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간 들어온 <어린이 독서 지도사> 수업이 끝나간다. 시험과 모의 수업만 남았다. 시험은 예상문제가 있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고, 모의수업이 문제다. 실제 수업은 보통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인데, 모의수업에서는 10분 안에 축약해야 한다. 3~4주에 걸쳐 24명 수강생 전원을 평가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너무 짧아서 처음 모의수업을 한 4명 모두 줄거리만 요약하다 시간을 흘러 보냈다. 관건은 미리 제출한 수업계획안의 ‘이해 - 분석- 비판 - 독후활동’ 항목 모두를 10분 안에 적절히 배분하는 것이다. 실제수업에는 필요 없는 고민이 모의수업 최대의 고민이 될 판이다.

 

사실 나는 어린이 독서 지도에는 별 관심이 없다. 적어도 청소년, 좋기로는 성인과 노인을 대상으로 혹은 (그들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일을 하고 싶다. 처음에는 여기 지방 국립대 평생교육원의 <독서 지도사> 과정을 들으려 했다. 그런데 수강 인원이 미달되어 폐강되었다. 심지어 그 과정의 작년 수강생들은 봄 한학기만 듣고, 가을 학기는 못 들었다고 한다. 일 년 과정인데 봄에 들었던 몇 명이 빠져나가자, 가을 학기가 폐강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너무 무책임하지만, 강사료가 발목을 잡은 것 같다. 온라인에서 자격증을 따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강의의 질도 의심이 되고, 이론 보다는 경험담에서 배우는 것이 더 많을 텐데, 온라인 강의는 실제로 얻는 것이 별로 없을 것 같아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듣게 된 것이 <어린이 독서 지도사> 과정이다. 아파트 입구에서 2차선 도로 하나만 건너면 바로 시립도서관인데, 수강료도 싸고 가깝기도 하고, 노느니 장독 깬다고, 마실 삼아 나가기 시작했다. 어쨌든 시간은 쏜살이고, 세월은 유수라, 그저 앉아만 있었는데도 어느새 1년이다.

 

요즘은 스펙이 학생들이나 취업준비생들만의 관심거리는 아니다. 하도 오래 사는 세상이라, 사 오십 대의 주부들에게도 열풍이 되었다. 생업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소일거리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칠팔십을 넘어 구십, 백 살까지 긴긴 세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나는 일흔 정도까지만 살았으면 좋겠지만, 장담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존엄사도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할 일이다. 무엇보다, 인간이란 죽음을 향해가는 존재지만, 또 죽음에 절대적으로 저항하는 존재기도 하다. 개똥밭에 구르더라도 이승이 좋다고 하게 될지 또 모르는 일이다.

 

여든을 훌쩍 넘은 엄마가 요즘 영어 알파벳에 열중이다. 복지관의 영어수업을 신청해 놓았다는 것이다. 엄마 친구 분들 중에는 수학을 배우는 할머니도 있고, 한문을 배우는 분도 있다. 엄마가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TV 광고나 간판을 읽기 위해서다. 수학을 배우는 마음은 무엇일까? 치매방지를 위해서일까? 순수한 학문적 관심일까? 노인교육의 역사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엄마를 통해 간간이 얻어 듣기로는, 처음엔 노래, 등산, 춤 등의 취미활동이 주 대상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영어, 일어, 수학, 한문 등 학생들도 싫어하는,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배워야 하는 그런 학문으로 확장되었다. 왜 머리가 빨리빨리 돌아가지 않는 노인들이 이런 어려운 것들을 배우려 하는 것일까? 간판이나 광고 꼬라지를 보면, ABC를 알고 싶다는 욕망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내일 모레 죽음이 닥칠지 모른다면 이런 골치 아픈 것들을 굳이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의 시대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가 아니라 ‘인생은 길고 할 일은 없다’ 가 될 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그저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무언가 의미 있는 시간이, 딱히 돈이 되는 일이 아니라도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간절히 요구될 것이다. 나는 이런 분들과 함께 책을 읽었으면 한다.

 

우리가 배우지 못한 것은 영어, 수학이 아니라 인문학이다. 지금의 칠팔십 대가 아니라 앞으로의 칠팔십 대는 더욱 그렇다. 1950년대 생들만 해도 고등학교까지는 많이 졸업했다. 한글을 모르거나 ABC 자체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청소년기에 정말 배웠어야 할 것들은 우리들도 그리고 아마 지금 젊은 세대들도 거의 배우지 못하고 지나쳐 왔다. 존재가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 세상은 평등한지, 민주주의는 필요한지, 타자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지 등등의 질문에 진지한 사유를 해본 적도 없고 할 줄도 모른다. 왜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지, 우리가 걸어온 역사는 무엇인지, 서구의 근대가 오늘의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등은 그저 연도만 달달 외우는 역사 공부로는 생각조차 해볼 수 없다. 문학은 또 말해 무엇 할까? 훌륭한 고전들은 ‘고등학생이 꼭 읽어야 할~’, ‘하룻밤에 읽는~’ ‘시험에 나오는~’ 따위의 편집으로 누더기가 되었다. 고전의 깊이는 줄거리에 있지 않다. 오로지 입시를 위해 칼질해 버린 긴 묘사들, 역사적 배경들, 지루할 정도로 세세한 풍속 묘사들 속에 고전으로서의 고전이 있다. <젊은베르테르의 슬픔>이든 <차타레이 부인의 사랑>이든 <오만과 편견>이든 <고리오 영감>이든 그 줄거리는 우리가 욕하며 보는 막장 드라마와 거의 다르지 않다.

 

인문학은 청소년기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어쩌면 청소년에게는 너무 벅찬 것이기도 하다. 그 나이에 고전의 깊이를, 철학적 사유를,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읽어내기는 힘들다. 보르헤스가 말한 상호텍스트성을 인정한다면, 텍스트는 삶의 두께와 함께 더욱 두터워진다. 결혼생활의 권태를 겪어본 여자가, 애증으로 부대끼며 사오십년을 함께 보낸 친구가, 자식에게 헌신하고 상실감을 느끼는 아버지가, 기억이 가물대며 치매를 걱정하는 할머니가 읽는 <차타레이 부인의 사랑>,<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고리오 영감>, <엄마를 부탁해> 는 청소년이 읽는 그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텍스트일 것이다. 작가가 뽑아낸 삶의 진실에 자신이 겪어온 경험이 얹힌다면, 밤을 세워 나누어도 시간이 모자랄 이야기가 쏟아질 것이다. 텍스트는 저마다의 경험으로 더욱 깊어지고, 자신만의 경험에 갇혀 있던 노인의 옹고집은 텍스트의 전체적인 시각에 의해 풀어질지도 모른다.

 

노인의 경험이 세상의 지혜가 되기 위해서는 전체적 맥락 속에 개인의 경험을 위치지울 수 있는 시각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때 노인의 경험은 오히려 젊은 세대와의 연대를 단절시키고, 세대 간 불신을 촉발하는 독이 될 것이다. 불행하게도 현재 우리의 모습은 이런 단절을 향해 가고 있다. 젊은 것들은 모르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경험, 전쟁과 빨갱이, 배고픔과 새마을 운동을 젊은 세대에게도 강요하고 있다. 그것이 한 세대의 특정 경험일 뿐이라는 자각, 역사적 맥락 속 어디에 놓여있는지, 그것들이 만들어낸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노인교육의 핵심은 이런 성찰의 기회를 열고, 그 능력을 기르는데 있어야 한다. 2차 방정식을 푸는 것보다 새마을 운동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해 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을 읽으면서 말이다. 물론 인문학을 위해서는 노인의 똥고집을 버려야 한다. 똥고집을 버리기 위해서도 인문학은 노인에게 더욱 필요하다.

 

좋은 책을 선택해서 똥고집 노인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보고 싶다. 그들의 경험이 진정 이 세상의 지혜가 되도록 곰삭히는 방법을 함께 찾고 싶다. 자신의 세대를 제대로 된 맥락 속에 위치지우고,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는 멋진 ‘신세대(오래된 신인류)’가 우리나라에도 출현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가 노인이 되기 전에 노인 복지관을 가고 싶은 이유이다.

 

 

 

내가 선택한 어린이 독서지도사 모의수업 교재, <바보 한스>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려다 엉뚱한 이야기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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