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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오월 셋째 주 독서회의 책은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의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다. 일본 사람이지만, 20여 년 간 알래스카에 살면서 사진을 찍다가, 곰에게 물려 죽었으니, 이방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원주민도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은 두 어 달의 여행으로, 자연과 인간의 참모습이 어쩌고 하는 여행기들 같은 호들갑스러움이 없다. 따뜻하지만 담담하고 조금은 쓸쓸하다.
알래스카 자체가 그리고 자연이, 그 속의 모든 생명이 아름답지만 쓸쓸하다. 자연의 법칙은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약한 것이 제일 먼저 잡아먹히고, 싸우다 뿔이 얽힌 무스 두 마리를 이리떼와 그리즐리와 어치가 차례로 먹어 치운다. 인간들은 카리부를 사냥하고 고래의 등에 작살을 꽂아, 그 살점을 발라낸다. 자연은 잔인하지만, 그것이 자연이다. 전 메스컴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빙해에 갇힌 고래를 구출하는 작전을 지켜보며, 늙은 에스키모는 이렇게 말한다. “시절이 변했어.... 예전에 이런 고래는 자연이 주는 선물이었지.” 가혹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북극곰과 수많은 생명들에게 그 고래는 귀한 생명이 되어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도덕이 없다. 자연의 이름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타자의 시선이다.
알래스카는 미국에 편입되면서 급격한 문명의 변화를 겪었다. 원주민들의 심각한 알코올 중독 문제는 전통적인 삶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서구 문화 사이에서 정체성을 잃고 흔들리는 그들의 불안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과 어우러져 전통적인 삶을 사는 수많은 에스키모와 인디언이 있지만, 알래스카 원주민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백인 또래들에 비해 10배나 많고, 청소년 10명 중 1명이 자살을 시도할 위험이 있다는 통계는 원주민 청소년들이 느끼는 미래에의 불안감이 얼마나 큰지 말해주고 있다. 인구 550명이 안 되는 어느 마을에서는 16개월 사이에 8명의 젊은이들이 잇달아 목숨을 끊었다.
「화폐경제가 침투하고, 전통의 샤머니즘이 추방되고, 학교에서는 새로 영어를 가르치고, 토착 언어를 말하면 비누로 입을 씻어야 하는 시절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동화정책이라고는 해도, 태곳적부터 그들의 삶을 엮어주고 서로를 맺어주었던 보이지 않는 끈은 가차 없이 잘려 나갔다. 그 보이지 않는 끈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 문화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94」
그러나 작가 호시노는 섣부른 여행자들처럼 무조건 전통 문화를 예찬하고, 서구 문물을 재빠르게 받아들인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는 그럴 수가 없다. 알코올 중독으로 살인을 한 친구가 있고, 그들의 삶이 급속하게 붕괴되는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은 변화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현대화 속에서 마을 사람들의 생활은 크게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편리한 것, 보다 쉬운 살림으로 옮겨가는 것을, 거기서 살지 않는 사람이 어찌 비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의식중에 그들의 살림을 오래된 박물관 속에 가두어두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의 살림살이 역시 끊임없이 변해간다. p196」
여행자들의 시선은 늘 과거를 동경한다. 때 묻지 않은 것, 순수한 것, 오래된 것... 자신이 온 곳이 화려하고 빠르고 부유할수록, 느리고 가난하고 변하지 않는 것들을 찾는다. 그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과 삶의 진리와 혼자만의 깨달음을 찾아내었다고 믿으며,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전율한다. 그리고 다시 풍족하고 편리하고 현란한 자신들의 세상으로 돌아간다. 그 깨달음의 기쁨은 약삭빠른 세상을 더 영악하고 발 빠르게 살아갈 힘이 된다. 타인의 삶은 오래된 박물관 속에 가두고, 자신의 삶은 풍요로운 물질세계에 담근다. 원래 여행은 그런 것이니까.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제발 여행기네 어쩌네 하고, 책을 내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더구나 박물관 밖으로 걸어 나오는 현지인을 두고 개탄하고 훈계까지 하는 저자들의 경우는 차라리 읽는 사람이 민망하다. 순수를 잃었네, 돈 맛을 알았네... 지난 주에 읽은 어느 터키 여행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정체를 알았다. 야스민의 펜션에는 시골 사람, 아니 터키 사람 특유의 순수함과 자연스러움이 없었다. 그들은 투숙객이 올 때마다 각본에 짜인 듯 움직였고..." "그러나 뭐든 빨리 배우고 터득하는 야스민네 가족이 영악하게 상대방의 사람들을 사로잡으려는 방식이 나는 피로했다." 이렇게 작가는 자본주적 삶의 방식에 재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터키인을 비판한다. 정작 그녀 자신은 조금이라도 속을까 카펫 한 장을 두고 삼십분을 넘게 흥정을 하고, 차 한 잔에도 장삿속인지 인심인지를 의심하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늘 순박한 얼굴에 천진한 웃음을 띠고, 박물관 속에서 가난한 행복을 영원토록 전시하기 바란다.
그래서 이 책의 담담함이 특별하다. 작가의 섣부른 감탄도, 개탄도 없고 , 별스런 깨달음도 없다. 알래스카와 원주민들에 대한 잔잔한 기록이다. 책을 읽으면 조금 따뜻하고 ,또 조금 쓸쓸하기도 하다. 가을날의 햇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