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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카페 ㅣ Less Than Nothing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간주곡 5
상관주의와 그에 대한 불만들
상관주의? 처음 들어 본다. 불학의 소치려니 하다 지인들에게 물어봤는데 모른다고 한다. 무슨 단어를 번역한 것인지 궁금하다. 가끔은 원 단어가 더 쉽게 이해될 때가 있다.
간주곡 5는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를 다루고 있다. 처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상관주의가 무엇인지, 메이야수가 어떤 입장인지, 지젝이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지 뒤죽박죽이었다. 그런데 별 기대 없이, 리뷰는 써야 하니까,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내용이 제법 눈에 들어 왔다.
간단히 말하면, 상관주의의 대표는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이고, 메이야수는 상관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이고, 지젝은 메이야수의 비판이 역설적으로 칸트의 초월론적 지평에 사로잡혀 있다고 그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상관주의란 “주체와 객체, 인간과 현실은 오직 상호 상관적인 것으로서만, 양자의 상호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생각” 이다.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에서 현실은 주체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상관주의는 다른 다수의 입장들 속에도 있다. 예를 들어 주관주의, 주체-객체의 관계 자체를 절대자로 설정하는 것, 그리고 표준적인 20C적 입장이 있다. 상관 자체를 도저히 넘어 설 수 없는 인간 조건의 유한성의 표시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상관주의의 모든 입장에는 공통된 한계가 있다. ‘선조성先祖性’ 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인간과 현실이 상호적 상관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인간이 나타나기 전의 우주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란 질문에 상관주의는 전적으로 무능하다.
「메이야수는 최근 철학 내부에서 비합리적인 종교적 지향들이 등장한 것은 전근대 시대로의 후퇴가 아니라 서구의 비판적 이성의 필연적 결과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칸트적 버전의 계몽주의에서 이성의 비판적 사용은 항상 또한 자신을 겨냥하고 있었다. 종교 비판은 결국 이성 비판으로, 이성의 자기한정으로 귀결되며, 그것은 다시 종교적 신앙을 위한 공간을 열어준다. 다만 이번에 그러한 공간은 ‘철학자들의 신’, 즉 추론에 의해 존재나 특징이 논증되거나 또는 최소한 제한될 수 있는 신이 아니라 완전히 로고스를 넘어서 있는 철저한 타자성으로서의 역설적으로 심연 같은 신을 위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수를 둔 최초의 사람은 칸트 본인으로, 그는 잘 알려진 대로 도덕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이성을 제한할 것을 주장했다. p1110」
메이야수는 이성이 오히려 비합리적 신앙을 위한 공간을 열어주었다고 빈정댄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을 현실로 제한한 반면, 물 자체가 현실 너머에 존재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남겨 두었다. 칸트적인 주체는 유한성의 주체이다. 이에 대해 메이야수의 목표는 유한성의 자기 폐쇄를 깨뜨리고 예지체적인 즉자 존재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다면 메이야수는 어떻게 초월론적 상관주의적 폐쇄로부터 우리의 앎을 즉자 존재를 향해 열어놓는 쪽으로의, 즉자 존재에 대한 접근 가능성으로의 전환, 전도를 수행할까? 초월론적 상관주의의 궁극적 지평은 사실성facticity이다. 사물들은 엥겔루스 실레시우스의 표현을 빌자면 ‘ohne Warum 왜라는 이유 없이’ 거기 있는 그대로 있다. 우리는 유한성을 넘어설 수 없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사물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출현하는 데는 아무런 필연성도 없으며, 항상 그것들이 다른 식으로 나타날 수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p1120」
초월론적 상관주의는 이 ‘아무 이유 없음ohne Warum’ 을 유한성의 표시로 읽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절대자를 인식 할 수 없으며, 무지의 베일 뒤에서 절대자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초월적 상관주의의 오류는 그러므로 철저히 칸트적이다. 메이야수는 이 오류를 헤겔적으로 뒤집는다. 물론 여기서 헤겔적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지젝의 생각이고, 메이야수 자신은 헤겔과의 친연성을 부정한다.
「유한성의 초월론적 지지자들에게는 우리의 인식의 한정으로 보이는 것을 현실 자체의 가장 기본적인 긍정적인 존재론적 속성으로 바꾸어 버린다. - 절대적인 것은 “불가지론자가 이론화하는 것처럼 다르게 존재할 수 있음 그 자체” 일 뿐이다. “절대자란 나의 상태가 어떤 다른 상태를 향해 아무 이유 없이 이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능성은 더 이상 ‘무지의 가능성’, 즉 단지 내가 알 수 없는 불가능성의 결과인 가능성이 아니라” ..... 오히려 즉자 존재의 한가운데서의 “현실적 가능성 자체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p 1122~3」
인식론적 한정으로부터 긍정적인 존재론적 특징으로의 이러한 이행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메이야수는 이 최고로 어려운 질문에 심오하게 헤겔적인 방식으로 답한다.
「신의 존재론적 증명은 유물론적 방식으로 전도된다. 즉 지고의 존재의 가능성을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의 현실성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우리가 현실의 절대적 우연성의 가능성에 대해, 그것이 다를 수도 있을 가능성에 대해, 현실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과 그것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방식 사이에 근본적 간극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의 현실성을, 즉 현실 자체가 철저하게 우연적이라는 것을 수반하게 된다. 이 두 경우에 우리는 실존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이 개념의 일부인 실존으로의 직접적 이행을 다루게 된다. 하지만 신의 존재론적 증명의 경우, 가능성과 현실성을 매개하는 항은 ‘완전’(완전한 존재라는 개념 자체는 그것의 존재를 포함하고 있다)인 반면 개념으로부터 실존으로의 메이야수의 이행의 경우 매개항은 불완전이다. p1126」
「우리를 위한 존재와 즉자 존재를 분리시키는 간극 속에서 표현되고 있는 ‘타자가 될 수 있는’ 이러한 ‘능력’은 즉자 존재의 자기-거리화, 존재 자체의 한가운데 있는 부정성이다. - 메이야수가 “물자체는 표상의 초월론적 형식들의 사실성”, 현실에 대한 우리의 틀의 철저하게 우연적인 성격에 다름 아니라는 놀랄 만큼 난해한 명제 속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현실을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현실 아래 있는 ‘보다 깊은’ 또 다른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현실을 철저하게 우연성 속에서 보는 것이다. p1130 」
메이야수는 너무나 (지젝이 해석하는 바로서의) 헤겔적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헤겔적 성격을 인정하지 않는다. 헤겔 변증법은 개념의 필연적인 자기전개에 대한 묘사라는 통상적인 독법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젝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상관주의에 대한 메이야수의 헤겔적 돌파에도 불구하고 메이야수에게 남아 있는 문제란 무엇인가?
「메이야수와 관련해 진정한 문제는 전-주체적 현실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같은 어떤 것이 현실 안에서 출현할 수 있었을까를 사유하는 것이라는 비판적 함의를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몸짓 없이는 어떠한 객관주의라도 은밀한 방식으로 상관주의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현실 그 자체’에 대한 그것의 이미지는 (비록 부정적인 방식으로일지라도) 주체성과 관련된 것으로 머물 것이다. 그러한 몸짓을 하기 위해서는 주체를 우연적 출현으로 상정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그러한 우연성의 흔적들을 주체를 그것의 전-주체적 실재와 연결하고 있는 일종의 탯줄 속에 위치시켜야 하며, 그리하여 초월론적 상관주의의 원환을 깨야 한다.... 보어가 반복해서 말하기를 좋아했던 대로 극미립자 물리학 수준에 ‘객관적’ 측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객관적’ 현실에 대한 접근 같은 것도 있을 수 없다. - 우리가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가 측정하는 현실의 일부이며, 따라서 그것에 대한 ‘객관적 거리’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p1138~9」
우리는 전-주체적 현실, 즉 주체에 독립적인 현실을 사유할 수 없다. 주체가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체가 이미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에 현실에 대해 객관적 거리를 가질 수 없다. 그런데 메이야수는 “반-초월론 자체에서 물 자체에의 접근 가능성이라는 칸트적 주제에 사로잡혀 있다.” 즉 우리가 현실로 경험하는 것이 초월론적으로 구성된 것인가 아니면 현실이 주체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우리가 무언가를 알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이분법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물 자체로 나아갈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저 존재할 뿐인 현실의 밋밋한 어리석음 내에서 어떻게 현상들 자체가 등장할 수 있을까? 어떻게 현실은 자신을 이중화해 자신에게 나타나기 시작하는가?” 이다.
「..초월론적 상관주의를 거부하면서 메이야수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바대로의 현실과 현실 자체를 넘어,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초월론적인 것을 초월론적으로 대립시키는 칸트적 입장의 한계 내에 갇혀 있다. 그런 다음 그는 레닌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현실 자체에 접근해 그것을 사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p1140~1」
메이야수의 이런 방식에는 무언가 핵심적인 것이 빠져 있다. “주체 자체를 구성하고 있는 내속적 비틀기/휨이 그것이다.” 메이야수는 주체 자체 내의 분열을 즉자존재와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라캉이 주장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주체와 현실 사이의 환원불가능한 (구성적인) 불일치 또는 비-상관성이다. 즉 주체가 출현하려면 불가능한 주체-인-대상이 현실로부터 배제되어야 한다. 바로 이 배제가 주체를 위한 공간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초월론적 상관성 외부의, 주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주체 내부의, 주체의 내부 자체의 중핵 속의, 외-밀한 중심 속의 실재를 사유하는 것이다. p1141」
초월론적 상관성의 자기폐쇄를 깨뜨리는 것은 주체의 파악을 벗어나는 초월론적인 현실이 아니다. 그 자체로 주체인 대상에의 접근 불가능성이다. 우리는 현실에 완전히 중립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우리가 바로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지젝이 늘 말하는 대로 우리 눈 안에 그림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 안에 우리가 있다. 현실에 대한 접근이 인식론적으로 왜곡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실재가 존재하는 것은 상징적인 것이 자신의 외적 실재를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 완전히 자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현실)이 존재하는 것은 상징체계가 비정합적이며,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실재는 형식화의 막다른 골목이기 때문이다. ...실재는 형식화의 외적 예외가 아니라 형식화의 비전체에 다름 아니다. p1145」
비정합적인 현실을 안정화시켜 정합적인 장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주인-시니피앙이다. 주인-시니피앙의 역할은 칸트에게서 통각의 선험적 종합의 역할과 같다. 주인-시니피앙이 개입함으로써 실재는 ‘객관적 현실’ 이라는 정합적인 장으로 변형된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것이 상관주의에 대한 라캉적 대답이 되어야 한다. 즉 초월론적 상관주의는 주인-시니피앙의 개입을 현실을 구성하는 것으로 사유할 수 있는 반면 그것은 주인-시니피앙과 대상a 사이의 이처럼 전도된 또 다른 상관성을 놓치고 만다. 즉 주체를 내부로부터 탈중시화시키는 실재의 얼룩을 사유할 수 없다. p1146」
메이야수가 상관주의를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상관주의와 동일한 오류를 범한다. 실재의 얼룩을 사유하지 못한다. 실재는 사라지지 않으며, 제거할 수도 없고, 항상 상징적 조작의 잔여로 들러붙어 있다.
마지막으로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인간이 나타나기 전의 우주, 그것에 대한 기록인 화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인간과 독립적으로 공룡이 존재했다는 증거로 보아야 할까? 만약 우리가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동일한 그런 공룡을 만나게 될까?
「대답을 서두르기 전에 우리의 관점에 따라 ‘외부 현실’이 얼마나 상대적인가를 기억해야만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외부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재 그 자체의 무한한 복잡성으로부터 현실의 일부 또는 한 조각이 우리의 지각 장치와 상관적인 것으로 선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도대체 원환을 피할 수 없다. 화석이라는 현실은 마치 우리 관점에서는 무지개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점에서 그것을 관찰하는 한 ‘객관적’ 이다. -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주체 그리고 실재의 일부로서의 객체 사이의 상호작용의 장 전체이다. p1146~7」
얼마 전 EBS TV에서 <빛의 물리학> 이란 다큐를 방영했다. 천체 물리학과 양자 역학에 관한 긴 역사상의 핵심 쟁점을 다룬 대단히 흥미로운 프로그램이었다. 마지막 5편에 나온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관한 하나의 결론은 고양이는 관찰자에 상관적이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고양이는 관찰과 관계없이 살았거나 죽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다만 이후에 그것을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양자역학 특히 코펜하겐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관찰자의 개입에 의해서만 고양이가 살든지 죽든지 확정된다는 것이다. 그럼 관찰 이전의 고양이는 어떤 상태라는 것일까? 코펜하게 학파는 삶과 죽음이 중첩되어 있다고 하고, 또 다른 이론가들은 여러 개의 우주 안에 다중적으로 있다고도 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일축하는 과학자도 있다. 여전히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논쟁 중이다. 어쨌든 우리의 혹은 메이야수의 ‘화석’과 관련해서도, 코펜하겐 학파의 관점을 적용할 수 있다. 관찰자의 개입 이전의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일종의 ‘실재’ 이다. 관찰자의 개입 이후에야 그것은 우리의 눈에 ‘객관적으로’ 살아 있거나 죽어 있게 된다. 우리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실재’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는 없다. 과학의 발전은 어쩌면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실재’에 대해 그 ‘객관성’을 밝혀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현상 너머 물자체의 객관성을 밝혀 낼 수 없다. ‘실재’는 그런 실체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더 이상 ‘인간’ 이 아니라 ‘포스트 인간’ 으로 종이 변환된다면 그 때는 어쩌면 지금의 현상이 아닌 실재의 또 다른 단면이 출현하지 않을까?
새로운 상관성이 만들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