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라캉 카페 ㅣ Less Than Nothing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10_
대상들, 대상들, 모든 곳에
0.
제목처럼 대상a에 관한 내용이다. 본문에는 “라캉 이론의 패러다임 같은 역할을 하는 대상a인 목소리와 응시”라는 표현이 나온다. 대상a가 라캉 이론의 패러다임이란 말일테다. 대상a를 이해하면 라캉을 이해한다고 뽐내볼 만하지만, 그 만큼 복잡하고 어렵다. 대상a와 $, S1의 관계가 꼬리를 문 뱀처럼 빙글빙글 돈다. 대상a와 $의 상관성은‘ 뫼비우스의 띠’, ‘시차적 관점’이란 말로 누차 강조되어 왔다. 이 장에서는 대상a와 S1을 두 가지 환상으로 규정하며 그 관계를 새롭게 설명한다. S1과 $의 관계는 “A signifier represents the subject for another signifier”에서 찾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에 자세히 그러나 엄청 복잡하게 나와 있다. 여하튼 그러고 보면 담론의 네 가지 요소 중 세 가지인 S1,$,a 가 사실 그 뿌리는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이것들의 복잡한 상관관계에 부딪힐 때면, 괜히‘이거 다 한 통속 아니야!’째려 보는 것이지만, 서로 밀접한 관계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1. 형식과 내용 사이의 대상 a
대상a는 형식일까? 내용일까? 대상a와 관련해 지젝이 가장 많이 되풀이한 규정 중 하나는 이것이다. : $는 구조속의 텅 빈 자리인 반면 대상 a는 구조 속에서 자리를 결여한 대상이다. 그래서 대상a는 당연히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대상a에서 형식과 내용이 일치 한다 p1169”.
「대상a는 상징적 형식을 피해나가는 ‘나눌 수 없는 잔여’이며, 동시에 순수 형식, 내용의 순수하게 형식적인 왜곡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형식과 내용 사이에서의 대상a의 이러한 동요는 일종의 부정의 부정 속에서 네 가지의 연속적인 변증법적 전도를 포함하고 있다. p1170」
대상 a에 있어 헤겔적인 부정의 부정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정합적인 ‘큰 타자’, 자기 폐쇄된 상징적 질서와 함께 시작한다. 그런 다음 첫 번째 부정에서는 이 정합성이 실재의 잔여, 즉 상징적인 것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저항하며, 그리하여 그것의 균형을 교란하며 그것을 ‘빗금 처 진 것’으로 만들며, 그것 안으로 간극, 균열, 적대성을, 간단히 말해 비정합성을 도입하는 트라우마적 나머지에 의해 방해받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부정은 실재의 이처럼 틈입적인 나머지를 그 자체가 비정합적인 큰 타자의 최소 정합성을 보장해 주는 유일한 요소로 파악하는 관점의 전환을 요구한다. p1171」
늘 말하듯 헤겔적 부정의 부정은 마지막에 관점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대타자의 정합성에 균열을 내는 실재의 잔여를 역으로 대타자의 정합성을 보장해 주는 요소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다. 우리가 없다면 북한의 전체주의적이고도 봉건적인 3대 세습은 산산이 조각났을 것이다. 북한의 고난에 모든 책임이 있는 것으로 선전되는 남한은 실제로 북한 체제의 가장 공고한 지지대이다. 남한은 실제 하지만 북한이 선전하는 그런 남한은 존재하지 않는데, 바로 그런 남한이야말로 북한 체제에 정합성을 부여한다.
「틈입하는 요소는 이 틈입자가 부재할 때는 산산이 조각날 타자를 ‘하나로 묶어줄’뿐만 아니라 이 요소, 대상 a는 어떠한 실정적인 객관적 현실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것의 지위는 순전히 논리적 정합성의 지위이다. p1172」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는 무엇일까? 형식과 내용 사이의 동요에서 대상a의 네 번째 계기 말이다.
「먼저 정합적인 큰 타자가, 그런 다음 틈입적인 잔여로서의 대상a에 의해 비정합적인 것이 된 타자가, 그런 다음 큰 타자의 정합성을 보장해주는 것으로서의 이 대상이 있다. 마지막으로 비록 상이한 수준에서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 외부로부터 큰 타자의 정합성을 방해하는 대상은 없다. ‘실재’로서의 대상 a는 단지 상징적 질서 자체의 순수하게 형식적인 비틀기, 내적 고리를 가리키는 이름일 뿐이다. p1173」
여기서 지젝이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대상 a는 곧 S1의 내적 고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큰 타자, 상징적 질서는 수학소로 말하면 S1이 맞으니까 말이다. 대상a에 관한 변증법에서 출발은 분명 큰 타자에서 시작했고, 실재의 잔여와 그에 대한 관점의 변환을 거쳐 마지막으로 다시 대타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 속에 다시 대상a와 $의 환상 공식이 나온다.
「우리는 항상 (구조와 관련해서는) 텅 빈 차지되지 않은 자리인 동시에 (요소들과 관련해서는)재빨리 움직이며 교묘하게 피해나가는 대상, 자리 없는 점유자인 어떤 것과 마주친다. 그리하여 우리는 라캉의 환상 공식, $◇a를 만들어내게 된다. 주체를 위한 수학소는 $, 구조 속의 텅 빈 자리, 생략된 시니피앙인 반면, 대상 a는 규정상 초과적 대상, 구조 속에서 자리를 결여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지 구조 속에서 이용 가능한 자리들에 대한 요소의 잉여가 있다는 것 또는 채워야 할 요소가 없는 자리의 잉여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구조 속의 텅 빈 자리는 여전히 그러한 자리를 채우기 위해 출현할 환상을 지탱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리를 결여한 초과적 요소는 여전히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떤 미지의 자리에 대한 환상을 지탱하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조 속의 텅 빈 자리가 자리를 결여한 일탈적 요소와 엄밀하게 상관적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두 개의 상이한 존재자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존재자의 두 측면, 즉 뫼비우스 띠의 두 표면 위에 새겨진 하나의 동일한 존재자이다. p1176~7」
환상 공식의 모양 ($◇a)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달리 $와 대상a는 결코 마주 보지 못한다. $의 관점에서는 요소에 대한 환상이, 대상a의 관점에서는 자리에 대한 환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2. 목소리와 응시
대상a가 대타자의 정합성을 보장해 준다고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현실에서 우리 경험의 정합성은 대상a의 배제에 달려 있다. 대상a가 현실에 포함되면 우리는 정신병자가 된다. 목소리와 응시는 구강, 항문과 함께 대표적인 대상a이다. 간단히 말해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라캉은 우리의 ‘현실 경험’의 정합성은 현실로부터 소문자 대상a의 배제에 달려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현실’에 정상적으로 ‘접근하려면’ 무엇인가가 배제되어야 하며, ‘원초적으로 억압되어야 한다.’ 정신병에서는 그러한 배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상(우리의 경우 응시나 목소리)이 현실 속에 포함되며, 그 결과 ‘현실 감각’이 해체되고, 현실을 잃어버리게 된다. p1181」
「소문자 대상a란 현실의 틀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 그것의 배제가 그러한 틀 자체를 구성하고 지탱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막 살펴본 대로 정신병에서는 그러한 대상이 현실의 틀 안에 포함되는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현실 내에서는 환각화될 대상 (분열증자를 사로잡는 목소리 또는 응시)으로 나타난다. p1183」
3. 할머니의 목소리
요즘 부쩍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만나게 된다. TV 책 프로그램에서 보이더니, 펭귄 클래식의 완역본 1,2권이 도서관 신간 코너에 꽂혀 있어서, 호기심에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를 읽었는데 (프루스트를 직접 읽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좀 더 필요하다), 놀랍게도 여기에 또 프루스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예전에 읽은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도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여기서 지젝이 인용한 문장 또한 프루스트에 대한 호기심을 한층 부추긴다.
마르셀은 처음으로 전화를 이용해 할머니와 대화한 이후 “목소리만 귓전에 듣고 얼굴이라는 가면 없이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처음으로 삶을 보내는 동안에 목소리에 상처 낸 슬픔을 주목했다. p1191”고 한다. 목소리는 할머니라는 전체로부터 빼내어진 자율적인 부분대상이 된다. 전화 통화라는 새로운 경험 이후 직접 만난 할머니는 더욱 기괴해 보인다. “환상이라는 틀을 박탈당한 채 해변으로 쓸려온 오징어처럼 보인다. p1194"
「애정은 그들의 얼굴이 나타내는 형상을 우리의 의식에 보내기에 앞서, 그걸 소용돌이 속에 끌어들여, 우리가 그들에 대해 늘 품어온 관념 위에 다시 던져, 관념에 밀착시켜, 관념과 동일하게 한다...... 결단코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우리 눈에 숨기려고 우리의 슬기롭고도 경건한 애정이 때맞게 달려오려는 걸 어떤 우연한 잔혹한 농간이 방해하는 때와 마찬가지로, 애정이 눈에 선수를 빼앗겨, 눈이 첫 번으로 그 장소에 이르러, 제멋대로, 필름 식으로 기계적으로 작용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 지 오래지만 애정이 그 사망을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으려던 사랑받은 이 대신에, 날마다 수백 번이나 애정이 친근하고도 거짓된 유사로 덮고 있는 새 사람을 보려는 때 역시 그렇다.... 소파 위, 등불 아래, 붉고 둔하고도 속된, 병약한 얼굴을 한, 알지 못하는 한 노부인이 기진맥진한 자세로 꿈꾸는 듯, 좀 멍한 눈을 책 위에 굴리고 있음을 언뜻 보았다. p1195」
마르셀의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날 것 그대로의 할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을 방해해 왔다. 그런데 얼굴 없이 전화 통화를 한 충격적 경험이 마르셀의 지각 방식을 물들인다. 전화로 들은 할머니의 목소리는 마르셀이 기억하고 있던 목소리가 아니라 연약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직접 만났을 때 마르셀은 할머니의 얼굴에서 전혀 낯선 노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자율적인 부분 대상으로서의 목소리는 바로 이런 식으로 그것이 속한 몸에 대한 전체적인 지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름 아니라 몸의 통일에 대한 직접적 경험은 필연적인 신비화를 포함하고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진리에 가닿으려면 이 통일을 산산조각내고 그것의 측면 중의 하나를 고립시킨 채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런 다음 이 요소가 우리의 지각 전체를 물들이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 어떤 인간 존재의 모든 특성을 해당되는 사람의 유기적 전체 속에 위치시키는 것은 그것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러한 전체 자체의 진정한 의미마저 놓치게 된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사람과 주체는 대립되어야 한다. 주체는 사람과 관련해 탈중심화되어 있으며, 단독적인 특징, 소문자 대상a, 욕망의 대상-원인으로부터 최소한의 정합성을 얻는다. p1197」
4. 주인과 주인의 유령
다시 S1과 대상a로 돌아왔다. 주인은 S1, 주인의 유령은 대상a다. S1의 대표는 ‘아버지-의-이름’이고, 대상a의 역사적 사례는 ‘개념상의 유대인’ 이다. 주인과 주인의 유령은 하나이지만, 둘은 분명히 다르다. 주인은 가시적인 권력인 반면 유령은 환영적인 권력이다. 물론 보이지 않는 이 환영적 권력에 의해 주인의 권력은 은밀하게 지탱된다.
「아버지-의-이름과 ‘개념상의 유대인’ 사이의 차이는 상징적 픽션과 판타즘적 유령 사이의 차이다. 라캉적 대수학에 따르면 주인-시니피앙인 S1과 소문자 대상a 사이의 차이다. 상징적 권위를 부여받을 때 주체는 상징적 호칭의 부록으로 행위 한다. 즉 그를 통해 행위 하는 것은 큰 타자이다. 그와 반대로 유령적 현존의 경우 내가 행사하는 권력은 ‘내 안에 있는 나 이상의 것’에 의존한다. p1209~1210」
주인은 사실 껍데기다. 주인이라는 말의 일반적 의미와는 달리 그는 권력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주인은 반드시 거세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이 남성 중심적이라 비판받는 팔루스적 권위의 의미다.
「(상징적인) 팔루스적 권위를 주장하려면 행위 주체라는 입장을 포기하고 큰 타자가 행위하고 말하도록 해주는 매체로 기능하는 데 동의해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따라서 시니피앙으로서의 팔루스가 상징적 권위의 작인을 가리키는 한 그것의 핵심적 특징은 그것은 ‘나의 것, 살아 있는 주체의 기관이 아니라 낯선 권력이 개입해 나의 몸에 자신을 새겨 넣는 자리, 큰 타자가 나를 통해 행위하는 자리라는 사실에 있다. p1206」
5. 환상의 두 측면
동일한 동전의 양면인 S1과 대상a는 환상의 두 측면이다.
「환상1과 환상2, 즉 상징적 픽션과 유령적 환영은 동일한 동전의 양면이다. 어떤 공동체가 현실이 환상에 의해 통제되거나 구조화되어 있는 것으로 경험하는 한 그것은 자체의 내속적 불가능성, 그것의 한 가운데 있는 적대성을 부인해야 한다. - 그리고 환상2는 이러한 부인을 구체화한다. 간단히 말해 환상1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느냐의 여부는 환상 2의 효율성에 달려 있다. p1213」
환상의 역할 자체 또한 양면적이다. 환상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현실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만드는 동시에 그것을 산산조각 내며 현실에 동화될 수 없도록 만든다.
6. 이미지와 응시
베일의 역할은 그것 뒤에 무엇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 뒤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베일이 무로부터 무엇인가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음으로써 무엇인가를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베일 너머의 무無에 대한 통찰은 칸트의 비판적 초월론이나 칸트 이전의 형이상학적 기반을 침식한다. 즉 가상 뒤에 진정한 실체가 있을 것이라는 인식을 무너뜨린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공백을 가리는 베일로부터 타자의 응시, 대상으로서의 응시로 핵심적인 일보를 디뎌야 하는 것이다.
「베일 너머의 즉자 존재, 즉 베일이 가리고 있는 것은 어떤 실체적인 초월적 현실이 아니라 타자의 응시, 타자가 시선을 되돌려 보내는 점이다. 내가 보는 것에서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은 시선 자체, 대상으로서의 시선이다. p1228」
7. 현존 presence
시니피앙과 대상a라는 쌍은 representation대신하기 와 presence현존의 차이와 같다. 둘 다 주체의 대리인이지만 시니피앙은 주체를 re-presentation 하는 반면, 대상a는 주체의 presence 속에서 빛난다. 대상a의 presence는 representation의 실패를 메운다. 이것으로부터 “실재는 단지 싱징적인 것의 비정합성일 뿐이다.”는 주장이 나온다.
「물物은 말들(상징적 대신하기representation)이 실패하는 곳에서 나타나는 현존presence 이며, 잃어버린 말을 대신하는 사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숭고한 대상은 ‘물의 위엄까지 격상된 대상’ 이다. 물의 공백은 현실 속의 공백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상징적인 것 속의 공백이며 숭고한 대상은 실패한 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상이다. 아마 이것이 아우라에 대한 가장 간결한 규정일 것이다. 아우라는 어떤 대상이 상징적 질서 내의 어떤 공백을 차지할 때 그것을 둘러싼다. 이것은 상징적인 것의 영역은 비전체이며, 내부로부터 좌절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p1231」
8. ‘그림은 내 눈 속에 있지만 나는 그림 속에 있다.’
이 간결한 문구는 칸트로부터 헤겔로의 이행을 나타낸다.
「그림은 내 눈 안에 있다. 초월론적 주체로서 나는 항상 이미 주어져 있는 모든 현실의 지평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은 그림 속에 있다. 나는 오직 나에 의해 구성된 그림 자체 속에 있는 나의 대위법 또는 맞짝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말하자면 나는 그리스도의 현현에서 창조자인 신이 자기 자신의 창조물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나의 그림 속으로, 내가 그것의 틀을 구성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p1249」
그림을 그린 ‘초월론적 나,’$가 그림 안에 새겨지는 것은 바로 대상a를 통해서다. 히틀러는 “우리 안의 유대인을 죽여야 한다.”고 했다. 이 끔찍한 말 속에는 히틀러 자신의 의도와는 반대지만 어떤 진실이 있다. 유대인이 대상a인 것은 비유대인들의 정체성은 유대인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유대인은 우리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반유대주의자의 정체성 또한 유대인 안에 있다. 대상a로서의 유대인을 죽여야 한다는 것은 결국 반유대주의를 죽여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반유대주의적 환상을 제거해보라. 그러면 주체는 자체가 해체되고 말 것이다.”
「여기서 헤겔의 입장은 독특하다. 즉 주체는 절대자의 (자기)한정의 조작자이며, “절대자를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자를 실패한 자로, 내속적 불가능성에 의해 표시된 자로 바라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p1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