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은 수없이 봤지만 한번도 뽑아든 적이 없는 책이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사실 저자가 셀린저라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나는 호손이나 뭐 그런 정도의 유명작가인 줄 알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 셀린저라는 이름은 엄청 낯설었다;; 심지어는 몇 주전에 <빨간책방>을 들었는데도, 처음 보는 이름 같았다. 대개 설겆이나 청소를 하면서 듣기 때문에 흘려버리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분명히 들었을텐데도 책 표지의 셀린저라는 이름은 아주 이상해 보였다.

 

내용도 그랬다. 오랫동안 제목이 준 인상은 <붉은 수수밭>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목화농장 같은 것이었다. 광활한 호밀밭을 지키는 외로운 파수꾼. 뉴욕 중산층 사춘기 소년의 일탈에 관한 이야기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일탈이라니, 사실 요즘 아이들을 생각해 보면 이걸 일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도 1950년대의 미국에서는 굉장한 사건이었다고 한다. 제임스 딘의 반항적 이미지에 맞먹는 홀든 콜필드의 강렬함. <빨간책방>의 두 남자가 뭐라고 신나게 떠든 얘기 속에는 존 레논 암살범이 이 책을 갖고 있었다는 둥의 비화들이 있다. 비트 제너레이션의 선구자라나.  

  

1950년대 중반 미국에서 현대의 산업사회를 부정하고 기존의 질서와 도덕을 거부하며 문학의 아카데미즘을 반대한, 방랑자적인 문학가 및 예술가 세대를 이르는 말

 

문학 뿐만 아니라 사회 분야에서도 "1950년대 미국의 풍요로운 물질 환경 속에서 보수적인 기성 질서에 반발해 저항적인 문화와 기행을 추구했던 일단의 젊은 세대 " 를 가르킨다.

 

그러니 책 내용은 '다음 어학사전'의 정의 속에 그대로 있는 셈이다. 풍요로운 물질환경, 홀든 콜필드의 아버지는 뉴욕에 사는 변호사다. 보수적인 기성 질서에 대한 반발. 가령 이런 것이다.  콜필드와 늙은 스펜서 선생이 나누는 대화다.

 

「인생은 시합이지. 맞아, 인생이란 규칙에 따라야 하는 운동 경기와 같단다.」

「예, 선생님.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시합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합은 무슨. 만약 잘난 놈들 측에 끼어 있게 된다면 그때는 시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주 전에 교장 선생님과 부모님이 상담을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아주 훌륭하신 분들 같더구나」 

「예. 좋으신 분들입니다.」

 훌륭하다니. 난 정말 그런 말이 듣기 싫었다. 그건 위선적인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예의바른 자세와 공손한 대답 뒤에서 콜필드는 분노와 구역을 쏟아낸다. 그런데 나는 콜필드 보다 스펜서 선생이 마음 아프다. 내가 쏟아낸 수많은 말들도 누군가에게 조롱 속에 짓밟히지 않았을까 슬며시 겁도 난다. 이제 풋내기 콜필드에게 감정이입하기에는 나도 늙었다.

 

콜필드의 기행은 줄담배, 친구에게 흠씻 두들겨 맞기, 클럽에서 성인 여성들과 춤추기, 호텔에서 매춘부와의 소동, 떡이 되게 술마시기 따위 들이다. 그런데 콜필드는 그렇게 막 나가는, 앞뒤가리지 않는 반항아처럼 보이지 않는다. 콜필드에게는 항상 브레이크가 있다. 매춘부를 그냥 돌려보내고, 좋아하는 선생님을 찾아가고, 결국 가출도 하지 못한다. 콜필드의 3일은 일종의 럼스프린가이다.

 

럼스프린가는 '주위를 뛰어 돌아다닌다' 는 뜻의 독일어에서 온 말이다. 미국의 아만파 공동체는 17세가 되면 아이들을 공동체 밖으로 내 보내, '뛰어 돌아다니게' 한다. 공동체 안은 엄격한 규칙을 갖고 있는데, 밖으로 나간 아이들은 어떤 일을 해도 아니 어떤 일을하도록 부추겨진다. 차와 팝음악, 텔레비젼은 기본이고 음주와 마약 난교를 경험한다. 그리고 몇년 후 아이들은 선택할 기회를 갖게 된다. 아만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일반적인 미국 시민이 될 것인가? 결과는 90%의 아이들이 공동체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왜?  여기에는 속임수가 있다. 아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진정한 선택의 기회가 아니다. 아이들은 17세가 될때까지 엄격한 규율 속에서 바깥 세상에 대한 환상을 키워왔다. 그런데  자연스런 삶속에서의 한계나 규제 없이 갑작스레 주어진 음주와 마약과 섹스는 그들의 환상을 박살내며 참을 수없는 불안을 야기한다. 아이들은 평화와 안정을 찾아 아만파 공동체의 규율 속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 17세가 될때까지 일반적인 미국 가정에서 살다가 강제로 아만파 공동체에서 몇 년을 살게 된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몇년 후 아이들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럼스프린가는 일종의 '불맛'을 체험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아무것이나 덥석덥석 집으려는 아이에게 뜨거운 남비뚜껑을 만지게 해서 아이가 스스로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훈육같은 것 말이다. 

 

 콜필드의 3일은 막막하고 외롭고 불안하다. 콜필드는 한번도 해방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주위를 뛰어 돌아다니다, 스스로 울타리 안으로 돌아온다. 이 책이 미국에서 두번째로 많이 팔린 책 (빨간책방에서 들었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그래도 엄청 많이 팔렸고 지금도 많이 팔린단다) 인 이유는 아마도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비슷한 효과 때문이지 않을까?  엘리자베스는 사랑없는 결혼을 거부하지만, 결국 진정한 사랑을 찾아 결혼에 성공한다. 영국 엄마들이 딸들에게 이 책을 첫번째로 권유하는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결혼이다. 사랑은 악세러리고 결혼이 실체이다. 사랑이라는 장식물로 결혼이라는 영악한 실체를 가린 이 성공담이야말로 보기 좋아 맛도 더 좋은 떡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도 파멸하지 않고 안전한 세계로 돌아온다. 저자 셀린저는 막대한 인세로 은둔형 삶을 살았다고 하지만, 적어도 홀든 콜필드는 3일간의 체험을 바탕으로 적당히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갈 것 같다.  한때는 좀 놀아봤다는 그 추억이 그를 삶에 한층 더 단단히 고정시켜 주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콜필드는 파수꾼, catcher가 되고 싶다고 한다. 벼랑 끝으로 떨어지려는 아이들을 붙잡아 주는 파수꾼. 그런데 벼랑 위는 여전히  '기존의 질서와 도덕' 의 세계가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1. 저자 : 조 사코

  1) 지중해 작은 섬국가 몰타에서 태어난 미국인

  2) 역사, 특히 팔레스타인의 역사에서 지은이의 국적은 그의 세계관과 함께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됨. 극한 대립의 땅에 대한 중립적 시선은 불가능하기 때문.

  3) 충실한 취재를 바탕으로 가급적 주관을 배제하고 사실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는 평

 

2. 시기

  1) 1991년 12월과 1992년 2월, 두 달간의 취재 후 집필 

  2) 1차 인티파다(1987년 12월 ~ 1994년 5월)가 사그라들 무렵

  3) 출간 배경 : 9개의 시리즈물을  약 10년이 지난 2001년 한 권의 책으로 엮음  

 

3. 주요 방문 지역

  1) 입국 경로 : 카이로 → 시나이 반도 → 팔레스타인 입국

  2) 예루살렘 → 요르단강 서안지구 (웨스트뱅크) → 가자지구 → 텔아비브

 

4. 주요 내용

  1) 1967년 불법 점령지인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의 실태 : 실업, 시위, 탄압, 통금, 투옥, 빈곤

  2) 19948년 추방과 학살에 관한 증언

      이스라엘 건국과 더불어 팔레스타인인 추방 및 학살, 재산 몰수 

      귀환권은 한 번도 협상 대상이 된 적이 없음 :  팔레스타인 민중이 협상을 거부하는 이유 중 하나

  3) 이스라엘 불법 정착촌과 정착민의 만행

      웨스트뱅크의 2/3 점령, 강제 퇴거, 가옥 파괴

  4) 안사르 감옥과 고문에 관한 증언

  5) 인티파다

      가자지구 난민촌에서 발발

      투옥을 자랑스러워하는 소년들

      여성 인권의 문제와 히잡

  6) 팔레스타인 경제 파괴

      팔레스타인인의 토마토 경작 방해 : 과다한 세금, 물부족, 운송 지연

      올리브 나무 절단 :인티파다 동안 12만그루 절단

      이스라엘의 최하층 프롤레타리아

  7) 운르와 UNRWA : UN팔레스타인난민기구

      난민촌, 학교, 병원 등 지원 턱없이 부족

  8) 텔아비브(이스라엘 수도)의 이스라엘인들의 시각

 

5. 말, 말  

  1) 시온주의자들의 구호 : "다음해에는 예루살렘에서!"

  2) "땅없는 사람에게 백성없는 땅을"

  3) "팔레스타인 민족은 없다."

  4) "대부분의 이스라엘인들은 평화와 토지를 바꿀 마음이 없다"

 

6. 덧붙인 글 : <팔레스타인 역사와 분쟁> 최진영 

  1) 성서에 근거한 이슬라엘의 소유권 주장 (BC 2000년 경?)

      팔레스타인 = 필리스틴인이 살던 땅 = 가나안 (이스라엘, 가자, 서안지구 및 폭넓게는 골란고원, 레바논, 시나이반도, 홍해지역까지) 

     창세기: 하느님이 가나안을 영구 소유지로 약속 , 이른바 약속의 땅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정착했다 유대국 멸망 이후 디아스포라(BC 586년)  

  2)  로마지배 (1세기) → 아랍 이슬람 지배 (7세기 경) → 셀주크 및 오스만 투르크 지배 (10세기~19세기)   → 영국 위임 통치 (1917년)

  3) 7세기 이후 1400년 간 아랍 무슬림의 나라

  4) 1948년 이스라엘 건국비화 : 영국의 이중 약속

      아랍인 : 대 오스만 투쟁을 대가로 아랍 독립국 약속

      시온주의자 : 벨푸어 선언으로 유대국가 약속

      분쟁은 민족간의 대립이 아니라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로 부터 비롯

  

7.  한겨레 21의 현 팔레스타인 정세 분석

   3차 인티파다의 징후들 : <제국주의의 균열 이스라엘의 발악>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7703.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팔레스타인 현대사 - 하나의 땅, 두 민족 커리큘럼 현대사 5
일란 파페 지음, 유강은 옮김 / 후마니타스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쓴 일란 파페는 이스라엘인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지금도 극한 대립을 벌이고 있는 비극의 땅, ‘팔레스타인’ 에 관해 이스라엘인이 쓴 역사를 믿어도 될까? 일란 파페는 이 땅에 살면서 초연하고 중립적인 역사를 쓰기는 불가능하다고 고백한다. 사실과 ‘진실’을 고수하라는 동료들의 조언은 오히려 헛될 뿐이라며, 저자는 과감히 ‘편견’을 선택한다. “이 책은 식민자가 아니라 피식민자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 점령자가 아니라 피점령자에 동조하는 사람, 사장이 아니라 노동자 편에 서는 사람이 쓴 것이다.” 불가능한 진실 대신 이른바 몫 없는 자part of no part의 관점을 채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는 자연스런 균형이 있다. 팔레스타인인의 편에 서겠다는 저자의 단호한 의식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유대인이라는 어쩔 수 없는 민족적 무의식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어쨌든 팔레스타인인을 미화하지도, 유대인을 단순한 악마로 그리지도 않는 미덕이 있다.

 

제목의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1948년에 국가를 선포하고 즉각적으로 영국, 소련의 인정을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팔레스타인은 겨우 이 년 전인 2012년 11월에 UN으로 부터 non-member observer state의 자격을 승인받았다. 회원국도 아니고 참관국(?)에 불과하지만, ‘state', 국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팔레스타인’은 무엇인가? 물론 땅이름이다. 그런데 현재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자기들이 사는 땅을 팔레스타인으로, 그리고 스스로를 팔레스타인 민족과 팔레스타인인으로 여기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팔레스타인은 (근)현대사modern 외에는 역사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은 20세기 초 서구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의 침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과 이스라엘이 없었다면 아마도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도 없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에 산다는 것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응집력 있는 지정학적 단위에 속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런 식민주의의 노력의 결과로 이제 팔레스타인에는 민족과 종교가 조화를 이루는 구조가 어느 정도 자리 잡게 되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뚜렷한 실체가 아니었던 팔레스타인에게 이런 변화는 과거와의 결정적인 단절을 이루었다 1918년에 이르면 팔레스타인은 오스만제국 시기에 비해 한층 더 행정적으로 통일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세 지역이 하나의 행정 체제로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1923년에 팔레스타인의 지위에 관한 국제사회의 최종적인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영국 정부는 최종적인 국경선을 교섭하면서 민족운동이 쟁취하기 위해 싸우게 될 뚜렷한 공간을 만들어냈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소속감을 불어넣었다. p134」

 

근현대 이전의 팔레스타인 지역은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 이전에는 셀주크 투르크가, 더 이전 그러니까 7세기 무렵부터는 아랍인들의 왕조에 속해 있었다. 팔레스타인인의 대다수가 아랍-무슬림인 이유가 이 때문이다. 투르크 족들도 제국을 이룬 후 무슬림으로 개종했기 때문에, 약 1400년 동안 이 땅은 아랍-무슬림들의 터전이었다. (조금 자세한 내용과 지도는 여기 ^^)

 

‘팔레스타인 문제’라고 할 때 연상되는 것들은 가자지구, 서안지구, 인티파다, PLO, 하마스, 지하드, 정착촌, 점령지, 시온주의 등등이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아는 것도 없고, 더욱이 어떤 맥락 속에 놓여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복잡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읽다보면 이런 어지러운 개념들이 오롯이 제 자리를 잡으며,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 속에 그 비극적 의미를 드러낸다. 모든 역사는 이야기다. 특히 『팔레스타인 현대사』는 잔인하고 슬픈 이야기다. 우리에겐 더욱 그렇다. 일제 강점기와 미 군정기의 압제와 학살을 겪고도, 동족간의 전쟁으로 땅도 민족도 마음도 나뉘어 원수처럼 대립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너무도 익숙하고 그래서 더욱 서러운 이야기다. 말하자면 500쪽이 넘는 이 역사책이, 그것도 팔레스타인이라는 머나먼 땅의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고 그리고 뜻밖에 흡인력이 있다는 말이다.

 

 

19세기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그러나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노리며 선교사, 의사, 교육자들을 앞세운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 땅에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초기 시온주의자들은 선교사들과 거의 같은 무렵에 이 땅에 도착했다. 팔레스타인은 제국주의와 더불어 시온주의라는 두 마리의 늑대를 맞닥뜨린 것이다. 그리고 시온주의는 100년 가까이 이 땅을 피로 물들이고 있다.

 

「시온주의는 유럽의 현상이었고 따라서 다른 서구인들과 마찬가지로 현지인을 등한시했다. 또한 시온주의는 오스만의 지배자들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그 대신 유럽 식민 강대국들의 선의에 의지했다. 다른 식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자들도 유럽에서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위한 안식처를 만들기 위해 영토를 개척했다. 시온주의는 원래 유럽의 민족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지도자들이 민족 부흥의 전망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실현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식민주의 운동으로 바뀌었다. p67」

 

한마디로 시온주의는 식민주의이고, 남아메리카에서 스페인 개척자들이 그랬듯 팔레스타인에서 원시적인 아랍인들을 내쫒고 문명화된 유대인의 나라를 건설하려 했다. 유럽에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그 역할을 뒤집어 박해자가 되었던 것이다. 초기 시온주의 운동에는 그 유명한 로스차일드도 잠깐 등장한다. 막대한 자금력과 서구 열강에 대한 로비력을 발휘하는데, 이후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시온주의에서 손을 떼었다.

 

1차 세계 대전은 팔레스타인 비극의 본격적인 신호탄이 되었다. 전쟁의 결과 오스만 제국은 폭삭 망하고,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 통치 아래 놓였다. 1917년에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영국은 1948년까지 주둔하는데, 이 때 시온주의에 넘어간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다. 1917년 11월 2일, 벨푸어 경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고국을 세우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벨푸어 선언으로 이스라엘 건국의 토대가 놓인 것이다. 이 시기 팔레스타인에는 무슬림 65만 명, 기독교도 8만 명, 유대인 6만 명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을 유대인이 차지하고 있다.

 

물론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지도부와 시온주의 지도부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거의 씨족중심의 생활을 하던 팔레스타인은 명사 가문들이 지도부를 형성했지만, 파벌간의 분열과 대립으로 무기력했다. 시온주의자들은 법률·교육·정치 구조를 확립하고 실질적인 국가기구를 운영했다. 또한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땅을 사들이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아랍인 부재지주들은 많은 돈을 받고 땅을 매각했으며, 그 결과 팔레스타인인 소작인들은 땅을 잃고 쫓겨났다. 농촌은 더욱 빈곤해졌다. 반란이 일어났고, 영국은 벨푸어 선언을 철회한다고 약속했지만, 영국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영국은 2차 세계 대전의 끝 무렵 여러 식민지의 독립운동과 미국의 경제적 압박 등에 시달리다, 1947년 2월 팔레스타인 문제를 UN에 위임했다. 이 무렵 아랍연맹은 팔레스타인에 아랍 독립 국가 수립을 약속했고, 유대인 지도부는 미국에 팔레스타인 전체를 유대 국가로 내놓기를 요구했다. 최후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1947년 8월 UN은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갈랐다. UN이 내놓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1400년 가까이 이 땅에 살아온 아랍인들로서는 결단코 수용할 수 없는 폭거로, 분노가 폭발했다. 위키 백과를 빌어 분할안의 내용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다.

 

「 당시 인구비에서 아랍 인의 3분의 1, 전체 면적의 7퍼센트만을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전역의 56퍼센트를 분할한다는 게 이 분할안의 골자였다. 특히 지역 생계 기반인 올리브 농장과 곡창 지대의 80퍼센트, 아랍 인 공장의 40퍼센트가 유대인에게 배정되었다. 이로써 경작 가능한 대부분의 비옥한 땅이 유대인 차지가 된 것이다[1]. 팔레스타인 내(內) 아랍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중동의 반미주의도 이때부터 싹트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이 분할안 채택이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분할안은 미국과 소련 주도로 강행 통과되었으며, 영국은 기권하였다. <위키백과> 」

 

    

 

 

  

 

UN 결의안이 채택된 뒤 12일 만에 유대 땅으로 예정된 곳에서 팔레스타인인의 추방이 시작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원주민 상당수가 나라를 떠났고, 팔레스타인의 엘리트들은 외국으로 탈출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었다. 다음날 미국은 곧바로 이스라엘을 승인하는 내용을 발표했고, 이틀 뒤 소련은 이스라엘을 법적으로 승인했다. 영국은 이스라엘 국가 선포 한 시간 전에 마지막 고등판무관이 팔레스타인을 떠났다. 이제 팔레스타인 땅에는 서구 열강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과 아랍국을 배후에 둔 팔레스타인인 사이에 어떤 완충제도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1948년 5월에서 1949년 1월까지 계속되었다.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군대들이 아랍군단을 이루었지만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과 동시에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인종청소가 시작되었다. 유대 국가로 지정된 곳 중의 팔레스타인 마을 370개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유대인들은 마을을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 또는 추방했으며 팔레스타인인의 재산을 몰수했다. 영국의 위임통치 시절에도 땅을 잃고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있었지만, 이제 바야흐로 대규모의 난민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난민들은 대부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로 쫓겨났고,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의 인접국가로도 갔다. 곳곳에 거대한 난민촌이 형성되었다. 난민들은 미국 복지 단체와 국제 구호 기구에 의지하여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난민공동체는 뜻하지 않게도 “과거의 어떤 이데올로기나 정치도 도달하지 못한 수준으로 정치화되었다.” 사실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대대로 살아왔던 땅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 거지 신세가 된 사람들이 그들을 그렇게 내몬 ‘정치’ 에 대해 무관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가끔 들어본 무슬림 형제단이 조직된 곳도 가자 지구에서다. 무슬림 형제단은 훗날 그 유명한 하마스, 지하드 같은 조직을 낳는다. 1950년대 말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은 팔레스타인 단독 국가 창설과 난민 귀환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싸워나갔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으로서는 두 눈뜨고 빼앗긴 땅인데, 이스라엘을 인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리 ‘눈앞의 현실’ 이 그렇다 해도.

 

1967년 팔레스타인은 더 큰 비극으로 빠져든다. 1967년 6월에 발생해 6일 만에 끝난 소위 ‘6일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지역 모두가 이스라엘에 점령당했다.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시나이 반도, 골란 고원이 모두 이스라엘의 수중에 떨어졌다. 한마디로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와 시나이 반도까지 이스라엘이 장악한 것이다. 이 지역을 이스라엘은 점령지로 지배했다. 요르단강 서안 59만 명, 가자지구 38만 명이 이스엘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동예루살렘은 새로운 유대인 주거지역이 되었다. 시나이 반도에서는 1977년이 되어서야 이스라엘 군대가 모두 철수하였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팔레스타인 문제들의 대부분은 이 6일 전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근본 원인은 1947년의 분할안 이지만 말이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는 보호관리 지역으로 선포되었다. 그것은 이 지역 팔레스타인인의 인권과 시민권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대한 제네바 협약을 무시하고, 가옥파괴, 추방, 가택수색, 통행금지, 검문, 재판 없는 구금을 실행하였으며, 이때부터 점령지에 대한 메시아 담론을 확산시켰다. 점령지역을 성스러운 땅으로 규정하고, 종교적인 근거에 따라 향후 이 지역에서의 철수를 금지했다. 유대 율법으로 팔레스타인 전역에 대한 이스라엘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다. UN은 아랍국가들과의 평화 유지를 대가로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의 철수를 결의했지만,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철수를 거부하였다.

 

    

 

 

  

 

이스라엘이 새로 점령한 지역에서 도망치거나 강제로 쫓겨난 사람들에 의해 난민 공동체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등록된 난민만 1972년에 150만 명, 1982년에 200만 명이었다. 난민들은 이스라엘과 인접 국가들의 최하층 프롤레타리아가 되거나 UN의 기금으로 생존했다. 난민들은 팔레스타인 사회의 땅 없는 프롤레타리아가 되었다. 난민들은 매일 출퇴근을 하면서 이스라엘 검문소에서 아침마다 학대와 괴롭힘을 당했고, 노예시장이라 불리는 곳에서 하루 일당의 노동자로 선택되기 위해 기다려야 했다. 사실 이스라엘 경제는 점령지에 의해 유지되었다.

 

「1987년에 이르면 이스라엘 경제는 이미 레이건이나 대처식 자유 시장 자본주의 체제로 바뀐 상태였다. 이런 경제는 점령 지역 출신의 값싸고 유순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이는 지방자치 복지, 경제 등의 권한을 협조적인 지방의 시장들과 의회 수장들에게 위임하는 일종의 신식민주의적 관계를 통해 촉진되었다. 이런 구조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점령 지역이 제공해야만 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착취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경제는 여러 면에서 점령 지역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p360」

 

이런 상황에서 민중봉기와 테러리즘은 이상할 것이 없다. 1987년 12월 1차 인티파다가 일어났다. 봉기로 번역되는 인티파다는 ‘뒤흔들기’ 라는 뜻을 가졌다. 1947년 UN 분할 40년, 1967년 이스라엘 점령 20년 만에 대규모의 민중봉기가 발생한 것이다. 가자 난민촌에서 시작된 인티파다는 농촌마을로 불붙었고, 여성과 어린아이와 청소년이 가세했다. 난민촌과 유대지역 안의 팔레스타인인들이 협력했다. 그 결과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었다.

 

오슬로 협정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처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다. 이스라엘은 PLO를 협상의 상대로 인정하고, PLO는 팔레스타인 분할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 ‘눈앞의 현실’은 턱없이 달랐지만 그때까지도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을 몰아내고 아랍민족의 단일 국가를 세운다는 이상을 품고 있었다. 1993년 9월 유대국가의 생존권 승인과 그 대가로 요르단 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에 5년간의 잠정자치를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잠정해결'을 위한 오슬로 합의(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잠정설치에 관한 원칙선언)가 선언되었다. 오슬로 협정에 따라 1994년 5월부터 5년간에 걸친 잠정자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협정은 수시로 위반되었다.

 

「국경 폐쇄가 되풀이되고 가자 지구를 벗어나는 이동에 자의적인 제한이 가해지면서 오슬로 과정이 가자 지구를 팔레스타인 국기만 걸렸을 뿐 이스라엘 병사들이 지키는 거대한 감옥으로 바꿔 놓았다는 인식이 생겨나는 데는 1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슬람 저항 단체인 하마스와 이슬람지하드가 협정에 반대하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폭탄 공격을 가하자 이스라엘은 국경 폐쇄를 재개했다. p379」

 

「1996년 경 정치 지도자들이오슬로 과정에 관해 만들어낸 이미지의 자리에 현실이 들어섰다. 그 뒤에는 이제 오슬로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으로 찢긴 땅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는지 여부가 아니라 근시안적인 정치인들이 팔아먹은 환상을 위해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가 문제가 되었다. p380」

 

2000년 10월 2차 인티파다가 발발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해 미국은 항상 이스라엘의 관점을 받아들였다. 이스라엘의 관점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분쟁은 1967년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고, 따라서 평화란 이 두 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의 시작은 시온주의와 1947년의 UN 분할안이었다. 미국과 오슬로 과정은 팔레스타인에게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대한 제한된 주권일 뿐임을 설득했다. 그것은 UN이 인정한 권리인 1948년 이스라엘에 의해 추방당한 난민들의 귀환권을 포기하라는 주문이었다. 2000년 여름 클린턴은 팔레스타인 지도부에 이를 승인할 것을 요구했고, 팔레스타인은 거부했다.

 

이스라엘은 국경폐쇄, 검문소에서의 학대, 가옥 파괴, 군사·정치 활동가 암살, 대규모 체포, 요르단 강 서안 지역을 이스라엘 영토와 분리하는 장벽 건설 개시 등을 계속해 나갔다. 분리 장벽은 1990년대 중반에 이미 가자 지구에 먼저 건설되었다. 가자 지구는 전기 담장과 감시탑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포로수용소가 되었다. 최고 8m 높이의 요르단강 서안의 장벽은 지금도 건설 중이다. 올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분리 장벽 앞에서 평화의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국가는 여전히 두 개의 거대한 포로수용소이다.

   

 

 

 

 

2차 인티파다 중에 자살 테러가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자살 테러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종교와는 무관하다. 이슬람법은 자살을 비난하며, 팔레스타인의 이슬람주의자들이 속한 수니파 이슬람은 지하드보다는 관용과 평화를 장려한다. 종교는 법으로든 경전에 근거해서든 자살 행위를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자살 폭탄 테러는 정치적 이슬람 그룹이 투쟁에서의 독창성과 헌신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선택한 전술의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2차 인티파다 무렵 자살 폭탄 공격이 무력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방식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전투기와 탱크에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살 폭탄으로 대응했다.

 

「실업률이 50퍼센트에 육박하고, 요르단 강 서안 도시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봉쇄가 계속되고, 전기 장벽이 가자 지구를 에워싸고, 정치적 해결책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는 가운데, 이제 설교자나 ‘진리의 전달자’는 필요가 없고 폭발물과 수류탄의 끊임없는 공급만이 필요했다. p436」

 

희망이 전혀 없는 ‘포로수용소’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살 테러를 선택했다고 해서, 우리가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 이 책은 2004년에 씌어졌고, 당시에도 별다른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딱 10년이 지난 지금도 하마스와 팔레스타인은 서로 로켓을 주고받고 있다. 물론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은 팔레스타인 쪽이다. 지난 달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토지를 강제 수용하고 초대형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30년 만에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이 될 것이란다. 미국마저도 철회를 촉구했지만,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갈수록 위태롭다.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읽으며 든 생각은 팔레스타인 문제는 해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해결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속내는 팔레스타인 전체를 이스라엘 영토로 삼는 것일 테니 어떤 중재도 내심 귀찮게 여길 것이다. 미국은 중동의 아랍 국가들을 견제하기 위해 강력한 이스라엘이 필요하다. 아랍 국가들은 각기 자국의 이해타산에 따라 친미적 혹은 반미적 성격을 띤다. 그들에게 팔레스타인 문제는 자국의 이해를 실현할 기회가 될 때만 의미가 있다. 초기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명사 가문들로서 팔레스타인 전체 보다는 가문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 하마스와 지하드 등의 무장 단체는 어쩌면 팔레스타인 민중의 적대를 먹고 산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의 적대 위에 정권을 유지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극우주의자도 팔레스타인의 근본주의자도 서로의 적대에 뿌리박고 있다. 적대가 사라지면 존재도 사라질 것이다. 절박한 것은 오직 고통 속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민중뿐이다. 그 누구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인권에 호소하는 것은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을지라도, 결코 실질적인 해법은 되지 않을 것이다. 국제 관계는 희랍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대의 그것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눈앞의 현실 즉 힘의 관계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운 좋게 국제 역학관계가 뒤집어 지지 않는 한, 남아 있는 방법은 오직 힘을 기르는 방법뿐일 것 같다. 두 차례에 걸친 인티파다는 민중봉기의 힘을 보여 주었다. 비록 또다시 꺾인다 해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저항해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팔레스타인’은 도대체 무엇에 대한 명칭일까?

 

이스라엘이 쏜 백리탄에 뼈가 하얗게 탄 아이들의 사진이 SNS에서 공분을 일으킬 때, 독서회 회원들이 9월에 읽을 책으로 선택한 책이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이다. 만화책인데도 결코 읽기가 쉽지 않다. 내용이 어려워서라기보다 그림체가 무섭고(어릴 때 일본 순정만화에 길들여진 터라, 강풀 등의 웹툰체에도 아직 거리감이 남았다), 여백을 가득 메운 깨알 같은 글씨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팔레스타인에 대해 내가 가진 지식이 너무 없다는 것이 더 큰 이유다. 조 사코는 일제강점기나 미군정기의 4.3사건을 연상하게 하는 박해와 고문, 강제 소개령 등을 세밀하게 그려내며,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워낙 기초지식이 없는 터라, 이 모든 것들이 왜 시작되었는지, 한줌도 안 되는 이스라엘을 빙 둘러싸고 있는 아랍 국가들은 왜 그렇게 무력한지, 비인도적이고 반인륜적인 이스라엘을 왜 국제사회는 묵인 혹은 비호하는지 궁금증만 커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팔레스타인’은 무엇을 가리키는 이름인지, 무심코 불러왔지만 정작 그 이름이 땅이름인지 국가이름인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고른 책이 일란 파페의 『팔레스타인 현대사』이다. 발제 때까지 팔레스타인의 비극의 원인을 모두 밝혀내리라, 야심차게 도서관 희망도서 목록에 올려놓았는데, 막상 책을 받고 보니 500쪽을 살짝 넘는 무서운 분량이다. 우리나라 현대사도 이렇게 자세히 읽어본 적이 없는데, 이상한 양심의 스멀거림과 두께의 압박으로 한풀 꺾인 채 시작했는데, 의외로 재미가 있다. 그런데 이 책도 워낙 현대사이기 때문에, 읽다보니 또 궁금한 것들이 생겼다. 먼저 ‘팔레스타인’은 도대체 뭐냐? 정확한 위치는 어디냐? 원래는 누구의 지배아래 있었느냐? 등등의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래서 검색질과 세계사책에서 몇 가지 사전 지식을 찾아보았다. 이 분량이 만만치 않고, 지도들이 많아, 일단 1차 자료정리를 해두려고 한다.

 

 

 

‘팔레스타인’은 현재 국가명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국가로 인정받은 것은 2년이 채 되지 않은, 2012년 11월 29일(현지날짜)의 사건이다. UN이 미국과 영국 등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non-member observer state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아직도 미국과 서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출처는 파악하지 모했는데, 지도의 회색국가들이 인정을 거부하는 나라들이라고 한다. 잘 보면 우리나라도 회색이다. UN 결의안 통과 때는 기권했다고 한다.

 

 

   

 

그럼 이전의 ‘팔레스타인’은 무엇이냐? 주변의 몇 개 지역이 통합된 명칭인 것 같은데, 여하튼 우리가 지금 팔레스타인 ‘땅’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1차 세계 대전 무렵까지만 해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토였다.

 

오스만 투르크는 1453년 동로마제국을 끝장내고 이스탄불을 차지한 거대한 제국이었다. 색칠되어있는 지역은 모두 오스만 투르크의 영향아래 있는 땅이었다. 유럽의 발칸반도와 서남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북부까지 지중해 연안의 세 대륙을 차지한 거대 패권 국가였다.

  

 

 

 

 

그런데 19세기 초부터 슬슬 유럽 제국주의의 손아래 들어가기 시작해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손잡았다가 패망했다. 영토의 반 이상을 상실하고, 지금 남은 것이 터키 공화국이다.

  

 

 

 

 

투르크와 터키? 맞다. 터키는 영어식 명칭이고, 터키어로는 '튀르키예'(Türkiye)다. 투르크(Türk)는 강하다는 뜻인데, 우리역사에서는 돌궐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돌궐이 투르크고, 투르크가 터키의 전신이다. 오스만 투르크는 투르크족의 오스만 가문이 세운 제국이고, 그 이전에 셀주크 가문의 셀주크 투르크가 지중해 패권을 장악했다. 그 악명 높은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을 회복하겠다고 쳐들어간 나라가 바로 셀주크 투르크다. 10세기 무렵에 벌써 팔레스타인 땅은 투르크족의 지배아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잠깐 칭키스칸에 의해 평정됐다가, 오스만 투르크가 다시 장악했다. 그런데 왜 이 땅의 사람들은 대부분 무슬림인가? 7세기에 모하메드가 이슬람제국을 세우고 아라비아반도를 넘어 영토를 확장하면서 이 지역을 차지했다. 이후로 지배한 투르크족들도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이 땅은 천오백년 가까이 무슬림의 영토였다. 아래 지도는 셀주크 투르크 전성기의 이슬람세계 영역이다. 그런데 여기를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이라고 우기며, 신화인지 역사인지 모를 책 하나를 달랑 내밀며 나라를 세운 것이다.

 

 

 

 

크림전쟁 직전, 크림전쟁은 1853~1856에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가 벌인 전쟁이다, 팔레스타인 땅에는 5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 기독교도 6만 명, 유대인 2만 명, 오스만 제국의 병사와 관리가 5만 명, 유럽인이 1만 명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아랍어를 쓰는 무슬림이었다. 총 50만 명 중 유대인 2만 명으로 4%만이 토착 유대인이었다.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인의 대다수는 아랍인으로 그때도 오스만 투르크의 식민지였다. 그러나 이 때만해도 여러 종교의 여러 민족들이 별 갈등 없이 그럭저럭 살고 있었고, 지역 자치가 인정되고 있었다. 

 

19세기 초부터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에 의해 오스만 투르크는 서서히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갔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흔히 그랬듯이 서구 식민주의자들은 근대화의 명목으로 선교사, 의사, 교육자들을 선봉대로 파견하여 식민화 작업을 다져 나갔다. 팔레스타인 땅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영국의 위임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의 진짜 비극은 다른 곳에 있었다.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민족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시온주의자들이 영국을 대상으로 막대한 로비를 시작했던 것이다. 세계금융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그림자 정부로 끊임없이 음모론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대인 금융가 로스차일드 가문도 여기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나선다. 여하튼 자세한 내용은 『팔레스타인 현대사』리뷰에서 정리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1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영국의 위임통치 아래 들어간 팔레스타인 땅에 시온주의자들이 유대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정착 작업을 시작했다는 사실만 적어둔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땅은 급격히 유대인의 땅으로 변해갔다.

 

 

 

 

2011년 현재 국가로서의 팔레스타인 영토는 노란색으로 표기된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지구 및 동예루살렘 3곳뿐이다.

  

 

 

 

 

그런데 뉴스에 자주 나오는 서안지구 즉 웨스트뱅크는 도대체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bank는 강둑이란 뚯이니, 요르단강의 서쪽 땅을 가리키기 위해 붙여졌다. ‘요르단강 건널 때’의 그 요르단강이다.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팔레스타인 영토인데 최근 이스라엘이 엄청난 발표를 해서 전 세계의, 심지어는 미국의 비난을 사고 있다. 한겨레 신문 9월 1일자 기사를 긁어왔다.

  

 

 

 

「이스라엘이 31일 서안지구 베들레헴 남쪽 땅 400㏊(4㎢)를 강제 수용할 계획을 발표했다고 영국 <비비시>(BBC) 방송이 보도했다. 정착촌 건설 감시 단체인 ‘피스나우’는 이스라엘이 강제 수용할 땅의 규모가 지난 30년 내 최대라고 평가했다.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수용되는 땅에는 5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이 있다”며 “이번 조처는 새로운 정착촌 건설에 길을 터주는 것”이라고 전했다.」

 

도대체 왜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을 끝없이 당해야 하는 걸까? 아마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단 한명의 무슬림마저 절멸시킬 때까지 이 비인간적인 일을 계속 할지도 모른다. 이 엄청난 일이 단지 종교적 신념에 의한 것만도 아닐 것이고, 유대 민족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닐 것이다. 일란 파페의 500쪽이 넘는 『팔레스타인 현대사』가 이 비극의 자세한 전모를 밝혀줄 것이다. 여기까지의 개략적인 상식이 본격적인 책읽기에 속도를 붙여주기를 기대한다. 인샬라. 아니... 인간의 의지가 신을 움직이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 1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케이블 TV를 달았을 때, 플레이보이 같은 채널이 연결되어 있었다.  무심코 돌리다 야한 장면에 맞닥뜨리면, 나도 모르게  리모콘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화면에 붙들리곤 했다. 그런데 매번 딱 2~3분 이었다. 스토리는 없고 행위만 반복되는 장면은 감각적이지도 않고 차라리 비현실적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메스꺼움, 인간의 살덩어리에 대한 오심惡心.  계속 보아야만 한다면 고문이 될 것 같은 그런 벌건 화면들. 그런데 고맙게도 그런 채널들은 곧 별도의 요금을 받는 유료채널이 되었고, 무심코 볼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조금 아쉬웠나? ^^;;

 

예롄커라는 중국작가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가 딱 그랬다. '중국 당대 최고의 소설가' 라는데, 설마 뭔가 있겠지라는 기대는 그냥 기대였다. 포르노도 아니고 문학도 아닌 이런 책을 왜 번역했을까 싶어 역자후기를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중국 소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현란한 수사와 시적인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몹시 긴장하면서 퇴고를 거듭해야 했다." 현란은 고사하고 수사자체가 없고, 시적인 이미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구호 외에는 시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혹시 중국어의 번역 때문이었을까? 현대 중국어는 하나도 모르지만, 한문을 배웠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한문 번역은 너무 자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말이나 영어, 일어처럼 문법구조가 꽉 짜여져 있지도 않고, 더우기 조사가 없어서 더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번역의 과정에서 '수사'와 '시'가  몽땅 날아간 걸까? 기억나는 표현이라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밖에 없는데 말이다. 설마 실오라기가 현란한 수사는 아니겠지?

 

이 책은 중국에서 출판되자마자 금서가 되었다. '마오쩌뚱의 사상과 위상을 모욕했다는 이유' 다. 어쩌면 중국 인민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70년대 박정희를 대놓고 깐 소설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랬다면 우리국민들에게도 그런 책은 화제의 문제작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마오쩌뚱의 사상과 위상을 모욕하는 방식이다. 밤낮없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두 주인공은 모두 마오주석의 책들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는 투철한 친체제주의자들이다. 그럼에도 서로의 애정이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오주석의 얼굴이나 어록이 들어간 갖가지 물건들을 경쟁적으로 파손한다. 그리고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혁명 강령을 성적 자극의 페티시로 이용한다. 강령이 적힌 팻말은 침실로 올라오라는 신호가 된다.  마오쩌뚱의 사상과 위상이 모욕되는 방식은 딱 이것뿐이다.  마오쩌뚱의 사상과 위상이 그 내용에 있어서 왜 모욕되어야 하는지, 인민들이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위에 관해서는 진짜 실오라기 하나의 언급도 없다. 물론 중국인민들에게는 전혀 불필요한 사족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오쩌뚱이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중국인민을 해방시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들의 마오쩌뚱에 대한 애증은 소설 속에 전혀 형상화되지 않고 있다. 실제 두 주인공이 마오쩌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마오쩌뚱의 중국혁명이 이들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변환시켰는지 같은 배경도 전혀 없다. 그냥 모든 것이 마오쩌뚱마저도 포르노같은 애정 행각의 소도구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상징적으로 보아, 내용없는 형식상의 비판이 최고의 비판이 될 수도 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성스러운 강령을 성적 환타지의 패티시로 사용하는 것이 최고의 시적 은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 보아주기에는 너무 조악하다.

 

이 작품같지 않은 작품,『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역설적이게도 기초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정의는 평론가 김현의 것이다. 문학이란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는다.) 지젝의 책 중 『The Ticklish Subject』, 『까다로운 주체』가 있다. 사실 ticklish에는 간지럼을 타는, 불안정한이란 뜻도 있다. 동사는 tickle로 간지러움을 태우다란 뜻의 타동사이다. 간지러움을 태우는 주어는 주체가 아니라 object, 대상이다.  강아지풀 같은 대상이 주체의 콧구멍을 살살 간질러서 자극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대상이 주체를 슬슬 긁어 자극을 주면, 주체는 뭔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김현의 문학은 작품이라는 대상이 독자라는 주체를 건질거리게 긁고 자극하여 주체를 불편한 상태에 빠뜨리는 것을 말한다. 독자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좋은 작품이 아니다. 책을 덮는 순간 내 삶을 돌아보고, 내 주위를 살펴보고, 이 세계를 비딱하게 보게 될 때, 그 책은 좋은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다. 고전에 희극보다 비극이 압도적인 이유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도 불편한 책이다. 그런데 불편함의 종류가 다르다. 이 대상은 내 사유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내 허벅지를 살짝 건드리는 것 같다가 곧바로 나의 구토중추를 자극한다. 책 제목을 보았을 때 내가 생각했던 것은 이런 것이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는 아주 멋진 말이다. 모든 인민이 혹은 모든 당원들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강령대로 산다면 중국은 이 땅의 유토피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중국은 천박한 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일당독재의 국가이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국가에서 눈부신 꽃을 피운 이 아니러니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자본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담보하는 것도 아니고, 자유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다.  여하튼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마오주석의 성스러운 강령이 혁명을 통해 어떻게 변질되어 왔는지,  실체는 변질되고 껍데기만 남아 있는 저 혁명강령이 중국 인민의 삶을 어떻게 왜곡해 왔는지를, 생생하게 형상화된 인물들 속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기대는 기대로 끝났다.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