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 1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케이블 TV를 달았을 때, 플레이보이 같은 채널이 연결되어 있었다.  무심코 돌리다 야한 장면에 맞닥뜨리면, 나도 모르게  리모콘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화면에 붙들리곤 했다. 그런데 매번 딱 2~3분 이었다. 스토리는 없고 행위만 반복되는 장면은 감각적이지도 않고 차라리 비현실적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메스꺼움, 인간의 살덩어리에 대한 오심惡心.  계속 보아야만 한다면 고문이 될 것 같은 그런 벌건 화면들. 그런데 고맙게도 그런 채널들은 곧 별도의 요금을 받는 유료채널이 되었고, 무심코 볼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조금 아쉬웠나? ^^;;

 

예롄커라는 중국작가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가 딱 그랬다. '중국 당대 최고의 소설가' 라는데, 설마 뭔가 있겠지라는 기대는 그냥 기대였다. 포르노도 아니고 문학도 아닌 이런 책을 왜 번역했을까 싶어 역자후기를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중국 소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현란한 수사와 시적인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몹시 긴장하면서 퇴고를 거듭해야 했다." 현란은 고사하고 수사자체가 없고, 시적인 이미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구호 외에는 시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혹시 중국어의 번역 때문이었을까? 현대 중국어는 하나도 모르지만, 한문을 배웠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한문 번역은 너무 자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말이나 영어, 일어처럼 문법구조가 꽉 짜여져 있지도 않고, 더우기 조사가 없어서 더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번역의 과정에서 '수사'와 '시'가  몽땅 날아간 걸까? 기억나는 표현이라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밖에 없는데 말이다. 설마 실오라기가 현란한 수사는 아니겠지?

 

이 책은 중국에서 출판되자마자 금서가 되었다. '마오쩌뚱의 사상과 위상을 모욕했다는 이유' 다. 어쩌면 중국 인민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70년대 박정희를 대놓고 깐 소설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랬다면 우리국민들에게도 그런 책은 화제의 문제작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마오쩌뚱의 사상과 위상을 모욕하는 방식이다. 밤낮없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두 주인공은 모두 마오주석의 책들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는 투철한 친체제주의자들이다. 그럼에도 서로의 애정이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오주석의 얼굴이나 어록이 들어간 갖가지 물건들을 경쟁적으로 파손한다. 그리고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혁명 강령을 성적 자극의 페티시로 이용한다. 강령이 적힌 팻말은 침실로 올라오라는 신호가 된다.  마오쩌뚱의 사상과 위상이 모욕되는 방식은 딱 이것뿐이다.  마오쩌뚱의 사상과 위상이 그 내용에 있어서 왜 모욕되어야 하는지, 인민들이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위에 관해서는 진짜 실오라기 하나의 언급도 없다. 물론 중국인민들에게는 전혀 불필요한 사족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오쩌뚱이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중국인민을 해방시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들의 마오쩌뚱에 대한 애증은 소설 속에 전혀 형상화되지 않고 있다. 실제 두 주인공이 마오쩌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마오쩌뚱의 중국혁명이 이들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변환시켰는지 같은 배경도 전혀 없다. 그냥 모든 것이 마오쩌뚱마저도 포르노같은 애정 행각의 소도구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상징적으로 보아, 내용없는 형식상의 비판이 최고의 비판이 될 수도 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성스러운 강령을 성적 환타지의 패티시로 사용하는 것이 최고의 시적 은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 보아주기에는 너무 조악하다.

 

이 작품같지 않은 작품,『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역설적이게도 기초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정의는 평론가 김현의 것이다. 문학이란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는다.) 지젝의 책 중 『The Ticklish Subject』, 『까다로운 주체』가 있다. 사실 ticklish에는 간지럼을 타는, 불안정한이란 뜻도 있다. 동사는 tickle로 간지러움을 태우다란 뜻의 타동사이다. 간지러움을 태우는 주어는 주체가 아니라 object, 대상이다.  강아지풀 같은 대상이 주체의 콧구멍을 살살 간질러서 자극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대상이 주체를 슬슬 긁어 자극을 주면, 주체는 뭔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김현의 문학은 작품이라는 대상이 독자라는 주체를 건질거리게 긁고 자극하여 주체를 불편한 상태에 빠뜨리는 것을 말한다. 독자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좋은 작품이 아니다. 책을 덮는 순간 내 삶을 돌아보고, 내 주위를 살펴보고, 이 세계를 비딱하게 보게 될 때, 그 책은 좋은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다. 고전에 희극보다 비극이 압도적인 이유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도 불편한 책이다. 그런데 불편함의 종류가 다르다. 이 대상은 내 사유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내 허벅지를 살짝 건드리는 것 같다가 곧바로 나의 구토중추를 자극한다. 책 제목을 보았을 때 내가 생각했던 것은 이런 것이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는 아주 멋진 말이다. 모든 인민이 혹은 모든 당원들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강령대로 산다면 중국은 이 땅의 유토피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중국은 천박한 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일당독재의 국가이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국가에서 눈부신 꽃을 피운 이 아니러니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자본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담보하는 것도 아니고, 자유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다.  여하튼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마오주석의 성스러운 강령이 혁명을 통해 어떻게 변질되어 왔는지,  실체는 변질되고 껍데기만 남아 있는 저 혁명강령이 중국 인민의 삶을 어떻게 왜곡해 왔는지를, 생생하게 형상화된 인물들 속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기대는 기대로 끝났다.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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