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고 연구소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12년 출간된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을 통해서다. 책보다는 우리나라의 청년들이  슬라보예 지젝을 직접 인터뷰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었다. 유명학자도 아닌 청년들이 슬로베니아로 날아가 지젝을 만났다니, 만날 수 있다니, 평범한 사람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니, 부럽고도 놀라웠다.

 

인디고 연구소는 인디고 서원에서 출발했다. 인디고 서원에서 인문학을 함께 공부한던 청소년들이 청년으로 성장하여 만든 공부 공동체가 인디고 연구소다. 2008년에 문을 연 인디고 연구소는 2012년 '공동선 총서' 1권으로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를,  2014년 '공동선 총서' 2권으로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를 출간했다.

 

「공동선 총서는 불가능한 꿈에 과감히 도전한다. 공동선을 열망하는 철학자의 사유와 더불어 불가능한 미래를 가능한 미래로 바꾸고자 한다. 공동선의 사유를 통해 자유와 평등을 향한 공동투쟁의 장에서 잠재된 혁명의 무수한 이름들을 이 세계에 살려낼 것이다. 불가능한 꿈의 시도야말로 인문학의 본질이자 가능한 미래의 징후가 아니겠는가.」

 

'공동선 총서'를 기획하며 던진 인디고 연구소의 출사표다.  짧은 문장에 공동선, 자유, 평등, 혁명, 인문학, 사유, 본질, 투쟁 등 온갖 '선한' 단어가 난무한다. 청년들의 패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치기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공동선이란 무엇인가?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의  <차례>에는 이례적으로 길다란 질문이  붙어 있는데, 인디고 연구소가 여기서 정의한 개념은 이렇다.

 

"공동선이란 개인의 주관적 가치가 보편적인 윤리적 질서와 만나는 지점, 즉 나의 좋음이 세상의 옳음과 맞닿는 곳에서 창조되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좋은 말같은데, 매우 추상적으로 들린다. 인문학이 아니라면 사실 공동선이란 말 따위야 정의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착하게 살자! 그러나 인문학이라면 인디고 연구소가 내린 공동선의 정의는 그 자체로는 아무 내용이 없다. 좋음도 옳음도 보편적인 윤리적 질서도 모두 채워져야 할 텅 빈 단어일 뿐이다. 이 텅빈 기표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 인디고 연구소가 공동선 총서를 통해 하려는 것도, 해야 할 것도 바로 이 작업일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작업의 첫 번째로 슬라보예 지젝을 택했을까? 이 책을 보며 제일 먼저 떠올랐던 의문이다. '선'이란 개념은 지젝과 그닥 친밀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젝이 'commons' 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common goods'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다. 지젝에게 윤리는 차라리 근본악과 더 밀접하다. 말하자면 세상이 망하더라도 나는 물러서지 않겠다... 뭐 이런. 지젝도 인터뷰 첫머리에 '선'에 대한 문제 의식을 제기한다. 공동선에 대한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공동선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변화된 시대에 맞는 공동선에 대한 정의를 먼저 정립해야 합니다. 공동선을 묻는 작업이 이렇게 새로운 의미의 공동선을 정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저는 여러분의 기획에 동의합니다. p45

 

아마 이 인터뷰가 아니었다면 지젝이 입에 올리지 않았을(내가 읽은 지젝의 책 중에 공동선이란 말은 없었다고 기억하므로 막 이렇게 과감히 쓴다;;) 지젝의 '공동선'이란 어쩌면 우리가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선의 개념과는 많이 다를지도 모른다. 지젝의 어떤 주장들은 받아들이기에 힘들만큼 상식과의 괴리가 크다. 물론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는 그런 지젝의 특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기특한 청년들이 떼로 찾아와 배움을 구하는데, 절정고수의 날카로운 초식을 막 던질만큼 몰인정하지는 않다. 바꾸어 말하면 이 책은 읽기는 편하지만, 지젝 특유의 사유를 제대로 맛보기는 어렵다. 지젝은 공동선이라는 부자유스런 틀 안에서도 할말을 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틀이다.

 

 

내가 바우만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최태섭의 『잉여사회』에서다. 몇 번이나 인용되는 것을 보고 유명한 사회학자구나, 짐작만 했다. '액체 근대'라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발명한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인디고 연구소의 '공동선 총서' 2권으로 바우만과의 인터뷰집이 나온 것을 보면서도, 선뜻 내키지는 않았다.  나는 사회학자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학은 철학에 비해 너무 직접적이고 현실적이어서 딱 부러지기는 하는데 미묘한 매력은 없는 편이다.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도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다. 바우만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얻었다는 만족감을 빼면 책 자체의 매력은 별로 없었다.

 

슬슬 넘기면서 읽어서, 내가 정확하게 읽었는지 자신은 없지만, 액체 근대란 말하자면 포스트모던에 대한 바우만식 정의인 것 같다. 근대 그러니까 고체 근대는 단단하고 확실하고, 선악도 딱딱 구분이 되고, 아버지의 법도 살아있는 그런시대다. 액체 근대는 이 모든 확실성이 사라지고, 딛고 있는 땅마저 언제 무너질지 모르고, 오늘 기준이 내일은 일탈이 되고, 한마디로 불안정과 불확실성의 시대다. 노동자로 말하자면 프레카리아트, 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의 시대다.

 

바우만은 현재의 액체근대를 '공위의 시대' 라고도 표현한다. 고체근대 즉 국민국가의 시대에는 권력과 정치가 통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액체근대에서 권력은 세계화된 자본으로 넘어갔다. 반면 정치는 여전히 근대국가의 틀 안에 놓여 있다. '정치에 의해 규제되지 않은 권력'과 '권력을 빼앗긴 정치'가 남았다. 당연히 UN은 세계화된 자본을 규제할 수 없다. UN은 근대 국민국가의 주권을 상호 침해하지 않기 위해 탄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귀에 따갑게 들어왔던 대로 꿰맞추어 보자면 토대는 세계화되었는데, 그에 걸맞는 상부구조는 없다. 이것을 바우만은 '공위' 라고 부른다. 비었다. 이 빈자리에 적합한 정치형태가 들어와 권력과 다시 결합하여야 세계화된 자본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인디고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이제 몇 살쯤 되었을까? 책을 읽고 문득 궁금해졌다. 인디고 서원의 청소년들이 자라서 청년이 되고 그러고도 7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서른쯤은 되었을까?  함께 책을 읽은 친구들이 어른이 되어가면서도 함께 생각하고 함께 실천하는 그런 삶은 참 좋을 것 같다. 내가 참여하는 작은 독서회도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들 주변의 수많은 독서회들이 그렇게 된다면 진짜 신나는 세상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런데, 읽은 책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너무 심하게 이름들을 끌어다 댄다. 맥락상 별 관련이 없는 지식인들의 이름을 가져오고, 불필요한 인용들을 한다. 핵심을 치고 들어와 머리에 탁 박히는 질문이 될 수도 있을 수 많은 문장들이 "누구 누구의 어떤 어떤 책에 무슨 무슨 말이 있는데,..." 따위의 서두 때문에 산만해지고 만다. 바우만 앞에서 그런 말은 사실 번데기 앞의 주름잡기 같아 읽는 내가 살짝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이렇게 불러댄 그 많은 학자들과 책들을 제대로 읽고 이해는 하고 있을까 살짝 의문이 들려고도 한다. 그런 것 없이도 인디고 연구소는 충분히 멋져 보인다.

 

 

 

 

 

 

 

 

 

 

 

 

 

 

 

 

 인디고 서원의 이런 책들.... 읽어 보진 않았다. 후루룩 넘겨 보니 아이들이 쓴 독서일기 같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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