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6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언제 또 다시 읽을까 싶어, 독서회 책으로『댈러웨이 부인』이 정해진 김에『등대로』까지 읽었다. 울프의 글에 조금 익숙해 진 탓인지, 읽기가 한결 수월했다. 

 

이렇게 섬세한 의식의 흐름을 펼쳐내려면, 역시 작가 자신의 경험과 환경에 바탕해야 할 것이다.  귓결로 들은『자기만의 방』에 대한 선입견 탓에 울프가 대단한 페미니스트나 박해받은 여성이 아닌가 싶었지만, 울프는 요즘 식으로 하자면 상위 1%의 문화적 환경에서 자라났다.

 

작가연보의 첫머리에 이렇게 적혀있다.

 

1882년 

1월 25일 런던 출생. 본명은 애들린 버지니아 스티븐.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영국 인명사전』을 편찬하고, 명망 있는 《콘힐 매거진》을 편집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작가였으며, 어머니 줄리아 스티븐은 귀족 혈통의 뛰어난 미인이었음.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과 친분이 두텁고 교양이 높은 집안에서 성장함

 

『댈러웨이 부인』과 『등대로』모두 딱 이런 상류층의 50대 귀부인의 의식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댈러웨이 부인』이 1925년, 『등대로』가 1927년 출간 되었으니, 비록 미인이었던 엄마를 모델 삼았다 해도, 버지니아 울프 그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것 같다.

 

댈러웨이 부인과 램지 부인 모두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존중받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이지만, 그녀들 자신의 내면은 버지니아 울프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기력을 다해 무의미를 의미로, 균열을 평화로 바꾸어 나가지만, 불쑥불쑥 찾아오는 하나의 질문 앞에 그녀들은 망연하다.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은 아마도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일 것이다. 그녀는 과연 답을 찾았던 걸까? 『등대로』에서 램지부인을 회상하던 릴리 (버지니아 울프 자신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일상적 경험의 차원에서 이건 의자고 저건 식탁일 뿐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이건 기적이고 저건 희열이라고 느끼는 거야. p328 」

 

그래서 댈러웨이 부인은 파티를 열고, 램지 부인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걸까?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가져다 주는 기적과 희열이 삶의 균열을 메워주고 심연과도 같은 저 무시무시한 질문,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도록? 그러나... 그녀는 일상에서 안식을 얻지 못했다...

 

 

추기:

이 예민한 여성도 무심코 어떤 독자들에게는 상처를 준다.

 

「실로 그녀는 모든 남성을 보호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에, 어쩌면 그들의 기사도 정신과 용기 때문에, 그들이 조약을 협상하고 인도를 통치하고 재정을 관리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자신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그리했다. p13 」

 

유럽의 독자들은 이런 문장에서 아무런 껄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걸까? 『등대로』의 1부 배경은 1909년이다. 영국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를 자랑질하며 세계 각지로 총독을 보내고 있던 때, 인도에서도 팔레스타인에서도 독립을 외치며 열사들이 죽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남성들의 존경을 받는 램지부인은 '인도를 통치하고' 라는 말을 아주 우아하고 무심하게 말한다. 버지니아 울프, 그 섬약한 여인도 실로 그렇다. 그 짧은 말 속의 피와 눈물과 고통을 그녀는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백년쯤 뒤의 어느 3세계 독자에게 그것이 목구멍의 가시로 남았다는 것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ow to read ' 시리즈 의 기대에 못미친다. 내가 읽은 이 시리즈의 책 중 가장 재미없다.  다윈에 대해 특별히 더 많이 알게 된 것도, 더 깊이 알게 된 것도 없는 것 같다.  모르던 사실들이 분명 씌어 있는데도 그런 느낌이 든다. 다윈의 진화론이 너무 유명해서일까?  새롭게 알게된 사실은 <종의 기원> 에서 다윈은 'evolve' 란 단어를 딱 한 번 밖에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도 <종의 기원> 이후 다윈과 진화는 거의 동의어가 되었다는 것.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HOW TO READ 다윈
마크 리들리 지음, 김관선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2014년 11월 15일에 저장
품절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일 년 간 들어온 <어린이 독서 지도사> 수업이 끝나간다. 시험과 모의 수업만 남았다. 시험은 예상문제가 있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고, 모의수업이 문제다. 실제 수업은 보통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인데, 모의수업에서는 10분 안에 축약해야 한다. 3~4주에 걸쳐 24명 수강생 전원을 평가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너무 짧아서 처음 모의수업을 한 4명 모두 줄거리만 요약하다 시간을 흘러 보냈다. 관건은 미리 제출한 수업계획안의 ‘이해 - 분석- 비판 - 독후활동’ 항목 모두를 10분 안에 적절히 배분하는 것이다. 실제수업에는 필요 없는 고민이 모의수업 최대의 고민이 될 판이다.

 

사실 나는 어린이 독서 지도에는 별 관심이 없다. 적어도 청소년, 좋기로는 성인과 노인을 대상으로 혹은 (그들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일을 하고 싶다. 처음에는 여기 지방 국립대 평생교육원의 <독서 지도사> 과정을 들으려 했다. 그런데 수강 인원이 미달되어 폐강되었다. 심지어 그 과정의 작년 수강생들은 봄 한학기만 듣고, 가을 학기는 못 들었다고 한다. 일 년 과정인데 봄에 들었던 몇 명이 빠져나가자, 가을 학기가 폐강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너무 무책임하지만, 강사료가 발목을 잡은 것 같다. 온라인에서 자격증을 따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강의의 질도 의심이 되고, 이론 보다는 경험담에서 배우는 것이 더 많을 텐데, 온라인 강의는 실제로 얻는 것이 별로 없을 것 같아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듣게 된 것이 <어린이 독서 지도사> 과정이다. 아파트 입구에서 2차선 도로 하나만 건너면 바로 시립도서관인데, 수강료도 싸고 가깝기도 하고, 노느니 장독 깬다고, 마실 삼아 나가기 시작했다. 어쨌든 시간은 쏜살이고, 세월은 유수라, 그저 앉아만 있었는데도 어느새 1년이다.

 

요즘은 스펙이 학생들이나 취업준비생들만의 관심거리는 아니다. 하도 오래 사는 세상이라, 사 오십 대의 주부들에게도 열풍이 되었다. 생업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소일거리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칠팔십을 넘어 구십, 백 살까지 긴긴 세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나는 일흔 정도까지만 살았으면 좋겠지만, 장담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존엄사도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할 일이다. 무엇보다, 인간이란 죽음을 향해가는 존재지만, 또 죽음에 절대적으로 저항하는 존재기도 하다. 개똥밭에 구르더라도 이승이 좋다고 하게 될지 또 모르는 일이다.

 

여든을 훌쩍 넘은 엄마가 요즘 영어 알파벳에 열중이다. 복지관의 영어수업을 신청해 놓았다는 것이다. 엄마 친구 분들 중에는 수학을 배우는 할머니도 있고, 한문을 배우는 분도 있다. 엄마가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TV 광고나 간판을 읽기 위해서다. 수학을 배우는 마음은 무엇일까? 치매방지를 위해서일까? 순수한 학문적 관심일까? 노인교육의 역사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엄마를 통해 간간이 얻어 듣기로는, 처음엔 노래, 등산, 춤 등의 취미활동이 주 대상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영어, 일어, 수학, 한문 등 학생들도 싫어하는,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배워야 하는 그런 학문으로 확장되었다. 왜 머리가 빨리빨리 돌아가지 않는 노인들이 이런 어려운 것들을 배우려 하는 것일까? 간판이나 광고 꼬라지를 보면, ABC를 알고 싶다는 욕망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내일 모레 죽음이 닥칠지 모른다면 이런 골치 아픈 것들을 굳이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의 시대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가 아니라 ‘인생은 길고 할 일은 없다’ 가 될 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그저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무언가 의미 있는 시간이, 딱히 돈이 되는 일이 아니라도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간절히 요구될 것이다. 나는 이런 분들과 함께 책을 읽었으면 한다.

 

우리가 배우지 못한 것은 영어, 수학이 아니라 인문학이다. 지금의 칠팔십 대가 아니라 앞으로의 칠팔십 대는 더욱 그렇다. 1950년대 생들만 해도 고등학교까지는 많이 졸업했다. 한글을 모르거나 ABC 자체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청소년기에 정말 배웠어야 할 것들은 우리들도 그리고 아마 지금 젊은 세대들도 거의 배우지 못하고 지나쳐 왔다. 존재가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 세상은 평등한지, 민주주의는 필요한지, 타자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지 등등의 질문에 진지한 사유를 해본 적도 없고 할 줄도 모른다. 왜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지, 우리가 걸어온 역사는 무엇인지, 서구의 근대가 오늘의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등은 그저 연도만 달달 외우는 역사 공부로는 생각조차 해볼 수 없다. 문학은 또 말해 무엇 할까? 훌륭한 고전들은 ‘고등학생이 꼭 읽어야 할~’, ‘하룻밤에 읽는~’ ‘시험에 나오는~’ 따위의 편집으로 누더기가 되었다. 고전의 깊이는 줄거리에 있지 않다. 오로지 입시를 위해 칼질해 버린 긴 묘사들, 역사적 배경들, 지루할 정도로 세세한 풍속 묘사들 속에 고전으로서의 고전이 있다. <젊은베르테르의 슬픔>이든 <차타레이 부인의 사랑>이든 <오만과 편견>이든 <고리오 영감>이든 그 줄거리는 우리가 욕하며 보는 막장 드라마와 거의 다르지 않다.

 

인문학은 청소년기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어쩌면 청소년에게는 너무 벅찬 것이기도 하다. 그 나이에 고전의 깊이를, 철학적 사유를,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읽어내기는 힘들다. 보르헤스가 말한 상호텍스트성을 인정한다면, 텍스트는 삶의 두께와 함께 더욱 두터워진다. 결혼생활의 권태를 겪어본 여자가, 애증으로 부대끼며 사오십년을 함께 보낸 친구가, 자식에게 헌신하고 상실감을 느끼는 아버지가, 기억이 가물대며 치매를 걱정하는 할머니가 읽는 <차타레이 부인의 사랑>,<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고리오 영감>, <엄마를 부탁해> 는 청소년이 읽는 그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텍스트일 것이다. 작가가 뽑아낸 삶의 진실에 자신이 겪어온 경험이 얹힌다면, 밤을 세워 나누어도 시간이 모자랄 이야기가 쏟아질 것이다. 텍스트는 저마다의 경험으로 더욱 깊어지고, 자신만의 경험에 갇혀 있던 노인의 옹고집은 텍스트의 전체적인 시각에 의해 풀어질지도 모른다.

 

노인의 경험이 세상의 지혜가 되기 위해서는 전체적 맥락 속에 개인의 경험을 위치지울 수 있는 시각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때 노인의 경험은 오히려 젊은 세대와의 연대를 단절시키고, 세대 간 불신을 촉발하는 독이 될 것이다. 불행하게도 현재 우리의 모습은 이런 단절을 향해 가고 있다. 젊은 것들은 모르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경험, 전쟁과 빨갱이, 배고픔과 새마을 운동을 젊은 세대에게도 강요하고 있다. 그것이 한 세대의 특정 경험일 뿐이라는 자각, 역사적 맥락 속 어디에 놓여있는지, 그것들이 만들어낸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노인교육의 핵심은 이런 성찰의 기회를 열고, 그 능력을 기르는데 있어야 한다. 2차 방정식을 푸는 것보다 새마을 운동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해 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을 읽으면서 말이다. 물론 인문학을 위해서는 노인의 똥고집을 버려야 한다. 똥고집을 버리기 위해서도 인문학은 노인에게 더욱 필요하다.

 

좋은 책을 선택해서 똥고집 노인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보고 싶다. 그들의 경험이 진정 이 세상의 지혜가 되도록 곰삭히는 방법을 함께 찾고 싶다. 자신의 세대를 제대로 된 맥락 속에 위치지우고,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는 멋진 ‘신세대(오래된 신인류)’가 우리나라에도 출현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가 노인이 되기 전에 노인 복지관을 가고 싶은 이유이다.

 

 

 

내가 선택한 어린이 독서지도사 모의수업 교재, <바보 한스>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려다 엉뚱한 이야기로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올해 읽은 독서회 책을 표로 정리하다, 고전들을 연대순으로 배열해 보았다. 고전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가졌지만, 동시에 시대상황을 가장 잘 그려낸 작품이기도 하다. 하나씩 읽었던 고전들을 주욱 연결해 놓으면, 그 자체가 훌륭한 역사가 될 수 있다. 가령 19세기 몇몇 고전들을 이으면, 그 속에 프랑스 혁명사가 그대로 녹아있다. 그런가 하면 동시대의 작가가 전혀 다른 시대상을 담고 있기도 하다. 오스틴의 소설에는 상류사회의 화렴함이, 디킨스의 소설에는 빈민들의 비참한 모습이 있다. 두 작품이 동시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주로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닌 책도 있고, 직접 읽지 않은 것도 있다. 방법서설 같은 것. 근대사상에는 워낙 중요한 책이라, 이정표로 삽입했다. 서양 근대에 유독 관심이 가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 우리 삶의 바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평등과 자유개념, 국민국가, 개인주의, 합리주의, 실용주의.... 이 모든 것들이 오로지 서구 근대사상에 기반했다고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대체로 그런 것은 사실이다. 우리 삶을 되돌아보기 위해서 서구근대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댈러웨이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인이 참 좋아했던 작가들 중 내가 따라 읽지 못한 두 사람이, 더 있었던가?, 보르헤스와 버지니아 울프였다. 다행히 지난여름 보르헤스의 미로는 여기 독서회 몇몇 회원들과 함께, 비록 헤매었으되 그럭저럭 통과했고, 이번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 버지니아 울프다.

 

버지니아 울프하면 우리 또래들이 다 그런지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물론,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다. 얼마 전 알라딘 로자님의 <버지니아 울프 이야기> 를 읽으며, 그래서 웃었다. 떨어진 낙엽처럼 여기저기 뒹굴던 이 시의 출처가 책받침이었는지, 공책의 표지였는지, 그 기억은 어슴푸레한데, 여린 감성을 툭 건드리던 그 첫 구절은 아직도 외울 수 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내가 그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의 한 자락이나마 얻어 들은 것은 아주 오랜 뒤였다. 주머니에 돌을 집어넣고 강인가 바다인가로 걸어 들어가서 죽었다는 이야기, 그 이유가 다시 덮쳐올 정신병 발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성이라는 정도가 고작이긴 해도.

 

목마가 아니라 물결을 안고 떠난 이 숙녀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 빼든 책은, 어쩌면 당연히도,『자기만의 방』이었다. 그러나 그 유명한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돈” 이란 구절도 찾지 못하고 책을 던졌다. 그냥 안 읽혔다. 그 재미있었다는 드라마 <상속자>가 왠지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이런 비유가 너무 부적절한 걸까. 여자로서의 기본적 소양과 의무라는 채찍을 들이대도, 읽지 못했다. 나의 하소연을 들은 지인이 추천한 것이 그렇다면, 『댈러웨이 부인』이었다.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마도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서술 기법을 발전시킨 모더니즘 소설의 실험적인 작가 P255”가 영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하기야 의식의 흐름이라니, 말만 들어도 엄청 지겨울 것 같지 않은가?

 

 

독서회는 이럴 때 또 고맙다. 예전처럼 그냥 던져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에 쓸 꽃을 사러 웨스트민스터의 거리를 걸으며, 그놈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가는 과정은 여전히 지난했다. 잡생각이 수시로 끼어들고, 댈러웨이 부인을 놓치기 일쑤였다. 봄에 읽었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와 비슷했다. 그래도 일단 분량 면에서 비교가 안 되니, 안심이 되긴 했다. 그런데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가 그랬던 것처럼, 『댈러웨이 부인』도 치미는 갑갑증을 꾹꾹 누르며, 빅토리아 스트리트며 세인트 제임스 파크며 본드 스트리트며,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이방의 거리와 광장들을 따라 걷다보니, 이 여인의 <의식의 흐름>이 내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250여 쪽의 책을 덮을 때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혼란기를 살았던, 그러나 만 서른 해를 채우지 못하고 요절한, 젊은 시인이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며 쓰러진 술병을 두고 울먹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정작 서러운 것은 버지니아 울프 아니 댈레웨이 부인이 아니라 미스 킬먼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말이다.

 

 

장편치고는 그리 길지 않은 『댈러웨이 부인』에는 참 많은 이름들이 나온다. 주요 인물들도 여럿이지만, 파티에 참석하는 군상들까지 합치면 누가 누군지 자꾸 책장을 거꾸로 넘겨봐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주요 축으로 삼은 인물은 댈레웨이 부인과 그녀의 남편인 리처드 댈레웨이, 첫사랑 피터 월시, 처녀시절 영혼의 친구 샐리, 딸 엘리자베스의 역사 선생인 미스 킬먼, 그리고 1차 대전 참전 후유증을 앓고 있는 셉티머스이다. 이 중 댈러웨이 부인과 셉티머스는 하나의 영혼의 두 모습이라 할 수도 있다. 해설에 보면 <더블>이라고 표현하는데, 일반적으로 그렇게 보는 모양이다. 그러니 댈러웨이 부인과 셉티머스가 둘이면서 하나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고, 댈러웨이 부인을 둘러싸고 피터와 샐리 그리고 리처드가 있다. 그리고 약간 동떨어져 보이는 미스 킬먼이 있다.

 

댈러웨이 부인은 말하자면 우아한 강남 진보라 할 수 있다. 몸은 상류층의 안락함에 파묻혀 있지만, 영혼은 셉티머스처럼 예민하여, 삶의 허위와 무의미를 꿰뚫고 있다. 조금 비약하자면 드라마 <밀회>의 오혜원(김희애)과 같다. 댈러웨이 부인은 처음부터 상류층이었고 오혜원은 바닥을 박박 기어 상류사회의 고급 집사가 되었다는 차이가 있지만, 실질적으로 극과 극이라 해야겠지만, 사건의 중심에서 그들이 발 디딘 위치와 욕망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성공의 정점에서 둘 모두 잃어버린 것을 갈망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영혼이 통하던 피터 월시와 헤어지고 휴식과 안정을 주는 리처드와 결혼한다.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지만, 젊은 날의 꿈과 열정은 화려한 파티 속에 흩어진 지 오래다. 오혜원도 그렇다. 노력으로 오를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갔지만, 대신 자신의 재능과 꿈을 버렸다. 그러나 이 두 중년의 여인들은 젊은 시절의 아름다웠던 영혼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는 못했다. 그 환상은, 드라마 <밀회>에서는 대중 드라마답게, 아름다운 모습과 영혼을 간직한 천재 피아니스트 이선재(유아인) 를 통해, 『댈러웨이 부인』에서는 뜻밖에도,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그럼직하게, 옛 연인 피터가 아니라 셉티머스의 자살을 통해 실현된다.

 

그러나 댈러웨이 부인은 매우 현실적이다. 첫사랑 피터 월시가 회고하는 그녀는 누구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아주 명확히 알고” 있다. “그녀의 감정은 모두 표면적인 것일 뿐, 사실은 아주 영리했다.” 클라리사(댈레워에 부인)는 날카로운 논쟁, 열정적 토론, 셰익스피어 대신 “<그녀의 영혼을 질식시키고> 그녀의 세속적인 면을 부추겨 한갓 안주인으로 만들어 버릴 <완벽한 신사들>” 중 한 명인 리처드 댈러웨이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녀는 끊임없이 파티를 열어왔다. 피터 월시는 물론 남편인 리처드까지 속으로 비웃는 파티를 말이다.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여는 이유는 하나다.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파티는 봉헌이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만나게 하는 것, 그것은 조합이고 창조이다. 그녀는 성공을 좋아하고 불편함을 싫어하는 속물이지만, 사람들의 호감을 얻고 실없는 수다를 떨며 삶의 매 순간 순간을 사랑한다.

 

그러나 댈러웨이 부인의 이면에는 삶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인생을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끔찍한 두려움이다. <더 타임스>를 읽는 고지식한 리처드가 없었다면 도저히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섬세하고 복잡한 댈러웨이 부인에게 삶은 두려움이지만 또한 더 없는 사랑의 대상이다. 그녀는 셉티머스에 동질감을 느끼며, 모든 것을 내던진 그 청년의 삶을 기뻐하는 동시에, 속물적이고 무의미한 파티 한 가운데서 행복을 만끽한다.

 

댈러웨이 부인과 공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녀의 세계는 나에게 낯설다. 가난하게 자랐고, 예쁘지도 않고, 사교성도 없고, 상류층의 문화에 전혀 접해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미스 킬먼이 더 가깝고 아프게 느껴진다. 미스 킬먼과 댈러웨이 부인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댈러웨이 부인은 미스 킬먼을 끔찍이 싫어하고, 미스 킬먼의 마음에는 댈러웨이 부인에 대한 증오와 동정, 부러움이 뒤섞여 들끓는다. 미스 킬먼은 불쌍한 여자지만, 내 안의 무엇들과 닮아 있다.

 

댈러웨이 부인은 어디에나 값비싼 물건을 늘어놓고, 그림과 양탄자에 수많은 하인들을 부리며,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미스 킬먼은 생각한다. 그런데 자신은 지독히도 못생기고 지독히도 가난하다. 자기가 경멸하는 댈러웨이 집안 같은 곳에서도 일을 해야 한다.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다. 왜 다른 여자들, 댈러웨이 부인 같은 여자들은 당하지 않는 고통을, 그녀만 당해야 하는 걸까? 미스 킬먼은 종교를 통해 분노를 다스리며 오히려 댈러웨이 부인의 무가치한 삶을 동정하지만, 그것이 진심으로 이루어지기는 힘들다.

 

가난하고 못생겼지만 똑똑한 미스 킬먼의 삶은 힘들다. 똑똑하지 않았다면 덜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부유하고 예뻤다면 더, 더, 덜 힘들었겠지만. 불평등에 대한 분노는 뿌리 깊은 것이다. 수 천 년에 걸쳐 종교가 해 온 일은 어쩌면 이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것, 그것 한 가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분노가 뿌리 뽑힐 수는 없는 법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처럼 상류층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다면, 만약 미스 킬먼처럼 가난하고 못생겼다면, 『댈러웨이 부인』이 아니라 『미스 킬먼』이 우리에게 남겨졌을 지도 모른다. 버지니아 울프가 더 오래 살았다 해도, 그녀는 『미스 킬먼』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썼다 해도 『댈러웨이 부인』처럼 좋은 작품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결코 미스 킬먼을 댈러웨이 부인을 묘사한 것처럼, 그토록 섬세하고 미묘하고 복합적으로, 그렇게 생생하게 그려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증오와 동정과 부러움이 뒤엉킨 미스 킬먼의  <의식의 흐름>을 더 깊이 따라가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렇기에 『댈러웨이 부인』은 댈러웨이 부인인 것이다.

 

「정말이지 수상이 와주다니 친절하기도 하지. 클라리사는 생각했다. 저기 샐리, 저기 피터가 있고 리처드는 아주 흡족한 얼굴이고, 모든 사람들이 아마도 조금은 부러운 눈길로 지켜보는 가운데 수상과 함께 방을 지나면서, 그녀는 순간의 도취를, 심장의 신경들이 부풀어 올라 파르르 떠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 그래,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느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느낌을 사랑했고 그 온몸이 저리는 짜릿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모든 외양과 승리는(가령 피터는 그녀가 아주 멋지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공허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팔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지 마음속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전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수상이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토시를 낀 어린 소녀를 그린 조슈아 경의 그림이 든 금빛 액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불현듯 킬먼이 생각났다. 그녀의 적인 킬먼이. 그것은 마음에 와 닿았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아, 얼마나 그녀를 혐오하는지 - 과격하고, 위선적이고, 사악한 여자, 무서운 힘으로 엘리자베스를 유혹한 여자. 남의 집에 몰래 들어와 더럽히는 여자(리처드가 들으면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만). 그녀를 혐오했다. 그리고 사랑했다. 필요한 것은 적이지 친구가 아니었다. p227」

 

우리가 그 <의식의 흐름>을 세밀히 쫓아온 댈러웨이 부인이 마지막에 와서 킬먼에 대한 혐오와 사랑을 동시에 깨달은 것처럼, 아마도 미스 킬먼에게도 세밀한 <의식의 흐름>이 허용되었다면 그녀 또한 댈러웨이 부인에 대한 증오와 사람을 동시에 깨닫지 않았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