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하는 페미니즘 - 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정희진 서문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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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이라고 해야 세상의 책들에 비하면 당연 빙산의 한조각이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집적거리며 읽었는데,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은 것이 페미니즘 관련 책이다. 반-페미니스트는 아닌데 굳이 손을 들어야 한다면 비-페미니스트?, 한마디로 별로 관심이 없었다.

 

딸로 태어난 죄로 설움도 당해봤고, 직장생활에서 남녀차별이라는 것도 겪어 봤고, 슈퍼우먼 콤플렉스에도 걸려봤는데, 왜 그렇게 덤덤했는지 모르겠다. 인습에 갇혔기도 했지만 어쩌면 기질 자체가 남성적이어서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라캉의 성 구분 공식에 따르면 아무래도 나는 남성 쪽에 가깝다. 프로이트는 물론 라캉도 남근중심주의자로 비난 받지만, 라캉의 남근은 생물학적 음경과는 관련이 없다. 남근 기표가 뭐고, 성 구분 공식이 뭐고 떠들기에는 이 개념들 자체가 워낙 까다롭기도 하고, 내 밑천이래야 싸락눈 두께도 못되니, 설명할 ‘빵법’은 없다. 다만 세계를 보는 관점에 따라 남성과 여성이 나뉜다고 대충 말할 수는 있겠다.

 

올해 독서회의 책을 추천하다, 스테퍼니 스탈의 『빨래하는 페미니즘』을 떠올린 것은 어차피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작년 버지니아 울프 토론 때, 참고자료로 페미니즘 책을 찾다가 발견한 것이 스탈의 이 책이다.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는데, 뒤늦게야 들어와 읽지 못하고 있었다. 도의적으로(?) 신청자가 읽지 않을 수는 없고, 또 생각해보니 주부 독서회인데도 여성주의에 관한 책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 교육에 관한 책은 여러 권 읽었는데, 정작 우리 자신의 문제에 관해서는 논의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은 나와 같은 이유일까? 나는 페미니즘 자체보다 페미니즘에 무관심한 이유들이 더 궁금하다. 나 역시 따지고 보면 그 이유가 모호하고, 이유를 생각하는 것 자체를 피하고 있다. 어차피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일까... 그나마 안일한 일상이 깨질까봐 두려운 걸까...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르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스트 잡지 《미즈》가 뽑은

‘반드시 읽어야 할 100대 페미니즘 논픽션’에 선정된 바로 그 책

 

『빨래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출판사 홍보문구다. 우선 놀라운 것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100권이나 된다는 것이다. 나는 한 권도 안 읽었으니 페미니즘에 관한한 문맹이다. 이 홍보문구는 또, 과장이 생명인 광고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10대도 아니고 100대 정도는 된다고 고백(?)함으로써, 사실 그렇게 썩 높은 위상의 책은 아니라는 실토(?)를 하고 있는 셈이라, 우습다.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논픽션’ 이라는 분류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고, 소설인가? 수필인가? 기록물인가?, 무어라 불러야 할지 헷갈렸다. 알라딘 분류상으로는 사회과학 분야 중 여성학이론에 속한다.

 

제목만으로는 당연히 페미니즘의 이론서 정도를 연상할 수 있는데, 사실상의 형식은 1인칭 화자 소설에 가깝다. 좋은 점이라면 그만큼 읽기 쉽고 재미있다는 것이고, 나쁜 점으로는 이 책이 소개하는 페미니즘 이론이 그리 체계적이지도 탄탄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취향에 따라 좋은 책도 그다지 탐탁하지 않은 책도 될 수 있다. 나는? 읽을 때는 재미있었다. 나는 feminist가 아니라도 female임은 분명하고, 스탈이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며 겪는 고통과 좌절은 어떤 여자라도 비켜가기 힘든 부분임에 틀림없다. 공감하고 분노하지 않을 여자란 엘리자베스 여왕과 박근혜 대통령에 맞먹을 수 있는 정도의 여성? 조현아씨는 복수의 칼날을 품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테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 생각한다.

 

문제는 혹시 발제를 맡을 경우에 대비해서 정리를 해 보려니 내용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스탈은 사실 이 책을 쉽게(?) 썼다. 졸업 후 사회활동을 하다가, 출산과 육아에 지쳐 자신을 잃어가던 스탈이 어느 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예전에 들었던 <페미니즘 고전 연구> 수업을 청강한다. 2년간의 수업을 통해 읽고 토론한 페미니즘 고전과 스탈 자신의 생활이 교차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물론 홍보문구처럼 이 이야기는 ‘논픽션’이다. 스탈은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그대로 따라가며 촬영하듯 기록한다. 그 과정에서 고전 속 페미니스트의 주장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도 하고 비판도 하고 반성도 하고 각성도 한다. 여기서 소개되는 고전은 26권인데, 내가 그 이름이라도 들어본 책은 4권밖에 안 된다. 물론 한 권도 읽지는 않았다. 내 욕심은 이 26권의 책과 페미니스트들(26명은 아니다. 책들 중에는 반-페미적 책도 있다)의 이론과 사상을 정리해 보는 것인데, 스탈의 설명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체계적 정리가 아니라 수업시간에 있었던 토론의 일부와 그때그때 스치는 스탈 자신의 생각을 조각조각 써놓았기 때문이다. 비-페미니스트로서는 이것만으로 페미니즘 역사의 선명한 그림을 그리기는 힘들다. 스탈이 이 책을 쓴 의도도 물론 그런 것이 아니다. 스탈은 자신의 책이 페미니즘 고전을 직접 읽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을 뿐이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독서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 책을 통해 독서에 대한 열망을 느끼게 되기를 희망한다.”

 

나는 독서 열망 보다는 검색에의 충동을 먼저 느꼈다. 책에서 얻지 못한 페미니즘의 체계를 인터넷에서 건져보리라는 욕심이었는데, 실패했다. 대체로 너무 지엽적이거나 너무 두루뭉술했다. 가장 기본적이라 할 페미니즘 세대별 특성과 대표자도 아직 정리를 못했다. 무슨 책을 보거나 무슨 글을 읽으면 삼빡하게 정리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몇 군데 표시해 놓은 내용이 있다.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나 흥미를 돋우는 것들이다.

 

첫 째, 창세기의 이브에 대한 해석이다. 일레인 페이절스의 『아담, 이브, 뱀 : 기독교 탄생의 비밀』에 나오는 내용이다. 페이절스는 창세기 1장과 2장을 모순으로 간주한다. 1장에서는 성 구분 없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장에서는 알다시피 아담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직접 만든 1차적 피조물인 반면, 이브는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2차적 부속물로 그려져 있다. 설명이 명확하지는 않은데, 하여튼 박해받던 초기 400년 기독교 시절에 원죄는 도덕적 자유와 책임을 비유한 말로 해석되었다. 창세기에 나타난 ‘불복종’이라는 이 주제가 국가의 정치 세력과 맞서 싸우기 위한 부름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브는 투사다. 그런데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되자 창세기 1장과 2장은 자유 의지를 예증하는 상징에서 그 정반대인 인간의 속박과 타락의 상징으로 탈바꿈했다.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다. 방탕한 생활을 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원인을 여자의 사악한 유혹으로 돌렸고, 이브는 악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해석을 받아들인 것은 자신의 고통과 절망을 자기 책임이 아니라 외부의 탓으로 손쉽게 돌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건 내가 아니라 원죄 때문이니, 복종과 회개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가 훨씬 마음 편했다는 것이고, 교회와 권력은 복종을 통해 손쉽게 통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브는 불가피하게 악의 근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페이절스의 견해이다.

 

둘 째, 모성신화에 대한 설명이다. “모성신화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다. 모성신화를 떠받치는 기둥은 어머니는 더 이상 자신만의 야심도 호기심도 욕구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다. p88”

 

셋 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다.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페미니즘의 시조여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름인 것 같다. 1792년 『여성의 권리 옹호』를 출간하며 페미니즘의 탄생을 알렸다. 그녀는 “교육 받지 못한 여자는 인류 공통의 진리, 즉 지식과 미덕을 키울 수 없기 때문에 남자의 동반자가 될 준비를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시조가 다 그렇듯 현대 페미니스트의 눈으로 보자면 페미니즘도 아니지만, 현대의 그 어떤 페미니스트도 따라 갈 수 없는 용기를 가지고 여성의 권리를 주장했다. 흥미로운 것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두 번째 남편(?)이 영국의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인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메리, 훗날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다.

 

넷 째, 케이트 초핀의 소설 『각성』에 나오는 말이다.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포기할 수 있어요. 돈과 생명은 아이들에게 내줄 수 있어요. 하지만 나 자신을 내주지는 않을 거예요. p156” 모성신화와 자기희생을 강요하는 사회는 어쩌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돈과 생명을 내주면 모든 것을 내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대항해 초핀은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나 자신’을 주장한다.

 

다섯 째, 페미니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이다. “여자는 태어나지 않으며 여자로 만들어진다.p205” 비-페미니스트도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다. 보부아르는 남성을 우등한 제1의 성, 여성을 열등한 제2의 성으로 대비시킴으로써, 성차별의 현실을 극명하게 고발한다.

 

여섯 째,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가 현대 여성에게 일으키는 뜻밖의 부작용, 슈퍼맘 콤플렉스다. 50년 전 『여성의 신비』는 여성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당대 문화적 강요를 고발하고, 여성에게도 한 인간으로서의 자아실현의 기회가 필요하며, 적극적으로 사회진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여성의 사회진출은 경이롭게 증가했지만, 모성신화는 사라지지 않았고, 여성은 사회생활과 더불어 출산과 양육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훌륭한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슈퍼우먼, 수퍼맘이 되어야 했다.

 

“여자들은 직장일과 가사일의 이중고를 모두 끝내고 나면, 그러니까 아이들을 재우고 설거지 마친 그릇을 선반에 가지런히 진열해놓고 나면 손 하나 까딱할 정도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아 대의를 추구하는 집회에 참석하기는커녕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생각하기도 어려운 상태가 된다. 여자들 자신이 변화의 주체라고 주장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그러한 심오한 책임의 짐과 더 넓은 사회적 변화를 위한 싸움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데 실패했다. p276”

 

주디 사이퍼스가 1972년에 발표한 에세이에는 “나한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유명한 말이 그저 영화의 재치 있는 제목인 줄만 알았다.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고, 음식을 만들어 주고, 아이를 돌보고, 집 안을 청소하고, 성적 욕구까지 충족시켜 주는 누군가를 뜻하는 암호. 바로 ‘아내’다. p298” 사이퍼스는 “아아, 세상 누군들 아내를 원하지 않겠는가?”라며 에세이를 끝냈다.

 

일곱 째, 모성신화와 슈퍼맘에 이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자기희생’ 이다. 자기희생은 모성신화와 슈퍼맘 콤플렉스가 여성에게 이끌어낸 자기체면 혹은 자기강요라 할 수 있다. 『다른 목소리』로의 저자, ”캐럴 길리건은 여자들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덕목인 자기희생이라는 악의적이고 집요한 믿음이 여자들을 이기심의 망령에 시달리게 만든다고 했다. 자신이 이기적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욕구를 완전히 매몰시키게 만든다는 것이다. p377”

 

그런데 자기희생은 엄마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들까지 옭아매는 경우가 많다. “내가 어떻게 너를 키웠는데!” “엄마가 우리를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 프레임에 갇히면 천하에 나쁜 년놈이 되지 않고 빠져나올 방법은 없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의 바탕에는 예외 없이 엄마의 자기희생이 잠복해 있다. 자기희생을 신조로 살아온 엄마들이 역설적으로 절대 희생하지 않으려는 것 역시 자기희생이다. 자기희생만은 희생할 수 없는 것이다. 이쯤 되면 자기희생은 자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케이트 초핀이 말한 ‘나 자신’을 살지 못한 여성의 자기변명 혹은 자기은폐의 수단일 뿐이다. 자기희생이 부정되면 자기 삶 전체가 부정되는 것이다. 엄마의 비극이며, 자식들의 비극이기도 하다. 캐럴 길리건은 자기희생이 욕구를 희생시킨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자기희생이야말로 그녀 최고의 욕망이다. 그 욕망의 불길은 모든 것을 불태운다. 자신의 삶도 자식의 삶도. 영화 <국제시장>은 우리 현대사가 만들어낸 자기희생의 아버지 버전이다. <국제시장>에 열광하는 우리는 무엇을 불태우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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