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 - 소희와 JB 사람을 만나다 - 터키편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09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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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책은 아니었다. 나는 무엇에나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여행자의 열린 마음과 넘치는 감성을 싫어한다. EBS <테마기행> 에서 가장 겸연쩍은 것이 그 지역, 특히 가난한 지역일 경우 더, 사람들과 어울리며 쏟아내는 온갖 감탄사들이다. 가난하지만 순수하고 인정많고 착하고 오오!!.... 땟물이 꼬작꼬작한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맨발로 뛰어다니는 그 모습에 나도 빙그레 웃음짓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삶의 진리를 발견한 듯 호들갑을 떨어대면 정말이지 낯이 간지럽다. 꼬질꼬질한 아이들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그의 온몸은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로 칭칭 감겨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를 보는 나의 눈은 처음부터 뒤틀려 있었다. 어디 너는 어떤가 한번 보자는 심보? 그런 책을 왜 읽었냐하면 물론 독서회 때문이다. 내가 읽고 싶은 책만 읽자고 할 수는 없으니까.

 

 

 

걸렸다! 처음부터 비딱한 내 눈에 딱 들어온 건 영어 조기교육 이었다. 이 책은 엄마가 세 살 난 아들을 데리고 터키 베낭여행을 하는 이야기다. 엄마는 아들이 돌이 되면서부터 영어와 국어 2개국으로 대화를 했다고 한다. 이 아들에게 '엄마의 말', mother tongue은 두개다. 엄마가 영어 조기교육을 시작한 이유는 '영어란 더 넓은 세상의 많은 것들과 소통하는 기쁨을 알게 해주는 주요한 수단" 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의 부모들처럼 입시나 취업이 목적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책 한권을 고를 때에도 국문학에 그치지 않고 그 몇 십 배에 달하는 선택의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팝송 한 곡이 그 음운 그 느낌 그대로 가슴에 알알이 박히는 것, 여행 시 관광지의 유적을 힐끔 보고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민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삶 속에 잠겼다 나오는 것....p13」

 

훌륭하다. 나도 가끔 원서가 읽고 싶을 때가 있다. 번역이 엉망일 때, 글맛을 생생히 느끼고 싶을 때, 내 초라한 영어실력에 후회가 남는다. 나도 한때는 영어를 좀 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20여년이 되도록 내 삶에 영어가 필요한 경우가 별로 없었다. 직장 초년 시절 새벽에 밥도 먹지 않고 영어회화 학원을 다녔어도 정작 내가 맡은 일은 외국인 콧잔등 한번 볼일 없는 국내업무였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그랬다. 승진 시험에나 필요할까, 설사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일을 한다 해도 영어로 처리해야 할 업무는 없었을 것이다. 국내 영업을 하는 사람이 누구를 붙잡고 영어로 물건을 팔겠는가. 그런데도 영어는 모든 직장인의 두통거리였다. 실무에는 개똥만큼도 필요 없지만, 승진을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으니. 영어는 모순 그 자체였다. 잘리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목숨 줄이었으나, 정작 써먹을 데는 하나도 없는 장식품에 불과했다. 영어 실력과 업무 능력은 전혀 비례하지 않았거나, 아무 관련이 없었으니 비례를 산정해 볼 수도 없었다.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도 마찬가지다. 영어가 모든 교육에 우선하는 것은 영어의 실용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학생들을 차별화하기에 가장 적절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육은 이미 한 때 개천에서 용을 키울 수 있던 시절을 벗어났다. 교육은 아이의 재능이 아니라 부모의 재력이 무한 경쟁하는 각축장이 되었다. 개미들이 혹시나 하는 기대로 주식시장을 벗어나지 못하듯이 가난한 부모들 역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사교육 시장의 소용돌이 속에 빨려든다. 승자는 자명하다. 개미가 큰 손을 이기는 시장은 없다. 특히 영어 교육 시장은 더 그렇다. 자그마한 예외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돌대가리 날라리도 십 여 년만 미국 물을 먹여주면 방정식은 못 풀어도 외국인과 이야기는 할 수 있다. 돈과 영어와 명문대와 대기업과 사회지도층이 일직선으로 연결되면 부의 세습뿐만 아니라 권력과 문화의 세습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우리시대 영어는 계급 고착화의 토대에 놓여 있다.

 

물론 영어 자체는 무죄다. 영어는 우리에게 선택의 가능성을 넓혀준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그 가능성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세계화 시대 운운하지만, 관광객과의 몇 마디 외에 영어를 실제로 써먹을 곳이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기껏 외국인들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친절한 한국인이 되기 위하여 가정 경제가 휘청하도록 영어에 돈을 쏟아 부어야 한단 말인가. 결코 서민들에게는 돌아올 수 없는 그 바늘구멍 같은 가능성을 위하여 돌박이 부터 머리 희끗한 직장인까지 영어에 목을 매고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한마디로 웃기는 짓이다.

 

책 한권, 팝송 한곡, 지역민과의 대화....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이것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전 국민이 돈을 퍼부으며 사교육에 매달릴 만큼 가치 있는 것인가?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 인생을 걸어도 좋을 만큼 가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가치를 지향하고 산다. 고흐는 그림 한 장에 목숨을 걸었고, 베토벤은 귀를 잃고도 음악에 인생을 바쳤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그림 한 장, 음악 한곡, 소설 한편, 가치 있는 그 모든 것들에 번번이 모든 것을 걸 수는 없다. 그것은 각자의 선택이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영어에만 보편성을 부여한다. 마치 영어만 잘하면 문학을 더 심오하게 이해할 수 있고, 예술적 감수성이 더 풍부해지고, 인격이 훌륭해진다고 믿는 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영어를 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더할 나위 없는 인간일 텐데, 미국엔 왜 그렇게 총기사건도 많고 가난한 사람도 많고 인종차별주의자도 많은 것일까!

 

작가가 영어를 통해 아들에게 열어주는 삶의 가능성들은 전혀 비난받을 것이 못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영어 광풍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영어교육의 병폐를 은폐하도록 돕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어떨까? 나는 굳이 작가가 아들과의 대화를 영어로 옮겨 쓰면서, 조기 영어 교육을 그렇게 자랑스러워 할 필요가 있었는지 묻고 싶다. 지인에게 들은 얘기로는 ‘nanny' 가 강남에는 인기인가 보다. 보모를 말하는데, 한국에 여행 온 외국인 학생들을 고용해 보모를 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영어교육을 한단다. 입주 생활 가정교사인 셈이다. 그것이 부담스러운 집에서는 필리핀 가정부를 고용하기도 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이제 모든 것을 우아하게 처리할 줄 안다. 아등바등한 경쟁 속에 직접 뛰어들지 않는다. 작가의 영어교육은 거의 이런 수준에 가깝다. 일상어로 영어를 할 만한 엄마들이 한국에는 그다지 많지 않다. 세 살짜리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몇 달씩 배낭여행을 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는 가정도 당연히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혜택 받은 자신의 조건을 마치 일반화 시킬 수 있다는 듯이 말한다. 다만 욕망의 문제이고 선택의 문제인 듯이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 가혹한 사교육 시장에 등골을 뽑히는 서민들이 가엽고 어리석다는 듯이. 문제의 구조적 측면은 보지 않고,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초월적인 시선은 무책임하다. 선택받은 소수만이 구조를 뛰어넘을 수 있다. 남은 사람들에게 구조는 무너뜨려야 할 대상이지, 뛰어넘을 수 있는 장애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구조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뿐이다.

 

 

 

글이 엉뚱하게 흘렀다. 독서회에서 할 말을 가볍게 기록해두려 했는데, 논리가 부족한 말들을 쏟아내고 말았다. 교육에 대해 별반 아는 것이 없는데 이러쿵저러쿵하고 말았다. 그럴 때는 글이 현실에서 둥둥 뜨게 마련이다. 여하튼 그렇고. 진짜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다른 것이다. 여행자의 시선이 주는 불편함인데 그건 나중에 해야겠다. 맛없는 글이 벌써 충분히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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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6 00: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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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6 1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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