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펭귄클래식 15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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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카프카를 읽었다. 사실은 작년에 『변신』을 읽기는 했다. 그래도 그때는 카프카를 읽은 것 같지 않았다. 잘 이해를 못했기 때문일까? 지난주에 『소송』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카프카를 읽은 것 같았다. 이번에는 카프카를 이해했다는 말인가?

 

 

지젝의 『시차적 관점』에는 카프카에 관한 이런 글이 있다.

 

「... 카프카를 읽는 것은 추출하기라는 지대한 노력을 요구한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적절한 해석적 지평에 대하여) 더 많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카프카의 글이 가진 살아 있는 힘에 노출되도록 전형적인 해석적 기준들에 대한 지식을 버리는 것이다. 세 개의 그러한 해석적 틀이 있다. : 신학적인 틀(부재하는 신에 대한 간절한 추구) : 비판적 틀(소외된 현대 관료주의의 악몽 같은 세계를 무대에 올리는 것) : 정신분석적 틀(“정상적인” 성관계를 불가능하게 한 카프카의 “해결되지 않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 모든 것을 지워야만 한다. : 독자가 카프카의 우주가 가진 살아 있는 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아이와 같은 순진함이 복원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카프카의 경우 첫 번째 (단순한) 독서가 흔히 가장 적절한 것이며 두 번째 독서는 주어진 해석의 틀을 카프카에게 강제하여 첫 번째 독서의 생생한 충격을 “지양”하려는 시도가 된다. 이것이 우리가 카프카의 주요 업적 중 하나인 “오드라덱”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p231~2」

 

덕분에 나는 펭귄 클래식 판의 작품해설에 조금의 미련도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이와 같은 순진함”으로, 카프카를 느꼈던 것도 아니다. 도대체 오염된 세상에 순진한 아이가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당장 지젝부터 카프카에 대한 해석적 틀을 여러 번 제시해 왔다. 내가 카프카를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 짓눌린 것도 지젝 때문이다. 『시차적 관점』에는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인 대상a를 카프카의 ‘오드라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드라덱은 분명 라캉이 『세미나Ⅺ』과 그의 중요한 글인 ≪무의식의 위치≫에서 라멜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기관으로서의 리비도이자, 신체 없는 “불사의” 비인간적·인간적 기관이며, 신비로운 “불사의” 전주체적 생명-물질이다. 또는 그보다 상징적 속박을 벗어난 생명 물질의 잔여이며, 일반적인 죽음 너머 부성적 권위의 영역 밖에서 어떤 고정된 거처 없이 유목적으로 지속되는 “무두적” 충동의 끔찍한 박동이다. 그러므로 카프카 이야기 이면에 제시되는 선택은 라캉의 “아버지 또는 그 보다 나쁜 것”이다. : 오드라덱은 아버지의 대안으로서 “더 나쁜 것” 이다.p239」

 

오드라덱은 언뜻 보면 납작한 별모양의 실패 같은데, 꼭 실패만은 아니다. 옛날에는 알아볼 만한 모양이었는데, 마모에 의해 이제는 잔여만 남았다고도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전체적으로는 무의미해 보이지만 그 자신의 방식으로는 완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드라덱은 특이할 정도로 민첩하고 붙잡히지 않아, 정밀하게 조사할 수도 없다. 다락방, 계단, 로비, 현관에 잠복해 있는데 몇 달간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항상 충실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내가 죽은 후에는 아이들의 발밑에도 나타날 것 같다. 카프카가 단편 『The Cares of a Family Man』에서 설명하고 있는 오드라덱의 형상이다. 카프카는 “그는(오드라덱은)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나 이후에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생각은 상당히 고통스럽다.” 고 쓰고 있다. 『소송』의 마지막 문장도 이와 비슷하다. 「“개 같군!” 하고 그는 말했으나, 자신은 비록 죽어도 치욕은 남을 것 같았다. p303」

 

카프카는, 우리나라의 들뢰즈 산실(?)이라 알려진(적어도 대중에게는), 이진경의 <수유 너머 N>이 꾸준히 읽고 연구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들뢰즈를 읽다 보면 자연 카프카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카프카는 현대 철학자들의 스타? 혹은 교과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지젝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 카프카와 그의 아버지의 관계를 매우 자세히 다루며, 그의 문학은 “아버지 보다 더 나쁜 것”의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카프카와 아버지의 관계는 매우 심각했다. “카프카를 힘들게 한 것은 아버지의 과도한 현존이다.p129” 그런데 아버지의 과도한 현존은 역설적이게도 아버지의 상징적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

 

「 우리는 또다시 인과율의 고유한 질서를 명심해야 한다. 아버지의 과도한 활력이 그의 상징적 권위를 무너뜨린 것은 아니다. 반대로 카프카가 아버지의 과도한 활력에 진저리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부성적 권위의 결핍을 전제하는 것이다.

아버지-의-이름Name-of-the-father의 진짜 기능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확히 주체로 하여금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살해’하도록 하는 것, 그의 아버지를(그리고 폐쇄적인 가족의 회로를) 단념하여 자유롭게 자기 삶의 길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카프카가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지시한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는 주체가 영원히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를 리비도적 곤경에 빠뜨린 것은 주체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카프카가 아버지의 이름을 거부한 것은 아버지의 포획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포획의 가장 명백한 징표이다.p130」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상징계의 진입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징계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인가? 지젝이 자주 그러듯, 도스토예프스키의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여기서 뒤집혀야 한다. “신이 없다면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상징적 아버지가 아니라 원초적 아버지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즉 주인에는 두 가지가 있다. 공적인 상징적 주인과 비밀스럽게 활동하며 실제로 모든 것을 조정하는 악마적 마법사, 원초적 아버지가 그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즉 가부장적인 상징적 권위의 해체는 새로운 주인의 출현을 예고한다. 카프카에게 아버지는 상징적 권위를 상실하고, 외설적인 원초적 아버지로 돌아온다.

 

「라캉의 용어로, 상징적 동일화의 특질이나 자아 이상이 중지될 때, 주인이 상상적 이상으로 축소되어 버릴 때, 그것의 괴물 같은 형상으로 우리의 삶을 조종하는 전능한 악신의 초자아 형상이 출현한다. 이런 형상 속에서 상징적 권위의 고유한 효력은 중지되고, 그로 인해 상상계(외양)와 (편집증의) 실재가 중첩된다. p135」

 

프로이트는 주체를 윤리적으로 행동하게 몰아가는 세 가지 작인을 제시했다. 이상적 자아, 자아 이상, 그리고 초자아가 그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세 가지를 혼용했지만 라캉은 이 세 항을 엄격히 구별한다. 이것은 라캉의 삼항조인 ISR, 즉 상상계I-상징계S-실재계R에 상응한다.

 

「이상적 자아는 주체의 이상화된 자기 이미지(내가 되고 싶거나 타인이 나를 이렇게 봐 줬으면 하는 상)를 의미한다. 자아 이상은 그 응시로 나의 자아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작인, 나를 지켜보며 내가 최선을 다하도록 독려하는 대타자, 내가 따르고 실현하고 싶어 하는 이상적 ‘나’이다. 그리고 초자아는 그 작인의 집요하고 가학적이며 징벌하는 측면이다. 이 세 항의 구조화는 명백히 라캉의 상상계-상징계-실재로 이루어진 삼항구조이다. 이상적 자아는 상상적인 것으로, 라캉이 ‘작은 타자’라고 불렀던 내 자아의 이상화된 분신 이미지다. 자아 이상은 상징적인 것으로, 내가 상징적으로 동일시하는 지점, 내가 대타자 속에서 나 자신을 관찰하는(판정하는) 지점이다. 초자아는 실재적인 것으로, 나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퍼붓고 그것에 부응하지 못하는 나의 실패를 조롱하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작인, 그 시선 속에서 나의 ‘나쁜’ 갈망을 억누르고 그 명령에 따를수록 점점 유죄가 되는 작인이다.p137~8」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어느 것이 정말 윤리적인 작인일까? 보통의 특히 미국의 정신분석학자들은 나쁜 초자아에 맞서 좋은 자아 이상을 수립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아버지-의-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가장 평온한 방법이다. 기존의 사회-상징적 질서에 따르면, 쉽고 편안하다. 그러나 라캉은 이런 손쉬운 방법에 반대하면 네 번째 작인을 주장한다. 라캉이 가끔 ‘욕망의 법’이라 부르는 것으로, 우리의 욕망에 부응하는 행동을 요구하는 작인이다.

 

「라캉에게, 우리를 성장과 성숙으로 이끄는 자비로워 보이는 자아 이상은 우리로 하여금 기존의 사회-상징적 질서의 ‘합리적’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욕망의 법’을 배반하게 만든다. 초자아는 그 과도한 죄의식 속에서 자아 이상의 필연적 이면일 뿐이다. 초자아는 ‘욕망의 법’에 대한 우리 자신의 배반에 관하여 참을 수 없는 압박을 가한다. 간단히 말해, 라캉에게 초자아의 압박 속에서 경험하는 죄의식은 환영이 아니라 실제적이다. “우리의 죄는 오직 우리의 욕망에 의해 주어진 토대와 관련해서이다.” 그래서 초자아의 압박은 우리의 욕망에 대해 우리가 실제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p139」

 

라캉이 제시하는 것은 네 번째 작인, 욕망의 법이다. 사회의 질서에 순응하며 아버지-의-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외견상 쉽지만, 대가를 요구한다. 주체의 욕망을 억압해야 한다. 그러나 억압된 욕망은 초자아의 압박으로 돌아온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가끔씩 일탈을 꿈꾸며 초자아를 적당히 달랜다. 욕망은 억압되고 초자아는 가상의 세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그 대가로 우리는 사회 질서에 성공적으로 적응한다.

 

카프카는 결혼을 하려 했다. 초자아적 아버지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아버지-의-이름을 받아들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 의해 훼방당하고, 마침내 ‘아버지 보다 더 나쁜 것’을 선택한다. 카프카는 이 모든 과정의 고통과 저항을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남겼다. 마지막에 카프카는 『소송』의 ‘법정 문’의 우화처럼, 아버지의 격분은 오직 그를 위해 존재했던 것임을 깨닫는다.

 

『소송』에서 평생을 법의 문 앞에서 들여 보내주기를 기다리던 시골남자는 문지기에게 이렇게 묻는다. “누구나 다 법을 얻으려고 노력하지요. 오랜 세월 동안 나 말고 아무도 들여보내 달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대체 뭐요? p285” 남자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안 문지기는 이렇게 대답한다. “다른 사람은 누구도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소. 당신만이 이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난 이제 가서 입구를 걸어 잠그겠소. p285” 요제프 K는 이 이야기를 해주는 신부에게 문지기가 시골남자를 속였다고 하지만, 신부는 반론을 편다. “그런데 사실 시골남자는 자유롭기 때문에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는데, 다만 그에게는 법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 금지되어 있을 뿐이지요. 게다가 그것도 한 사람의 문지기에 의해서만 금지되어 있어요. 시골남자가 문 옆의 의자에 앉아 거기서 평생 동안 지냈다면, 그것은 자유 의지로 일어난 일이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p290 ”

 

카프카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진정한 수신인은 카프카 자신인 것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의 카프카에 대한 내용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런 식으로 카프카의 주체적인 동일시는 (아버지의) 치욕인 ‘거의 아무것도 아님’으로부터 ‘전혀 아무것도 아님’으로 -미세하게, 하지만 모든 것을 바꾸면서 - 옮겨진다. 만약 그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면’ 나의 무가치함은 더 이상 (타인의) 치욕일 수 없다. 그래서 편지 결말의 변화는 죽음으로부터 승화로의 이동이다. 자신을 무nothing의 자리에 놓는 카프카의 선택, 말라르메식으로, ‘장소 말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최소 존재로의 환원은 창조적인 승화(문학)를 위한 공간을 창조한다. 다시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에 나오는 모토를 바꿔 말하자면, (라캉의 말장난에 따라) 대지의 표면을 더럽히는 오물litter인 ‘문학litturaterre’, 그 글쓰기의 더러운 순수함에 비하면 자그마한 성적 위반의 더러움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p144~5」

 

카프카는 아버지 보다 더 나쁜 것인 무無, 즉 문학을 선택함으로써 두 아버지 즉, 초자아로부터도 자아이상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소송』 자체에 대한 감상은 지젝의 조언대로, “첫 번째 독서의 생생한 충격”을 위해 어떤 해석의 틀 안에 가두지 않고 그냥 충격으로 남겨둔다. 그래봤자, 아이와 같은 순진함은 존재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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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kofiev 2015-01-20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1세기 자본 리뷰보다 서재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편안한 감상자의 주조같은 게, 보기 좋네요. 배경적으로 알아가는 것도 있습니다. 좋은 책 많이 접하길 바랄게요.

말리 2015-01-20 20:54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인디고 연구소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12년 출간된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을 통해서다. 책보다는 우리나라의 청년들이  슬라보예 지젝을 직접 인터뷰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었다. 유명학자도 아닌 청년들이 슬로베니아로 날아가 지젝을 만났다니, 만날 수 있다니, 평범한 사람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니, 부럽고도 놀라웠다.

 

인디고 연구소는 인디고 서원에서 출발했다. 인디고 서원에서 인문학을 함께 공부한던 청소년들이 청년으로 성장하여 만든 공부 공동체가 인디고 연구소다. 2008년에 문을 연 인디고 연구소는 2012년 '공동선 총서' 1권으로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를,  2014년 '공동선 총서' 2권으로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를 출간했다.

 

「공동선 총서는 불가능한 꿈에 과감히 도전한다. 공동선을 열망하는 철학자의 사유와 더불어 불가능한 미래를 가능한 미래로 바꾸고자 한다. 공동선의 사유를 통해 자유와 평등을 향한 공동투쟁의 장에서 잠재된 혁명의 무수한 이름들을 이 세계에 살려낼 것이다. 불가능한 꿈의 시도야말로 인문학의 본질이자 가능한 미래의 징후가 아니겠는가.」

 

'공동선 총서'를 기획하며 던진 인디고 연구소의 출사표다.  짧은 문장에 공동선, 자유, 평등, 혁명, 인문학, 사유, 본질, 투쟁 등 온갖 '선한' 단어가 난무한다. 청년들의 패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치기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공동선이란 무엇인가?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의  <차례>에는 이례적으로 길다란 질문이  붙어 있는데, 인디고 연구소가 여기서 정의한 개념은 이렇다.

 

"공동선이란 개인의 주관적 가치가 보편적인 윤리적 질서와 만나는 지점, 즉 나의 좋음이 세상의 옳음과 맞닿는 곳에서 창조되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좋은 말같은데, 매우 추상적으로 들린다. 인문학이 아니라면 사실 공동선이란 말 따위야 정의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착하게 살자! 그러나 인문학이라면 인디고 연구소가 내린 공동선의 정의는 그 자체로는 아무 내용이 없다. 좋음도 옳음도 보편적인 윤리적 질서도 모두 채워져야 할 텅 빈 단어일 뿐이다. 이 텅빈 기표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 인디고 연구소가 공동선 총서를 통해 하려는 것도, 해야 할 것도 바로 이 작업일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작업의 첫 번째로 슬라보예 지젝을 택했을까? 이 책을 보며 제일 먼저 떠올랐던 의문이다. '선'이란 개념은 지젝과 그닥 친밀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젝이 'commons' 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common goods'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다. 지젝에게 윤리는 차라리 근본악과 더 밀접하다. 말하자면 세상이 망하더라도 나는 물러서지 않겠다... 뭐 이런. 지젝도 인터뷰 첫머리에 '선'에 대한 문제 의식을 제기한다. 공동선에 대한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공동선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변화된 시대에 맞는 공동선에 대한 정의를 먼저 정립해야 합니다. 공동선을 묻는 작업이 이렇게 새로운 의미의 공동선을 정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저는 여러분의 기획에 동의합니다. p45

 

아마 이 인터뷰가 아니었다면 지젝이 입에 올리지 않았을(내가 읽은 지젝의 책 중에 공동선이란 말은 없었다고 기억하므로 막 이렇게 과감히 쓴다;;) 지젝의 '공동선'이란 어쩌면 우리가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선의 개념과는 많이 다를지도 모른다. 지젝의 어떤 주장들은 받아들이기에 힘들만큼 상식과의 괴리가 크다. 물론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는 그런 지젝의 특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기특한 청년들이 떼로 찾아와 배움을 구하는데, 절정고수의 날카로운 초식을 막 던질만큼 몰인정하지는 않다. 바꾸어 말하면 이 책은 읽기는 편하지만, 지젝 특유의 사유를 제대로 맛보기는 어렵다. 지젝은 공동선이라는 부자유스런 틀 안에서도 할말을 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틀이다.

 

 

내가 바우만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최태섭의 『잉여사회』에서다. 몇 번이나 인용되는 것을 보고 유명한 사회학자구나, 짐작만 했다. '액체 근대'라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발명한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인디고 연구소의 '공동선 총서' 2권으로 바우만과의 인터뷰집이 나온 것을 보면서도, 선뜻 내키지는 않았다.  나는 사회학자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학은 철학에 비해 너무 직접적이고 현실적이어서 딱 부러지기는 하는데 미묘한 매력은 없는 편이다.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도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다. 바우만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얻었다는 만족감을 빼면 책 자체의 매력은 별로 없었다.

 

슬슬 넘기면서 읽어서, 내가 정확하게 읽었는지 자신은 없지만, 액체 근대란 말하자면 포스트모던에 대한 바우만식 정의인 것 같다. 근대 그러니까 고체 근대는 단단하고 확실하고, 선악도 딱딱 구분이 되고, 아버지의 법도 살아있는 그런시대다. 액체 근대는 이 모든 확실성이 사라지고, 딛고 있는 땅마저 언제 무너질지 모르고, 오늘 기준이 내일은 일탈이 되고, 한마디로 불안정과 불확실성의 시대다. 노동자로 말하자면 프레카리아트, 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의 시대다.

 

바우만은 현재의 액체근대를 '공위의 시대' 라고도 표현한다. 고체근대 즉 국민국가의 시대에는 권력과 정치가 통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액체근대에서 권력은 세계화된 자본으로 넘어갔다. 반면 정치는 여전히 근대국가의 틀 안에 놓여 있다. '정치에 의해 규제되지 않은 권력'과 '권력을 빼앗긴 정치'가 남았다. 당연히 UN은 세계화된 자본을 규제할 수 없다. UN은 근대 국민국가의 주권을 상호 침해하지 않기 위해 탄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귀에 따갑게 들어왔던 대로 꿰맞추어 보자면 토대는 세계화되었는데, 그에 걸맞는 상부구조는 없다. 이것을 바우만은 '공위' 라고 부른다. 비었다. 이 빈자리에 적합한 정치형태가 들어와 권력과 다시 결합하여야 세계화된 자본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인디고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이제 몇 살쯤 되었을까? 책을 읽고 문득 궁금해졌다. 인디고 서원의 청소년들이 자라서 청년이 되고 그러고도 7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서른쯤은 되었을까?  함께 책을 읽은 친구들이 어른이 되어가면서도 함께 생각하고 함께 실천하는 그런 삶은 참 좋을 것 같다. 내가 참여하는 작은 독서회도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들 주변의 수많은 독서회들이 그렇게 된다면 진짜 신나는 세상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런데, 읽은 책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너무 심하게 이름들을 끌어다 댄다. 맥락상 별 관련이 없는 지식인들의 이름을 가져오고, 불필요한 인용들을 한다. 핵심을 치고 들어와 머리에 탁 박히는 질문이 될 수도 있을 수 많은 문장들이 "누구 누구의 어떤 어떤 책에 무슨 무슨 말이 있는데,..." 따위의 서두 때문에 산만해지고 만다. 바우만 앞에서 그런 말은 사실 번데기 앞의 주름잡기 같아 읽는 내가 살짝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이렇게 불러댄 그 많은 학자들과 책들을 제대로 읽고 이해는 하고 있을까 살짝 의문이 들려고도 한다. 그런 것 없이도 인디고 연구소는 충분히 멋져 보인다.

 

 

 

 

 

 

 

 

 

 

 

 

 

 

 

 

 인디고 서원의 이런 책들.... 읽어 보진 않았다. 후루룩 넘겨 보니 아이들이 쓴 독서일기 같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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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은 TV에서 <빨강머리 앤>도 <알프스 소녀 하이디>도 <플랜더스의 개>도 보지 못한다. 불후의 명작 <캔디 캔디>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TV에는 어떤 아름답고 슬픈 만화 주인공들이 아이들의 마음과 영혼을 사로잡겠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내가 모르는 그 누구들도 나의 주인공들처럼 오래오래 아이들의 가슴 속에 꿈으로 살아있겠지만, 나는 앤과 하이디와 캔디캔디와 넬로를 모르는 아이들이 어쩔 수 없이 안타깝다.

 

위더의 『플랜더스의 개』를 직접 읽은 것은 처음이지 싶다. 효령이와 함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비룡소 출판사의 완역본을 읽었다.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해서 한밤중에 나는 펑펑 울었다. 작년 한해 내내 읽은 어떤 책도 그렇게 내 감성을 무방비로 뒤흔들지 못했다. 꺼이꺼이 삼키려던 눈물은 딸국질로 변하고 콧물이 숨구멍을 막아버릴 것 같았다. 다 아는 이야기에 왜 그렇게 울음을 쏟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언제나 ,왜? 라고 묻기를 좋아하지만, 나는 왜?라고 한마디도 묻고 싶지 않았다. 황현상 선생은 트윗에서 환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세월호 참사로 슬퍼하는 한국인에 대한 글을 쓰라는 숙제에서 초등학생이 오빠와 나는 울었다로 썼다." 울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 환유다. 나도 이제 이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영화 <더 리더> 의 마지막에 케이트 윈슬렛은 감옥에서 자살한다. 자살하기 전 그녀는 혼자서 글자를 배운다.... 기 보다는 터득한다. 책 속의 글자와 책을 녹음한 말을 하나하나 비교하며, 단어를 깨우친다. 케이트 윈슬렛이 읽는 책은 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다. 나는 그때부터 이 책이 궁금했다. 그런데도 이제야 읽었다. 나는 그녀의 자살과 이 책의  내용이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작가가 아무책이나 고르지는 않았을테니까. 그런데 모르겠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아주 짧은 단편이다. 내용은 무척 단순하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젊은 여자가 얄타의 휴양지에서 자신보다 두 배는 나이가 많은 남자를 만나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 여자가 집으로 돌아간 뒤 이 바람둥이 남자는 다른 많은 여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금방 잊어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고, 여자를 찾아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다. 둘은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을 찾을 방법을 고민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혼자 이렇게 소리쳤다.  "아니! 진짜 이렇게 끝나는 거야?" 진짜 그렇게 끝났다. 영화 속 케이트 위슬렛이 깨달은 '문자'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가 얻은 '사랑'이 같은 것일까? 그 보다 이 책이 왜 고전인거야?

 

 

얼마전 JTBC 뉴스룸에 김혜자가 나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인터뷰를 실시간으로 보면서  많이도 키득거렸다. 그렇게 재미있으면서 따뜻한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압권은 당연히 김혜자의 '손석희는 깍쟁이', 발언이다. 그 인터뷰는 영화 홍보의 하나였지만, 길이길이 남을 인터뷰가 될 것이다. 김혜자가 출연한 영화는 좋은 평을 듣고 있지만, 상영관이 별로 없어 고전하고 있다. 그 영화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이다.

 

마크 해던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 책이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인 줄 알았다. 둘 다 이름치고는 긴데다가, 개와 의문의 사건과 훔친다는 단어들이 뒤섞이니, 하나로 들릴 법도 하지 않은가. 여하튼 개에게 무슨 일인가가 발생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와 책은 아무 상관이 없다.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처럼 정작 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열다섯 살의 크리스토퍼는,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수학천재 자폐아인 듯하다. 이 책은 이 아이가 쓰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는데, 일종의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성장소설과 자폐아, 대강은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감동의 요소도 있고, 반성의 계기도 있다.

 

그럼에도 크리스토퍼가 만약 현실에 출현한다면 상황은 그렇게 녹록할 것 같지 않다. 크리스토퍼는 나름의 사고체계와 행동지침을 가지고 있다. 이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면 크리스토퍼의 행동은 충분한 개연성을 갖는다. 이해할만 하다. 그러나 스위스제 칼을 가지고 다니며, 낯선 사람과는 말도 하지 않으려 하고, 조금이라도 자신을 건드리는 사람은, 말 그대로 어깨나 팔등이 살짝 건들리기만 해도, 거칠게 밀어 쓰러뜨리고, 백화점 한복판에서 뒹굴며 악을 쓰는 크리스토퍼를 현실에서 맞닥뜨린다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경우에 따라 대단한 위협을 느낄 수 있다. 크리스토퍼는 진짜로 스위스제 칼을 휘두를 수도 있다. 타인을 이해하려 하지만, 타인을 이해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타인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이 한권의 책으로 해결될 수 없는 어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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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하는 페미니즘 - 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정희진 서문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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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이라고 해야 세상의 책들에 비하면 당연 빙산의 한조각이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집적거리며 읽었는데,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은 것이 페미니즘 관련 책이다. 반-페미니스트는 아닌데 굳이 손을 들어야 한다면 비-페미니스트?, 한마디로 별로 관심이 없었다.

 

딸로 태어난 죄로 설움도 당해봤고, 직장생활에서 남녀차별이라는 것도 겪어 봤고, 슈퍼우먼 콤플렉스에도 걸려봤는데, 왜 그렇게 덤덤했는지 모르겠다. 인습에 갇혔기도 했지만 어쩌면 기질 자체가 남성적이어서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라캉의 성 구분 공식에 따르면 아무래도 나는 남성 쪽에 가깝다. 프로이트는 물론 라캉도 남근중심주의자로 비난 받지만, 라캉의 남근은 생물학적 음경과는 관련이 없다. 남근 기표가 뭐고, 성 구분 공식이 뭐고 떠들기에는 이 개념들 자체가 워낙 까다롭기도 하고, 내 밑천이래야 싸락눈 두께도 못되니, 설명할 ‘빵법’은 없다. 다만 세계를 보는 관점에 따라 남성과 여성이 나뉜다고 대충 말할 수는 있겠다.

 

올해 독서회의 책을 추천하다, 스테퍼니 스탈의 『빨래하는 페미니즘』을 떠올린 것은 어차피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작년 버지니아 울프 토론 때, 참고자료로 페미니즘 책을 찾다가 발견한 것이 스탈의 이 책이다.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는데, 뒤늦게야 들어와 읽지 못하고 있었다. 도의적으로(?) 신청자가 읽지 않을 수는 없고, 또 생각해보니 주부 독서회인데도 여성주의에 관한 책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 교육에 관한 책은 여러 권 읽었는데, 정작 우리 자신의 문제에 관해서는 논의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은 나와 같은 이유일까? 나는 페미니즘 자체보다 페미니즘에 무관심한 이유들이 더 궁금하다. 나 역시 따지고 보면 그 이유가 모호하고, 이유를 생각하는 것 자체를 피하고 있다. 어차피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일까... 그나마 안일한 일상이 깨질까봐 두려운 걸까...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르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스트 잡지 《미즈》가 뽑은

‘반드시 읽어야 할 100대 페미니즘 논픽션’에 선정된 바로 그 책

 

『빨래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출판사 홍보문구다. 우선 놀라운 것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100권이나 된다는 것이다. 나는 한 권도 안 읽었으니 페미니즘에 관한한 문맹이다. 이 홍보문구는 또, 과장이 생명인 광고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10대도 아니고 100대 정도는 된다고 고백(?)함으로써, 사실 그렇게 썩 높은 위상의 책은 아니라는 실토(?)를 하고 있는 셈이라, 우습다.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논픽션’ 이라는 분류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고, 소설인가? 수필인가? 기록물인가?, 무어라 불러야 할지 헷갈렸다. 알라딘 분류상으로는 사회과학 분야 중 여성학이론에 속한다.

 

제목만으로는 당연히 페미니즘의 이론서 정도를 연상할 수 있는데, 사실상의 형식은 1인칭 화자 소설에 가깝다. 좋은 점이라면 그만큼 읽기 쉽고 재미있다는 것이고, 나쁜 점으로는 이 책이 소개하는 페미니즘 이론이 그리 체계적이지도 탄탄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취향에 따라 좋은 책도 그다지 탐탁하지 않은 책도 될 수 있다. 나는? 읽을 때는 재미있었다. 나는 feminist가 아니라도 female임은 분명하고, 스탈이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며 겪는 고통과 좌절은 어떤 여자라도 비켜가기 힘든 부분임에 틀림없다. 공감하고 분노하지 않을 여자란 엘리자베스 여왕과 박근혜 대통령에 맞먹을 수 있는 정도의 여성? 조현아씨는 복수의 칼날을 품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테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 생각한다.

 

문제는 혹시 발제를 맡을 경우에 대비해서 정리를 해 보려니 내용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스탈은 사실 이 책을 쉽게(?) 썼다. 졸업 후 사회활동을 하다가, 출산과 육아에 지쳐 자신을 잃어가던 스탈이 어느 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예전에 들었던 <페미니즘 고전 연구> 수업을 청강한다. 2년간의 수업을 통해 읽고 토론한 페미니즘 고전과 스탈 자신의 생활이 교차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물론 홍보문구처럼 이 이야기는 ‘논픽션’이다. 스탈은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그대로 따라가며 촬영하듯 기록한다. 그 과정에서 고전 속 페미니스트의 주장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도 하고 비판도 하고 반성도 하고 각성도 한다. 여기서 소개되는 고전은 26권인데, 내가 그 이름이라도 들어본 책은 4권밖에 안 된다. 물론 한 권도 읽지는 않았다. 내 욕심은 이 26권의 책과 페미니스트들(26명은 아니다. 책들 중에는 반-페미적 책도 있다)의 이론과 사상을 정리해 보는 것인데, 스탈의 설명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체계적 정리가 아니라 수업시간에 있었던 토론의 일부와 그때그때 스치는 스탈 자신의 생각을 조각조각 써놓았기 때문이다. 비-페미니스트로서는 이것만으로 페미니즘 역사의 선명한 그림을 그리기는 힘들다. 스탈이 이 책을 쓴 의도도 물론 그런 것이 아니다. 스탈은 자신의 책이 페미니즘 고전을 직접 읽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을 뿐이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독서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 책을 통해 독서에 대한 열망을 느끼게 되기를 희망한다.”

 

나는 독서 열망 보다는 검색에의 충동을 먼저 느꼈다. 책에서 얻지 못한 페미니즘의 체계를 인터넷에서 건져보리라는 욕심이었는데, 실패했다. 대체로 너무 지엽적이거나 너무 두루뭉술했다. 가장 기본적이라 할 페미니즘 세대별 특성과 대표자도 아직 정리를 못했다. 무슨 책을 보거나 무슨 글을 읽으면 삼빡하게 정리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몇 군데 표시해 놓은 내용이 있다.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나 흥미를 돋우는 것들이다.

 

첫 째, 창세기의 이브에 대한 해석이다. 일레인 페이절스의 『아담, 이브, 뱀 : 기독교 탄생의 비밀』에 나오는 내용이다. 페이절스는 창세기 1장과 2장을 모순으로 간주한다. 1장에서는 성 구분 없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장에서는 알다시피 아담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직접 만든 1차적 피조물인 반면, 이브는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2차적 부속물로 그려져 있다. 설명이 명확하지는 않은데, 하여튼 박해받던 초기 400년 기독교 시절에 원죄는 도덕적 자유와 책임을 비유한 말로 해석되었다. 창세기에 나타난 ‘불복종’이라는 이 주제가 국가의 정치 세력과 맞서 싸우기 위한 부름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브는 투사다. 그런데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되자 창세기 1장과 2장은 자유 의지를 예증하는 상징에서 그 정반대인 인간의 속박과 타락의 상징으로 탈바꿈했다.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다. 방탕한 생활을 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원인을 여자의 사악한 유혹으로 돌렸고, 이브는 악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해석을 받아들인 것은 자신의 고통과 절망을 자기 책임이 아니라 외부의 탓으로 손쉽게 돌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건 내가 아니라 원죄 때문이니, 복종과 회개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가 훨씬 마음 편했다는 것이고, 교회와 권력은 복종을 통해 손쉽게 통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브는 불가피하게 악의 근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페이절스의 견해이다.

 

둘 째, 모성신화에 대한 설명이다. “모성신화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다. 모성신화를 떠받치는 기둥은 어머니는 더 이상 자신만의 야심도 호기심도 욕구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다. p88”

 

셋 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다.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페미니즘의 시조여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름인 것 같다. 1792년 『여성의 권리 옹호』를 출간하며 페미니즘의 탄생을 알렸다. 그녀는 “교육 받지 못한 여자는 인류 공통의 진리, 즉 지식과 미덕을 키울 수 없기 때문에 남자의 동반자가 될 준비를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시조가 다 그렇듯 현대 페미니스트의 눈으로 보자면 페미니즘도 아니지만, 현대의 그 어떤 페미니스트도 따라 갈 수 없는 용기를 가지고 여성의 권리를 주장했다. 흥미로운 것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두 번째 남편(?)이 영국의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인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메리, 훗날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다.

 

넷 째, 케이트 초핀의 소설 『각성』에 나오는 말이다.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포기할 수 있어요. 돈과 생명은 아이들에게 내줄 수 있어요. 하지만 나 자신을 내주지는 않을 거예요. p156” 모성신화와 자기희생을 강요하는 사회는 어쩌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돈과 생명을 내주면 모든 것을 내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대항해 초핀은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나 자신’을 주장한다.

 

다섯 째, 페미니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이다. “여자는 태어나지 않으며 여자로 만들어진다.p205” 비-페미니스트도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다. 보부아르는 남성을 우등한 제1의 성, 여성을 열등한 제2의 성으로 대비시킴으로써, 성차별의 현실을 극명하게 고발한다.

 

여섯 째,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가 현대 여성에게 일으키는 뜻밖의 부작용, 슈퍼맘 콤플렉스다. 50년 전 『여성의 신비』는 여성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당대 문화적 강요를 고발하고, 여성에게도 한 인간으로서의 자아실현의 기회가 필요하며, 적극적으로 사회진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여성의 사회진출은 경이롭게 증가했지만, 모성신화는 사라지지 않았고, 여성은 사회생활과 더불어 출산과 양육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훌륭한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슈퍼우먼, 수퍼맘이 되어야 했다.

 

“여자들은 직장일과 가사일의 이중고를 모두 끝내고 나면, 그러니까 아이들을 재우고 설거지 마친 그릇을 선반에 가지런히 진열해놓고 나면 손 하나 까딱할 정도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아 대의를 추구하는 집회에 참석하기는커녕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생각하기도 어려운 상태가 된다. 여자들 자신이 변화의 주체라고 주장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그러한 심오한 책임의 짐과 더 넓은 사회적 변화를 위한 싸움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데 실패했다. p276”

 

주디 사이퍼스가 1972년에 발표한 에세이에는 “나한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유명한 말이 그저 영화의 재치 있는 제목인 줄만 알았다.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고, 음식을 만들어 주고, 아이를 돌보고, 집 안을 청소하고, 성적 욕구까지 충족시켜 주는 누군가를 뜻하는 암호. 바로 ‘아내’다. p298” 사이퍼스는 “아아, 세상 누군들 아내를 원하지 않겠는가?”라며 에세이를 끝냈다.

 

일곱 째, 모성신화와 슈퍼맘에 이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자기희생’ 이다. 자기희생은 모성신화와 슈퍼맘 콤플렉스가 여성에게 이끌어낸 자기체면 혹은 자기강요라 할 수 있다. 『다른 목소리』로의 저자, ”캐럴 길리건은 여자들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덕목인 자기희생이라는 악의적이고 집요한 믿음이 여자들을 이기심의 망령에 시달리게 만든다고 했다. 자신이 이기적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욕구를 완전히 매몰시키게 만든다는 것이다. p377”

 

그런데 자기희생은 엄마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들까지 옭아매는 경우가 많다. “내가 어떻게 너를 키웠는데!” “엄마가 우리를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 프레임에 갇히면 천하에 나쁜 년놈이 되지 않고 빠져나올 방법은 없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의 바탕에는 예외 없이 엄마의 자기희생이 잠복해 있다. 자기희생을 신조로 살아온 엄마들이 역설적으로 절대 희생하지 않으려는 것 역시 자기희생이다. 자기희생만은 희생할 수 없는 것이다. 이쯤 되면 자기희생은 자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케이트 초핀이 말한 ‘나 자신’을 살지 못한 여성의 자기변명 혹은 자기은폐의 수단일 뿐이다. 자기희생이 부정되면 자기 삶 전체가 부정되는 것이다. 엄마의 비극이며, 자식들의 비극이기도 하다. 캐럴 길리건은 자기희생이 욕구를 희생시킨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자기희생이야말로 그녀 최고의 욕망이다. 그 욕망의 불길은 모든 것을 불태운다. 자신의 삶도 자식의 삶도. 영화 <국제시장>은 우리 현대사가 만들어낸 자기희생의 아버지 버전이다. <국제시장>에 열광하는 우리는 무엇을 불태우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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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동양의 지혜>를 끝으로  총 7부로 구성된 한스 요하힘 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를 다 읽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단계인  4부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시대>를 시작으로 7부 <20세기 철학사상의 주요 방향>까지 주욱  읽었다. 그리고 돌아가 2부 <희랍철학>과 3부 <중세철학>을 읽고, 마지막으로 1부를 읽었다. 왜 이렇게 정신없이 왔다갔다 읽었냐하면 그것이 내겐 가장 흥미롭고 편안했기 때문이다.

 

15~16세기부터 서구 사회는 근대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 근대가 현대까지도 (modern은 근현대를 아우른다) 여전히 서구 사회의 토대가 되고 있다. 불행인지 불행이 아닌지, 서구의 근대는 지금 우리 사회의 근간이기도 하다.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공맹의 도에서 비롯된 것들도 있지만 더욱 많이는 서구 근대 사상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니 희랍이나 중세 보다는 서구 근대 사회가 더욱 친밀하고 이해하기 쉬울 수밖에 없다.

 

전문가가 아닌 바에야 희랍철학과 중세철학은 알면 좋지만 그다지 긴요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서양 근대 사상의 뿌리라는 면에서 무시할 수는 없지만, 끌어 당기는 힘으로서의 매력은 좀 떨어진다.

 

가장 문제적인 것은 <동양의 지혜>로 퉁쳐지는 동양철학이다. 1200 쪽 가까이 되는 이 책의 1/6도 안되는 분량이 1부 <동양의 지혜> 에 허용된 지면이다.  인도와 중국만 해도 영토와 사상 모든 면에서 유럽보다 훨씬 넓고 깊을텐데 고작 1/6일 뿐이다. 사실 이 책은 세계철학사가 아니라 서양철학사라 해야 맞다. 그럼에도 굳이 <동양의 지혜>를 집어넣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싶다.  철학도 아니고 그것도 '지혜'라고 하면서.

 

예상대로 1부 <동양의 지혜>는 그다지 읽을 것이 없었다. 아마 작가 자신도  잘 알지 못하면서 썼을 수도 있다. 서양의 독자들에게는 흥미가 있을지 몰라도 동양의 독자들에게는 어떤 면에서는 쓴웃음을 짓게 한다. 그가 애써 설명하려 하는 어떤 개념들을 우리는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듣고 익혀왔다. 개념적으로, 학문적으로는 작가가 더 많이 알고 있을지 몰라도, 그것의 본래적 의미를 우리는 어쩌면 생득했기 때문이다.  

 

외국의 문학작품을 읽을 때면 늘 아쉬운 것이 있다. 그 작품이 모국 독자들에게 주는 깊이와 감동을 우리는 아마 반 너머 놓치기 일쑤일 것이다. 거꾸로 영어로 번역된 『토지』를 생각해 보면 너무 확연하다. 영미인들이 어떻게 그 감칠맛나는 사투리를 느낄 수 있을까. 동학혁명의 의미도, 일제강점기의 아픔도 모르면서 어떻게 김환과 이동진과 최치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도 그렇다. 문학이 그렇지만 아마 철학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더욱 꼼꼼이 읽어야 하고, 더 많이 읽어야 한다. 우리가 그래야 하듯 서구인들이 동양을 대할 때도 그래야 할 것이다.

 

1부 <동양의 지혜> 따위는 없는 편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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