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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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원작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물론 그 저자가 로얄드 달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맛』은 당연히 내가 처음 읽는 로얄드 달의 소설이다.

 

  단편 10개로 묶인 소설집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소설과 같다. 같은 빵틀에  재료만 바꿔 구운 여러가지 맛의 붕어빵처럼. 하나같이 맛있긴 한데, 네개, 다섯개, 여섯개를 넘어가면 슬슬 질리기 시작한다. 다행히 배터져 죽기 전에 끝나지만, 첫 맛의 강렬함은 더부룩한 속 때문에 벌써 잊혀버렸다.

 

  나이가 들면서 뷔페나 코스 요리가 별로 먹고 싶지 않다. 한 배에 양식,일식,한식,중식까지 우겨 넣고 배를 두드리노라면 잘 먹었다는 만족감 보다는 미련한 짓이라는 후회가 앞선다. 코스 요리도 비슷하다. 배가죽이 빵빵해 질때까지 먹기는 하는데, 숟가락을 놓고 물러 앉을 때쯤엔 쾌감 보다 불쾌감이 앞선다. 소화력이 약해져서 그런지, 단품 요리나 일식 삼찬 정도가 제일 좋다.  그 고유의 맛을 집중해서 잘 느낄 수 있고 오래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맛』은 속이는 자가 어떻게  속는자가 되는가에 대한 다양한 변주이다. 잘난척하는 사람, 영리한척하는 사람, 교양있는척하는 사람들 모두, 자기가 놓은 덫에 걸려든다. 덫에 가장 잘 걸려드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의심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그 여러가지 사례들이 『맛』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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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카페 Less Than Nothing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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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_

대상들, 대상들, 모든 곳에

 

 

 

0.

 

  제목처럼 대상a에 관한 내용이다. 본문에는 “라캉 이론의 패러다임 같은 역할을 하는 대상a인 목소리와 응시”라는 표현이 나온다. 대상a가 라캉 이론의 패러다임이란 말일테다. 대상a를 이해하면 라캉을 이해한다고 뽐내볼 만하지만, 그 만큼 복잡하고 어렵다. 대상a와 $, S1의 관계가 꼬리를 문 뱀처럼 빙글빙글 돈다. 대상a와 $의 상관성은‘ 뫼비우스의 띠’, ‘시차적 관점’이란 말로 누차 강조되어 왔다. 이 장에서는 대상a와 S1을 두 가지 환상으로 규정하며 그 관계를 새롭게 설명한다. S1과 $의 관계는 “A signifier represents the subject for another signifier”에서 찾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에 자세히 그러나 엄청 복잡하게 나와 있다. 여하튼 그러고 보면 담론의 네 가지 요소 중 세 가지인 S1,$,a 가 사실 그 뿌리는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이것들의 복잡한 상관관계에 부딪힐 때면, 괜히‘이거 다 한 통속 아니야!’째려 보는 것이지만, 서로 밀접한 관계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1. 형식과 내용 사이의 대상 a

 

  대상a는 형식일까? 내용일까? 대상a와 관련해 지젝이 가장 많이 되풀이한 규정 중 하나는 이것이다. : $는 구조속의 텅 빈 자리인 반면 대상 a는 구조 속에서 자리를 결여한 대상이다. 그래서 대상a는 당연히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대상a에서 형식과 내용이 일치 한다 p1169”.

 

  「대상a는 상징적 형식을 피해나가는 ‘나눌 수 없는 잔여’이며, 동시에 순수 형식, 내용의 순수하게 형식적인 왜곡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형식과 내용 사이에서의 대상a의 이러한 동요는 일종의 부정의 부정 속에서 네 가지의 연속적인 변증법적 전도를 포함하고 있다. p1170」

 

  대상 a에 있어 헤겔적인 부정의 부정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정합적인 ‘큰 타자’, 자기 폐쇄된 상징적 질서와 함께 시작한다. 그런 다음 첫 번째 부정에서는 이 정합성이 실재의 잔여, 즉 상징적인 것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저항하며, 그리하여 그것의 균형을 교란하며 그것을 ‘빗금 처 진 것’으로 만들며, 그것 안으로 간극, 균열, 적대성을, 간단히 말해 비정합성을 도입하는 트라우마적 나머지에 의해 방해받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부정은 실재의 이처럼 틈입적인 나머지를 그 자체가 비정합적인 큰 타자의 최소 정합성을 보장해 주는 유일한 요소로 파악하는 관점의 전환을 요구한다. p1171」

 

  늘 말하듯 헤겔적 부정의 부정은 마지막에 관점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대타자의 정합성에 균열을 내는 실재의 잔여를 역으로 대타자의 정합성을 보장해 주는 요소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다. 우리가 없다면 북한의 전체주의적이고도 봉건적인 3대 세습은 산산이 조각났을 것이다. 북한의 고난에 모든 책임이 있는 것으로 선전되는 남한은 실제로 북한 체제의 가장 공고한 지지대이다. 남한은 실제 하지만 북한이 선전하는 그런 남한은 존재하지 않는데, 바로 그런 남한이야말로 북한 체제에 정합성을 부여한다.

 

  「틈입하는 요소는 이 틈입자가 부재할 때는 산산이 조각날 타자를 ‘하나로 묶어줄’뿐만 아니라 이 요소, 대상 a는 어떠한 실정적인 객관적 현실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것의 지위는 순전히 논리적 정합성의 지위이다. p1172」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는 무엇일까? 형식과 내용 사이의 동요에서 대상a의 네 번째 계기 말이다.

 

  「먼저 정합적인 큰 타자가, 그런 다음 틈입적인 잔여로서의 대상a에 의해 비정합적인 것이 된 타자가, 그런 다음 큰 타자의 정합성을 보장해주는 것으로서의 이 대상이 있다. 마지막으로 비록 상이한 수준에서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 외부로부터 큰 타자의 정합성을 방해하는 대상은 없다. ‘실재’로서의 대상 a는 단지 상징적 질서 자체의 순수하게 형식적인 비틀기, 내적 고리를 가리키는 이름일 뿐이다. p1173」

 

  여기서 지젝이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대상 a는 곧 S1의 내적 고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큰 타자, 상징적 질서는 수학소로 말하면 S1이 맞으니까 말이다. 대상a에 관한 변증법에서 출발은 분명 큰 타자에서 시작했고, 실재의 잔여와 그에 대한 관점의 변환을 거쳐 마지막으로 다시 대타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 속에 다시 대상a와 $의 환상 공식이 나온다.

 

  「우리는 항상 (구조와 관련해서는) 텅 빈 차지되지 않은 자리인 동시에 (요소들과 관련해서는)재빨리 움직이며 교묘하게 피해나가는 대상, 자리 없는 점유자인 어떤 것과 마주친다. 그리하여 우리는 라캉의 환상 공식, $◇a를 만들어내게 된다. 주체를 위한 수학소는 $, 구조 속의 텅 빈 자리, 생략된 시니피앙인 반면, 대상 a는 규정상 초과적 대상, 구조 속에서 자리를 결여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지 구조 속에서 이용 가능한 자리들에 대한 요소의 잉여가 있다는 것 또는 채워야 할 요소가 없는 자리의 잉여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구조 속의 텅 빈 자리는 여전히 그러한 자리를 채우기 위해 출현할 환상을 지탱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리를 결여한 초과적 요소는 여전히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떤 미지의 자리에 대한 환상을 지탱하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조 속의 텅 빈 자리가 자리를 결여한 일탈적 요소와 엄밀하게 상관적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두 개의 상이한 존재자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존재자의 두 측면, 즉 뫼비우스 띠의 두 표면 위에 새겨진 하나의 동일한 존재자이다. p1176~7」

 

  환상 공식의 모양 ($◇a)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달리 $와 대상a는 결코 마주 보지 못한다. $의 관점에서는 요소에 대한 환상이, 대상a의 관점에서는 자리에 대한 환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2. 목소리와 응시

 

  대상a가 대타자의 정합성을 보장해 준다고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현실에서 우리 경험의 정합성은 대상a의 배제에 달려 있다. 대상a가 현실에 포함되면 우리는 정신병자가 된다. 목소리와 응시는 구강, 항문과 함께 대표적인 대상a이다. 간단히 말해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라캉은 우리의 ‘현실 경험’의 정합성은 현실로부터 소문자 대상a의 배제에 달려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현실’에 정상적으로 ‘접근하려면’ 무엇인가가 배제되어야 하며, ‘원초적으로 억압되어야 한다.’ 정신병에서는 그러한 배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상(우리의 경우 응시나 목소리)이 현실 속에 포함되며, 그 결과 ‘현실 감각’이 해체되고, 현실을 잃어버리게 된다. p1181」

 

  「소문자 대상a란 현실의 틀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 그것의 배제가 그러한 틀 자체를 구성하고 지탱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막 살펴본 대로 정신병에서는 그러한 대상이 현실의 틀 안에 포함되는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현실 내에서는 환각화될 대상 (분열증자를 사로잡는 목소리 또는 응시)으로 나타난다. p1183」

 

 

3. 할머니의 목소리

 

  요즘 부쩍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만나게 된다. TV 책 프로그램에서 보이더니, 펭귄 클래식의 완역본 1,2권이 도서관 신간 코너에 꽂혀 있어서, 호기심에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를 읽었는데 (프루스트를 직접 읽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좀 더 필요하다), 놀랍게도 여기에 또 프루스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예전에 읽은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도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여기서 지젝이 인용한 문장 또한 프루스트에 대한 호기심을 한층 부추긴다.

 

  마르셀은 처음으로 전화를 이용해 할머니와 대화한 이후 “목소리만 귓전에 듣고 얼굴이라는 가면 없이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처음으로 삶을 보내는 동안에 목소리에 상처 낸 슬픔을 주목했다. p1191”고 한다. 목소리는 할머니라는 전체로부터 빼내어진 자율적인 부분대상이 된다. 전화 통화라는 새로운 경험 이후 직접 만난 할머니는 더욱 기괴해 보인다. “환상이라는 틀을 박탈당한 채 해변으로 쓸려온 오징어처럼 보인다. p1194"

 

  「애정은 그들의 얼굴이 나타내는 형상을 우리의 의식에 보내기에 앞서, 그걸 소용돌이 속에 끌어들여, 우리가 그들에 대해 늘 품어온 관념 위에 다시 던져, 관념에 밀착시켜, 관념과 동일하게 한다...... 결단코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우리 눈에 숨기려고 우리의 슬기롭고도 경건한 애정이 때맞게 달려오려는 걸 어떤 우연한 잔혹한 농간이 방해하는 때와 마찬가지로, 애정이 눈에 선수를 빼앗겨, 눈이 첫 번으로 그 장소에 이르러, 제멋대로, 필름 식으로 기계적으로 작용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 지 오래지만 애정이 그 사망을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으려던 사랑받은 이 대신에, 날마다 수백 번이나 애정이 친근하고도 거짓된 유사로 덮고 있는 새 사람을 보려는 때 역시 그렇다.... 소파 위, 등불 아래, 붉고 둔하고도 속된, 병약한 얼굴을 한, 알지 못하는 한 노부인이 기진맥진한 자세로 꿈꾸는 듯, 좀 멍한 눈을 책 위에 굴리고 있음을 언뜻 보았다. p1195」

 

  마르셀의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날 것 그대로의 할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을 방해해 왔다. 그런데 얼굴 없이 전화 통화를 한 충격적 경험이 마르셀의 지각 방식을 물들인다. 전화로 들은 할머니의 목소리는 마르셀이 기억하고 있던 목소리가 아니라 연약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직접 만났을 때 마르셀은 할머니의 얼굴에서 전혀 낯선 노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자율적인 부분 대상으로서의 목소리는 바로 이런 식으로 그것이 속한 몸에 대한 전체적인 지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름 아니라 몸의 통일에 대한 직접적 경험은 필연적인 신비화를 포함하고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진리에 가닿으려면 이 통일을 산산조각내고 그것의 측면 중의 하나를 고립시킨 채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런 다음 이 요소가 우리의 지각 전체를 물들이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 어떤 인간 존재의 모든 특성을 해당되는 사람의 유기적 전체 속에 위치시키는 것은 그것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러한 전체 자체의 진정한 의미마저 놓치게 된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사람과 주체는 대립되어야 한다. 주체는 사람과 관련해 탈중심화되어 있으며, 단독적인 특징, 소문자 대상a, 욕망의 대상-원인으로부터 최소한의 정합성을 얻는다. p1197」

 

 

4. 주인과 주인의 유령

 

  다시 S1과 대상a로 돌아왔다. 주인은 S1, 주인의 유령은 대상a다. S1의 대표는 ‘아버지-의-이름’이고, 대상a의 역사적 사례는 ‘개념상의 유대인’ 이다. 주인과 주인의 유령은 하나이지만, 둘은 분명히 다르다. 주인은 가시적인 권력인 반면 유령은 환영적인 권력이다. 물론 보이지 않는 이 환영적 권력에 의해 주인의 권력은 은밀하게 지탱된다.

 

  「아버지-의-이름과 ‘개념상의 유대인’ 사이의 차이는 상징적 픽션과 판타즘적 유령 사이의 차이다. 라캉적 대수학에 따르면 주인-시니피앙인 S1과 소문자 대상a 사이의 차이다. 상징적 권위를 부여받을 때 주체는 상징적 호칭의 부록으로 행위 한다. 즉 그를 통해 행위 하는 것은 큰 타자이다. 그와 반대로 유령적 현존의 경우 내가 행사하는 권력은 ‘내 안에 있는 나 이상의 것’에 의존한다. p1209~1210」

 

  주인은 사실 껍데기다. 주인이라는 말의 일반적 의미와는 달리 그는 권력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주인은 반드시 거세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이 남성 중심적이라 비판받는 팔루스적 권위의 의미다.

 

  「(상징적인) 팔루스적 권위를 주장하려면 행위 주체라는 입장을 포기하고 큰 타자가 행위하고 말하도록 해주는 매체로 기능하는 데 동의해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따라서 시니피앙으로서의 팔루스가 상징적 권위의 작인을 가리키는 한 그것의 핵심적 특징은 그것은 ‘나의 것, 살아 있는 주체의 기관이 아니라 낯선 권력이 개입해 나의 몸에 자신을 새겨 넣는 자리, 큰 타자가 나를 통해 행위하는 자리라는 사실에 있다. p1206」

 

 

5. 환상의 두 측면

 

  동일한 동전의 양면인 S1과 대상a는 환상의 두 측면이다.

 

  「환상1과 환상2, 즉 상징적 픽션과 유령적 환영은 동일한 동전의 양면이다. 어떤 공동체가 현실이 환상에 의해 통제되거나 구조화되어 있는 것으로 경험하는 한 그것은 자체의 내속적 불가능성, 그것의 한 가운데 있는 적대성을 부인해야 한다. - 그리고 환상2는 이러한 부인을 구체화한다. 간단히 말해 환상1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느냐의 여부는 환상 2의 효율성에 달려 있다. p1213」

 

  환상의 역할 자체 또한 양면적이다. 환상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현실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만드는 동시에 그것을 산산조각 내며 현실에 동화될 수 없도록 만든다.

 

 

6. 이미지와 응시

 

  베일의 역할은 그것 뒤에 무엇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 뒤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베일이 무로부터 무엇인가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음으로써 무엇인가를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베일 너머의 무無에 대한 통찰은 칸트의 비판적 초월론이나 칸트 이전의 형이상학적 기반을 침식한다. 즉 가상 뒤에 진정한 실체가 있을 것이라는 인식을 무너뜨린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공백을 가리는 베일로부터 타자의 응시, 대상으로서의 응시로 핵심적인 일보를 디뎌야 하는 것이다.

 

  「베일 너머의 즉자 존재, 즉 베일이 가리고 있는 것은 어떤 실체적인 초월적 현실이 아니라 타자의 응시, 타자가 시선을 되돌려 보내는 점이다. 내가 보는 것에서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은 시선 자체, 대상으로서의 시선이다. p1228」

 

 

7. 현존 presence

 

  시니피앙과 대상a라는 쌍은 representation대신하기 와 presence현존의 차이와 같다. 둘 다 주체의 대리인이지만 시니피앙은 주체를 re-presentation 하는 반면, 대상a는 주체의 presence 속에서 빛난다. 대상a의 presence는 representation의 실패를 메운다. 이것으로부터 “실재는 단지 싱징적인 것의 비정합성일 뿐이다.”는 주장이 나온다.

 

  「물物은 말들(상징적 대신하기representation)이 실패하는 곳에서 나타나는 현존presence 이며, 잃어버린 말을 대신하는 사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숭고한 대상은 ‘물의 위엄까지 격상된 대상’ 이다. 물의 공백은 현실 속의 공백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상징적인 것 속의 공백이며 숭고한 대상은 실패한 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상이다. 아마 이것이 아우라에 대한 가장 간결한 규정일 것이다. 아우라는 어떤 대상이 상징적 질서 내의 어떤 공백을 차지할 때 그것을 둘러싼다. 이것은 상징적인 것의 영역은 비전체이며, 내부로부터 좌절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p1231」

 

 

8. ‘그림은 내 눈 속에 있지만 나는 그림 속에 있다.’

 

  이 간결한 문구는 칸트로부터 헤겔로의 이행을 나타낸다.

 

  「그림은 내 눈 안에 있다. 초월론적 주체로서 나는 항상 이미 주어져 있는 모든 현실의 지평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은 그림 속에 있다. 나는 오직 나에 의해 구성된 그림 자체 속에 있는 나의 대위법 또는 맞짝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말하자면 나는 그리스도의 현현에서 창조자인 신이 자기 자신의 창조물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나의 그림 속으로, 내가 그것의 틀을 구성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p1249」

 

  그림을 그린 ‘초월론적 나,’$가 그림 안에 새겨지는 것은 바로 대상a를 통해서다. 히틀러는 “우리 안의 유대인을 죽여야 한다.”고 했다. 이 끔찍한 말 속에는 히틀러 자신의 의도와는 반대지만 어떤 진실이 있다. 유대인이 대상a인 것은 비유대인들의 정체성은 유대인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유대인은 우리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반유대주의자의 정체성 또한 유대인 안에 있다. 대상a로서의 유대인을 죽여야 한다는 것은 결국 반유대주의를 죽여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반유대주의적 환상을 제거해보라. 그러면 주체는 자체가 해체되고 말 것이다.”

 

  「여기서 헤겔의 입장은 독특하다. 즉 주체는 절대자의 (자기)한정의 조작자이며, “절대자를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자를 실패한 자로, 내속적 불가능성에 의해 표시된 자로 바라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p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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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알랭 드 보통 지음, 지주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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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2일, 고속버스의 TV 화면에서 '프루스트'를 보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 화면에는 강신주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보였고, 간혹 홍차와 마들렌, 콩브레 따위가 뒷 배경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최근 도서관의 신간 코너에는 펭귄 클래식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가 꽂혀 있었다. 상경 길에 만난 지인에게 내가 그 지루하다는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웃으며 물었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읽어 봐... 나는 그 유명한 마들렌은 어디쯤 나오냐고 다시 물었고, 다행히 그것은 책 앞 부분, 아주 앞 부분에 있다는 희망적인 대답을 들었다. 그러나 그 사이 도서관 신간 코너에 오랫동안 꽂혀만 있을 것 같았던 그 책의 1권이 사라졌다. 누군가 깁스를 했거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준하는 어떤 지루한 교통 수단을 이용할 일이 생겼나 보다. 나는 대신 알랭 드  보통의 책 중 가장 재미있었다는 지인의 말을 기억해 내고,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를 빌려 왔다. 표지 제목의 아래에 바싹 붙여 놓은 영어 문장은 "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 다. 출판사는 알랭 드 보통에 자신이 없었거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질이 누군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프루스트의 책을 읽는다면 아마 대단히 지루해할 것이 틀림없겠지만, 나는 <넷, 훌륭하게 고통을 견디는 법>에서 프루스트와 내가 비슷한 방식으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발견했다. 프루스트는 평생동안 여러가지 질환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프루스트가 자신이 말하는 것만큼 아픈 것은 아니라며 빈정댔다. 프루스트는 생애의 마지막 16년 동안이나 자신은 곧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했다니 그럴만도 하다.

 

  「마르셀이 과장을 했던 것일까? 똑같은 바이러스라도 한 사람은 일주일 동안 침대에 눕게 만들수 있고, 다른 사람은 단지 점심 후에 약간 나른하게 만들 수 있다. 손가락이 긁힌 고통으로 웅크리고 있는 사람에 대해 엄살부리지 말라고 비난하는 대신에 택할 수 있는 것은, 민감한 피부를 가진 생명체라면 이 생채기를 우리가 큰 칼에 맞는 것만큼이나 아프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따라서 단순히 우리가 비슷하게 다쳤었다면 겪었을 고통을 근거로 다른 사람이 정말 아픈가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p88」

 

  남다른 고통은 자극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르게 민감하기 때문이다. 이 고통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렇다. 고통은 불편하고 우울한 감각이지만, 때로는 뜻하지 않은 통찰력을 주기도 한다. 프루스트가 불면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한 남자가 침대에서 뒤척이며 잠들기 전까지의 모습을 열일곱 페이지에 걸쳐 묘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처음에는 출판업자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던져버리게 했지만, 결국 그 덕분에 이 책은 위대한 고전이 되었다.

 

  푸르스트는 이웃의 소음에도 극도로 민감했는데, "어떤 인간에게도 없는, 남들을 분개시키는 능력을 가진 무생물체가 하나 있다. 바로 피아노."라고 했다. 이웃집의 인테리어 공사 때문에 소음에 시달리던 프루스트는 "하루에 열두 명의 노동자가 발작적으로 망치를 수개월 동안이나 두드렸다면 케오프스의 피라미드처럼 웅장한 어떤 것을 세웠음에 틀림없으며, 보행자들은 프렝탕 백화점과 생오귀스탱 성당 사이에 서 있는 그것을 보고 놀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라고 했는데, 물론 피라미드는 보이지 않았고, 이웃집의 변기와 타일이 바뀌었을 뿐이다.  

  나도 몇 번의 이사를 다니며, 층간 소음만으로도 얇은 책 한권 정도는 너끈히 써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남들은 너무 신경이 날카롭기 때문이란다. 어쨌든 훌륭한 작가에게서 닮은 점을 발견한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고통일지라도, 좋다.

 

 

  <여섯, 좋은 친구가 되는법>을 보면 프루스트는 위선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프루스트는 친구를 사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나치게 친절하고 헌신적일뿐 아니라 비위를 잘 맞추었다. 프루스트의 친구들이 그것을 '프루스트하기' 라 부르며 비꼴 정도였는데, 한편 친교에 대한 그의 견해는  놀랄만큼 신랄했다. "친교의 표현 양식인 대화란, 습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피상적인 여담일 뿐이다. 우리는 일 분 일 분의 공허함을 무한정 반복하는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평생 동안 이야기를 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친교란 "우리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지 않게 하려는 거짓말" 이상이 아니다. 프루스트는 진짜 위선자일까?

 

  「이 불일치는 그다지 극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가 자신의 '프루스트하기'에 대해 거의 신뢰하지 않았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프루스트하기'를 불러일으킨, 그 뒤에 숨어 있던 메시지에서 그는 거짓이 없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이 나를 좋아하길 원합니다." ...... 자랑스럽게 자신의 시집이나 갓난아기를 보여주는 친구들에게 듣기 좋은, 그러나 허울뿐인 말을 해주는 것은 항상 필요한 일이다. 그런 정중함을 위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부분적으로는 거짓말을  해왔음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악한 의도를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놀라움의 한숨과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면 의심받을 수 있는 우리의 호감을 확인시키기 위한 것이다. p171~2 」

 

  우리가 매일 하는 인사도 마찬가지다. "안녕하세요?" 물으며, 상대방의 마음과 몸이 평안한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습관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진심으로 상대방의 안녕이 궁금하지는 않기 때문에 위선적이지 않으려고 상대방을 만나고 나서도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단지 상대의 안녕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를 무시하고 모욕한다는 적대적인 의사의 표현이 되어 버린다. 중요한 것은 인사의 내용이 아니라 인사를 한다는 형식 자체이다. 허울뿐인 말은 우리가 서로에 대한 호감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형식적인 확인이다. 프루스트하기적 대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 대화의 내용은 '공허함을 무한정 반복'하는 것일 뿐이지만, 대화의 형식 자체는 관계 유지에 필수적이다.

 

 

  마지막 <아홉, 책을 치워버리는 법>은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해 볼만한 문제이다. 프루스트는 "친애하는 친구여, 우리 시대 사람들 사이에서의 일반적인 풍조와는 반대로, 나는 한 사람이 문학에 대해 매우 고결한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동시에 그것을 악의 없이 비웃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고 앙드레 지드에게 말했다.  여기에는 책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때 생기는 위험들, 책을 물신적으로 숭배하는 태도에 내재한 위험들에 대한 경고가 있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채만식 문학기행'에 다녀 온 적이 있다. 채만식 문학관과 채만식이 주로 살았던 임피의 생가터, 학교, 역, 묘소를 둘러 보는 기행이었다. 생가터는 잡풀만 드문드문한 빈터이고, 임피역은 화물차만 드물게 지나다니는 작은 시골역이고, 묘소는 언제 벌초를 했나싶게 황폐한 봉분과 낡은 묘석만 덩그런 무덤이었다. 학교는 그야말로 학교. 여기에서 내가 무엇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콩브레 역시 다르지 않다. 콩브레는 가공의 지역으로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지만, 프루스트가 콩브레의 모델로 삼았다는 이유만으로 일리에라는 도시는 이름을 일리에 콩브레로 바꾸고 수많은 관광객을 받고 있다. 관광객들은 경쟁이 치열한 빵집들 중 한 곳에서 산 마들렌 봉지와 카메라를 들고 아미오 아줌마의 집으로 향한다. 관광 안내소의 책자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깊고도 신비한 느낌을 포착하고 싶다면 그 책을 읽기 전에 일리에 콩브레를 방문하는 데 하루 전체를 바쳐라. 콩브레의 마법적인 힘은 오직 이 특별한 장소에서만 진정으로 느낄 수 있다." 고 씌어 있다. 그러나 정작 프루스트는 어떤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써놓았다.

 

  「우리는 밀레가.... <봄>을 통해 보여준 들판을 가서 보고 싶어 한다. 우리는 클로드 모네가 우리를 센 강의 양안에 위치한 지베르니로, 아침 안개 속에서 분별할 수 없는 그 강의 굽이로 데려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실 밀레나 모네가 그 근처를 지나가거나 거기에 머물게 되고 다른 것보다 그 길, 그 정원, 그 들판, 그 강의 굽이를 그리게 된 것은 가족이나 지인이 우연히 거기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이 세계의 다른 것들과 다르게, 그리고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알 수 없는 그림자처럼 그 속에 천재가 포착할 수 있었던 인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들처럼 고유하고 독창적으로, 그들이 그렸을 수도 있는 모든 풍경의 유순하고 무관심한 표면 위를 방황할 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p268」

 

  프루스트적인 것이 콩브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눈을 통해 세계를 바라볼 때 그 어느 곳이라도 콩브레가 될 수 있다. "프루스트에 대한 참된 경의란 그의 눈을 통해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을 통해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책을 읽었다면, 다음으로 우리가 할 일은 책을 치우고 책에서 얻은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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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세계사 창비청소년문고 5
이영숙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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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단연 ‘프랑스 혁명’ 이다. 『식탁 위의 세계사』 에는 <빵-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오해들> 이란 장에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였는지, 케잌을 먹으라였는지, 하여튼 그 유명한 말이 앙투아네트가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악법도 법이다.” 란 말을 소크라테스가 한 적이 없다는 것과 겉보기에는 비슷하다. 사실을 정확히 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에 관해 하필 해야 할 이야기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해를 풀어주는 것일까?

 

 

 

  프랑스 혁명은 1789년에 일어났다. 그런데 혁명은 언제 끝이 났을까? 우리는 프랑스 혁명을 20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프랑스 혁명은 어떤 관점에서는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까지 보지 않는다 해도 혁명은 거의 100년 가까이 걸쳐 일어났다. 내가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이야기만 해도 시대별로 몇 가지는 된다.

 

 

 

 처음 혁명군이 바스티유를 공격했던 1789년의 이야기는, 당연히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오스칼과 앙드레, 앙투아네트와 페르젠 백작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지만, 혁명을 전후한 프랑스 사회의 모습이 세세히 그려져 있다. 앙투와네트의 빵 보다 더 유명한 ‘목걸이 사건’, 삼부회의 소집, 운명의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공격, 그리고 해외 도피를 시도하다 붙잡힌 국왕 일가에 대한 처형까지, 그 많은 사건들을 나는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보며 우리 역사보다 더 생생히 느꼈다.

 

 

 

  그러나 혁명은 순탄하지 않았다.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났다.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자코뱅파가 몰락하며 혁명은 혼란에 빠졌고, 결국 5년 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사 쿠데타를 위한 길을 마련해 주었다. 나는 이 반혁명의 비극 또한 만화로 배웠다.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다. 홍세화가 추천사를 써주고, 공공 도서관에 비치될 만큼 좋은 만화다. 물론 김혜린의 순정만화답게 절절하게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은 단순히 한 사람 혹은 한 정파의 몰락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중 권력의 몰락이자, 혁명 정신의 쇠퇴였다. 프랑스 혁명은 우리의 얄팍한 상식에는 뜻밖이게도, 국왕에게 권력을 빼앗겼던 특권층에 의해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태양왕 루이 14세가 상징하듯 유럽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권력이 왕에게 집중된 절대왕정이었다. 그러나 국내외 상황이 악화되자, 특권계급은 왕을 도와주기 보다는 권력을 되찾으려 했고, 이에 굴복한 왕은 특권계급의 요구대로 삼부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막상 판이 만들어지자 잽싸게 끼어들어 주도권을 거머쥔 것은 부르주아들이었다. 그러자 국왕과 대립하던 특권계급이 왕과 한 편이 되어 버렸고, 부르주아지들은 굴복하거나 민중에 호소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프랑스 혁명은 처음부터 민중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특권 계급 즉 귀족 계급이 왕의 권력을 나누어 먹기 위해, 그 다음에는 신흥 부르주아지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민중이 부르주아지들의 마지못한 선택으로 혁명에 끼어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번 발을 들인 민중은 광범위한 대중 동원력으로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폭발력을 발휘하며 혁명을 키워 나갔다.

  ‘평등, 자유, 박애’ 라는 혁명 정신만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프랑스 혁명은 순수한 열정과 순고한 가치로 찬연하게 빛나지만, 실상 혁명 세력은 내부에서 이권에 따라 분열되어 있고, 혁명은 늘 반혁명의 위협 앞에 놓여 있었다. 로베스피에르는 부르주아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중과의 굳건한 연대만이 혁명을 지킬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혁명의 각종 세력 중 로베스피에르 파가 가장 민중과 가까이 있으며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 부르주아지들은 평등은 외면하고 사적 소유권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체제를 수립하려 하였다. 민중이 요구한 것은 부르주아적 자유가 아니라 평등자유였다. 그러므로 테르미도르 반동은 민중이 혁명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된 분수령이었다.

  로베스피에르의 죽음과 함께 민중의 동력을 상실한 혁명은 대번에 기세가 꺾여 버렸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을 향해 굴러 떨어졌다. 프랑스 혁명의 종결을 언제로 보느냐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는 1799년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종결된 것으로 보고, 1789년부터 1799년까지를 프랑스 '대'혁명 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보통 프랑스 혁명이라고 할 때는 이 기간을 말한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다. (로베스피에르에 관한 내용은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머리말을 참고했다. 빌려놓고 아직 본문은 읽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은 정말 어지럽다. 1789년 혁명이 시작되었고, 1792년 프랑스는 역사적인 공화국을 수립하였지만,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을 거쳐 1799년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1804년에 결국 나폴레옹은 공화정을 폐지하고 제정시대를 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완전히 몰락하고 프랑스는 다시 절대왕정으로 복귀한다. 이후 1830년 7월 혁명이 있었고,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으나, 부르주아 계급의 이권을 중심으로 한 이 7월 왕정은 민중들에게는 여전히 불만의 대상이었다. 1832년 다시 6월 봉기가 일어난다. 이것이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뒷부분에 나오는 그 유명한 바리케이드 전투의 배경이다. 그러나 6월 봉기는 처참하게 실패하고, 7월 왕정이 이어지다가 1848년 2월 혁명이 발생한다. 2월 혁명의 결과 프랑스는 다시 공화정을 선포하고, 제2 공화정이 시작되었으나 투표에 의해 당선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가 3년 후인 1851년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는 제2 제정 시대로 돌입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반복한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 정국을 분석한 마르크스의 책이 바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20년간 집권했고 1871년 제 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약 100년 가까이에 걸쳐 ‘혁명’ 만 세 번이 있었고, 공화정-제정-왕정-공화정-제정-공화정을 반복했다. 프랑스는 위대한 혁명으로 단번에 오늘날 같은 근대국가로 도약한 것이 아니다. 100년에 걸쳐 희망과 배신과 음모와 무엇보다 피, 죄 있는 자와 순결한 자를 가리지 않은 무수한 피를 요구했던 험난한 역사였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그에 비하면 차라리 순탄하다고 할 정도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실 억울했을 수도 있다. 영화와 만화, 소설, 전기 등 현대의 대중문화가 전하는 그녀는 우아하고 기품 있고 순수하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단지 혁명의 소용돌이에 비극적으로 휩쓸렸을 뿐이다. 우리가 어떻게 그녀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진실로 그녀는 무죄인 걸까?

 

 

 

 

  소설 『레미제라블』은 지루하다. 그러나 재미있다. 원작 5권을 1권으로 줄인

 

다면 분명 덜 지루하겠지만, 소설의 지루함만이 줄 수 있는 ‘잉여적’ 재미는 사라질 것이다. 나는 지루할 틈 없이 사건이 연속되는 『28』과 『검은 꽃』이 왜 책을 덮는 순간 그걸로 끝나 버리는지, 어떤 점이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들과의 차이인가 생각해 보았다. 그것들에는 고전이 갖고 있는 ‘잉여’가 없었다. 하품을 깨물게 하고, 책장을 건너 뛰게 하는 그런 ‘잉여’가 없다. 여관주인 테나르디에가 전사자의 주머니를 털며 보여주는 워털루 전투의 장면도, 꼬맹이 가브로슈가 파리의 뒷골목을 누비며 보여주는 민중들의 비참한 삶도, 미리엘 주교가 숲 속의 국민공회 의원 출신의 노인과 벌이는 논쟁 같은 것이 없다. 그런 잉여적 모습들이 없어도 레미제라블은 여전히 레미제라블이겠지만, 과연 고전이 될 수 있었을까 싶다.

 

 

 

  말이 엇길로 새었지만, 『레미제라블』의 배경은 1800년대 초반부터 1832년 6월 봉기까지이다. 대혁명이 지나갔지만, 민중의 삶은 여전히 참혹하다. 빵 한 덩이,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빵은 앙투아네트의 빵이 아니라 아마도 장발장의 것일 텐데, 그 빵 한 덩이가 19년형이 되었다는 이야기 자체가 민중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준다. 어린 조카가 굶어 죽는 것을 볼 수 없어 장발장은 빵을 훔쳤다. 그렇게 죽어 가거나 가브로슈처럼 도둑질을 하며 거리를 유랑하는 아이들은 수없이 많았다.

  『레미제라블』의 초반부에는 미리엘 주교와 국민공회 의원을 지낸 노인의 매우 흥미로운 논쟁이 그려져 있다. 노인의 임종 소식을 듣고 숲속으로 찾아간 미리엘 주교는 국왕 루이16세의 처형과 어린 왕자(루이 17세)의 참상을 언급하며 국민공회의 잔혹함을 비판한다. 어린 왕자는 아무 죄도 없었다는 것이다. 노인은 그렇다고 한다. 왕자는 죄가 없다. 그리고 또 가난해서 죽어간 프랑스의 수많은 아이들도 죄가 없다. 그러나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한다면 민중의 편을 들겠다고. 민중이 훨씬 고통 받아 왔으니까.

 

 

  「국민공회 의원은 손을 뻗어 주교의 팔을 잡았다.  "루이 17세! 그러면 당신은 누구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는 거요? 죄 없는 아이에 대해서요? 그렇다면 좋소. 나도 함께 눈물을 흘리겠소. 하지만 왕자에 대해서라면,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소. 카르투슈(1693~1721년. 파리 부근에 출몰했던 도적단의 두목. 산 채로 수레바퀴형에 처해졌음)의 동생은 단지 그의 동생이라는 죄만으로 그레브 광장에서 양쪽 겨드랑이를 묶인 채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매달려 있었소. 이 죄 없는 소년의 죽음은 루이 15세의 손자라는 죄만으로 탕플 성의 탑 속에서 죽어간 루이 17세 못지않게 가슴 아픈 일이오."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을 비유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카르투슈를 위해서요, 아니면 루이 15세를 위해서요? 어느 쪽을 위해 항의 하시는 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교는 이곳에 온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기묘하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국민공회 의원은 말을 이었다.  "아! 당신은 비정한 진실을 좋아하지 않는구려. 그리스도는 그것을 좋아하셨지요. 그분은 채찍을 들고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셨소. 불이 일 듯한 그의 채찍은 엄하고도 분명하게 진리를 말해 주었소.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마태복음> 19장14절)' 외쳤을 때, 그는 어린아이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소. 그는 바라바(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리스도 대신에 용서를 받은 죄인)의 아들과 헤롯(잔학하기로 유명한 유태인의 왕) 왕의 아들을 대등하게 부르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어요. 죄 없는 마음이 그대로 왕관이 되는 거요. 왕손일 필요가 없소. 누더기를 걸치고 있든 백합(왕가의 문장)으로 장식되어 있든 똑같이 훌륭한 것이오."  "옳은 말씀입니다." 하고 주교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듭 말씀드리오만," 하고 국민공회 의원은 말을 이었다. "당신은 루이 17세의 이름을 꺼냈소. 이 점에 관해서는 서로 이해하고 싶소. 우리들은 죄 없는 사람들, 순교자들, 어린아이들, 신분이 높고 낮은 것에 관계없이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자는 거지요? 그건 나도 동감이오. 그렇다면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1793년 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특히 루이 17세 이전 시대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오. 나도 당신과 함께 국왕의 아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겠소. 당신이 나와 함께 민중의 아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신다면."  "저는 모든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하고 주교가 말했다.  "평등하게 말이지요!" 하고 G가 외쳤다. "만약에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야만 한다면 당연히 민중 쪽이어야 할 것이오. 민중 쪽이 훨씬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왔으니 말이오."」

 

 

  어린 왕자, 루이 17세는 왕자라는 이유로 탑에 갇혀 죽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또한 그렇다. 사치와 낭비가 심하고, 오스트리아의 공주였기 때문이 아니라 프랑스의 왕비였기 때문에 민중의 분노와 오해를 샀다. 중요한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행동이 아니라 그녀가 왕비라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들이 훌륭한 행동을 해서 왕자와 왕비가 된 것이 아닌 것처럼 그들의 행동이 개인적으로 나빴기 때문에 처벌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민중을 수탈한 부르봉 왕가의 상징이다. 인간적으로 순박했다고 알려진 루이 16세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과오는 그가 프랑스의 국왕이라는 것에 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프랑스가 평등 자유의 공화정임을 선포한 이상 국왕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외국으로 탈출하다 붙잡혀 온 국왕을 두고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는 논쟁이 일자 생쥐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중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군림하거나 아니면 죽어야 합니다.... 누구도 죄 없이 군림할 수 없습니다. 군림하는 왕의 광기는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왕은 반도이며 찬탈자입니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p364」

 

 

  왕과 공화국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왕가의 핏줄을 이어 받았다는 이유로 군림할 수 있었다면, 단지 왕가의 핏줄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죽음도 받아들여야 한다. 프랑스 혁명은 그 왕가의 혈통들이 민중을 기아와 빈곤 속으로 몰아넣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오해들은 민중의 분노가 만들어낸 허구일지라도, 민중의 분노는 정당하고 위대하다.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을 때 그녀는 이미 죽어야 했던 것이다. 우리가 그 억울함에 대해 먼저 귀 기울여야 할 대상은 앙투아네트가 아니라 장발장과 팡틴, 가브로슈이다. 늙은 국민공회 의원이 말했듯 민중이 훨씬 오랫동안 고통 받아 왔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야만 한다면 당연히 민중 쪽이어야 할 것이오. 민중 쪽이 훨씬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왔으니 말이오."

 

 

 

 

 

 

  『레미제라블』의 마지막은 실패로 끝난 1832년 6월 봉기다. 1848년까지 지속된 입헌군주제 아래 부르주아지의 권익은 상당히 확장되었지만 민중은 여전히 빈곤 속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 결과 1848년 2월 혁명이 발생했다. 왕정이 폐지되고 다시 공화정이 선포되었는데, 투표를 통해 집권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였다. 3년 후 루이는 영구 집권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된다.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1848년 2월부터 1851년 12월까지, 프랑스 제2 공화정의 수립과정과 몰락을 다룬 일종의 연작 칼럼이다. 이 책은 160여 년 전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시론이지만, 현재의 우리 정치상황에 대입해도 어색할 것이 하나도 없다.

  루이 보나파르트가 선거로 당선된 이유는 단 하나다. 그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이기 때문이다. 혼란에 시달리던 프랑스 농민과 민중들은 보나파르트라는 이름에 홀딱 넘어갔다. 나폴레옹처럼 프랑스를 구원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이 보나파르트는 한낱 룸펜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다.

 

 

  「역사적 전통은 프랑스 농민들에게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한 남자가 그들에게 모든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어떤 자가 불쑥 나타나서 자신을 나폴레옹으로 칭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p141

 

 

  2월 혁명으로 구성된 임시 정부에는 노동 프롤레타리아, 민주공화파 쁘띠부르주아지, 공화주의 부르주아지, 심지어는 왕당파 야당까지, 다양한 정파가 참여했다. 그리고 곧바로 극심한 권력 투쟁에 돌입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맨 처음 노동 프롤레타리아가 제거되었고, 그 다음엔 쁘띠 부르주아지, 그 다음으로는 공화주의 부르주아지, 그리고 최후의 승자처럼 보였던 왕당파 야당 연합인 ‘질서당’이 마지막으로 루이 보나파르트에 의해 축출 당했다. 혁명은 한 발짝도 진보하지 못하고 역사는 거꾸로 돌았다. 제 2공화정은 폐지되고 제2 제정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노동 프롤레타리아가 축출당할 때 모른 채 했던 부르주아지들은 결국 차례차례 제거 당했다. 그들을 지켜 줄 수 있었던 것이 최고 전위의 노동 프롤레타리아란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이 얼마나 오랜 기간, 얼마나 극심한 혼란과 패배와 후퇴를 반복하며 전진했는지 생각하다, 뜻하지 않게 긴 글을 쓰게 되었다. 우리가 프랑스 역사를 세세히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와 프랑스 혁명이 절대 무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근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프랑스 혁명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 프랑스 혁명은 ‘진정한 근대’ 의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자유, 평등, 국민주권, 헌법, 인권 같은 개념들이 구체성을 획득하며 역사에 정착한 것은 바로 프랑스 혁명에 기인한다. 프랑스 혁명시기의 우리나라는 정조 치세 정도에 해당하는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정조 치세의 결과라기보다는 프랑스 혁명의 성과에 바탕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영화, 소설, 만화들에 그토록 마음이 끌리는 것은 아마도 프랑스 혁명이 이루어낸 성과들이 우리 정신의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위안은, 혁명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의 패배는 긴 혁명의 역사에서 한 발의 후퇴에 불과할 뿐일지 모른다. 인내하며 생각을 가다듬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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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카페 Less Than Nothing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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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주곡 5

상관주의와 그에 대한 불만들

 

 

 

  상관주의? 처음 들어 본다. 불학의 소치려니 하다 지인들에게 물어봤는데 모른다고 한다. 무슨 단어를 번역한 것인지 궁금하다. 가끔은 원 단어가 더 쉽게 이해될 때가 있다.

  간주곡 5는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를 다루고 있다. 처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상관주의가 무엇인지, 메이야수가 어떤 입장인지, 지젝이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지 뒤죽박죽이었다. 그런데 별 기대 없이, 리뷰는 써야 하니까,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내용이 제법 눈에 들어 왔다.

  간단히 말하면, 상관주의의 대표는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이고, 메이야수는 상관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이고, 지젝은 메이야수의 비판이 역설적으로 칸트의 초월론적 지평에 사로잡혀 있다고 그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상관주의란 “주체와 객체, 인간과 현실은 오직 상호 상관적인 것으로서만, 양자의 상호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생각” 이다.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에서 현실은 주체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상관주의는 다른 다수의 입장들 속에도 있다. 예를 들어 주관주의, 주체-객체의 관계 자체를 절대자로 설정하는 것, 그리고 표준적인 20C적 입장이 있다. 상관 자체를 도저히 넘어 설 수 없는 인간 조건의 유한성의 표시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상관주의의 모든 입장에는 공통된 한계가 있다. ‘선조성先祖性’ 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인간과 현실이 상호적 상관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인간이 나타나기 전의 우주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란 질문에 상관주의는 전적으로 무능하다.

 

  「메이야수는 최근 철학 내부에서 비합리적인 종교적 지향들이 등장한 것은 전근대 시대로의 후퇴가 아니라 서구의 비판적 이성의 필연적 결과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칸트적 버전의 계몽주의에서 이성의 비판적 사용은 항상 또한 자신을 겨냥하고 있었다. 종교 비판은 결국 이성 비판으로, 이성의 자기한정으로 귀결되며, 그것은 다시 종교적 신앙을 위한 공간을 열어준다. 다만 이번에 그러한 공간은 ‘철학자들의 신’, 즉 추론에 의해 존재나 특징이 논증되거나 또는 최소한 제한될 수 있는 신이 아니라 완전히 로고스를 넘어서 있는 철저한 타자성으로서의 역설적으로 심연 같은 신을 위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수를 둔 최초의 사람은 칸트 본인으로, 그는 잘 알려진 대로 도덕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이성을 제한할 것을 주장했다. p1110」

 

  메이야수는 이성이 오히려 비합리적 신앙을 위한 공간을 열어주었다고 빈정댄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을 현실로 제한한 반면, 물 자체가 현실 너머에 존재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남겨 두었다. 칸트적인 주체는 유한성의 주체이다. 이에 대해 메이야수의 목표는 유한성의 자기 폐쇄를 깨뜨리고 예지체적인 즉자 존재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다면 메이야수는 어떻게 초월론적 상관주의적 폐쇄로부터 우리의 앎을 즉자 존재를 향해 열어놓는 쪽으로의, 즉자 존재에 대한 접근 가능성으로의 전환, 전도를 수행할까? 초월론적 상관주의의 궁극적 지평은 사실성facticity이다. 사물들은 엥겔루스 실레시우스의 표현을 빌자면 ‘ohne Warum 왜라는 이유 없이’ 거기 있는 그대로 있다. 우리는 유한성을 넘어설 수 없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사물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출현하는 데는 아무런 필연성도 없으며, 항상 그것들이 다른 식으로 나타날 수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p1120」

 

  초월론적 상관주의는 이 ‘아무 이유 없음ohne Warum’ 을 유한성의 표시로 읽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절대자를 인식 할 수 없으며, 무지의 베일 뒤에서 절대자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초월적 상관주의의 오류는 그러므로 철저히 칸트적이다. 메이야수는 이 오류를 헤겔적으로 뒤집는다. 물론 여기서 헤겔적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지젝의 생각이고, 메이야수 자신은 헤겔과의 친연성을 부정한다.

 

  「유한성의 초월론적 지지자들에게는 우리의 인식의 한정으로 보이는 것을 현실 자체의 가장 기본적인 긍정적인 존재론적 속성으로 바꾸어 버린다. - 절대적인 것은 “불가지론자가 이론화하는 것처럼 다르게 존재할 수 있음 그 자체” 일 뿐이다. “절대자란 나의 상태가 어떤 다른 상태를 향해 아무 이유 없이 이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능성은 더 이상 ‘무지의 가능성’, 즉 단지 내가 알 수 없는 불가능성의 결과인 가능성이 아니라” ..... 오히려 즉자 존재의 한가운데서의 “현실적 가능성 자체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p 1122~3」

 

  인식론적 한정으로부터 긍정적인 존재론적 특징으로의 이러한 이행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메이야수는 이 최고로 어려운 질문에 심오하게 헤겔적인 방식으로 답한다.

 

  「신의 존재론적 증명은 유물론적 방식으로 전도된다. 즉 지고의 존재의 가능성을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의 현실성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우리가 현실의 절대적 우연성의 가능성에 대해, 그것이 다를 수도 있을 가능성에 대해, 현실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과 그것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방식 사이에 근본적 간극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의 현실성을, 즉 현실 자체가 철저하게 우연적이라는 것을 수반하게 된다. 이 두 경우에 우리는 실존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이 개념의 일부인 실존으로의 직접적 이행을 다루게 된다. 하지만 신의 존재론적 증명의 경우, 가능성과 현실성을 매개하는 항은 ‘완전’(완전한 존재라는 개념 자체는 그것의 존재를 포함하고 있다)인 반면 개념으로부터 실존으로의 메이야수의 이행의 경우 매개항은 불완전이다. p1126」

 

  「우리를 위한 존재와 즉자 존재를 분리시키는 간극 속에서 표현되고 있는 ‘타자가 될 수 있는’ 이러한 ‘능력’은 즉자 존재의 자기-거리화, 존재 자체의 한가운데 있는 부정성이다. - 메이야수가 “물자체는 표상의 초월론적 형식들의 사실성”, 현실에 대한 우리의 틀의 철저하게 우연적인 성격에 다름 아니라는 놀랄 만큼 난해한 명제 속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현실을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현실 아래 있는 ‘보다 깊은’ 또 다른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현실을 철저하게 우연성 속에서 보는 것이다. p1130 」

 

  메이야수는 너무나 (지젝이 해석하는 바로서의) 헤겔적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헤겔적 성격을 인정하지 않는다. 헤겔 변증법은 개념의 필연적인 자기전개에 대한 묘사라는 통상적인 독법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젝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상관주의에 대한 메이야수의 헤겔적 돌파에도 불구하고 메이야수에게 남아 있는 문제란 무엇인가?

 

  「메이야수와 관련해 진정한 문제는 전-주체적 현실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같은 어떤 것이 현실 안에서 출현할 수 있었을까를 사유하는 것이라는 비판적 함의를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몸짓 없이는 어떠한 객관주의라도 은밀한 방식으로 상관주의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현실 그 자체’에 대한 그것의 이미지는 (비록 부정적인 방식으로일지라도) 주체성과 관련된 것으로 머물 것이다. 그러한 몸짓을 하기 위해서는 주체를 우연적 출현으로 상정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그러한 우연성의 흔적들을 주체를 그것의 전-주체적 실재와 연결하고 있는 일종의 탯줄 속에 위치시켜야 하며, 그리하여 초월론적 상관주의의 원환을 깨야 한다.... 보어가 반복해서 말하기를 좋아했던 대로 극미립자 물리학 수준에 ‘객관적’ 측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객관적’ 현실에 대한 접근 같은 것도 있을 수 없다. - 우리가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가 측정하는 현실의 일부이며, 따라서 그것에 대한 ‘객관적 거리’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p1138~9」

 

  우리는 전-주체적 현실, 즉 주체에 독립적인 현실을 사유할 수 없다. 주체가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체가 이미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에 현실에 대해 객관적 거리를 가질 수 없다. 그런데 메이야수는 “반-초월론 자체에서 물 자체에의 접근 가능성이라는 칸트적 주제에 사로잡혀 있다.” 즉 우리가 현실로 경험하는 것이 초월론적으로 구성된 것인가 아니면 현실이 주체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우리가 무언가를 알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이분법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물 자체로 나아갈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저 존재할 뿐인 현실의 밋밋한 어리석음 내에서 어떻게 현상들 자체가 등장할 수 있을까? 어떻게 현실은 자신을 이중화해 자신에게 나타나기 시작하는가?” 이다.

 

  「..초월론적 상관주의를 거부하면서 메이야수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바대로의 현실과 현실 자체를 넘어,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초월론적인 것을 초월론적으로 대립시키는 칸트적 입장의 한계 내에 갇혀 있다. 그런 다음 그는 레닌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현실 자체에 접근해 그것을 사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p1140~1」

 

  메이야수의 이런 방식에는 무언가 핵심적인 것이 빠져 있다. “주체 자체를 구성하고 있는 내속적 비틀기/휨이 그것이다.” 메이야수는 주체 자체 내의 분열을 즉자존재와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라캉이 주장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주체와 현실 사이의 환원불가능한 (구성적인) 불일치 또는 비-상관성이다. 즉 주체가 출현하려면 불가능한 주체-인-대상이 현실로부터 배제되어야 한다. 바로 이 배제가 주체를 위한 공간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초월론적 상관성 외부의, 주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주체 내부의, 주체의 내부 자체의 중핵 속의, 외-밀한 중심 속의 실재를 사유하는 것이다. p1141」

 

  초월론적 상관성의 자기폐쇄를 깨뜨리는 것은 주체의 파악을 벗어나는 초월론적인 현실이 아니다. 그 자체로 주체인 대상에의 접근 불가능성이다. 우리는 현실에 완전히 중립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우리가 바로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지젝이 늘 말하는 대로 우리 눈 안에 그림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 안에 우리가 있다. 현실에 대한 접근이 인식론적으로 왜곡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실재가 존재하는 것은 상징적인 것이 자신의 외적 실재를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 완전히 자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현실)이 존재하는 것은 상징체계가 비정합적이며,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실재는 형식화의 막다른 골목이기 때문이다. ...실재는 형식화의 외적 예외가 아니라 형식화의 비전체에 다름 아니다. p1145」

 

  비정합적인 현실을 안정화시켜 정합적인 장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주인-시니피앙이다. 주인-시니피앙의 역할은 칸트에게서 통각의 선험적 종합의 역할과 같다. 주인-시니피앙이 개입함으로써 실재는 ‘객관적 현실’ 이라는 정합적인 장으로 변형된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것이 상관주의에 대한 라캉적 대답이 되어야 한다. 즉 초월론적 상관주의는 주인-시니피앙의 개입을 현실을 구성하는 것으로 사유할 수 있는 반면 그것은 주인-시니피앙과 대상a 사이의 이처럼 전도된 또 다른 상관성을 놓치고 만다. 즉 주체를 내부로부터 탈중시화시키는 실재의 얼룩을 사유할 수 없다. p1146」

 

  메이야수가 상관주의를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상관주의와 동일한 오류를 범한다. 실재의 얼룩을 사유하지 못한다. 실재는 사라지지 않으며, 제거할 수도 없고, 항상 상징적 조작의 잔여로 들러붙어 있다.

 

  마지막으로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인간이 나타나기 전의 우주, 그것에 대한 기록인 화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인간과 독립적으로 공룡이 존재했다는 증거로 보아야 할까? 만약 우리가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동일한 그런 공룡을 만나게 될까?

 

  「대답을 서두르기 전에 우리의 관점에 따라 ‘외부 현실’이 얼마나 상대적인가를 기억해야만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외부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재 그 자체의 무한한 복잡성으로부터 현실의 일부 또는 한 조각이 우리의 지각 장치와 상관적인 것으로 선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도대체 원환을 피할 수 없다. 화석이라는 현실은 마치 우리 관점에서는 무지개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점에서 그것을 관찰하는 한 ‘객관적’ 이다. -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주체 그리고 실재의 일부로서의 객체 사이의 상호작용의 장 전체이다. p1146~7」

 

 

  얼마 전 EBS TV에서 <빛의 물리학> 이란 다큐를 방영했다. 천체 물리학과 양자 역학에 관한 긴 역사상의 핵심 쟁점을 다룬 대단히 흥미로운 프로그램이었다. 마지막 5편에 나온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관한 하나의 결론은 고양이는 관찰자에 상관적이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고양이는 관찰과 관계없이 살았거나 죽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다만 이후에 그것을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양자역학 특히 코펜하겐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관찰자의 개입에 의해서만 고양이가 살든지 죽든지 확정된다는 것이다. 그럼 관찰 이전의 고양이는 어떤 상태라는 것일까? 코펜하게 학파는 삶과 죽음이 중첩되어 있다고 하고, 또 다른 이론가들은 여러 개의 우주 안에 다중적으로 있다고도 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일축하는 과학자도 있다. 여전히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논쟁 중이다. 어쨌든 우리의 혹은 메이야수의 ‘화석’과 관련해서도, 코펜하겐 학파의 관점을 적용할 수 있다. 관찰자의 개입 이전의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일종의 ‘실재’ 이다. 관찰자의 개입 이후에야 그것은 우리의 눈에 ‘객관적으로’ 살아 있거나 죽어 있게 된다. 우리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실재’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는 없다. 과학의 발전은 어쩌면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실재’에 대해 그 ‘객관성’을 밝혀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현상 너머 물자체의 객관성을 밝혀 낼 수 없다. ‘실재’는 그런 실체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더 이상 ‘인간’ 이 아니라 ‘포스트 인간’ 으로 종이 변환된다면 그 때는 어쩌면 지금의 현상이 아닌 실재의 또 다른 단면이 출현하지 않을까?

새로운 상관성이 만들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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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13-11-09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사놓고 아직 못보고 있는데 대신 잘보고있습니다. 끝까지 계속 써주실꺼죠?

말리 2013-11-09 10:37   좋아요 0 | URL
읽어 주고 계시다니 반갑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대로 읽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블로그라 읽고 느끼는대로 그냥 씁니다만, 늘 불안합니다.;; 나중에 책 읽으시면서 맘껏 비난하시고 ^^ , 가르쳐 주시기 바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