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알랭 드 보통 지음, 지주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1월 2일, 고속버스의 TV 화면에서 '프루스트'를 보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 화면에는 강신주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보였고, 간혹 홍차와 마들렌, 콩브레 따위가 뒷 배경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최근 도서관의 신간 코너에는 펭귄 클래식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가 꽂혀 있었다. 상경 길에 만난 지인에게 내가 그 지루하다는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웃으며 물었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읽어 봐... 나는 그 유명한 마들렌은 어디쯤 나오냐고 다시 물었고, 다행히 그것은 책 앞 부분, 아주 앞 부분에 있다는 희망적인 대답을 들었다. 그러나 그 사이 도서관 신간 코너에 오랫동안 꽂혀만 있을 것 같았던 그 책의 1권이 사라졌다. 누군가 깁스를 했거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준하는 어떤 지루한 교통 수단을 이용할 일이 생겼나 보다. 나는 대신 알랭 드 보통의 책 중 가장 재미있었다는 지인의 말을 기억해 내고,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를 빌려 왔다. 표지 제목의 아래에 바싹 붙여 놓은 영어 문장은 "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 다. 출판사는 알랭 드 보통에 자신이 없었거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질이 누군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프루스트의 책을 읽는다면 아마 대단히 지루해할 것이 틀림없겠지만, 나는 <넷, 훌륭하게 고통을 견디는 법>에서 프루스트와 내가 비슷한 방식으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발견했다. 프루스트는 평생동안 여러가지 질환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프루스트가 자신이 말하는 것만큼 아픈 것은 아니라며 빈정댔다. 프루스트는 생애의 마지막 16년 동안이나 자신은 곧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했다니 그럴만도 하다.
「마르셀이 과장을 했던 것일까? 똑같은 바이러스라도 한 사람은 일주일 동안 침대에 눕게 만들수 있고, 다른 사람은 단지 점심 후에 약간 나른하게 만들 수 있다. 손가락이 긁힌 고통으로 웅크리고 있는 사람에 대해 엄살부리지 말라고 비난하는 대신에 택할 수 있는 것은, 민감한 피부를 가진 생명체라면 이 생채기를 우리가 큰 칼에 맞는 것만큼이나 아프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따라서 단순히 우리가 비슷하게 다쳤었다면 겪었을 고통을 근거로 다른 사람이 정말 아픈가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p88」
남다른 고통은 자극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르게 민감하기 때문이다. 이 고통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렇다. 고통은 불편하고 우울한 감각이지만, 때로는 뜻하지 않은 통찰력을 주기도 한다. 프루스트가 불면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한 남자가 침대에서 뒤척이며 잠들기 전까지의 모습을 열일곱 페이지에 걸쳐 묘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처음에는 출판업자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던져버리게 했지만, 결국 그 덕분에 이 책은 위대한 고전이 되었다.
푸르스트는 이웃의 소음에도 극도로 민감했는데, "어떤 인간에게도 없는, 남들을 분개시키는 능력을 가진 무생물체가 하나 있다. 바로 피아노."라고 했다. 이웃집의 인테리어 공사 때문에 소음에 시달리던 프루스트는 "하루에 열두 명의 노동자가 발작적으로 망치를 수개월 동안이나 두드렸다면 케오프스의 피라미드처럼 웅장한 어떤 것을 세웠음에 틀림없으며, 보행자들은 프렝탕 백화점과 생오귀스탱 성당 사이에 서 있는 그것을 보고 놀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라고 했는데, 물론 피라미드는 보이지 않았고, 이웃집의 변기와 타일이 바뀌었을 뿐이다.
나도 몇 번의 이사를 다니며, 층간 소음만으로도 얇은 책 한권 정도는 너끈히 써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남들은 너무 신경이 날카롭기 때문이란다. 어쨌든 훌륭한 작가에게서 닮은 점을 발견한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고통일지라도, 좋다.
<여섯, 좋은 친구가 되는법>을 보면 프루스트는 위선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프루스트는 친구를 사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나치게 친절하고 헌신적일뿐 아니라 비위를 잘 맞추었다. 프루스트의 친구들이 그것을 '프루스트하기' 라 부르며 비꼴 정도였는데, 한편 친교에 대한 그의 견해는 놀랄만큼 신랄했다. "친교의 표현 양식인 대화란, 습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피상적인 여담일 뿐이다. 우리는 일 분 일 분의 공허함을 무한정 반복하는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평생 동안 이야기를 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친교란 "우리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지 않게 하려는 거짓말" 이상이 아니다. 프루스트는 진짜 위선자일까?
「이 불일치는 그다지 극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가 자신의 '프루스트하기'에 대해 거의 신뢰하지 않았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프루스트하기'를 불러일으킨, 그 뒤에 숨어 있던 메시지에서 그는 거짓이 없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이 나를 좋아하길 원합니다." ...... 자랑스럽게 자신의 시집이나 갓난아기를 보여주는 친구들에게 듣기 좋은, 그러나 허울뿐인 말을 해주는 것은 항상 필요한 일이다. 그런 정중함을 위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부분적으로는 거짓말을 해왔음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악한 의도를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놀라움의 한숨과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면 의심받을 수 있는 우리의 호감을 확인시키기 위한 것이다. p171~2 」
우리가 매일 하는 인사도 마찬가지다. "안녕하세요?" 물으며, 상대방의 마음과 몸이 평안한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습관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진심으로 상대방의 안녕이 궁금하지는 않기 때문에 위선적이지 않으려고 상대방을 만나고 나서도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단지 상대의 안녕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를 무시하고 모욕한다는 적대적인 의사의 표현이 되어 버린다. 중요한 것은 인사의 내용이 아니라 인사를 한다는 형식 자체이다. 허울뿐인 말은 우리가 서로에 대한 호감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형식적인 확인이다. 프루스트하기적 대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 대화의 내용은 '공허함을 무한정 반복'하는 것일 뿐이지만, 대화의 형식 자체는 관계 유지에 필수적이다.
마지막 <아홉, 책을 치워버리는 법>은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해 볼만한 문제이다. 프루스트는 "친애하는 친구여, 우리 시대 사람들 사이에서의 일반적인 풍조와는 반대로, 나는 한 사람이 문학에 대해 매우 고결한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동시에 그것을 악의 없이 비웃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고 앙드레 지드에게 말했다. 여기에는 책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때 생기는 위험들, 책을 물신적으로 숭배하는 태도에 내재한 위험들에 대한 경고가 있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채만식 문학기행'에 다녀 온 적이 있다. 채만식 문학관과 채만식이 주로 살았던 임피의 생가터, 학교, 역, 묘소를 둘러 보는 기행이었다. 생가터는 잡풀만 드문드문한 빈터이고, 임피역은 화물차만 드물게 지나다니는 작은 시골역이고, 묘소는 언제 벌초를 했나싶게 황폐한 봉분과 낡은 묘석만 덩그런 무덤이었다. 학교는 그야말로 학교. 여기에서 내가 무엇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콩브레 역시 다르지 않다. 콩브레는 가공의 지역으로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지만, 프루스트가 콩브레의 모델로 삼았다는 이유만으로 일리에라는 도시는 이름을 일리에 콩브레로 바꾸고 수많은 관광객을 받고 있다. 관광객들은 경쟁이 치열한 빵집들 중 한 곳에서 산 마들렌 봉지와 카메라를 들고 아미오 아줌마의 집으로 향한다. 관광 안내소의 책자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깊고도 신비한 느낌을 포착하고 싶다면 그 책을 읽기 전에 일리에 콩브레를 방문하는 데 하루 전체를 바쳐라. 콩브레의 마법적인 힘은 오직 이 특별한 장소에서만 진정으로 느낄 수 있다." 고 씌어 있다. 그러나 정작 프루스트는 어떤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써놓았다.
「우리는 밀레가.... <봄>을 통해 보여준 들판을 가서 보고 싶어 한다. 우리는 클로드 모네가 우리를 센 강의 양안에 위치한 지베르니로, 아침 안개 속에서 분별할 수 없는 그 강의 굽이로 데려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실 밀레나 모네가 그 근처를 지나가거나 거기에 머물게 되고 다른 것보다 그 길, 그 정원, 그 들판, 그 강의 굽이를 그리게 된 것은 가족이나 지인이 우연히 거기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이 세계의 다른 것들과 다르게, 그리고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알 수 없는 그림자처럼 그 속에 천재가 포착할 수 있었던 인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들처럼 고유하고 독창적으로, 그들이 그렸을 수도 있는 모든 풍경의 유순하고 무관심한 표면 위를 방황할 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p268」
프루스트적인 것이 콩브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눈을 통해 세계를 바라볼 때 그 어느 곳이라도 콩브레가 될 수 있다. "프루스트에 대한 참된 경의란 그의 눈을 통해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을 통해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책을 읽었다면, 다음으로 우리가 할 일은 책을 치우고 책에서 얻은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