과 동일한 말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모파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읽는 방식이 프루스트에 의해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닌가? 이에 대해 지젝은 텍스트의 비전체성으로 응답한다.

 

  「오히려 모파상의 텍스트를 비전체로,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것으로,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간극들과 비정합성들로 가득 찬 것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p998」

 

  또 다시 ‘비전체’로 귀결된다. 모든 것이 인과관계에 의한다면, 세계가 총체적이라면, 다시 말해 한 치의 틈도 없다면 소급성이 작동할 여지는 전혀 없다. 반복 역시 필요 없어진다. 아무런 차이도 창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반복이 과거를 소급적으로 재정립하기 때문에, 필연성과 인과성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열려 있고, 주체의 자리는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소급성에 관한 또 다른 측면의 고찰을 살펴보자. 말과 사유는 어느 것이 먼저일까? 러셀은 어느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 두 귀로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기 전까지는 당신을 사랑하는지 몰랐다오. - 잠시 ‘맙소사,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오. p1015」

 

  이 편지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말이 먼저 오고 의미는 소급적으로 뒤따른다는 것이다. 데넷은 이것이 의미를 낳는 기본적인 메커니즘이라고 말한다. 어떤 깊은 인식이 미리 존재하고 그것이 어떤 구절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저절로 떠오른 구절이 우리의 경험을 깊은 인식으로 조직해 낸다. 의미의 출현은 표현의 소급적인 영향이다.

 

  「언표 수준에서 이것은 사유 - 의도하는 바의 의미, 말하려고 하는 것- 는 그것의 ‘표현’ 과정에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나는 말하려고 하는 것을 오직 그것을 말함으로써만 발견한다. p1013」

 

  지젝은 이례적으로 클라이스트의 논문 「말하는 과정에서의 생각들의 점진적 형성에 대해」전문을 인용하면서 시니피앙의 소급성에 대해 또 한 번 강조한다. 전문이라 해도 다행히 7쪽 정도의 짧은 논문이라 그렇게 무리한 인용은 아니다. 논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입맛은 먹을수록 생긴다’ 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경험적 격언을 패러디해 ‘생각은 떠들수록 는다’ 라고 말해도 여전히 사실일 것이다. p1017」

 

  글쓰기도 마찬가지일 때가 종종 있다. 책을 읽을 때 생각했던 내용은 글을 쓰다 보면 사라지고 문장의 흐름에 이끌려 오히려 생각 자체를 바꾸게 된다. 물론 말을 할 때도 그렇다. 처음에는 얼굴만 벌겋게 달아올라 횡설수설하는데, 어느 순간 마구 지껄이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돌아보는 순간 하고 있는 말의 의미가 또렷해지는 것이다. 떠들수록 생각이 는다.

 

  「나는 많은 위대한 웅변가들은 입을 열기 전에는 자신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몰랐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에 필요한 풍부한 생각은 그의 연설을 둘러싼 조건 그리고 그로 인해 빚어질 흥분 상태에 의해 자연스럽게 영감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확신은 순전히 행운을 믿고 연설을 시작할 정도로 그들을 대담하게 만들었다. p1018」

 

  「이처럼 클라이스트는 오직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가 완벽해졌을 때야 비로소 입을 열어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는 통상적인 지혜를 뒤집어 버린다. “따라서 만약 어떤 생각이 혼란스럽게 표현되는 경우 그로부터 그러한 생각 또한 혼란스런 방식으로 떠올린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극히 혼란스런 방식으로 표현된 생각이 가장 명료하게 떠올린 생각인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p1024」

 

  프랑스 혁명사의 유명한 한 순간이 이에 해당한다. 국왕이 주재하는 마지막 국민회의가 끝난 후 왕은 국민회의의 해산을 명령했다. 해산하지 않고 웅성거리는 의원들에게 왕의 의전관이 왕의 명령을 받았느냐고 물으며 해산을 종용했을 때, 미라보는 ‘벼락을 쳐서’ 그를 내쫓았다. “그렇소, 왕의 명령을 이해했소.”라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까지 미라보는 그가 총검으로 말을 끝맺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신은 도대체 무슨 권한이 있어 우리에게...”라고 계속하면서 갑자기 놀라운 생각들의 원천이 그를 위해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국민의 대표들이란 말이오!" 그리고 마침내 “국민은 명령하는 것이오. 국민은 명령을 받지 않소!” 라고 말했다. 바로 그에게 필요했던 그 말이 갑자기 튀어 나온 것이다. “왕에게 가서 오로지 총검으로만 우리를 여기에서 몰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시오!”  미라보는 오만하게 말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느긋하게 앉았다.

 

  「미라보와 안티고네: “진리는 그것의 언표에 의해 촉발된 놀라움의 효과”임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두 사례이다. - 또는 prise와 sur-prise 사이의 말놀이를 언급하면서 알튀세르가 한 말을 빌리자면, 어떤 내용에 대한 모든 진정한 파악prise은 그것을 완수하는 사람에게 놀라움surprise으로 다가온다. p1027」

 

  이것은 헤겔적인 변증법적 과정의 구조와 닮아있다.

 

  「헤겔적인 ‘변증법적 과정’의 구조는 가차 없는 개념적 필연성에 의해 규제되는 결과들의 자동적인 전개가 아니라 정확히 클라이스트에 의해 묘사되고 있듯이 길을 잃고 그런 다음 어떤 안을 급조해내는 과정이다. 어떤 것을 말하기로 계획하지만 일이 틀어져 길을 잃으며 교착 상태를 피하려고 급조된 해결책을 고안한다. p1028」

 

 

  과거를 반복함으로써 미래가 과거를 소급적으로 구원 한다 혹은 정립한다 라는 개념은 지젝의 핵심적 주장 가운데 하나이다. 이 개념은 그의 행위의 원천이기도 하다. 헤겔을 비롯한 독일 관념론 철학과 라캉의 정신분석을 통해 그가 고금의 온갖 철학자들과 대결하며 치열하게 투쟁할 때, 그 난해한 개념과 현란한 수사의 난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보면 그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참 단순하다. 비록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여하튼 우리는 다시 공산주의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돌아가는가? 레닌을 반복함으로써 레닌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레닌적인 것을 구원함으로써 다시 공산주의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프루스트가 모파상을 반복함으로써 모파상이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모파상이 출현한 것처럼 말이다. 지젝은 대중들을 향해 차마 communism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commons를 주장한다. 우리가 레닌을 반복함으로써 스탈린적 증상 없이 완벽한 commons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체계는 언제나 비정합적이고 비전체이며 자체의 증상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증상을 제거하려고 할 때, 완벽한 유토피아를 실현하려 할 때, 전체주의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 위험을, 그 부정성을 당당하게 감수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여기 1:99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처음 지젝을 읽기 시작했을 때, 그래서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건지 도통 이해 할 수 없었지만, 2009년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를 읽으며 그가 무엇을 주장해 왔는지 뒤늦게 알아 차릴 수 있었다. 비록 아직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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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카페 Less Than Nothing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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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물 자체 The thing itself : 라캉

 

 

 

08_

헤겔의 독자로서의 라캉

 

 

 

 

 

0.

 

 

  헤겔을 읽기 위해서는‘개념의 인내’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지젝 독해 역시 어떤 종류의 것이든‘인내’가 요구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8장은 특히 그렇다. 크게 어렵지는 않지만 헤겔과 라캉과 지젝이 만나는 곳에 이르기까지, 길은 얽혀있고, 긍정은 부정의 시작에 불과하므로, 인내를 잃지 않아야 한다.  

 

 

 

1. 이성의 간지

 

 

  간지는 간사한 지혜다. 그러나 헤겔의 간지는 교활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가장 공공연한 행위가 가장 위대한 간지이다.

 

 

  「헤겔은 적을 파괴하는 최선의 방법은 적으로 하여금 잠재력을 마음껏 펼치도록 해당 되는 장場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으로, 그렇게 되면 성공은 실패가 되리라는 것을 장담하고 있다. 모든 외적 장애물의 결여는 그를 자기 자신의 입장의 비정합성이라는 절대적으로 내속적인 장애물에 직면하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p914~5」

 

 

  그러므로 이성의 간지는 이성의 힘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차라리 ‘비이성’ 에 대한 신뢰를 포함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 보여주는 것이 이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단지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가 하고 있는 추상적인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펼쳐내도록 추동했을 뿐이다.

 

 

  「참가자들은 본인들이 말하는 것에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의 심연에 직면하며, 그렇게 권위를 부여하는 통상적인 토대에 의지하려는 순간 그러한 권위 부여는 실패한다. p921」

 

 

  정의의 이름으로 전쟁을 역설하는 젊은이가 있다고 하자.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단순하다. “그런데 정의가 뭐지?” 정의에 답하려는 순간 그는 이성의 간지에 걸려든다. 정의의 토대는 그 이름만큼 탄탄하지 못하다. 누구에게 정의인가?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정의인가? ... 소크라테스는 상대를 공격하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 자신을 공격하게 만들뿐이다. 이성의 간지 또한 그렇다.

 

 

 

 

2. 라캉적 활인법

 

 

  활인법? 의인법도 아니고 무엇일까? 이런 단어가 적어도 네이버 사전에는 없다. 어떤 단어를 번역한 것인지 상당히 궁금하다.  여하튼, 

 

 

 「활인법은 “부재하는 또는 상상 속의 사람이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으로 제시되는” 비유법으로 규정된다. 보통은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것(자연, 상품, 진리 자체....)이 어떤 말을 한 것으로 돌리는 것은 라캉에게서는 단지 말하기 자체의 이차적 복잡화만이 아니라 말하기 자체의 조건이다. ‘언표의 주체’와 ‘언표된 것의 주체’라는 라캉의 구분은 바로 이 방향을 가리키지 않는가? 내가 말할 때 말하는 것은 결코 ‘나 자신’일 수 없다. -나는 나의 상징적 정체성인 픽션에 의존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말하기는 ‘간접적이다.’ “당신을 사랑해”는 “연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구조를 갖는다. 따라서 활인법은 무질이 잘 알고 있던 기묘한 분열을 함축하고 있다. 즉 ‘특성 없는 인간은 인간 없는 특성에 의해, 그러한 특성의 소유자로 알려진 주체 없는 특성들로 보충되어야 하는 것이다. p923~4」

 

 

  “너는 누굴 믿니, 네 눈이야 내 말이야?”에서 우리가 믿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말이다. 경멸해 마지않을 인간도 법복을 입고 있으면 우리는 그를 존중할 수밖에 없다. 판결을 내릴 때, 그를 통해 말하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법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활인법이다.

 

 

  「‘원초적 활인법’은 실제로는 상징적 질서 자체의, 상징적 권한을 인수한 주체(그것을 통해 자신을 구성하는 주체)의 활인법이다. p926」

 

 

  「‘내가 말한다’와 ‘타자가 나를 통해 말한다’는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를 통해 ‘말할’ 때, 말하는 것은 큰 타자가 아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타자의 실패들, 간극들, 비정합성들에 대한 진리이다. p928」

 

 

  꿈이나 말실수, 증상을 통해 드러나는 것 역시 타자의 간극과 실패들이다. 1950년대의 라캉은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라고 했지만, 그 이후 타자 자체가 빗금처진 타자임을 알고 난 뒤의 라캉은 무의식을 타자의 간극과 실패들을 등록하는 담론으로 전환시켰다.

 

 

  그러므로 이성의 간지는 뒤에서 몰래 끈을 조종하는 신비스러운 정신이 아니다. “헤겔적인 이성의 간지 이념은 자신의 실현의 실패 속에서, 그것을 통해 자신을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은 이것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Great Expectation”은 핍이 세속적으로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Great Expectation의 의미 자체를 바꾸어 놓음으로써 실현된다. 세속적 성공의 기회를 용감하게 포기함으로써, 그 실패를 통해 핍은 성공한다. “주인공은 시련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성격이 바뀔 뿐만 아니라 그의 성격을 평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윤리적 기준 자체가 바뀐다.”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헤겔 고유의 해결책은 진정 철저한 변화는 자기 관계 맺기적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변화를 평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들의 좌표 자체를 바꾼다. 다시 말해 진정한 변화는 자기 자신의 기준을 정한다. 그것은 오직 그것으로부터 유래하는 기준에 의해서만 평가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부정의 부정'이다. 즉 실패를 진정한 성공으로 바꾸어놓는 관점의 전환인 것이다. p932」

 

 

  변화는 외부의 기준에 의해서 인지되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 기준에 의하면 핍은 여전히 실패한 인물이다. 핍의 성공은 세속적 관점을 버리고 성공의 좌표 자체를 바꾼 사람의 눈에만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헤겔의 변증법적 전도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일도,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관점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성공의 필연적 실패 이야기, 주체가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성공’은 실패 자체 속에서 성공을 인식할 수 있는 관점의 반성적 전환뿐이라는 이야기이다.”

 

 

 

 

3. 라캉, 마르크스, 하이데거

 

 

  라캉은 <로마 보고>를 즈음해 치료의 종결을 헤겔적인 절대적 앎의 위치로 규정했다. 정신분석적 치료의 목적을 상징화의 완성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헤겔과의 차이가 없지는 않은데, 정신분석가는 결코 상징화/드러남이 완성되는 지점에 이를 수 없다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라캉을 이렇게 ‘약한 헤겔주의자’로 읽는 것은 틀렸다. 그것은 라캉에 앞서 헤겔에 대한 이해가 틀렸기 때문이다. (라캉의 생각은 후기에 와서 바뀐다.)

 

 

  「다시 말해 상징화의 완성, 존재의 완전한 드러남 등으로서의 절대적 앎은 헤겔적 ‘화해’를 이미 항상 여기 있는 어떤 것, 그리하여 단지 인수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서보다는 도달해야 할 이념으로 바꾸어버림으로써 완전히 요점을 놓치고 만다. 여기서는 헤겔적 시간성이 핵심이다. 즉 우리는 기적적으로 상처를 치유함으로써가 아니라 ‘현재의 십자가 위에서 장미’를 인식함으로써, 그러한 화해는 항상 우리가 소외로 (오)인하는 것 속에서 이미 이루어져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화해’를 행한다. p936~7」

 

 

  「그 결과 헤겔은 정말 증상을 다룰 수 있게 된다. - 모든 보편성은 현실성 속에서는 자신을 침해하는 하나의 초과를 낳는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헤겔적 총체성은 규정상 ‘자기모순적이며’, 적대적이며, 비정합적이다. ‘진리’인 전체는 진리 더하기 그것의 증상들로, 자신의 비진리를 폭로하는 의도치 않은 결과이다. p937」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는 필수적으로 공황을 유발한다고 했을 때, 그가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증상이다.

 

 

  「이 모두에서 기본적인 전제는 전체는 결코 정말로 전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전체라는 개념은 모두 무엇인가를 빼먹으며, 변증법적 노력은 다름 아니라 이러한 초과를 포함시키기 위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노력이다. 증상들은 결코 단지 기본적으로 건강한 체계의 이차적 실패나 왜곡이 아니다. - 그것들은 체계의 바로 한가운데서 무엇인가가 ‘썩었다는 것’(적대적이고 비정합적이다)을 알려주는 표시들이다. p937」

 

 

  증상은 썩은 사과 같은 것이 아니다. 도려내면 되거나, 애초에 잘 길러 썩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증상을 도려내면 체계 자체가 사라진다. 그러므로 증상은 체계의 진리이자, 체계 자체가 결코 ‘전체’일 수 없음에 대한 증표이다.

 

 

  「증상은 큰 타자를 침식하는 것, 타자가 그 속에서 간극, 비정합성, 실패, 무능을 드러내는 것이다. 라캉이 ‘나, 진리가 말한다’고 쓸 때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실체적인 ‘큰 타자’가 말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와 반대로 타자의 실패가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수는 총체성의 진리의 종속적 계기 속으로 지양될 수 있는 부분적 비진리인 반면 증상은 총체성의 억압된 진리의 부분적 드러남, 총체성이 허위임을 드러내는 진리이다. p943」

 

 

  그런데 증상은 이미 있는 어떤 것의 표현이 아니다.

 

 

  「증상은 이미 주체 속에 깊숙이 머물고 있는 어떤 실체적 내용의 부차적 표현이 아니다. - 반대로 증상은 ‘열려 있으며’, 미래에서 오며, 오직 증상을 통해서만 존재하게 되는 내용을 가리킨다.p944」

 

 

  ‘여성은 남성의 증상이다.’를 읽는 지젝의 방식은 이렇다. 애인의 성향에 따라 정치적 대의를 바꾸는 어떤 시인에 대한 일화가 있다. 애인이 여성 우익 파시스트일 때는 군사적 규율과 애국적 희생을 찬양하고, 공산주의 여성과 사귀면 게릴라전을 찬양하고, 히피 여자와 사랑하면 약물과 초월적 명상에 대한 글을 썼다. 여기에서 규정적 요소는 여성이다. 남성은 여성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뀐다. 증상이 총체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남성은 자신의 증상들을 향해 방향을 잡으며, 삶에 정합성을 주기 위해 그것에 매달린다. 그리고 헤겔적인 이성의 간지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즉 이성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간이라는 대리인들을 이용하는 막후의 비밀스러운 힘이 아니다. 오직 각자의 특수한 목적을 추구하는 대리인들밖에 없으며, 그들이 ‘자기생산적으로’ 하는 것이 좀 더 큰 유형으로 조직된다. p946」

 

 

  이 절의 제목은 ‘라캉, 마르크스, 하이데거’ 인데 막상 마르크스와 하이데거에 관한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다. 계속 이성의 간지와 관련된 총체성, 증상, 비전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따라서 나도 하이데거는 그냥 대충 통과 ;;

 

 

 

 

4. 전도의 ‘마력’

 

 

  지젝의 책 중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가 있다. 이 제목은 헤겔의 『정신현상학』 서문 중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따온 것이다.

 

 

  「참으로 정신이 이러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바로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며 그것과 함께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머묾으로써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화시킬 수 있는 마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p949」

 

 

  증상은 도려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썩어 있다는 징표라는 의미에서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것을 직시함으로써,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은 주문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부정적인 것이 변증법적 전도를 일으키면 그것이 바로 긍정적인 것이 된다.

 

 

  「본래적인 의미의 변증법적 전도는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으로 전도되는 것, 불가능성의 조건이 가능성의 조건으로 전도되는 것, 장애물이 가능하게 해주는 작인으로 전도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초월성이 내재적으로 전도되는 것, 언표의 주체가 언표된 내용 속에 포함되는 것이기도 하다.

  자체 내로의 이러한 전도는 변증법적 과정에 핵심적이다. 먼저 물의 단순한 표시(속성, 반영, 왜곡)처럼 보이는 것은 물 자체임이 드러난다. 만약 관념이 자신을 적절히 나타낼 수 없으면, 만약 그러한 나타냄이 왜곡되거나 결함이 있으면 그것은 동시에 관념 자체의 한계 또는 결함을 알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편적 관념은 항상 왜곡된 또는 전이된 방식으로 출현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왜곡 또는 전치, 자신과 관련한 특수성의 자기-부적합성에 다름 아니다. p958」

 

 

 

 

5. 반성과 전제

 

 

  철학 책을 조금 읽기 시작한 독자가 가장 궁금해 하지만 막상 똑 부러진 대답을 듣기가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가 “주체란 무엇인가?”가 아닐까 싶다. 지젝의 여러 책들에도 주체는 빈번하게 나오는 개념이지만 나는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지젝은 6장에서 주체는 사람과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했다. 그러면 주체는 무엇인가?

 

 

  「주체는 결코 직접적으로, 긍정적인 실체적 독립체로 주어지지 않으며, 우리는 결코 주체를 직접적으로 마주치지 않으며 그것은 두 개의 시니피앙 사이에 〔존재하는〕것으로 ‘가정된’ 깜박거리는 공백일 뿐이다. 즉 정확히 ‘주체’란 무엇인가? 하나의 발언을 생각해 보라 -이 발언은 어떻게, 언제 ‘주체화되는가?’어떤 재귀적 특징이 주체적 태도를 거기에 써넣을 때 그렇게 된다.- 이러한 엄밀한 의미에서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에게 주체를 대표할’ 수 있다. 주체는 이러한 재귀적 비틀기, 이러한 왜곡을 설명하기 위해 가정되어야 하는 부재하는 X이다. 그리고 여기서 라캉은 끝까지 밀고 나간다. 즉 주체는 의미작용의 사슬의 외적인 관찰자-청취자에 의해 가정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가정이다. 주체는 하나의 물로서의 자신에게는, 예지체적 동일성 속에서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에게 영원히 사로잡히게 된다. 나를 사로잡는 대상으로서의 나의 형상들이 아니라면 모든 분신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 타자들은 나를 위한 가정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그에 못지않게 나를 위한 하나의 가정이다. 즉 추정되지만 결코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아무리 면밀히 또는 깊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더라도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특수한 생각들, 특정한 정신 상태, 지각들, 감정들 뿐 결코 ‘자아’는 아니라는 흄의 유명한 견해는 요점을 놓치고 있다. 즉 이처럼 주체가 결코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에게 접근 불가능한 것은 그것이 ‘자아’라는 것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p963~4」

 

 

  주체는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가정’ 이며, ‘출현’ 이다.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지만 하여튼 그렇다고 한다. 사람도 아니고 자아도 아니고 실체도 아니고 접근도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고 가정된 X, 혹은 그 보다는 가정 자체, ... 이것이 주체란다.  

 

 

 

 

 

6. 상호주체성을 넘어

 

 

  조금 쉬워 보이는 것에서 시작하자. 키스란? “입 닥쳐! 내가 네 입을 닫음으로써 우리 관계를 망치려고 위협하는 간극을 닫도록 하자!” 라는 말에 다름 아니라면? 그래서 매춘부들이 고객과의 키스를 거절하는 것에는 어떤 진리가 있다. “그것은 이방인이 입을 막는 것에 주체성의 심연을 넘겨주고 싶지는 않다는 신호이다.”

 

 

  「키스는 ‘언어의 힘을 빠져 나가는 질문’에 대한, 라캉이 ‘케 부오이’라고 부르는 것에 다름 아닌 것에 대한, 즉 타자의 욕망의 심연과 관련된 질문에 대한 답이다. 키스는 육체적 실재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통해 심연의 원천을 닫아버리는 방식으로 이 심연을 진정시키기 위한 어설프지만 필사적인 조치이다. p969」

 

 

  드라마에서도 많이 봐온 장면이다. 대답이 궁할 때 흔히 남자가 여자에게 써 먹는 수법. 물론 대개 사랑의 이름으로 여자는 쉽게 자신의 ‘주체성의 심연’을 넘겨주고 사태는 봉합된다.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볼까. 성경은 왜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도 하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도 할까? 답은 체스터튼이 준다. 그 둘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웃은 “규정상 너무 가까이에 있는 불청객” 들을 가리킨다.

 

 

  「말라부는 생명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엄밀하게 논리적으로 다수의 주체들을 연역해내고 있음에도 또 다른 주체와의 마주침에는, 즉 주체가 자신 밖에서, 자신 앞에서 또한 주체라고 주장하는 세계 속의 또 다른 살아 있는 존재와 마주친다는 사실 속에는 환원 불가능한 스캔들, 트라우마적이고 전혀 예기치 못한 어떤 것이 들어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p973」

 

 

  어설프게 이해한 것을 대충 말하자면 이런 것이 아닐까? 정신이 외화된 것이 세계라면, 그 세계는 내 것이고 의식을 가진 주체는 나뿐이어야 할 텐데, 또 다른 주체가 나타나 자기도 똑 같은 정신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엄청 황당무계스럽다, 뭐 이런..

 

 

  「내 앞에서 또 다른 자기의식과 조우하게 될 때 내 안에는 나뿐만 아니라 나와 마주하고 있는 자기의식을 인류라는 종의 단순한 구성원들로 환원시키는 것에 저항하는 무엇인가 (이것은 단순히 자기 중심벽이 아니라 자기의식이라는 개념 자체 안에 있는 어떤 것이다)가 나타나게 된다. 즉 그러한 마주침을 충격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거기서 두 보편성이 오직 하나의 보편성만을 위한 공간이 있는 곳에서 만나는 것이다. p974」

 

 

  「따라서 원초적인 만남에서 타자는 내가 인정의 상호주체적 공간을 공유하는 또 다른 주체일 뿐만 아니라 트라우마적 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초과가 본래 셈해질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주체들은 결코 1+1+1...이 아니다. 항상 이 계열에 자신을 추가하는 대상적 초과가 있다. ..물론 이러한 초과적인 유령적 대상은 주체의 대리인, 대상으로서의 주체 자체, 주체의 불가능한-실재적 대상적 맞짝이다. p975」

 

 

 

 

7. 충동 대 의지

 

 

  “헤겔은 충동을 사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7장에서 다루었던 주제이다. 지젝의 결론은 헤겔 자신은 채 주제화하지 못했지만 헤겔적 변증법의 핵심은 바로 죽음충동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8장에서 지젝은 헤겔의 힘 개념을 들어 죽음충동과의 근접성을 설명한다. 그러나 충동은 곧바로 힘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충동은 좌절당한 힘이다. 충동은 목표를 맞추지 못하고 실패를 되풀이 하는데, 이 반복이 바로 충동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충동은 또한 자연적인 것도 문화적인 것도 아니다. 충동은 자연 상태의 문화다. 칸트가 교육이 길들이려하는 것은 인간 안의 동물적 본성이 아니라‘난폭함’이라고 할 때의 그 난폭함과 상동적이다.

  그러나 충동은 의지와 대립적인 것도 아니다. 사진으로 표현하자면, 충동은 의지의 음화이다.

 

 

  「그것은 대상을 내쫓고, 잃어버리고, 간극을 도입하라는 독려이지 그것을 극복하라는 독려가 아니다. 따라서 심지어 의지는 충동에 대한 대항-운동, 통제와 지배의 심급인 에고의 경제에 ‘탈주체화된’ 충동을 ‘다시-기입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p982」

 

 

  라캉의 충동 공식은 ‘$-D’이다. 라캉의 유명한 공식들 중 충동 공식은 유독 왜 요구와 관련되어 있을까 궁금했다.

  충동은 요구 너머의 간극이나, 요구 속에 있는 요구 이상의 어떤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요구가 하는 말 자체이다. 이와 달리 욕망은 늘 욕망하는 것 이상의 것을 욕망하므로써, ‘그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야’를 반복한다. 욕망은 히스테리적이지만,  충동은 히스테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안티고네가 요구하는 것이  충동을 잘 보여준다.

 

 

  「그녀의 무조건적인 요구는 오빠를 제대로 상징적으로 매장하라는 것이며, 그녀는 그것을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고집한다. 그녀가 무엇이든 그녀는 히스테리하지 않다. 그녀는 그녀가 말 그대로 원하는 것을 원한다. 그 자체로 그녀의 행위는 의식과 무의식의 대립을 넘어서며, 또한 영원한 불문법을 포함해 모든 큰 타자의 형상들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심연과도 같은 자유의 행위이며,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p984」

 

 

 

 

8. 자기의식의 무의식

 

 

  몸이 힘들면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몸이 팔팔하면 정신도 따라서 맑아진다고 할 수는 없다. 육체가 없으면 정신도 없다. 그렇다고 육체가 정신의 전부는 아니다. <자기의식의 무의식> 이 어려운 것이, 내용 때문인지 내 몸 상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정리가 잘 안 된다. 한 문장만 인용하고 끝내야 겠다.

 

 

  「인간의 욕망은 항상 욕망하는 것에 대한 욕망이라는 라캉의 말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칸트적 재귀성을 형식적으로 그대로 복제한 형태로 나는 결코 단지 직접 대상을 욕망하지 않으며, 항상 재귀적으로 이 욕망과 관계한다. - 나는 그것을 욕망하기를 욕망할 수 있으며, 그것을 욕망하는 것을 증오할 수 있으며, 나의 이 욕망에 무관심해 중립적으로 보아 넘길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의 이러한 재귀성의 철학적 결과는 핵심적이다. 그것은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사이의 대립이 의식과 자기의식 사이의 대립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무의식은 어떤 종류의 전-재귀적이고, 단정 이전의 원시적 기질로 나중에 의식적 재귀성에 의해 가공되는 것이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주체에게서 가장 철저하게 ‘무의식적인 것’은 자기의식 자체, 즉 재귀적으로 의식적 태도와 관련 맺는 방식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적 주체는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보다 정확하게는 후일의 칸트적-헤겔적 자기의식 속에서 정교화 되는 것과 동일하다. p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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