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카페 Less Than Nothing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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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합과 순수 차이

 

 

 

 

 

0.

 

 

  40여 년 전에 밀레와 바디우 사이에 짧은 논쟁이 벌어졌다. ‘봉합’ 개념을 둘러싼 논쟁의 배경은 주체와 구조 사이의 관계다. 결여로서의 주체와 구조 사이의 관계, 주체의 지위는, 그 자체로 ‘구조주의’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밀레는 처음으로 주체를 구조에 속한 개념으로 제안하고 정교화 했다. 주체화된 구조라는 밀레의 개념에 격렬하게 반대한 바디우는 익명의 또는 탈주체적 구조를 고수했다.

 

 

 

 

1. 차이성으로부터 팔루스적 시니피앙으로

 

 

‘주체화된 구조’라는 개념을 정교화하기 위해서는‘차이성’ 이라는 개념에서 시작해야 한다. ‘차이성’을 처음으로 정식화한 사람은 소쉬르다.

 

「그는 시니피앙의 정체성은 오직 일련의 차이들(자신을 다른 시니피앙들과 구분 지어주는 특징들)에만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 시니피앙에 긍정적인 것은 없다. 그것은 단지 일련의 무엇이 아닌 것일 뿐이다. 차이적 정체성의 핵심적인 결과는 어떤 특징의 부재 자체가 하나의 특징으로, 긍정적 사실로 간주될 수 있다는 데 있다. p1037」

 

  특징의 부재가 하나의 특징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예를 들면 셜록 홈즈의 이런 대화에서 볼 수 있다. “그날 밤 개의 이상한 행동을 놓치지 마시오.” “그날 밤 개는 전혀 짖지 않았는데요.” “그게 바로 이상한 행동이오.”

  차이성의 이런 특징은 변증법의 핵심적 특징과 동일하다. 앞 선 장들에서 되풀이 설명했던, 부정성의 긍정성으로의 전환 말이다. 그러므로 1960년대 구조주의의 폭발은 ‘변증법에 대한 재각성 또는 재발견’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고 제임슨이 강조한 것은 옳다. 제임슨은 나아가 “『정신현상학』이 미완성 상태의 심히 구조주의적인 저서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차이성만으로는 의미가 출현할 수 없다. 이것은 저것이 아니고 저것은 그것이 아니고의 연쇄를 끊어 줄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이것이 말하자면 ‘봉합’ 이다. 밀레가 말하는 봉합, 라캉의 누빔점, 주인기표, 남근기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시니피앙의 동일성이 단지 그것을 구성하는 차이들의 연속일 뿐이라면 모든 의미화의 연속은 특정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 재귀적 시니피앙에 의해 보충 -‘봉합’ -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의미의 부재와 반대되는) 의미의 현존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p1041」

 

  차이성에서 봉합으로의 이행은 현실사회주의를 풍자하는 농담을 통해 다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회주의 정권의 전략은 차이성에, 즉 모든 부정성을 긍정적인 특징으로 바꾸는 것에, 있다. “상점에 고기가 없어요.”“비만으로 죽을 염려가 없으니 얼마나 좋아!”, “영화도 책도 너무 없어요.” “ 이웃들과 풍부한 사교생활을 즐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비밀경찰이 내 삶을 통제하고 있어요.” “ 그러니 마음 턱 놓고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잖아!”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지다가 드디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다. “그런데 공장 때문에 공기가 너무 오염되어 아이들이 치명적인 폐질환에 걸렸어요.” 여기서 봉합이 필요해 진다. “아니 대체 뭘 원하는 거야. 결함 없는 체제는 어디에도 없다고!”

 

「모든 의미화의 장은 보충적인 0-시니피앙, “0의 상징적 가치 즉 시니피에가 이미 포함하고 있는 것을 넘어, 그리고 위에, 상징적 내용을 보충할 필연성을 표시하는 기호”에 의해 ‘봉합’ 되어야 한다. 이 시니피앙이 ‘순수한 상태의 상징’ 이다. 어떠한 특정한 의미도 결여하고 있는 그것은 의미의 부재와는 반대로 의미의 현존 자체를 나타낸다. p1042」

 

  기의를 갖지 않지만, 그 자체로 기의의 현존을 드러내는 기표가 ‘0-시니피앙’ 이다. 라캉이 ‘누빔점’이라 불렀고, 나중에는 ‘주인기표’로 발전시킨 개념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까 주인기표의 역할이 봉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나’로부터 ‘봉합’으로 나가는 핵심적 발걸음인 이러한 3항적 제스처는 ‘누빔점’이라는 개념 - 이 개념의 명백한 지시 대상은 분명히 봉합을 가리키고 있다. - 의 명료화로부터 시작해 라캉에 의해 서서히 완수되었다. 레비-스트로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누빔점’은 시니피앙의 장과 시니피에의 장이라는 두 장을 봉합하며, 라캉이 아주 엄밀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대로 ‘시니피앙이 시니피에에 딱 들어맞는’ 점으로 작용한다. p1043」

 

 

  이름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장미’라는 이름은 일련의 속성을 가진 대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모든 속성을 하나로 묶는 것은 오로지 그 이름이다. 사물에 이름이 필요한 이유는 이름만이 사물에 동일성(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 명사가 없다고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건망증이 생기면 가장 먼저 잊어버리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명사라고 한다. 드라마 얘기를 하다가도 연예인 이름 하나가 기억나지 않아, 한 마디로 할 이야기를 저기 옛날에 무슨 드라마에서 무슨 역할로 나왔던 그 머리 길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사태가 발생해 버린다.

 

  「이 모든 경우에 이름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 안에 포함된다는 정확한 의미에서 ‘시니피앙은 시니피에에 딱 들어 맞는다.’ - 의미의 통일(성)을 구현하기 위해 시니피앙은 시니피에 속으로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다수의 특징들 또는 속성들을 단일한 대상 속으로 통일시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의 이름이다. p1044」

 

  사회의 혼란기에 상황을 장악하는 주인의 역할 역시 ‘새로운 시니피앙’, 즉 ‘누빔점’을 고안해 내는 것이다. 주인은 현실에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시니피앙을 덧붙일 뿐이다. 히틀러가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히틀러는 독일 사회의 극심한 혼란에 단지 ‘반유대주의’라는 시니피앙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바로 거기에 주인의 마술이 있다. 긍정적인 내용 수준에서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주인이 말을 공언한 다음에는 ‘어떤 것도 전과 같을 수 없다.’ p1045~6」

 

  이름은 물物의 특수한 특징이 아니라 물物의 ‘증상’ 이다. 이름은 물을 물로 만드는 대상a, X, 거시기한 것을 나타낸다. 이 X는 ‘당신 속에 있는 당신 이상의 것’ 이다. 이름은 물의 속성들의 집합이 아니라 저 파악하기 힘든 X를 가리킨다. 속성들을 아무리 많이 갖다 붙여도 그것들은 물과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근기표, ‘팔루스’는 결여의 시니피앙이다. 그리고 팔루스적 주인기표가 주체의 상징적 동일시의 지점인 한 동일시는 궁극적으로 항상 결여와의 동일시다.

 

  「그리하여 팔루스적 시니피앙은 권력과 생식력의 상징이기는커녕 체계의 구조적 실패를 구체화하고 있다. 즉 그것은 어떤 결함이 더 이상 긍정적인 특징으로 배역을 바꿀 수 없게 되는 지점을, “뭘 원하는 거야, 결함 없는 체계는 없어!” 라고 말하는 지점을, 거세가 체계 안에 기입되는 지점을 나타낸다. 그것이 은폐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이 드러나는 것은 거세가 드러나는 것과 같다. 그것을 은폐하는 것은 “두 개의 핵심적 의지처를 갖고 있다. 벽 -이것은 공포증적 해결책이다.- 또는 베일 -이것은 물신주의적 해결책이다. - 이 그것이다.” p1057」

 

  「라캉은 팔루스는 신체기관으로서의 페니스가 아니라 시니피앙, 심지어는 ‘순수한’ 시니피앙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 따라서 그렇다면 왜 이 ‘순수한’ 시니피앙을 ‘팔루스’라고 부르는가? 하지만 들뢰즈에게는 분명했듯이 거세라는 개념은 아주 특수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즉 보편적인 상징적 과정은 어떻게 신체적 뿌리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가?가 그것이다. 어떻게 상대적 자율성 속에서 출현할까“ ‘거세’는 우리가 비신체적인 것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폭력적인 신체적 절단을 가리킨다. p1061」

 

  남근기표인 Φ(또는 -ϕ)는 ‘상상적 남근의 상징적 거세’를 의미한다. 상상적 남근이란 생물학적인 페니스의 유무와는 관련이 없다. 생물학적인 여성도 거세될 수 있다. 그렇다면 상징적 거세란 무엇인가? 왕홀이나 왕관 혹은 휘장, 법복 같은 것을 걸치는 것이다. 이것들에 의해 나는 직접적인 나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상징적인 내가 된다.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것들을 입는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 나를 ‘거세시킨다.’그것들은 직접적으로 내가 나인 것과 내가 실행하고 있는 기능 사이의 간극을 도입한다. 이것이 바로 저 악명 높은 ‘상징적 거세’가 의미하는 것이다. ...상징적 질서에 사로잡혀 상징적 권한의 위임을 받아들이는 사실 자체에 의해 일어나는 거세이다. 거세는 직접적으로 내가 나인 것과 그러한 ‘권한’이 나에게 부여하는 상징적 권한 사이의 간극이다. 정확히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권력과 정반대 것이기는커녕 권력과 동의어이다. 바로 그것이 나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p1062」

 

  언뜻 보면 p1057의 인용문과 p1062의 인용문은 상충하는 것 같다. 앞에서는 팔루스적 시니피앙이 ‘권력과 생식력의 상징이기는커녕’이라고 했는데, 뒤에서는 거세가 ‘권력과 정반대이기는커녕 권력과 동의어’라고 하니 말이다. 팔루스는 거세의 시니피앙이므로 둘 중 하나는 틀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세는 이중적이다. 주체는 거세에 의해 상징적 권한을 위임받지만, 거세되었다는 사실은 은폐되어야 한다. “뭘 원하는 거야!, 다 그런 거지” 가 튀어 나오면 상징적 권한은 무너진다. “나 원래 그런 놈이야, 그래도 내가 왕이야.”는 사실이지만, 이 사실이 공적으로 등록되는 순간 왕으로서의 상징적 효능은 사라진다. 무소불위의 독재가가 한순간 초라한 노인으로 변하는 것도 바로 이 거세가 드러나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이성으로부터 팔루스적 시니피앙으로의 이행은 ‘소외’라고 할 수 있다. 상징적 권한을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소외’된다. 그렇다면 ‘봉합’은 주체의 소외라고 할 수 있나? 다음 절의 결어를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어떤 장을 봉합하는 것은 통일적인 특징이 아니라 순수 차이 그 자체라는 역설이 나타나게 된다. 어떻게?” 일반적으로 봉합이란 주체가 실재와 대면하는 것을 가로막으며 아버지의 이름으로 체계를 닫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여기서 지젝은 봉합에 어떤 역설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 어떻게? 그리고 왜? 밀레가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에? ...

 

 

2. 팔루스적 시니피앙으로부터 대상 a로

 

  도식적으로 말하면 소외는 주체로부터 대상a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고, 분리는 이 대상a가 타자로부터도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주체가 인식하는 것이다. 주체에게 결여된 그것이 타자에게도 결여되었다는 것을 주체가 알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정신분석의 ‘분리’ 과정이다. '팔루스적 시니피앙으로부터 대상a로'는 말하자면 ‘소외에서 분리로’라는 말이다. 주인기표의 역할은 분리를 방해하는 환상을 제공하는 데 있다.

 

  「바로 거기에 주인-시니피앙의 환상이 있다. 그것은 대상a와 합쳐지며, 그리하여 주체의 타자/주인은 주체가 결여하고 있는 것을 소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소외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체가, 주체가 결여하고 있는 것을 소유한 타자의 형상에 직면하는 것이다. 소외에 이어지는 분리에서 대상a는 또한 타자로부터도, 주인-시니피앙으로부터도 분리된다. 즉 주체는 타자 또한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p1066」

 

  대상a와 일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갑자기 일자가 튀어 나와 이상하지만, 뭐 타자 혹은 주인기표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대상a는 일자에 대해 상보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보충물이다. 즉 자신이 달라붙어 있는 일자를 일자보다 더 나은 것보다는 더 못한 것으로 만들며, 그것을 내부로부터 부식시키는 이상한 보충물인 것이다. 그것은 빼기를 하는 초과이다. p1067~8」

 

  타자의 보충물이지만, 타자를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빼기의 보충물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잉여다. 잉여는 초과이자 결여니까. 그런데 헤겔은 이 개념에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모든 존재자에 그림자 같은 분신으로 들러붙어 있는 이 없음은 부정성의 0-수준으로, 그 자체로서는 헤겔에게는 접근 불가능한 것, 부정성의 완전한 전개라는 그의 논지 전체에 있어 주제화되지 않는 전제이다. 헤겔도 분명히 두 개의 결여, 주체의 결여와 실체 자체의/속의 결여라는 두 개의 결여의 겹침을 정식화한다. 하지만 그는 이 겹침(탈-소외)을 분리로는 바라보지 못하며, 그것을 결여의 취소로 바라본다. p1068」

 

  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비밀은 이집트인 본인들에게도 비밀이었다.”는 헤겔의 발언이라고 한다. 주체의 결여와 타자의 결여가 겹치는 것에 대한 멋진 비유이다. 그러나 헤겔은 대상a를 사유하지 못했다. 따라서 순수 반복 역시 생각하지 못했다. 순수 반복이란 대상a 즉 ‘없음’에 의해 지탱되기 때문이다.

 

  「순수 반복은 모든 일자를 사로잡는 대상a의 없음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일자는 자신의 그림자를 되찾기 위한 시도 속에서 자신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p1068」

 

  라캉의 유명한 네 가지 담론에는 네 가지 요소와 네 가지 자리가 있다. 담론의 유형에 따라 네 가지 요소들은 담론 구조 안의 네 자리를 바꾸어 가며 차지한다. 구조 속의 네 자리는 고정되어 있는데, 행위자 - 타자 - 생산 - 진리 이다. S1(주인기표) - S2(지식의 연쇄) - 대상a - $(주체) 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움직이는 요소들이다. 네 요소들은 각각의 고유한 속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 가에 따라 특성이 달라진다. 가장 유명한 예는 뒤샹의 변기다. 변기가 예술이 되는 것은 오직 전시관에 놓일 때뿐이다. 왕이 왕인 것 역시 왕좌에 앉았기 때문이다.

 

  「(고정된) 구조적 자리들과 그러한 자리들을 차지하는 (가변적) 항들 사이의 차이는 어떤 항이 그러한 자리와 물신주의적으로 응고되는 것을 깨뜨리고, 또 어떤 대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과연 어느 정도나 대상의 직접적 속성들이 아니라 그것이 차지하는 자리에 달려 있는지를 인식하도록 하는 데 있어 핵심적이다. p1069」

 

  그러나 일상에서 우리는 구조의 효과를 대상의 직접적 속성으로 오인하며 산다. 일종의 ‘물화의 희생자들’이다. 왕은 날 때부터 왕이다. 동화 <왕자와 거지> 그리고 그것의 사극 판이라 할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고 나와서도, 우리는 다시 오인 속에 살아간다.

 

  그런데 자리와 내용 사이의 간극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밀레는 “형식주의자에게는 형식이 있고, 세부사항은 중요하지 않다. 그와 반대로 구조주의자에게서 소재와 형식은 구분되지 않으며, 구조는 물 자체들에서 발견되며, 따라서 모든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구조와 물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 구조의 자리를 단지 차지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를 바꾸어 버리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대상a가 그토록 핵심적인 이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자신의 형식적 구조일 뿐‘인’ 어떤 대상의 본래적인 의미의 변증법적 역설을 다루고 있는 셈인데, 이 역설은 고정된 자리들의 집합 내부의 항들의 치환보다 훨씬 더 강력한 구조적 변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다. 어떤 요소가, 즉 그것의 출현(또는 사라짐)이 구조 자체를 바꾸는 요소가 개입할 때 그러한 치환이 종결된다. 그러한 요소가 라캉적인 대상a이다. 즉 그것의 지위가 철저하게 비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형식 자체가 탯줄에 연결된 것처럼 연결된 요소가 그것이다. 사회적 동역학 수준에서 그러한 요소를 보자면 바로 바디우가 사회적 건물의 ‘증상적 비틀림’ 이라고 부르는 것, 랑시에르적인 ‘비-분분의-부분’이 그것이다. 즉 이 요소는 단지 치환되어 동일한 형식적 건물 내에서 상이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만들어질 수 없다. - 위치에서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전체 건물 자체의 철저한 변형을 가져온다. 따라서 그저 봉합이라는 주제를 배경으로 ‘비-부분의 부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p1074」

 

  예를 들어 랑시에르의 ‘part of no part' 가 바로 자본주의의 구조를 확 바꿔 버릴 수 있는 요소, 대상a란 것이다. 여기서 대상a는 단지 요소가 아니라 형식에 바로 연결된 요소, 형식과 요소가 구분되지 않는 요소이다.‘part of no part'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구조이자 잉여적 요소이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 “따라서 그저 봉합~” 은 갑자기 왜 튀어 나온 것일까? 나는 여기서 봉합이 어떻게‘따라서’ 나올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 절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우리를 봉합이라는 개념의 가장 사변적인 측면으로 데려간다. 즉 어떤 요소와 그것의 자리 사이의 순수하게 형식적인 차이는 더 이상 실정적인 두 존재자 사이의 차이가 아닌 순수 차이로 기능한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러한 순수 차이는 상징적 차이성의 조건이다. 따라서 어떤 장을 봉합하는 것은 통일적인 특징이 아니라 순수 차이 그 자체라는 역설이 나타나게 된다. 어떻게? p1074」

 

 

3. 순수 차이

 

  들뢰즈의‘순수 차이’를 가장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예는 <빌리 베스게이트>라는 영화에 관한 것이다. 영화 자체는 실패작인데,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훨씬 나은 소설에 대한 기대감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원작 소설은 기대와 달리 또 하나의 실패작이다.

 

  「<빌리 베스게이트>와 관련해 영화는 그것이 각색하고 있는 소설을 ‘반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과 영화 모두 반복 불가능한 잠재적 X를, ‘진짜’ 소설 - 실제 소설에서 영화로 이행하는 와중에 그것의 유령이 생겨난다 - 을 ‘반복한다.’ 이러한 잠재적 참조점은 비록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다. 그것은 실패한 현실의 시도들의 절대적 참조점인 것이다. 유물론적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신성한 것은 바로 이런 식으로 지상의 물질적 요소들의 반복으로부터, 그러한 요소들에 의해 소급적으로 상정되는 ‘원인’으로 출현한다. 여기서 들뢰즈가 라캉을 언급하는 것은 옳다. 이 ‘더 나은 책’이 라캉이 소문자 대상a라고 부른 것, 오직 ‘결과 속에서’, 책과 영화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두 작품에서 붙잡는 방법 말고는 ‘현재 속에서는 달리 다시 붙잡을 수 없는’ 욕망의 대상-원인이다. p1097~8 」

 

  ‘더 나은 소설’이 바로 부재하는 욕망의 대상-원인인 대상a이다. 소설과 영화의 반복을 통해서 소급적으로 가정되는, 순수하게 잠재적인 요소이다.

 

  「...언제나 순환하며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해 자리를 옮기는 대상=x, 바로 이 대상=x와 관련해서 매 순간마다 각각의 항은 절대적인 자리를 갖게 되며, 또 이렇게 취해진 절대적인 자리에 의해 구조 속 계열들의 항들의 상대적인 자리가 정해지게 된다.... 말하자면 대상=x가 모든 구조 속에 차이를 분배하면서, 또 자기 자신의 자리 옮김을 통해 차등적인 관계들을 변화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차이 자체를 차이화하는 것을 구성하는 것이다. p1091」

 

  들뢰즈는 대상=x라고 부른다. 이것이 대상a와 같은 것이며, “부재하는 원인으로서 요소들을 분배하는 이 고정된 요소는 결과 속에만 현존하며 그 자체로서는 결과들에 의해 소급적으로만 가정되는 순수하게 잠재적인 요소”다.

 

  「만약 실재가 최소 차이라면 반복이 본원적이다. 실재를 상징화에 저항하는 물로 ‘물화하는 것’과 함께 억압의 우위가 출현한다. - 오직 그때에야 비로소 배재된 또는 억압된 실재가 자신을 고집하고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재는 근원적으로 어떤 물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간극, 반복의 간극에 다름 아니다.

  들뢰즈적 ‘순수 차이’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볼 때는 실제적인 속성들과 관련해 자신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반복하는 어떤 것의 순수하게 잠재적인 차이이다. p1092~3」

 

  억압이 있기 때문에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이 억압에 선행한다. 억압은 실재가 물화되면서 억압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실재는 물화될 수 없는 순수차이다. ‘더 나은 소설’은 순수하게 잠재적인 것이다. ‘더 나은 소설’의 개념에 딱 맞는 ‘더 나은 소설’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반복이 발생한다. ‘더 나은 소설’과 실제 소설의 간극이 순수 차이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서 밀레- 바디우 논쟁의 결과를 살펴보자. 누가 이겼는가? 단적으로 말하면 밀레의 ‘봉합’개념이 살아남았지만, 심각한 오해의 결과이기 때문에 승자를 쉽게 단언하기는 어렵다. 밀레의 개념과는 달리 ‘봉합’은 ‘폐쇄’와 동의어가 되었다. 내가 이 장을 읽기 전에 알고 있던 ‘봉합’이 바로 이 왜곡된 봉합인 셈이다. 여하튼 최종적 승자는 그러므로 밀레가 아니라 알튀세르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승리를 거둔 것은 주체는 구조적 필연성에 대한 상상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오)인의 자리라는 알튀세르적 개념이었으며, ‘봉합’이라는 개념은 당시의 지배적인 대중적인 수용과 용법에서는 그러한 오인의 조작자 자체로 해석되었다. 즉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경험의 장이 ‘봉합되고’, 이 장의 원이 닫히고, 탈중심화된 구조적 필연성이 비가시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조작을 가리켰다. 이러한 독법에 따르면 ‘봉합하기’는 이데올로기적 경험의 장 내의 근본적인 외부의 모든 교란적인 흔적들은 지워지고, 그리하여 이 장은 이음매가 없는 연속성으로 지각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p1106」

 

  밀레-바디우의 논쟁과 관련해 우리는 어느 편이 되어야 할까? 밀레는 최근 몇 년간 “정치는 상상적 또는 상징적 동일시의 영역이며, 그 자체로서 환상들의 영역” 임을 강조해 왔다. 이런 입장은 결과적으로 냉소적 비관주의에 이르게 된다. 모든 열정적인 집단적 참여는 낭패로 끝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환상들의 게임임을 알면서도 게임을 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다. 바디우는 이에 단호히 반대한다. 바디우는 진리-사건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오늘날 이러한 차이는 절대적으로 핵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 그것은 정치적으로 사느냐 죽느냐의 차이이며, 현재의 지배적인 탈-정치적 냉소주의를 승인하느냐 아니면 근본적인 해방적 참여를 위해 용기를 내느냐의 차이이다. p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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