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의 신화
알베르 까뮈 지음, 이가림 옮김 / 문예출판사 / 1991년 1월
평점 :
품절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스무 세 살이었다. 치기였겠지, 스무 다섯 이후의 삶은 치욕이라고 주절대며 다닐 때였다. 더 살아야 할 이유는 알지 못했고, 살지 말아야 할 이유는 단순했다. 추하잖아. 삶은 권태로웠고, 세상은 불편했다.

 

까뮈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의 두 편의 시론試論, 『시지프의 신화』와 『반항인』에 빨려들었지만, 여전히 ‘웃는 시지프’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희망 없는 무익한 노동 속에서 어떻게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는 말일까?

 

그리고 두 배의 시간이 흘러, 다시 두 권의 책을 꺼내들었다. 꾹꾹 눌러 그은 밑줄들과 여백에 빼곡한 메모들이 낯설기도 정답기도 하다. 내 밋밋한 삶은 까뮈 이전에도 이후에도 지루하지만, 까뮈는 내 암울했던 한 때의 버팀목이었다.

  

 

<시지프의 신화 89년 중쇄(重刷), 반항인 87년 중판(): 둘 다 지금은 절판이다>

 

 

시론試論이 무엇일까? 시험할 시試자를 쓰는 시론은 ‘시험 삼아 해보는 평론이나 논설’ 혹은 ‘간단한 논설이나 논문’ 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까뮈는 소설가로 알려졌지만, 그 자신이 가장 사랑한 책은 시론인 『반항인』이다. 까뮈는 항상 세 개의 기본 테마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소설, 희곡, 시론이라는 세 개의 장르로 표현하려고 애썼다고 고백했다. 세 개의 테마는 부조리 혹은 부정, 반항 혹은 긍정, 사랑 혹은 중용이다.

 

부조리 혹은 부정의 계열에는 소설 『이방인』, 희곡 『깔리귈라』혹은 『오해』, 시론 『시지프의 신화』가 있다. 까뮈하면 떠오르는 이방인과 부조리는 ‘부정’의 계열이다. 부정은 곧바로 ‘자살’의 문제와 연결된다. 이것은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란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다. 모든 것을 잃고 버림받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모든 것이 다 좋다고 판단한다.” 신이 정해 놓은 운명 속에서도 그의 두 눈을 찌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두 손이다. 자신의 운명에 들어온 신을 추방하고 그 운명을 온전히 자신의 것, 인간의 것으로 만든 ‘오만한 자’, 오이디푸스의 ‘다 좋다’는 바로 시지프의 행복이기도 하다.

 

「시지프의 말 없는 기쁨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곧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의 고통을 바라볼 때, 모든 우상을 침묵하게 한다.」『시지프의 신화』p160

 

오이디푸스의 ‘모든 것이 다 좋다’ 도 시지프의 ‘행복’ 도 삶에 대한 구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계는 여전히 부조리하다. 인간은 이 세계에 의미 없이 내던져진, ‘피투된 존재’이다. 우리 모두에게 어김없이 예정된 죽음 역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던져졌다, 버려지는 존재이다. 세계는 낯설다. 인간은 세계에도, 자기 자신에게도 ‘이방인’ 이다. 물론 세계-내-존재로서, 혹은 매트릭스 안의 ‘미스터 앤더슨’으로 살아갈 수 있는 한, 우리는 이방인이 아니고 세계는 말할 수 없이 친밀하며, 인생은 수많은 의미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모든 것이 시작된다.

 

「다만 어느 날 ‘왜’하는 물음이 고개를 들어 놀라움에 물든 이 권태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는 말은 중요하다. 권태는 기계적인 생활의 행위 끝에 오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의 운동을 시작하게 한다. 권태는 의식의 운동을 눈뜨게 하고 그에 따르는 운동을 야기한다. 그에 따르는 운동이란 일상적인 연쇄 속으로의 무의식적인 회귀이거나 결정적인 자각이다. 자각 끝에는 시간과 더불어 자살 또는 재기라는 결과가 온다. 권태는 그 자체 속에 무엇인가 진저리나게 하는 것을 지니고 있다. 」 『시지프의 신화』p22

 

근면·성실을 강조하는 이면에는 권태에의 두려움이 있다. 권태와 더불어 의식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월,화,수,목,금,토,일의 바퀴를 멈춰 세우고, 낯설어진 세계에서, 의미를 찾는 의식의 활동이 시작된다.

 

「나의 논증은 그것을 각성시켜 준 명증에 충실하고자 한다. 이 명증이란 곧 부조리이다. 그것은 희구하는 정신과 실망을 주는 세계 사이의 단절, 통일에 대한 나의 향수, 여러 갈래로 분산된 우주, 그리고 그것들을 사로잡는 모순이다.」 『시지프의 신화』p68

 

부조리란 세계와 나 사이의 단절, 간극이다.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나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신이 있던 시대에 인간은 의미에 매달리지 않았다. 의미란 신의 뜻 속에 있고, 인간에게는 신의 은총과 구원만이 문제였다. 세계는 창조될 때부터 조화와 통일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근대의 이성은 신을 죽였고, 세계는 온통 인간의 손에 맡겨졌다. 모든 것이 허용된 것이다. 인간은 자유로워 진 것일까?

 

「이 무죄는 두려운 것이다. “모든 것은 허용되어 있다”라고 이반 카라마조프는 외친다. 이 말에도 역시 그의 부조리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통속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말이다. 사람들이 이점을 잘 주의했는지를 나는 모른다. 즉 모든 문제는 해방과 기쁨의 외침이 아니라 쓰디쓴 확인이라는 것이다. 삶에 의미를 부여할 그런 신의 확실성은 벌 받지 않은 악을 행하는 힘보다 훨씬 많은 매혹을 지니고 있다. 선택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으며 이때에 쓰라린 고통이 시작된다. 부조리는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결박한다. 그것은 모든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금지된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시지프의 신화』p91

 

까뮈는 구원의 호소 없이 살 수 있는가를 묻는다. 신의 속박이 오히려 전적인 자유보다 훨씬 견디기 쉽다. 그렇다면 신에게 돌아갈 것인가? 자살해야 할 것인가?

 

「하나의 경험, 하나의 운명을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운명이 부조리임을 알면서, 만약 우리가 의식에 의해 밝혀진 이 부조리를 자기 앞에 유지하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하지 않는다면,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대립의 항목 가운데 하나를 부정하는 것은 그것에서 도망치는 것이 된다. 의식적인 반항을 그만둔다는 것은 문제를 피하는 것이 된다. 」『시지프의 신화』p74

 

까뮈는 자살도 신도 아니라고 한다.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 문제지, 자진해서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자살은 하나의 착각일 뿐이다. 그리고 신으로 말하자면, 이미 죽었다. 부조리한 인간은 신 없는, 아무런 희망 없는 세상을 꿋꿋이 견디며 말없이 미소 짓는다. 비합리적인 세계를 은폐하고 신의 섭리를 선택하거나, 이 세계의 무익함에 절망하여 자살하는 것, 그 어느 쪽도 문제를 회피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일관성 있는 유일한 철학적 입장은 ‘반항’ 이다.

 

「반항은 인간과 인간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결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투명성에 대한 요구이다. 반항은 순간순간마다 세계를 문제 삼는다. .... 반항은 인간 자신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현존이다. 반항은 갈망이 아니다. 그리고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이러한 반항은 짓누르는 운명의 확인일 뿐, 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은 아니다. 」『시지프의 신화』p74~5

 

부조리한 인간은 이 낯선 세계의 이방인이다. 그리하여 반항인이 되어야 한다. 반항은 부조리한 인간의 자유이며 열정이다.

 

  

 

 

 

까뮈는 긍정 계열의 삼부작으로 소설 『페스트』, 희곡 『계엄령』혹은 『정의의 사람들』, 시론 『반항인』을 남겼다. 『반항인』은 까뮈 최고의 문제작으로, 이 책으로 인해 까뮈는 샤르트르와 철학적 결별을 맞게 된다. 자신에게 친구보다 적을 더 많이 만들어준 곤혹스러운 책이지만 그럼에도 까뮈는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책으로 『반항인』을 꼽았다.

 

『반항인』과 『시지프의 신화』는 하나로 연결된 책이다. 『시지프의 신화』가 자살에 대한 질문이라면, 『반항인』은 살인의 역사에 관한 고찰이다. 까뮈는 “이 시론의 목적은 자살과 부조리의 개념에서 시작된 하나의 성찰을 살인과 반항의 지평 위에서 추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두 시론의 연속성을 밝히고 있다.

 

「삼십 년 전에는, 살인을 결심하기 전에 사람들은 자살로써 스스로를 부정할 정도로 철저히 부정했었다. 신이 속임수를 쓰고, 신과 더불어 만인이 속임수를 쓰며,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속임수를 쓰니, 그러므로 나는 죽는다. : 즉 자살이 문제였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유일한 기만자들인 타인들만을 부정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살인을 한다. 새벽마다 요란한 몸치장을 한 살인자들이 슬그머니 독방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 즉 살인이 문제이다.」『반항인』p11

 

부조리한 감정은 어떻게 살인에 이르게 되는가?

 

「부조리의 감정이란,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어떤 행동규범을 이끌어내고자 할 때, 살인을 적어도 상관없는 것으로, 그리고는 결국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만약 사람들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면, 만약 아무것도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만약 우리가 그 어떤 가치도 긍정할 수 없다면, 모든 것은 가능하게 되고 또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찬성도 반대도 없으며, 살인자는 그르지도 옳지도 않게 된다. 」『반항인』p11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어떤 가치도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도 자연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선악의 개념이 사라진 곳에는 강자의 논리가 들어설 것이다.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 살인은 특권이 된다. 그러나 부조리의 마지막 추론은 자살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부조리한 인간은 인간의 질문과 세계의 침묵 사이의 대결을 유지해야 한다. 자살은 그 팽팽한 긴장을 놓아버리는 도피 행위이다. 그러므로 삶은 선으로 인정된다. 삶이 선이라면 그 선은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자살이 부정되어야 한다면 살인 역시 마찬가지다. 부조리의 사상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운명적인 살인은 인정할지언정, 추론에 의해 도출된 살인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살인이 문제가 되는가? 신성과 신성의 절대적 가치가 사라진 세계 속에 인간은 스스로의 규범을 찾아내어야 했다. 반항이 제기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그 형이상학적 반항과 역사적 반항의 위태로운 노정에서 살짝 삐끗하기만 해도 집단적 살인의 광기 속으로 곧바로 굴러 떨어진다.

 

「신의 왕관이 전복될 때, 반역자는 자신의 인간조건 속에서 헛되이 찾아 헤매었던 그 정의, 그 질서, 그 통일을 이제 자기 손으로 창조해야 하며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신의 실권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필요하다면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인간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절망적인 노력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무서운 결과들 없이 진행되지는 않을 것인데, 우리는 아직 그 중의 몇 가지 밖에 알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결과들이 추호도 반항 그 자체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 결과들은 반항자가 자신의 근원을 잊어버리고, ‘위’와 ‘농’ 사이의 힘든 긴장에 지쳐버리며, 마침내 전적인 부정이나 혹은 전적인 복종에 자신을 내팽개치는 한에 있어서만 발생한다.」

 

그 무서운 결과들은 반항 자체의 잘못이 아니다. 반항이 부정과 긍정 사이의 긴장을 놓쳐 버릴 때 발생한다. 까뮈는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 마르크스주의, 허무주의와 러시아 테러리즘, 나치즘, 소련의 스탈린 독재 등을 통해 반항이 어떤 비극적 행로를 밟아 왔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유럽의 오만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드, 니체, 헤겔, 로트레아몽, 초현실주의, 허무주의의 역사를 통해 형이상학적 반항들이 어떤 유혹에 굴복했는지도 보여준다. 『반항인』이 긍정의 계열에 속한다지만, 이 책이 펼쳐 보여주는 근대 이후의 유럽의 역사는 절망적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서구 형이상학은 극심한 허무주의에 시달리다 테러리즘의 길을 열어 주었다.

 

까뮈는 5장 <정오의 사상>에서 참다운 반항의 태도를 제시하고 있지만, 역사가 암시하듯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까뮈의 반항인은 ‘아름다운 영혼’을 닮아 있다. 그러나 광란의 밤이 지나면 ‘다음날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잔해를 치우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손이 처음처럼 깨끗할 수 없다. 아름다운 영혼은 더러운 손을 참지 못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지도 못한다. 그에게 가능한 것은 영원한 반항뿐인 것일까? 까뮈의 세 번째 테마, 중용 혹은 사랑의 작품들이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 십자가를 들고 가는 유럽

 

 

 

1. 천년의 제국, 비잔티움

 

비잔티움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다른 이름이다. 로마제국은 395년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었다. 게르만족이 훈족을 피해 몰려오면서 위기를 맞은 로마제국이 제국 내의 사정까지 겹치면서 분열된 것이다. 한 세기에 걸친 게르만족의 이동이 가라앉았을 즈음인 476년 서로마제국은 멸망했고 동로마 제국만 살아남았다. 동로마제국의 수도 비잔티움은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로, 당시에는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불렸다.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그리고 게르만족의 이동>

 

근대의 틀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서유럽을 문화의 중심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서유럽은 중세까지만 해도 거의 야만의 상태에 있었다. 고대 희랍·로마 문명 역시 서유럽이 아니라 동로마 제국이 이어받아 발전시키며, 이슬람 제국으로 전파했다.

크리스트교도 동로마제국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이후 서유럽의 게르만 국가들이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임에 따라, 두 가지 교회로 분열되었다. 서유럽의 로마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교회는 각각 ‘보편적인 교회(로마 카톨릭 교회)’ 와 ‘바른 전통을 이은 교회(그리스 정교회)’를 자처하며 갈라졌다. 비잔티움 문화는 동유럽의 슬라브족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2. 또 하나의 크리스트교 세계, 서유럽

 

서유럽으로 몰려온 게르만족들 중 프랑크족은 로마 카톨릭을 받아들였다. 원래 카톨릭 교를 믿던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프랑크족은 순식간에 서유럽의 강자로 등장했다. 8세기 이후 프랑크 왕국의 영토는 현재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에 이를 만큼 광대했다.

 

서유럽의 교회는 게르만족들 사이에 빠르게 침투했고, 서유럽의 많은 교회가 로마 주교를 모든 교회의 지도자, ‘교황’으로 받아들였다. 현재 바티칸을 다스리는 ‘교황’제도의 역사는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9~10세기, 바이킹의 침입과 기사 세력의 강화>   

 

 9~10세기, 서유럽은 또 다시 이민족의 침입을 받게 된다. 유목민인 마자르족과 이슬람 세력,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족이 세 갈래에서 각각 침입해 온 것이다. 이 중 바이킹족이 가장 큰 파괴력을 발휘하며 100여 년 간 서유럽의 지도를 크게 바꿔 놓았다.

 

 

또한 왕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나라는 영주(기사)들이 다스리는 수많은 영지로 나뉘어졌다. 왕은 이름만 가지고, 실질적 통치권은 지방의 영주들이 행사하는 ‘봉건제’가 시행된 것이다. 봉건제라는 지방분권사회에서 농민들은 영주(기사)들의 보호를 받는 대신, 부역과 세금을 내고 재판을 받는 등 영주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영주들은 아래에 하급 기사를 두고 전쟁을 하고 자신들의 농민 즉 농노를 보호하였다. 

 

 

 

3. 서유럽의 영혼을 지배한 카톨릭 교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두 가지는 봉건제도와 카톨릭 교이다. 카톨릭 교는 농민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황권과 경쟁하며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했다. 11세기 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교황의 성문 앞에서 맨발로 엎드려 용서를 빈 ‘카노사의 굴욕’은 황권을 압도한 교황의 권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후 200년 간 ‘교황은 해 황제는 달’ 의 이미지를 고착화시켰다.

‘기사도 정신’, ‘백마 탄 기사’ 등의 말은 중세 봉건제도의 ‘기사’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초기의 기사들은 거의 약탈자에 가까웠다. 사람들을 공격하고, 포로의 몸값을 요구하고, 농촌을 약탈하는 등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기사’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나쁜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현재의 ‘기사’ 이미지를 탄생시킨 것은 교회이다. 교회는 기사들에게 여성을 존중하고 과부나 고아 같은 약자를 보호하며 교회에 헌신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교도를 상대로 성전에 나설 것을 적극 권장하였다.

  

 

  <7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

 

이슬람 세계를 차지한 셀주크 튀르크는 비잔티움으로 진격하여,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사로잡고 아나톨리아 지역을 차지하였다. 동로마제국의 황제는 서유럽의 카톨릭 국가들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1096년 이슬람 세계와 카톨릭 세계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약 200년간 서유럽 국가들이 7차례에 걸쳐 일으킨 십자군 전쟁이다. 십자군 전쟁은 종교 전쟁이지만, 그 이면에는 부유한 동방 세계에 대한 서유럽 사람들의 부러움과 시기심이 작용했다.

십자군 전쟁은 서유럽의 패배로 끝났지만 이 전쟁을 통해 서유럽이라는 일체감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발전된 이슬람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서유럽은 중세의 암흑기로부터 벗어날 자극을 받게 되었다. 또한 전쟁을 주도한 교황과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의 힘이 크게 약해졌다. 그 결과 서유럽은 국왕을 중심으로 국가를 통합해 나갈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4. 도시와 함께 발전한 중앙집권 국가

 

부르주아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언제쯤일까? 부르주아는 11세기 이후 세력이 커지기 시작한, ‘부르그’ 안에 사는 상공업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작은 도시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피렌체와 같이 대도시로 성장한 곳도 있었다. 부유해진 부르주아들은 투쟁이나 돈을 통해 도시의 자치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봉건제 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부르주아는 왕권 강화에 큰 힘이 되었다. 부르주아는 직접 왕에게 세금을 내고, 왕은 그 돈으로 용병과 관리를 고용하여 영주들을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부르주아 또한 상업 활동의 독점권을 얻고, 정부의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영주 세력에 대항하여 왕과 부르주아가 손을 잡은 것이다.

 

  <중앙집권 국가의 등장 : 프랑스, 영국,에스파냐>

 

십자군 전쟁의 패배로 영주가 몰락하고, 부르주아와 힘을 합친 왕의 권력이 강화되어 가는 와중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100년 전쟁이 일어났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가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100년 전쟁이다. 잔 다르크 때문이든 어쨌든 이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고, 이후 프랑스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100년 전쟁 패배 후 곧 바로 두 귀족 가문 사이에 30년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 역시 프랑스와 같은 중앙 집권 국가로 재편되었다. 1453년 프랑스, 1485년 영국을 뒤이어 1492년 에스파냐 왕국도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확립했다. 십자군 전쟁을 겪으며 서유럽은 이렇게 봉건제도에서 벗어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1492년에 콜롬부스는 함대를 이끌고 서인도 제도에 도착했다. 이로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춘 서유럽이 드디어 세계 역사의 패권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윤서 2014-05-27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명작 돈키호테에 나온 영주 이야기가 나와서 재미있었지만
고달픈 농민들의 삶도 나와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고,
종교와 잔 다르크도 나와서 재미있었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오월 셋째 주 독서회의 책은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의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다. 일본 사람이지만, 20여 년 간 알래스카에 살면서 사진을 찍다가, 곰에게 물려 죽었으니, 이방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원주민도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은 두 어 달의 여행으로, 자연과 인간의 참모습이 어쩌고 하는 여행기들 같은 호들갑스러움이 없다. 따뜻하지만 담담하고 조금은 쓸쓸하다.

 

알래스카 자체가 그리고 자연이, 그 속의 모든 생명이 아름답지만 쓸쓸하다. 자연의 법칙은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약한 것이 제일 먼저 잡아먹히고, 싸우다 뿔이 얽힌 무스 두 마리를 이리떼와 그리즐리와 어치가 차례로 먹어 치운다. 인간들은 카리부를 사냥하고 고래의 등에 작살을 꽂아, 그 살점을 발라낸다. 자연은 잔인하지만, 그것이 자연이다. 전 메스컴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빙해에 갇힌 고래를 구출하는 작전을 지켜보며, 늙은 에스키모는 이렇게 말한다. “시절이 변했어.... 예전에 이런 고래는 자연이 주는 선물이었지.” 가혹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북극곰과 수많은 생명들에게 그 고래는 귀한 생명이 되어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도덕이 없다. 자연의 이름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타자의 시선이다.

 

알래스카는 미국에 편입되면서 급격한 문명의 변화를 겪었다. 원주민들의 심각한 알코올 중독 문제는 전통적인 삶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서구 문화 사이에서 정체성을 잃고 흔들리는 그들의 불안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과 어우러져 전통적인 삶을 사는 수많은 에스키모와 인디언이 있지만, 알래스카 원주민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백인 또래들에 비해 10배나 많고, 청소년 10명 중 1명이 자살을 시도할 위험이 있다는 통계는 원주민 청소년들이 느끼는 미래에의 불안감이 얼마나 큰지 말해주고 있다. 인구 550명이 안 되는 어느 마을에서는 16개월 사이에 8명의 젊은이들이 잇달아 목숨을 끊었다.

 

「화폐경제가 침투하고, 전통의 샤머니즘이 추방되고, 학교에서는 새로 영어를 가르치고, 토착 언어를 말하면 비누로 입을 씻어야 하는 시절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동화정책이라고는 해도, 태곳적부터 그들의 삶을 엮어주고 서로를 맺어주었던 보이지 않는 끈은 가차 없이 잘려 나갔다. 그 보이지 않는 끈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 문화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94」

 

그러나 작가 호시노는 섣부른 여행자들처럼 무조건 전통 문화를 예찬하고, 서구 문물을 재빠르게 받아들인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는 그럴 수가 없다. 알코올 중독으로 살인을 한 친구가 있고, 그들의 삶이 급속하게 붕괴되는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은 변화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현대화 속에서 마을 사람들의 생활은 크게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편리한 것, 보다 쉬운 살림으로 옮겨가는 것을, 거기서 살지 않는 사람이 어찌 비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의식중에 그들의 살림을 오래된 박물관 속에 가두어두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의 살림살이 역시 끊임없이 변해간다. p196」

 

여행자들의 시선은 늘 과거를 동경한다. 때 묻지 않은 것, 순수한 것, 오래된 것... 자신이 온 곳이 화려하고 빠르고 부유할수록, 느리고 가난하고 변하지 않는 것들을 찾는다. 그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과 삶의 진리와 혼자만의 깨달음을 찾아내었다고 믿으며,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전율한다. 그리고 다시 풍족하고 편리하고 현란한 자신들의 세상으로 돌아간다. 그 깨달음의 기쁨은 약삭빠른 세상을 더 영악하고 발 빠르게 살아갈 힘이 된다. 타인의 삶은 오래된 박물관 속에 가두고, 자신의 삶은 풍요로운 물질세계에 담근다. 원래 여행은 그런 것이니까.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제발 여행기네 어쩌네 하고, 책을 내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더구나 박물관 밖으로 걸어 나오는 현지인을 두고 개탄하고 훈계까지 하는  저자들의 경우는 차라리 읽는 사람이 민망하다. 순수를 잃었네, 돈 맛을 알았네... 지난 주에 읽은 어느 터키 여행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정체를 알았다. 야스민의 펜션에는 시골 사람, 아니 터키 사람 특유의 순수함과 자연스러움이 없었다. 그들은 투숙객이 올 때마다 각본에 짜인 듯 움직였고..."  "그러나 뭐든 빨리 배우고 터득하는 야스민네 가족이 영악하게 상대방의 사람들을 사로잡으려는 방식이 나는 피로했다." 이렇게 작가는 자본주적 삶의 방식에 재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터키인을 비판한다. 정작 그녀 자신은  조금이라도 속을까 카펫 한 장을 두고 삼십분을 넘게 흥정을 하고, 차 한 잔에도 장삿속인지 인심인지를 의심하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늘 순박한 얼굴에 천진한 웃음을 띠고, 박물관 속에서 가난한 행복을 영원토록 전시하기 바란다.

 

그래서  이 책의 담담함이  특별하다.  작가의 섣부른 감탄도, 개탄도 없고 , 별스런 깨달음도 없다. 알래스카와 원주민들에 대한 잔잔한 기록이다.  책을 읽으면 조금 따뜻하고 ,또 조금 쓸쓸하기도 하다. 가을날의  햇살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지난주 <그것이 알고 싶다>는 일베를 취재했다. 모자이크된 화면과 낯 뜨거운 자막들이 중간 중간 보였다.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을까 싶지만, 수 십 만이 넘는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재미삼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자부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중권은 <그것이 알고 싶다> 일베편을 조금 모자란 프로그램이라 평하면서, 속칭 ‘일부심’으로 통하는 일베의 자부심을 이렇게 규정했다. “‘자아’를 스스로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커뮤니티에 속한다는 사실에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며, “정확히 말하면 ‘자’부심을 가질 건덕지가 없는 아이들이 가상으로 만들어 느끼는 ‘타’부심”이라는 것이다. 진중권이 일베를 대하는 방식은 한마디로 불쌍한 애들이 관심 쫌 끌어 보려는 짓거리니, 가볍게 웃어주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일베의 영향력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관심과 진지한 응대 방식이 일베에 영향력을 실어 준다고 진중권은 예전부터 주장했다. 그에게 일베는 한마디로, 무시해 버리면 자연히 사라질 불쌍한 집단이다. 그래서 진중권은 일베에 동정심을 표출한다. “거기에는 어떤 처절함이 있다. 일베 너무 미워하지 마라. 불쌍한 애들이다” 진중권은 가끔씩 일베를 불러들여 설전을 하며 놀아 주기도 했다. 진중권이 <그것이 알고 싶다>에 “일베의 공격성의 바탕에 깔린 열등의식을 정신분석으로 헤집어야 했다” 고 아쉬움을 표한 이유도 그들에게 적대감 보다는 동정심을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알고 싶다>가 정신분석적 접근을 했다면 과연 어떤 분석이 나왔을까?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은 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일 수 있다. 실제로 박가분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일베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일베의 사상』은 한국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탐색이지만, 그 바탕에는 라깡의 정신분석학이 깔려있는 것 같다. 박가분은 라깡이란 이름을 언급하지 않지만, 서문에 “일베는 본질적으로 진보와 좌파의 증상이다.” 고 명시적으로 선언하면서, 그의 이론이 정신분석적 틀에 기초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 외에도 전이, 전치와 응축, 무의식, 은폐와 봉합 등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논증을 이끌어 가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은 분명히 적대 관계로 보이는 진보(혹은 좌파)와 일베가 실제로는 하나의 모태에서 태어난 쌍생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진보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일베와 같은 증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주장하는 것에 있어 보인다.

 

일베는 본질적으로 좌파의 증상이다. 진보와 좌파의 존재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일베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일베는 과거 촛불시위라는 정치적 이벤트가 개방한 공간 속에서 탄생했다. 그것이 보여준 급진성, 욕망의 정치, 자족적인 언설의 공간, 스스로도 진지하게 믿지 않는 윤리적 이상주의라는 바로 그 ‘촛불정신’은 오늘날 일베에 반전된 형태로 계승되었다. 일베에 대한 비판은 진보좌파가 스스로의 정치적 상상력을 극복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베를 도덕적이고 당위적으로 비판하기 이전에 그들을 내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이 책을 일베 유저들에게 바친다. p19

 

물론 박가분의 분석은 진중권이 말하는 의미의 정신분석과는 달라 보인다. 진중권은 아마 진보의 쌍생아로서의 일베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진중권은 일베 유저들을 단순히 열등감을 가진 사회부적응아정도로 치부하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가분은 혐오적 언사와 욕설이 난무하는 ‘일일 베스트 저장소’에 몇 달을 죽치고 앉아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일베를 통해 진보의 일그러진 얼굴을 찾아내게 되었던 것일까? 박가분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비방과 악의에 가득 찬 일베식 글쓰기 방식의 원조는 강준만과, 진중권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논객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논객다운 글쓰기란 공격적이고 우상 파괴적인 스타일로, 감성과 논리 그리고 정치적/학문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을 뒤섞어가며, 상대의 허점을 명쾌하게 논파하는 글쓰기를 의미했다. p77」

 

일베는 팩트 제일주의를 지향한다. 이때의 팩트는 맥락이 제거된 거두절미식 팩트이다. 귀신같은 신상 털기를 통해 언제 어디서 어떤 단어를 썼는지 단박에 찾아내어 너 그때 이렇게 말했잖아 식이다. 그런데 이런 공격방식은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의 진보 논객들이 즐겨 사용하던 수법이다. 우리에게 풍자적 통쾌함을 주었던 쥐박이, 닭그네, 좃선, 똥아, 딴나라당 등이나 노알라, 핵대중, 박원숭, 씹선비 따위가 다르다고 할 수 없다.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을 보면 상대를 ‘파시스트’, ‘소아병자’, ‘토론의 규칙을 모르는’ 수준 이하의 인간이라 부르며 비아냥거리고 모욕하는 방식을 즐겼다. 일베는 도를 지나치고 있지만, 진보논객들의 방식을 이어받고 있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 또한 일베는 평등을 추구한다. 어떤 성역도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는 존댓말도 허락하지 않는다. 일베에서는 누구나 ‘병신’이라는 점에서, 누구나 혐오할 수 있고 혐오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진보가 주창한 평등의 원리가 뒤틀린 채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베와 진보의 쌍생성은 형식적 측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2002년 촛불정국과 노무현에 대한 지지는 뚜렷한 이념이나 가치에 기반 한 것이 아니라 기성 정치에 대한 반동정서, 혐오와 환멸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인터넷의 정치적 분위기를 잘 표현하는 것은 진보나 좌파라기보다는 오히려 내셔럴리즘과 결합한 반한나라당 정서에 더 가까웠다. 노무현에 대한 지지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환멸과 혐오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거대 보수정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수구꼴통’, 친일독재 정당쯤으로 인식되고 비난당했다. 그리고 오늘날 인터넷 문화와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어떤 명확한 가치나 이념보다는 무언가에 대한 혐오와 안티정서가 사람들을 결속시켰다. p98 」

 

현재의 일베를 움직이는 힘 역시 환멸과 혐오이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는 둘 다 긍정적인 가치나 이념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좌파적 꿈의 부재와 우파적 비전의 실종은 사람들에게 현실에서 벗어난 상상적 국가를 열망하게 만든다. 더불어 이상적 국가를 단번에 실현해 줄 위대한 지도자를 갈망하게 한다. 2002년의 노사모를 홍위병으로, 현재의 일베를 파시스트로 경계하는 시각은 그것이 좌파든 우파든 이런 위험성을 일별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넷의 정치적 풍경은 2002년이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단지 감정적인 전이 대상이 옮겨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바라는 정상국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줄 국가란 (미국이 아니라) 북한에 대해서 당당하게 말을 하는 대한민국이다. 그 반대급부로 (과거에 딴나라당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면) 지금은 ‘노완용’, ‘핵대중’ ‘촛불좀비’가 유행하고 있다. 정상국가의 실현을 방해하는 존재에 대한 안티정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터넷을 관통하는 문화적/정치적 코드이다. 국가와 인터넷과의 이러한 상상적 관계(정상국가에 대한 열망)는 인터넷의 정치문화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다. 」

 

2002년 진보와 네티즌들은 자신의 상상을 실현해 줄 대상을 찾았다. 하지만 노무현이란 현실 정치인에게 투사한 상상적 국가의 모습은 저마다 달랐고, 당연하게도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실현할 수 없었다. 현실이 아니라 상상에 의해 구성된 지지 세력은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전향자들이 속출했다. 일본의 평론가 요시모토 다카아키에 따르면 전향은 현실과 유리된 사상에 집착한 것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는 전향이란 자신의 사상적 논리가 지닌 모순이 현실에 비춰 선명하게 드러날 때,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사상적 논리로 단순히 ‘갈아타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촛불이 전향하여 일베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 촛불의 사상이 일베의 사상으로 굴절된 것 이면에는 촛불시위에서 표출된 대중의 열망이 현실정치에서 좌절된 사정이 있다. 자신의 이상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들이 역으로 그러한 이상을 과격하게 조롱하고 비웃는 것이다. 일베 유저들은 촛불시위 이후에야 나타날 수 있는 유형의 군중이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촛불시위의 쌍생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촛불시위에서 제기된 문제와 쟁점들을 해결하지 않는 한 일베와 같은 존재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p234」

 

'촛불시위에서 제기된 문제와 쟁점들’은 경험상 단순하다. 상식과 원칙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는 아무것도 담지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은 사실 텅 비어 있었다. 그 텅 빈 이름에 어떤 내용을 채워 넣을 것인지 사고하지도 토론하지도 투쟁하지도 않았다. 그 이름이, 강력한 지도자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이루어 줄 것이라 믿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노무현은 스스로 ‘강력함’을 거부함으로써, 독재자의 길은 피했지만,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불구가 되었다. 영웅적 지도자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그를 통해 무엇을 이루어낼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전망이, 가치관의 공유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반대, 반동정서만으로 열정을 소진해야 하고, 상상적 국가를 그리며 적과의 키배틀에 나서야 한다. 넷 상의 이 적들만 섬멸되면 마침내 상상적 국가가 현실에 세워질 것이라는 환영 속에서 말이다.

 

박가분의 대안은 무엇일까?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의해 촉발된 촛불시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위는 애초에 좌파와 우파 모두 재전유하는 데 실패한 대중의 정념(사회 경제적 불안, 공포, 분노) 에 기초해 있었다.” 그것은 비단 2008년뿐 아니라 2002년의 촛불과 지금의 일베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정념을 촉발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를 극단으로 갈라놓고 있는 빈부 격차의 심화이다. 촛불시위나 원칙과 상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정치 경제적 적대가 있는 것이다. 일베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적당히 봉합하고 있는 이 적대를 비틀린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세상을 다 바꾼 듯 요란 떨던 너희는 살만하냐? 우리는 다 같이 병맛이다.

 

「일베는 대한민국의 문화적, 정치적 동질성과 집단주의적 문화 속에서 표출될 수 없었던 사회적인 갈등과 적대들이 특유의 ‘혐오 문화’라는 전치되고 응축된 형식으로 표출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일베의 혐오 문화는 합의지반이 존재하지 않는 실재의 정치적 적대에 뿌리내리고 있다. 일베는 지역 간의 경제적 격차, 일상에서 남성과 여성이 겪는 성적 갈등 등 진보나 좌파들이 직면하길 꺼려하거나 혹은 적절한 방식으로 동원하지 못했던 적대의 에너지를 자양분으로 삼는 존재이다.p123 」

 

박가분은 여기서 ‘사회’ 공동체를 제안한다. 개인이 국가에 불가능한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함께 현실화할 수 있는 사회 공동체를 조직하여 국가를 압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의 국가를 변화시키지 않고서 어떤 정치적 이상을 궁극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가는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장소이다. 하지만 현실의 국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로부터 자립한 ‘사회’가 필요하다. 굳이 국가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이상을 타인과 소통하고 또한 그것을 작게나마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국가에 대한 상상을 둘러싸고 인터넷에서 싸우는 의미는 사라질 것이다.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이상을 유기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사회 없이 이상을 국가에 의해 곧바로 실현시키려는 기획에 그동안 과도하게 의존했다는 점이다. 즉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은 채 국가를 변화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p241~2」

 

갑자기(?) 등장한 ‘사회’가 조금 뜬금없이 들리기도 한다. 사회란 학생회라든가 노동조합, 협동조합, 지역사회의 자치조직 등을 말하는 것 같다. 이런 사회 조직들이 그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튼튼히 뿌리내리지 못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조직도 조직이려니와 국가를 향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커다란 정치적 비전이 이들 조직에 선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는 다양한 자치 활동의 수준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 아닐까? 우리 사회는 공유된 정치적 비전이 전무하다. 좌파의 꿈의 부재가 대중의 정념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낼 수 없었고 그 때문에, 들끓는 정념이 극우적 이상주의를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일베는 좌파의 증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 - 소희와 JB 사람을 만나다 - 터키편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고 싶은 책은 아니었다. 나는 무엇에나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여행자의 열린 마음과 넘치는 감성을 싫어한다. EBS <테마기행> 에서 가장 겸연쩍은 것이 그 지역, 특히 가난한 지역일 경우 더, 사람들과 어울리며 쏟아내는 온갖 감탄사들이다. 가난하지만 순수하고 인정많고 착하고 오오!!.... 땟물이 꼬작꼬작한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맨발로 뛰어다니는 그 모습에 나도 빙그레 웃음짓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삶의 진리를 발견한 듯 호들갑을 떨어대면 정말이지 낯이 간지럽다. 꼬질꼬질한 아이들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그의 온몸은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로 칭칭 감겨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를 보는 나의 눈은 처음부터 뒤틀려 있었다. 어디 너는 어떤가 한번 보자는 심보? 그런 책을 왜 읽었냐하면 물론 독서회 때문이다. 내가 읽고 싶은 책만 읽자고 할 수는 없으니까.

 

 

 

걸렸다! 처음부터 비딱한 내 눈에 딱 들어온 건 영어 조기교육 이었다. 이 책은 엄마가 세 살 난 아들을 데리고 터키 베낭여행을 하는 이야기다. 엄마는 아들이 돌이 되면서부터 영어와 국어 2개국으로 대화를 했다고 한다. 이 아들에게 '엄마의 말', mother tongue은 두개다. 엄마가 영어 조기교육을 시작한 이유는 '영어란 더 넓은 세상의 많은 것들과 소통하는 기쁨을 알게 해주는 주요한 수단" 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의 부모들처럼 입시나 취업이 목적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책 한권을 고를 때에도 국문학에 그치지 않고 그 몇 십 배에 달하는 선택의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팝송 한 곡이 그 음운 그 느낌 그대로 가슴에 알알이 박히는 것, 여행 시 관광지의 유적을 힐끔 보고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민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삶 속에 잠겼다 나오는 것....p13」

 

훌륭하다. 나도 가끔 원서가 읽고 싶을 때가 있다. 번역이 엉망일 때, 글맛을 생생히 느끼고 싶을 때, 내 초라한 영어실력에 후회가 남는다. 나도 한때는 영어를 좀 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20여년이 되도록 내 삶에 영어가 필요한 경우가 별로 없었다. 직장 초년 시절 새벽에 밥도 먹지 않고 영어회화 학원을 다녔어도 정작 내가 맡은 일은 외국인 콧잔등 한번 볼일 없는 국내업무였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그랬다. 승진 시험에나 필요할까, 설사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일을 한다 해도 영어로 처리해야 할 업무는 없었을 것이다. 국내 영업을 하는 사람이 누구를 붙잡고 영어로 물건을 팔겠는가. 그런데도 영어는 모든 직장인의 두통거리였다. 실무에는 개똥만큼도 필요 없지만, 승진을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으니. 영어는 모순 그 자체였다. 잘리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목숨 줄이었으나, 정작 써먹을 데는 하나도 없는 장식품에 불과했다. 영어 실력과 업무 능력은 전혀 비례하지 않았거나, 아무 관련이 없었으니 비례를 산정해 볼 수도 없었다.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도 마찬가지다. 영어가 모든 교육에 우선하는 것은 영어의 실용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학생들을 차별화하기에 가장 적절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육은 이미 한 때 개천에서 용을 키울 수 있던 시절을 벗어났다. 교육은 아이의 재능이 아니라 부모의 재력이 무한 경쟁하는 각축장이 되었다. 개미들이 혹시나 하는 기대로 주식시장을 벗어나지 못하듯이 가난한 부모들 역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사교육 시장의 소용돌이 속에 빨려든다. 승자는 자명하다. 개미가 큰 손을 이기는 시장은 없다. 특히 영어 교육 시장은 더 그렇다. 자그마한 예외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돌대가리 날라리도 십 여 년만 미국 물을 먹여주면 방정식은 못 풀어도 외국인과 이야기는 할 수 있다. 돈과 영어와 명문대와 대기업과 사회지도층이 일직선으로 연결되면 부의 세습뿐만 아니라 권력과 문화의 세습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우리시대 영어는 계급 고착화의 토대에 놓여 있다.

 

물론 영어 자체는 무죄다. 영어는 우리에게 선택의 가능성을 넓혀준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그 가능성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세계화 시대 운운하지만, 관광객과의 몇 마디 외에 영어를 실제로 써먹을 곳이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기껏 외국인들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친절한 한국인이 되기 위하여 가정 경제가 휘청하도록 영어에 돈을 쏟아 부어야 한단 말인가. 결코 서민들에게는 돌아올 수 없는 그 바늘구멍 같은 가능성을 위하여 돌박이 부터 머리 희끗한 직장인까지 영어에 목을 매고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한마디로 웃기는 짓이다.

 

책 한권, 팝송 한곡, 지역민과의 대화....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이것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전 국민이 돈을 퍼부으며 사교육에 매달릴 만큼 가치 있는 것인가?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 인생을 걸어도 좋을 만큼 가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가치를 지향하고 산다. 고흐는 그림 한 장에 목숨을 걸었고, 베토벤은 귀를 잃고도 음악에 인생을 바쳤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그림 한 장, 음악 한곡, 소설 한편, 가치 있는 그 모든 것들에 번번이 모든 것을 걸 수는 없다. 그것은 각자의 선택이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영어에만 보편성을 부여한다. 마치 영어만 잘하면 문학을 더 심오하게 이해할 수 있고, 예술적 감수성이 더 풍부해지고, 인격이 훌륭해진다고 믿는 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영어를 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더할 나위 없는 인간일 텐데, 미국엔 왜 그렇게 총기사건도 많고 가난한 사람도 많고 인종차별주의자도 많은 것일까!

 

작가가 영어를 통해 아들에게 열어주는 삶의 가능성들은 전혀 비난받을 것이 못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영어 광풍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영어교육의 병폐를 은폐하도록 돕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어떨까? 나는 굳이 작가가 아들과의 대화를 영어로 옮겨 쓰면서, 조기 영어 교육을 그렇게 자랑스러워 할 필요가 있었는지 묻고 싶다. 지인에게 들은 얘기로는 ‘nanny' 가 강남에는 인기인가 보다. 보모를 말하는데, 한국에 여행 온 외국인 학생들을 고용해 보모를 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영어교육을 한단다. 입주 생활 가정교사인 셈이다. 그것이 부담스러운 집에서는 필리핀 가정부를 고용하기도 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이제 모든 것을 우아하게 처리할 줄 안다. 아등바등한 경쟁 속에 직접 뛰어들지 않는다. 작가의 영어교육은 거의 이런 수준에 가깝다. 일상어로 영어를 할 만한 엄마들이 한국에는 그다지 많지 않다. 세 살짜리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몇 달씩 배낭여행을 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는 가정도 당연히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혜택 받은 자신의 조건을 마치 일반화 시킬 수 있다는 듯이 말한다. 다만 욕망의 문제이고 선택의 문제인 듯이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 가혹한 사교육 시장에 등골을 뽑히는 서민들이 가엽고 어리석다는 듯이. 문제의 구조적 측면은 보지 않고,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초월적인 시선은 무책임하다. 선택받은 소수만이 구조를 뛰어넘을 수 있다. 남은 사람들에게 구조는 무너뜨려야 할 대상이지, 뛰어넘을 수 있는 장애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구조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뿐이다.

 

 

 

글이 엉뚱하게 흘렀다. 독서회에서 할 말을 가볍게 기록해두려 했는데, 논리가 부족한 말들을 쏟아내고 말았다. 교육에 대해 별반 아는 것이 없는데 이러쿵저러쿵하고 말았다. 그럴 때는 글이 현실에서 둥둥 뜨게 마련이다. 여하튼 그렇고. 진짜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다른 것이다. 여행자의 시선이 주는 불편함인데 그건 나중에 해야겠다. 맛없는 글이 벌써 충분히 길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05-26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26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