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은 수없이 봤지만 한번도 뽑아든 적이 없는 책이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사실 저자가 셀린저라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나는 호손이나 뭐 그런 정도의 유명작가인 줄 알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 셀린저라는 이름은 엄청 낯설었다;; 심지어는 몇 주전에 <빨간책방>을 들었는데도, 처음 보는 이름 같았다. 대개 설겆이나 청소를 하면서 듣기 때문에 흘려버리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분명히 들었을텐데도 책 표지의 셀린저라는 이름은 아주 이상해 보였다.

 

내용도 그랬다. 오랫동안 제목이 준 인상은 <붉은 수수밭>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목화농장 같은 것이었다. 광활한 호밀밭을 지키는 외로운 파수꾼. 뉴욕 중산층 사춘기 소년의 일탈에 관한 이야기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일탈이라니, 사실 요즘 아이들을 생각해 보면 이걸 일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도 1950년대의 미국에서는 굉장한 사건이었다고 한다. 제임스 딘의 반항적 이미지에 맞먹는 홀든 콜필드의 강렬함. <빨간책방>의 두 남자가 뭐라고 신나게 떠든 얘기 속에는 존 레논 암살범이 이 책을 갖고 있었다는 둥의 비화들이 있다. 비트 제너레이션의 선구자라나.  

  

1950년대 중반 미국에서 현대의 산업사회를 부정하고 기존의 질서와 도덕을 거부하며 문학의 아카데미즘을 반대한, 방랑자적인 문학가 및 예술가 세대를 이르는 말

 

문학 뿐만 아니라 사회 분야에서도 "1950년대 미국의 풍요로운 물질 환경 속에서 보수적인 기성 질서에 반발해 저항적인 문화와 기행을 추구했던 일단의 젊은 세대 " 를 가르킨다.

 

그러니 책 내용은 '다음 어학사전'의 정의 속에 그대로 있는 셈이다. 풍요로운 물질환경, 홀든 콜필드의 아버지는 뉴욕에 사는 변호사다. 보수적인 기성 질서에 대한 반발. 가령 이런 것이다.  콜필드와 늙은 스펜서 선생이 나누는 대화다.

 

「인생은 시합이지. 맞아, 인생이란 규칙에 따라야 하는 운동 경기와 같단다.」

「예, 선생님.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시합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합은 무슨. 만약 잘난 놈들 측에 끼어 있게 된다면 그때는 시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주 전에 교장 선생님과 부모님이 상담을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아주 훌륭하신 분들 같더구나」 

「예. 좋으신 분들입니다.」

 훌륭하다니. 난 정말 그런 말이 듣기 싫었다. 그건 위선적인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예의바른 자세와 공손한 대답 뒤에서 콜필드는 분노와 구역을 쏟아낸다. 그런데 나는 콜필드 보다 스펜서 선생이 마음 아프다. 내가 쏟아낸 수많은 말들도 누군가에게 조롱 속에 짓밟히지 않았을까 슬며시 겁도 난다. 이제 풋내기 콜필드에게 감정이입하기에는 나도 늙었다.

 

콜필드의 기행은 줄담배, 친구에게 흠씻 두들겨 맞기, 클럽에서 성인 여성들과 춤추기, 호텔에서 매춘부와의 소동, 떡이 되게 술마시기 따위 들이다. 그런데 콜필드는 그렇게 막 나가는, 앞뒤가리지 않는 반항아처럼 보이지 않는다. 콜필드에게는 항상 브레이크가 있다. 매춘부를 그냥 돌려보내고, 좋아하는 선생님을 찾아가고, 결국 가출도 하지 못한다. 콜필드의 3일은 일종의 럼스프린가이다.

 

럼스프린가는 '주위를 뛰어 돌아다닌다' 는 뜻의 독일어에서 온 말이다. 미국의 아만파 공동체는 17세가 되면 아이들을 공동체 밖으로 내 보내, '뛰어 돌아다니게' 한다. 공동체 안은 엄격한 규칙을 갖고 있는데, 밖으로 나간 아이들은 어떤 일을 해도 아니 어떤 일을하도록 부추겨진다. 차와 팝음악, 텔레비젼은 기본이고 음주와 마약 난교를 경험한다. 그리고 몇년 후 아이들은 선택할 기회를 갖게 된다. 아만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일반적인 미국 시민이 될 것인가? 결과는 90%의 아이들이 공동체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왜?  여기에는 속임수가 있다. 아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진정한 선택의 기회가 아니다. 아이들은 17세가 될때까지 엄격한 규율 속에서 바깥 세상에 대한 환상을 키워왔다. 그런데  자연스런 삶속에서의 한계나 규제 없이 갑작스레 주어진 음주와 마약과 섹스는 그들의 환상을 박살내며 참을 수없는 불안을 야기한다. 아이들은 평화와 안정을 찾아 아만파 공동체의 규율 속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 17세가 될때까지 일반적인 미국 가정에서 살다가 강제로 아만파 공동체에서 몇 년을 살게 된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몇년 후 아이들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럼스프린가는 일종의 '불맛'을 체험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아무것이나 덥석덥석 집으려는 아이에게 뜨거운 남비뚜껑을 만지게 해서 아이가 스스로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훈육같은 것 말이다. 

 

 콜필드의 3일은 막막하고 외롭고 불안하다. 콜필드는 한번도 해방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주위를 뛰어 돌아다니다, 스스로 울타리 안으로 돌아온다. 이 책이 미국에서 두번째로 많이 팔린 책 (빨간책방에서 들었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그래도 엄청 많이 팔렸고 지금도 많이 팔린단다) 인 이유는 아마도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비슷한 효과 때문이지 않을까?  엘리자베스는 사랑없는 결혼을 거부하지만, 결국 진정한 사랑을 찾아 결혼에 성공한다. 영국 엄마들이 딸들에게 이 책을 첫번째로 권유하는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결혼이다. 사랑은 악세러리고 결혼이 실체이다. 사랑이라는 장식물로 결혼이라는 영악한 실체를 가린 이 성공담이야말로 보기 좋아 맛도 더 좋은 떡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도 파멸하지 않고 안전한 세계로 돌아온다. 저자 셀린저는 막대한 인세로 은둔형 삶을 살았다고 하지만, 적어도 홀든 콜필드는 3일간의 체험을 바탕으로 적당히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갈 것 같다.  한때는 좀 놀아봤다는 그 추억이 그를 삶에 한층 더 단단히 고정시켜 주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콜필드는 파수꾼, catcher가 되고 싶다고 한다. 벼랑 끝으로 떨어지려는 아이들을 붙잡아 주는 파수꾼. 그런데 벼랑 위는 여전히  '기존의 질서와 도덕' 의 세계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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