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카페 Less Than Nothing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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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주곡 4

미래로부터 빌려 오고, 과거를 바꾸기

 

 

 

  훌륭한 제목이다. 내용이 뭔지 딱 감이 오니, 고맙다. 2장 <아무것도 없거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로 읽어라>는 두 달 만에, 기억나는 내용이 하나도 없다. 아마 한 달 전에도 아니면 2장 리뷰를 끝낸 직후였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간주곡4의 핵심어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소급성’과 ‘반복’ 이다. 아마도 retroactivity가 소급성의 원 단어가 아닐까 싶다. 소급성은 헤겔의 ‘전제정립’의 방법(?) 이기도 하고, 원환이 닫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마 그럴...그렇지 싶다;;

 

 

  간주곡4에서 지젝은 바야르의 『예상표절』을 소개한다. “예상표절”. 이른바 형용모순이지만 잘 읽어보면 언제나 그렇듯 꽤나 그럴듯한 개념으로 들린다.   표절이란 이미 있는 작품에서 베끼는 것이지만,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의 작품에서도 표절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대번 타임머신이 연상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설명이다.

 

  「바야르는 불일치를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두 작품이 공유하는 특징들과 관련해 후자가 그러한 특징을 보다 풍부하게 발달된 형태로 담고 있는 반면 전자에는 단지 작품 전체에는 맞지 않으며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처럼 미발달된 단편들만 들어 있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면 합리적 확신을 갖고 앞선 시대의 작품이 후대의 작품을 표절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p994~5」

 

  바야르는 모파상과 프루스트를 예로 든다. 모파상의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에는 우리가 흔히 ‘프루스트적’이라고 알고 있는 특징이 섬뜩할 정도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일상적 대상과의 우연한 만남이 과거에 대한 반쯤은 잊혀진 다수의 기억들을 촉발하는지를” 그려내는 프루스트적 특성 말이다. 마들렌 과자가 불러일으키는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 본적이 없는 나도 여러 번 들어 보았을 정도로 프루스트를 대표한다. 그런 특징이 모파상의 소설에도 그대로 드러나지만 그것은 ‘모파상적’인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30년 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발표되고 나서야 모파상의 소설은 새롭게 ‘푸르스트적’인 시각으로 읽혀질 수 있다. 이것이 바야르가 “예상표절”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시간대를 살지만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영혼들의 신비로운 합일이라는 식의 뉴에이지적 주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예상표절’이라는 생각을 단순히 하나의 도발적인 생각으로 기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것이, 현재가 미리 규정된 미래를 예시하는 어떤 종류의 감추어진 목적론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그러한 생각은 심오하게 반목적론적이며 유물론적이다. - 거기에 덧붙일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는 소급성이라는 핵심적 개념이 전부다. p996」

 

  「열쇠는 반복이라는, 즉 사물들이 ‘본래의 모습대로 될’ 수 있도록 해주는 반복이라는 변증법고유의 개념에 있다. 모파상은 오직 일단 프루스트가 도착해야만 프루스트의 앞-선-표절자가 되고, 그다운 그가 된다. 헤겔적 용어를 빌리자면, 즉자 존재에서 대자 존재로 전환되는 것이다. 즉 프루스트 속에서의 반복을 통해 모파상은 소급적으로 프루스트적으로 된다. 이것은 즉자 존재로서의 모파상의 소설의 모습과 프루스트 이후 소급적으로 읽었을 때의 모습 사이에 철저한 분열을 도입해야 함을 의미한다. - 즉 프루스트의 텍스트가 또 다른 모파상, 프루스트적인 모파상을 낳는 것이다. p997~8」

 

  프루스트가 모파상을 반복하고, 그 결과 모파상은 소급적으로 다시 읽혀지면서 프루스트적인 모파상이 된다. 그러므로 세 개의 텍스트가 존재한다. 모파상의 원작 소설, 프루스트의 연작 소설들, 그리고 프루스트적 모파상.

  그렇지만 한편, 소급성이라는 것이 별 독특한 개념이 아니라 그냥 우리가 흔히 독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고 할 때의 그 재해석과 동일한 말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모파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읽는 방식이 프루스트에 의해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닌가? 이에 대해 지젝은 텍스트의 비전체성으로 응답한다.

 

  「오히려 모파상의 텍스트를 비전체로,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것으로,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간극들과 비정합성들로 가득 찬 것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p998」

 

  또 다시 ‘비전체’로 귀결된다. 모든 것이 인과관계에 의한다면, 세계가 총체적이라면, 다시 말해 한 치의 틈도 없다면 소급성이 작동할 여지는 전혀 없다. 반복 역시 필요 없어진다. 아무런 차이도 창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반복이 과거를 소급적으로 재정립하기 때문에, 필연성과 인과성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열려 있고, 주체의 자리는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소급성에 관한 또 다른 측면의 고찰을 살펴보자. 말과 사유는 어느 것이 먼저일까? 러셀은 어느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 두 귀로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기 전까지는 당신을 사랑하는지 몰랐다오. - 잠시 ‘맙소사,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오. p1015」

 

  이 편지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말이 먼저 오고 의미는 소급적으로 뒤따른다는 것이다. 데넷은 이것이 의미를 낳는 기본적인 메커니즘이라고 말한다. 어떤 깊은 인식이 미리 존재하고 그것이 어떤 구절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저절로 떠오른 구절이 우리의 경험을 깊은 인식으로 조직해 낸다. 의미의 출현은 표현의 소급적인 영향이다.

 

  「언표 수준에서 이것은 사유 - 의도하는 바의 의미, 말하려고 하는 것- 는 그것의 ‘표현’ 과정에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나는 말하려고 하는 것을 오직 그것을 말함으로써만 발견한다. p1013」

 

  지젝은 이례적으로 클라이스트의 논문 「말하는 과정에서의 생각들의 점진적 형성에 대해」전문을 인용하면서 시니피앙의 소급성에 대해 또 한 번 강조한다. 전문이라 해도 다행히 7쪽 정도의 짧은 논문이라 그렇게 무리한 인용은 아니다. 논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입맛은 먹을수록 생긴다’ 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경험적 격언을 패러디해 ‘생각은 떠들수록 는다’ 라고 말해도 여전히 사실일 것이다. p1017」

 

  글쓰기도 마찬가지일 때가 종종 있다. 책을 읽을 때 생각했던 내용은 글을 쓰다 보면 사라지고 문장의 흐름에 이끌려 오히려 생각 자체를 바꾸게 된다. 물론 말을 할 때도 그렇다. 처음에는 얼굴만 벌겋게 달아올라 횡설수설하는데, 어느 순간 마구 지껄이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돌아보는 순간 하고 있는 말의 의미가 또렷해지는 것이다. 떠들수록 생각이 는다.

 

  「나는 많은 위대한 웅변가들은 입을 열기 전에는 자신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몰랐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에 필요한 풍부한 생각은 그의 연설을 둘러싼 조건 그리고 그로 인해 빚어질 흥분 상태에 의해 자연스럽게 영감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확신은 순전히 행운을 믿고 연설을 시작할 정도로 그들을 대담하게 만들었다. p1018」

 

  「이처럼 클라이스트는 오직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가 완벽해졌을 때야 비로소 입을 열어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는 통상적인 지혜를 뒤집어 버린다. “따라서 만약 어떤 생각이 혼란스럽게 표현되는 경우 그로부터 그러한 생각 또한 혼란스런 방식으로 떠올린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극히 혼란스런 방식으로 표현된 생각이 가장 명료하게 떠올린 생각인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p1024」

 

  프랑스 혁명사의 유명한 한 순간이 이에 해당한다. 국왕이 주재하는 마지막 국민회의가 끝난 후 왕은 국민회의의 해산을 명령했다. 해산하지 않고 웅성거리는 의원들에게 왕의 의전관이 왕의 명령을 받았느냐고 물으며 해산을 종용했을 때, 미라보는 ‘벼락을 쳐서’ 그를 내쫓았다. “그렇소, 왕의 명령을 이해했소.”라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까지 미라보는 그가 총검으로 말을 끝맺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신은 도대체 무슨 권한이 있어 우리에게...”라고 계속하면서 갑자기 놀라운 생각들의 원천이 그를 위해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국민의 대표들이란 말이오!" 그리고 마침내 “국민은 명령하는 것이오. 국민은 명령을 받지 않소!” 라고 말했다. 바로 그에게 필요했던 그 말이 갑자기 튀어 나온 것이다. “왕에게 가서 오로지 총검으로만 우리를 여기에서 몰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시오!”  미라보는 오만하게 말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느긋하게 앉았다.

 

  「미라보와 안티고네: “진리는 그것의 언표에 의해 촉발된 놀라움의 효과”임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두 사례이다. - 또는 prise와 sur-prise 사이의 말놀이를 언급하면서 알튀세르가 한 말을 빌리자면, 어떤 내용에 대한 모든 진정한 파악prise은 그것을 완수하는 사람에게 놀라움surprise으로 다가온다. p1027」

 

  이것은 헤겔적인 변증법적 과정의 구조와 닮아있다.

 

  「헤겔적인 ‘변증법적 과정’의 구조는 가차 없는 개념적 필연성에 의해 규제되는 결과들의 자동적인 전개가 아니라 정확히 클라이스트에 의해 묘사되고 있듯이 길을 잃고 그런 다음 어떤 안을 급조해내는 과정이다. 어떤 것을 말하기로 계획하지만 일이 틀어져 길을 잃으며 교착 상태를 피하려고 급조된 해결책을 고안한다. p1028」

 

 

  과거를 반복함으로써 미래가 과거를 소급적으로 구원 한다 혹은 정립한다 라는 개념은 지젝의 핵심적 주장 가운데 하나이다. 이 개념은 그의 행위의 원천이기도 하다. 헤겔을 비롯한 독일 관념론 철학과 라캉의 정신분석을 통해 그가 고금의 온갖 철학자들과 대결하며 치열하게 투쟁할 때, 그 난해한 개념과 현란한 수사의 난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보면 그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참 단순하다. 비록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여하튼 우리는 다시 공산주의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돌아가는가? 레닌을 반복함으로써 레닌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레닌적인 것을 구원함으로써 다시 공산주의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프루스트가 모파상을 반복함으로써 모파상이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모파상이 출현한 것처럼 말이다. 지젝은 대중들을 향해 차마 communism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commons를 주장한다. 우리가 레닌을 반복함으로써 스탈린적 증상 없이 완벽한 commons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체계는 언제나 비정합적이고 비전체이며 자체의 증상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증상을 제거하려고 할 때, 완벽한 유토피아를 실현하려 할 때, 전체주의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 위험을, 그 부정성을 당당하게 감수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여기 1:99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처음 지젝을 읽기 시작했을 때, 그래서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건지 도통 이해 할 수 없었지만, 2009년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를 읽으며 그가 무엇을 주장해 왔는지 뒤늦게 알아 차릴 수 있었다. 비록 아직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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