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사 - 독일 정신은 존재하는가
비토리오 회슬레 지음, 이신철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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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체계에 대한 동경 : 독일 관념론

 

오직 하나의 철학 노선, 즉 독일 관념론만이 ‘독일’이라는 덧이름을 획득했다. 왜인가? 한편으로 그것은 독일이 산출한, 지적으로 가장 요구하는 바가 많은 철학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그 이전 독일 철학의 거의 모든 혁신적 성취를 철학적 사유의 가장 복잡한 형태인 체계의 형식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모두가 신학을 공부한 주요 인물 3명의 종교적 동기는 세계사적으로 새로운 형식의 철학적 종교성을 성립하는데 기여했다. 새로운 형식의 그 종교성은 19세기 독일의 특히 프로테스탄트적인 교양 시민층에게 그러나 또한 그 발상에서 가톨릭적 시민층에게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다른 유럽 나라에서는 그에 대한 등가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p163

 

여기서 주요 인물 3명은 당연히 피히테, 셸링, 헤겔이다. 독일 관념론이 ‘지적으로 가장 요구하는 바가 많은 철학’이란 말은 엄청 어렵다는 말로 새겨야 할 것 같다. 피히테, 셸링은 잘 모르겠지만, 헤겔이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 누구나 안에는 헤겔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더 많겠지만, 읽어보지 않고도 어렵다는 것을 알만큼 헤겔은 어렵다. 새롭게 읽히는 단어로 ‘체계’가 있다. 체계가 철학적 사유의 가장 복잡한 형식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체계가 사유의 형식이란 의미로 쓰이는 것도, 체계라는 말은 워낙 일상적으로 써왔기 때문에 더 생경하게 읽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 3인방이 독일 철학의 성과를 ‘독일 관념론’ 으로 체계화했다고 일단 이해한다.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2~1814)의 철학적 성취는 무엇인가? 저자 회슬레는 일곱 개로 요약하고 있는데, 어차피 몇 줄짜리 글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우니 그 중 몇 개만 옮겨 보겠다.

 

첫째, 철학에 대한 개념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철학은 개별 과학의 근본 명제들 및 이 원리들로부터 정리를 끌어내는 논리학을 정당화하는 과제를 지닌다. 더불어 철학은 학문들의 체계 내적 통일을 제시해야만 한다. 이러한 학문의 학문은 그 자체가 학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철학은 그 자신의 근본 명제를 필요로 하는데, 그 근본명제는 형식과 내용의 특수한 통일에 의해 자기 자신을 근거 짓는다. 피히테의 첫 번째 근본명제는 “나는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단적으로 존재한다.” 이다. 형식논리학은 초월론적 논리학에 의해 근거 지어져야 한다.

둘째, 피히테는 다른 칸트 비판자들이 그러하듯이, 초월론적 철학으로부터 사물 자체를 제거하고자 한다. 자아에서 가분적 자아에 가분적 비아를 대립시키는 것은 항상 자아이다. 자기의식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으며, 의식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은 배제된다.

셋째, 피히테의 개념에는 변증법적 방법에 대한 발상이 감지된다. 하나의 개념과 그것의 대립 개념으로부터 매개하는 개념이 형성되는 것이다.

넷째, 피히테 철학은 1인칭인 바, 유아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 피히테는 이러한 위험에 직면해 상호 주관성의 연역을 시도했다. 비록 불만족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엄청난 성취이다.

 

에크하르트처럼 피히테도 참된 종교는 단지 관조적인 것이 아니라 활동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실천적 믿음만이 우리를 앎의 심연으로부터 구해준다. 우리에게 현실의 객관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이론적 논증이 아니라 의무의 명령일 뿐이기 때문이다. 신은 스스로를 세계 내부적으로 가령 아름다움으로서, 정의로운 국가로서, 학문으로서 현현한다.

 

피히테를 독일 내셔널리즘과 묶어 주는 것은, 1808년 프랑스인이 점령한 베를린에서 연설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다. 프랑스 점령군은 피히테도 한 때는 경탄했던 나폴레옹의 혁명군이다. 개별적인 독일 국가들과 종족들을 넘어서, 독일은 1871년에야 통일되었다, 하나의 국민에게 호소하는 피히테의 연설들은 독일 내셔널리즘의 형성에 기여했다. 오로지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감정만으로 피히테는 남성과 여성을 위한 포괄적인 국민교육을 요구했다. 독일의 내셔널리즘은 프랑스의 권력 정치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그는 세계 시민적인 독일인을 기원했지만 동시에 언어의 근원성을 기준으로 게르만적 혈통의 다른 국민과 독일인을 구별했다. 고유한 언어가 고유한 국가에 대한 권리를 근거 짓는다는 것이다. 피히테는 독일인의 철학적 정신을 강조하며 이 철학적 정신에 의한 세계 지배를 약속한다. 그러나 그는 위험한 방식으로 실재적인 독일 국민과 융합한다. 피히테는 마키아벨리를 열광적으로 찬양하며 독일 국민으로 하여금 프랑스인에게 저항할 투쟁의지를 고무시키기 때문이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1789년 프랑스혁명에 이르기까지 절대 왕정시기의 유럽은 소규모 군대와 귀족 장교단으로 구성된 ‘군주들 사이의 전쟁’ 만으로 평화를 유지해 왔다. 피히테의 선동은 이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이 제한적 내각 전쟁을 깨뜨린 것은 프랑스 혁명군이었다. 그러나 만약 피히테가 그의 잠재적 해방 전사들에게 그들의 행위로부터 구원의 시대가 새롭게 시작될 것이라고 약속한다면 한계를 넘어서 있다.

 

 

신동이었던 프리드리히 벨헬름 요제프 셸링((1775~1854)은 15세에 튀빙겐 복음주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의 같은 방에는 헤겔과 횔덜린이 있었다. 그들의 이념은 서로에게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횔덜린(1770~1843)은 근대정신에서 겪는 자신의 고뇌를 엄청난 복잡성을 지닌 시작들에서 표현했으며, 계몽의 역사 낙관주의에 맞서 인간의 역사를 신적인 것으로부터의 소외로 해석했다. 근대의 객관적 관념론은 셸링에 의해 창조되었는데 헤겔 후기 이념들에서 그 대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셸링은 그 이념들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헤겔은 그들의 우정을 상실한 후에도 친구의 천재적 이념들을 셸링 자신이 할 수 있었을 것 보다 더 훌륭하게 체계화했다. 셸링의 프로그램은 헤겔에 의해 비로소 유럽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셸링은 처음에는 자신보다 못했던 사람이 더욱 훌륭한 성과를 거둔 것에 분노했다. 헤겔을 마치 식물의 잎을 갉아 먹은 벌레에 비유하는 편지를 다른 지인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했던 것은 체계성에 대한 헤겔의 유일무이한 감각, 셸링의 이념들로부터의 헤겔의 선택 그리고 법철학과 국가철학에서의 헤겔의 탁월성이 비로소 독일관념론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셸링은 피히테주의자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를 피히테로부터 곧바로 구별해 주는 것은 세계의 물질적 풍부함에 대한 관심이었다.

 

1803년 《자연의 철학에 대한이념들》의 제2판에 대한 중요한 보론들에서 셸링은 자신의 새로운 입장을 절대적 관념론으로서 피히테와 자신의 초기 저작의 상대적 관념론과 구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을 더 이상 유한한 의식에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와 유사하게 양자를 절대자의 현현으로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개념은 우리가 사물에게 강요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래적 본질을 파악한다. P183~4

 

셸링의 새로운 철학의 중심은 헤겔과 함께 편집한 《철학 비판 저널》이었다. 데카르트 이래로 지배적인 이원론의 극복을 현대 철학의 결정적 과제로 삼았다. 그것은 “세계와 신의 화해라는 참된 복음의 시대”에 대한 종교적 희망과 결합한다. “그리스도교의 시간적이고 한갓 외적인 형식은 몰락한다.” 이를 위한 지적 작업은 동시에 윤리적 과제이기도 하다. 셸링은 후기에 전통 그리스도교로 복귀하며 신화학에 열심이었다. 셸링에 따르면 신화 그 자체 안에 진리가 존재한다. 겉보기에 무의미한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는 셸링의 최후 작업을 독일 관념론의 해석학의 정점으로 만든다. 자연철학이 전혀 사유하지 않는 것 속에서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후기 작업은 명백히 이성에 배치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 속에서 이성을 추구한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이 쓴 최초의 책,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차이》는 헤겔이 셸링의 충실한 추종자였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예나 시대 헤겔의 주저인 《정신현상학》 서문에서부터 셸링의 동일성 이론으로부터의 이반이 시작되었다. 《정신현상학》은 절대지로의 상승을 명확히 하며, “참된 것은 전체다.” 라는 헤겔의 전체론을 장엄하면서도 모호한 언어로 전개하고 있다.

 

절대지는 본질적으로 결과라는 것이다. 헤겔은 감성적 확신의 가장 단순한 것으로부터 절대지에까지 이르는 의식 형식의 만화경을 펼치는데, 거기서 성숙한 체계들의 범주들로 하자면 주관 정신으로부터 객관 정신을 거쳐 절대 정신으로, 그러므로 철학적 심리학으로부터 사회론을 거쳐 종교철학에로 움직여 간다. (…) 저작의 목표는 두 관점의, 즉 주관과 객관의 그러나 또한 나와 우리의 일치다. 왜냐하면 《정신현상학》은 상호 주관성이라는 주제에 《엔치클로피디》 보다 많은 공간을 배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지배와 예속’ 장은 마르크스로부터 샤르트르에 이르는 이후의 발전을 너무도 지속적으로 각인했다. p192

 

헤겔의 역사철학은 19세기에 광범위한 독자들이 읽었으며, 그에게 진보를 장담하는 낙관주의적 역사철학자라는 이미지를 부여했다. 그에 반해 복잡한 그의 형이상학은 오직 소수에 의해서만 파악되었다. 헤겔은 의심의 여지없이 자연과 정신에서의 절대자의 현현이 그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헤겔이 그에 못지않게 확신하고 있는 것은 정신이 체계의 첫 번째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은 자연으로부터 전개되는데, 그 자연은 자기를 근거 짓는 이념적 구조를 전제한다. 그 이념적 구조를 헤겔은 창조 이전의 신의 본질로 표현한다. 논리와 자연 그리고 정신이라는 바로 이 삼분법이 헤겔의 성숙한 체계를 특징짓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헤겔의 체계를 그토록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인가? 왜 언제나 거듭해서 헤겔의 르네상스가 존재했으며, 왜 중요한 철학자들은 그와의 대결을 회피하지 않는 것인가?

 

첫째, 헤겔은 철학사의 가장 위대한 체계 형성자이다. 그는 학문의 내적 건축술에 대한 선험적 설명을 하고자 한다. 종합적-선험적 판단이 아니라 개념의 선험적 체계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개념은 우리가 현실에 덮어씌우는 어떤 것이 아니다. 개념이 경험으로부터의 추상에 의해 획득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실재 자체가 개념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객관적 관념론(또는 절대적 관념론)은 개념경험주의가 견지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근본적 개념은 스스로를 선험적인 구성 과정에 빚지고 있다는 통찰과 우리의 개념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개념 때문에 현실의 맥박에 다가선다는 실재론적 확신과의 결합이다. p195

 

둘째, 헤겔의 대명사, 변증법이다. 헤겔 변증법의 모든 이성적 재구성은 모순율을 전제한다. 결정적인 것은 뵈메에게서처럼 부정적인 것을 절대자 내로 통합하는 것이다.

 

논리학의 최종 범주, 즉 ‘절대적 이념’은 그의 개념들의 삼분법 구조의 근저에 놓여 있는 원리다. 긍정적 개념 뒤를 부정적 개념이 뒤따르며, 마지막으로 종결하는 종합적 개념이 뒤따른다. 종합적 개념을 형성하는 이성을 헤겔은 ‘변증법적’이 아니라 ‘사변적’이라고 부른다. p196

 

체계의 가장 포괄적인 삼분법은 논리, 자연, 정신으로의 구분이다. 정신은 물론 자연에서 유래하지만 동시에 논리학으로 귀환함으로써 자연을 초월한다. 정신은 자연 발전의 결과이지만 자연은 처음부터 개념적 구조에 참여하고, 이 구조를 파악하는 자연 존재를 산출해야 한다. 정신의 최종 형식은 철학이다. 철학에서는 처음부터 체계의 전개에서 일어났던 것이 명시적으로 해명된다. 체계는 자기 회복에서 완결된다.

 

셋째, 헤겔의 자연철학이다. 헤겔은 자연의 부분적인 선험적 인식 가능성을 가르치면서도 칸트와 달리 실재론적 직관을 배반하지 않는다. 자연의 풍부한 형태에서 절대자의 현현을 인식하면서도 정신에의 목적론적 정합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헤겔의 자연철학을 무시하고 《정신현상학》과 《엔치클로페디》 제3부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체계의 객관적인 관념론적 전체 구조를 놓친다. 요컨대 그 체계를 주관주의적이고 구성주의적으로나 심지어 역사학적으로 잘못 해석하게 된다.

 

짐작컨대 칸트와 헤겔의 선험주의는 독일의 자연과학을 가령 영국의 그것보다 더 강력하게 사유 실험과 보편적 원리에 대한 이론적 반성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동시에 힘주어 견지해야 하는 것은 헤겔이 라이프니츠와 달리 범논리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실재적인 것의 세계 안에 환원 불가능한 우연성이 존재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헤겔에 따르면 실재철학에서는 논리학에서와 달리 일정한 경험 내용의 개념적 구조로의 귀속이 요구된다는 것을 자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거기서는 필연적으로 개념적 구조의 도출이 문제로 되는 것은 아닌 잘못이 생겨날 수 있다. p200~1

 

넷째, 헤겔은 계몽과 고전주의 및 초기 낭만주의가 획득한 모든 통찰을 하나의 체계 속에 편입시킴으로써, 그것이 없었다면 1933년까지 독일 정신과학의 장대한 전개가 가능하지 않았을, 정신의 이론을 창조했다.

 

헤겔은 인간 정신이 개념들을 창조한다는 것을 논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재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원리적으로 다만 실재가 개념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고 오로지 그에 의해서만 가지적이기 때문일 뿐이다. 몰개념적인 사물-자체는 헤겔에 따르면 자기 모순적인 개념적 구성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존재는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도 한데, 왜냐하면 언어에서 정신은 세계의 개념적 구조를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p202

 

헤겔의 《법철학 요강》은 독일의 법철학과 국가철학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다. 헤겔은 시대의 정치적 변화에 민감했다. 헤겔은 프랑스혁명의 중요한 이념, 특히 법적 평등은 프로이센에서 실현되었다고 생각했다. 헤겔은 피히테와 달리 독일 내셔널리즘을 반감을 갖고 고찰했다. 그는 결코 공동의 국민을 국가의 필요한 요소로 간주하지 않았다. 정당한 국가를 위해 결정적인 것은 법이념의 실현이다. 헤겔이 부각시키는 구체적인 국가는 고전적인 자유주의 국가이며, 헤겔의 국가는 국가 이전의 자연법을 인정한다. 나아가 헤겔은 자율적인 시민사회를 옹호한다. 그는 시민사회를 주제화한 최초의 독일인이다. 국가에 대한 헤겔의 윤리적 정당화는 국가에 의한 사회적 문제 해결을 고취한 사회국가적 프로그램이 설계되도록 추동했다. 그의 중심적 국법상 요구는 권력 분할과 관련이 있는데, 국가 권력은 왕권과 상원 그리고 하원의 협력에서 표현된다.

 

절대정신은 헤겔에게 세계의 절대적 원리를 확인하는 인간적 시도다. 그것은 예술, 종교, 그리고 철학으로 표현된다.

 

7장의 3인방은 모두가 매우 어려운데, 설상가상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번역이 몇 개 있다. 오역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 같은데, 일단 한글 문법상 전혀 문장이 성립되지 않는다. 도대체 왜, 이런... 무슨 말일까요?

 

① (…) 제시한 체계가 과연 타당성 이론적으로 실제로 ‘현상학’을 필요로 하는지 의심스럽고 (…) p191

② 그에 반해 그의 형이상학의 근거짓기 이론적인 복잡성은 오직 소수에 의해서만 (…) p193

③ (…) 모든 통찰을 그 근거짓기 이론적인 복잡성이 그 통찰에 걸맞은 (…) p201

 

 

 

08 그리스도교 교의학에 대한 반란 : 쇼펜하우어의 인도 세계 발견

 

지금까지 독일철학은 종교철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독일철학의 바탕에는 항상 종교를 이성적으로 근거 지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런데 독일 최초의 반 그리스도교 철학자가 등장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이다. 그는 유럽 최초의 불교도 철학자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는 희랍인 이래로 존립해온 로고스 철학에 철저히 도전하면서도 유물론으로 빠지지도 않았다. 니체와 그 후손들은 쇼펜하우어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피히테와 헤겔에게서 협잡꾼을 보았으며, 그리스도교 및 교회와 국가에 순응한 대학 철학을 경멸했다.

 

쇼펜하우어는 극도로 보수적이었다. 그는 모든 역사철학을 거부했고, 민주주의에 명백히 적대적이었다. 그의 여성 혐오는 유명하다. 키르케고르가 성적 장애로, 니체는 아마도 동성애로 그러했을 것에 반해 쇼펜하우어의 여성 혐오는 반대로 그가 여성을 성적으로 아주 강하게 욕망했기 때문이다. 여성은 그의 금욕을 위태롭게 했다. 쇼펜하우어가 그리스도교를 거부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유대적 유산 때문이라는 점에서 특히 위험하다. 그는 피히테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인권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시민권은 박탈한다. 그는 유대교를 고등 문화의 가장 저급한 종교로 간주한다.

 

쇼펜하우어는 1848년 독일 혁명 실패 이후, 독일인으로부터 정서적 공감을 획득했다. 그의 성공은 그가 세계 고통을 강력하게 표현한다는 점에 있었다. 이러한 염세주의는 인간들이 고통을 삶의 정상적인 부분으로서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시기에 전개된다.

 

우파니샤드 및 불교와 더불어 쇼펜하우어는 플라톤과 칸트에게서 자신의 철학의 가장 중요한 원천을 보았다. 그의 철학은 분명히 칸트에 대해 반작용하며, 그는 사물-자체에 빛을 비추고자 하는 독일 관념론자들의 소망을 공유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쇼펜하우어는 여전히 강력하게 칸트의 주관주의에 붙잡혀 있으며 또한 그것을 필요로 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그에 따르면 주관주의야말로 현상적 세계를 무조건적으로 지배하는 결정론을 최종 심급에서 회피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현상하는 대로의 세계는 우리의 표상이다. 공간, 시간, 인과성 (그가 인정하는 유일한 범주)은 다만 우리의 주관적 구성일 뿐이며, 아니 칸트의 초월론 철학을 인간학적으로 피상화하는 동일성 이론에 근거하자면 우리 뇌의 기능일 뿐이다. 물론 우리는 어떻게 공간이 뇌와 같은 공간적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 물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쇼펜하우에 따르면 현실의 최종 근거는 인식 불가능한 사물-자체가 아니라 내관으로부터 확신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성이나 개념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다. p221~2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프로이트를 선취하는데, 완전히 의식적인 사유의 본래적 근원 근거로 무의식적인 것을 지시한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을 최고의 예술로 꼽는다. 음악은 이념의 모상이 아니라 의지 자체이기 때문이다. 감정에 대한 힘과 개념으로 옮겨질 수 없다는 그 불가능성 때문에 음악은 유일무이한 지위를 획득한다. 쇼펜하우어에 열광적으로 반응한 천재는 바그너였다. 바그너는 <니벨룽겐의 반지>를 쇼펜하우어에게 보냈다. 쇼펜하우어의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았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무대 축제극은 쇼펜하우어의 이념을 표현한다. 바그너에게 새로운 것은 몰락이 시인-작곡가가 긍정하는 폭력에 의해 실행된다는 점이다. 모럴니스트인 쇼펜하우어는 지그프리트의 소박한 잔혹성에서 기쁨을 느끼기 어려웠지만, 바그너는 그의 가장 이지적인 제자를 사로잡았다. 니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니벨룽겐의 반지>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은 니체만이 아니었다. 굴욕을 당한 민족은 1918년 이후 스스로를 지그문트의 고통과 동일시하고 자신의 지그프리트를 기대했는데, 이 민족은 1933년에 그를 얻었고, 그는 전적으로 계획에 따라 신들의 황혼을 실행했으며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적 환상을 피비린내 나도록 진지하게 생각했다.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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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사 - 독일 정신은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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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독일의 윤리 혁명 : 임마누엘 칸트

 

칸트, 특히 칸트 윤리학에 대한 윤곽을 이렇게 잘, 사실은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놓은 글을 찾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40쪽 정도 되는 칸트 부분을 쉬지 않고 읽었는데, 조각조각 알고 있던 내용들에 어렴풋하나마 어떤 형체가 갖춰지는 것 같았다. 저자가 이미 공언했듯이 ‘스카이뷰’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며, 내게는 칸트가 특히 그렇다.

 

쾨니히스베르크는 임마누엘 칸트(1724~1804)의 고향이다. 동프로이센의 수도였지만, 2차 대전 이후 소련에 양도되어 칼리닌그라드로 불리고 있다. 러시아의 정치적 격동 속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페트로그라드와 레닌그라드를 거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그 이름이 바뀌어 왔지만, 소련 정치인 미하일 칼리닌의 이름을 딴 칼리닌그라드는 지금도 칼리닌그라드로 불리고 있다. 밀란 쿤데라는 『무의미의 축제』에서 어떻게 칼리닌이 자신의 이름을 지금까지도 지킬 수 있는지를 스탈린과 칼리닌의 일화를 통해 재미있게 들려준다. 쾨니히스베르크 즉 칼리닌그라드를 평생 떠나 본적이 없는 걸로 유명한 칸트는 러시아 사람들이 우기려고만 든다면 어쩌면 러시아인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누구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칸트는 철두철미 독일어로 사고하고 독일어로 책을 썼기 때문이다. 덕분에 모든 나라의 철학자들은 150년 동안이나 독일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의무와 부담을 안게 되었다. 칸트는 거의 전 생애를 대학이라는 제도 안에서 보냈다. 그에 의해 대학은 동업 조합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지적인 혁신을 지닌 장소로서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신망을 획득했다. 칸트는 신동이 아니라 대기만성 형 늦깎이였다. 칸트 최초의 신기원적인 철학적 저작 『순수이성비판』은 1871년, 그의 나이 57세에야 출판되었다.

 

 

칸트 철학의 의식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칸트는 이론철학에서 낡은 형이상학을 파괴한다. 형이상학이 아니라 ‘낡은’ 형이상학이다. 칸트의 세 개의 비판이론은 새로운 형이상학을 준비하는 것이지, 모든 형이상학을 철폐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전통적인 신 존재 증명은 어느 것도 살아남을 수 없다. 변신론 문제에 대한 모든 교의적 해결책도 실패한 것으로 본다.

 

둘째, 칸트는 실천철학에서 신에 대한 새로운 접근 통로를 열었다. 에크하르트가 그 단초를 보인 것처럼, 칸트는 역설적으로 피안에 대한 모든 희망을 완전히 없앰으로써 새로운 윤리학의 정초를 마련했다. 칸트는 도덕적 행위가 개인적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고대의 이론에도 반대하며, 도덕적 행위의 가치는 오직 자기 목적으로서 행해지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윤리학의 근저에는 오히려 정언명법, 다시 말하면 의지주의적인 신이나 원리적으로 변화 가능한 도덕 감정 같은 타율적 요인이 아니라 실천 이성의 자기 입법에 힘입은 무조건적 명령이 놓여있다. 특징적인 것은 칸트가 감정윤리학도 타율적인 것으로 거부한다는 점이다. p107

 

윤리학을 이성에 부합시킨 칸트의 영향은 오늘날까지 독일문화에 지속되고 있으며, 그의 반-행복주의는 독일이 법치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정서적 결합을 희생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강화해 왔다. 칸트의 윤리학은 앵글로색슨의 개인주의적 국가철학과는 완전히 다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존엄은 비록 자신을 위해서라도 흥정될 수 없으며, 법·권리는 사실적인 이해 조정에로 환원될 수 없다. 칸트는 행복론으로 이해되는 모든 윤리학에 대해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우리가 제레미 벤담의 것으로 알고 있는 실증주의의 대표적 구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은 칸트의 윤리학과는 정반대의 편에 있다. 칸트는 행복이 아니라 숭고에 가치를 부여한다. 독일 비극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희생함으로써 존엄을 지킬 수 있다.

 

독일정신사에서 칸트의 특수한 지위를 이루는 것은 그가 계몽과 그것에 본래적으로 적대적 의도를 지닌 경건주의 사이의 균형, 즉 그것의 완전한 표현이 바로 그 자신의 인격적이고 지적인 통합성인 그러한 균형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는 독일의 종교성을 라이프니츠처럼 모든 학문적 영향뿐만 아니라 사회를 변형시키고자 하는 소원에 대해서도 열어 놓았으며, 역으로 계몽주의적 노력에 대해서도 동시대의 프랑스 철학자들에게서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윤리적인, 아니 바로 종교적인 추진력을 부여했다. 모든 것을 이성의 법정 앞으로 끌어내는 것은 칸트에 따르면 종교적 의무다. 그 점이 칸트의 철학함의 엄청난 진지함을 근거 짓고 있는데, 그러한 진지함은 많은 경우 그야말로 소박한 것으로 나타나고 아이러니에 대단히 낯설다. 요컨대 칸트의 발상은 비극에 날개를 달아주었지만 희극적인 것에 대해서는 유해했던 까닭에 그 장르에서는 독일 문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p110

 

세 번째, 이론철학과 실천철학 사이의 다리 놓기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 인간 정신의 자율에 새로이 자유로운 공간을 열어주었다.

 

칸트의 천재적 착상은 그가 인과율에 대해 교조적 형이상학도 흄의 회의주의적 경험주의도 충족시킬 수 없는 타당성을 확증에 주는 동시에 인간적 자유의 가능성도 보존한다는 점에 존재한다. 칸트에 따르면 인과성과 그와 비슷한 다른 범주들, 아니 더 나아가 바로 공간과 시간이 우리로부터 유래한다. 우리가 그것을 현실에 강요하는 것이다. p111

 

이성은 범주들 없이는 세계를 전혀 경험할 수 없다. 범주들은 선험적으로 타당하다. 세계의 통일은 신이 아니라 자기의식의 통일에 근거한다. 우리가 사물들에 인과성을 규정하는 그 행위에 의해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인과성은 우리의 자발적인 정립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것을 ‘초월론적(transzendental)’ 이라고 이름 붙였다.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은 낭만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유에 대한 믿음과 외적 현실에 대한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따르는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칸트가 없었더라면 아마 낭만주의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계몽주의자인 칸트 자신은 낭만주의에 비판적으로 대립했다.

 

그런데 인과성이 사물들 자체가 아닌 현상들에 제한되어 있다면, 칸트는 어떻게 사물들 자체가 우리를 촉발한다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인식 불가능한 예지체들(Noumena)의 나라에 관한 칸트의 말은 그 자신의 기준에 따르면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요한 것은 칸트의 그야말로 유령 같은 부분론이다. 칸트는 분명 근세철학의 데카르트적 노선, 즉 근대화하는 노선에 속한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 그는 데카르트와 근본적으로 관계를 끊는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의식 흐름이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것으로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칸트는 우리 의식의 시간성 자체가 다만 그 자체에서 우리의 것의 주관적 변형일 뿐이다. 시간성은 현상적 자아에 속하지 분명히 무시간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예지적 자아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라는 공허한 점에 의하거나 우리의 실천 이성을 통하는 것 외에는 예지적 자아에 이르는 접근 통로를 지니지 않는다. 이 두 가지에서 독일 관념론은 시작될 것이다. p113

 

칸트는 선험적 종합 판단(synthetisches urteil a priori) 의 발견을 자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성취로 간주했다. 선험적 종합판단은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거꾸로 칸트는 경험 일반의 선험적 이론을 기초하고자 했다. 칸트는 상식을 “그 권위가 오로지 공공연한 소문에 기초할 뿐인 증인”이라고 논박한다. 흄을 비판하며 형이상학은 단지 전체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도 학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험적 종합 인식의 실존과 그 근거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하나의, 아니 아마도 바로 그 결정적 문제이며 그에 대한 몰두가 독일 철학을 영국 철학과 구별해주는 바로 그 독일 철학의 본질 징표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은 오늘날에도 견지될 수 있다. 물론 칸트는 자신이 선험적으로 종합적인 것으로 간주한 그 판단들 모두의 공통된 징표를 제시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p114~5

 

칸트에 관한 설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남았다. 내용상으로 이미 말해졌지만 여하튼 칸트의 세 가지 비판 이론이 그것이다. 첫 번째 비판은 경험주의와 이성주의 사이에서 가운데 길을 제안하고 있는 『순수이성비판』이다. 칸트는 영국의 경험주의자들 보다 더 철저하고 일관되게, 경험으로부터 분리된 형이상학적 사변을 무의미한 것으로 거부한다. 오로지 경험과 관련해서만 입증 가능한 인식이 존재한다. 경험이 가능한 것은 그것이 종합적-선험적이고 모든 인식에 대해 타당한 원리에 의해 이끌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경험은 감성(직관)과 개념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생겨난다.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며,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직관은 개별적인 사물들이나 사건들로 향하지만, 그것들은 만약 인식이 성립해야 한다면 개념 밑에 포섭되어야만 한다. p123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들에 대한 반성은 실증주의에는 없는 칸트의 이성주의이다. 경험은 오직 열두 개의 순수 지성 개념 즉 칸트가 논리학의 판단 형식들로부터 획득한 범주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 범주들은 ‘나는 생각한다’ 라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과 감성적으로 주어진 것의 다양 사이를 매개해야만 한다. 범주적으로 구조화한 객관적 세계만이 스스로를 통일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자기의식에 관계할 수 있다.

 

칸트는 자신의 도덕철학을 『윤리형이상학 정초』와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윤리형이상학』에서 전개했다. 칸트는 예지계와 현상계를 구별하는데, 이 이원론이야말로 비양립주의적인 자유의 가능성을 보장한다. 윤리법칙은 오로지 그것이 자유의 표현일 때만 우리를 구속할 수 있다. 자기규정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유는 인과적 비결정성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유와 동일하지 않다.

 

칸트의 경험주의적 인식론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규정하는 실천 이성이 실질적 윤리학이 아니라 오직 형식적 윤리학만을 근거 지을 수 있다는 것에로 이어진다. 그의 최초의 정식화에서 정언명법은 다음과 같다.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으로 될 것을 네가 동시에 의지할 수 있는 준칙에 따라서만 행동하라.” 그것으로 칸트는 앙시앵 레짐의 무수한 불평등으로 규정된 법체계와 사회 질서를 우선은 점진적으로 그리고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서 훨씬 더 빠르게 평등한 의미로 개혁한 계몽의 근본 사상을 개념화한다. 칸트는 어떤 사람에 대해 어떤 것이 허락되는 것은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이것이 다른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때뿐이라는 보편주의적 확신을 표현한다. p128~9

 

도덕적 행위는 단지 의무에 적합하게가 아니라 의무로부터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칸트는 어떤 단 하나의 행위에 대해서도 그것이 의무로부터 행해졌다는 걸 확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천 이성의 요청은 결코 앎의 지위를 지니지 못한다.

 

칸트의 중심적 윤리 사상이 근대의 법률적 사고 형식을 받아들이는데 존재하는 까닭에 그가 법의 도덕적 정당화를 제공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정언명법에 따라 모든 인간은 자유에 대한 본원적인 권리·법을 지닌다. 법은 내적 태도가 아니라 외적 행위, 도덕성이 아니라 적법성에만 관계되며,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자유의 규제에 맞추어져 있다.

 

제3비판은 미학적 판단력에 대한 비판과 목적론적 판단력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3비판은 자연과 자유, 지성과 이성 간의 이원론을 조정하는 중심 과제를 지닌다. 칸트는 미학 최초의 저자는 아니지만 미학적 반성 없는 철학의 체계를 결코 완전한 것으로 여길 수 없는 그러한 최초의 저자이다.

 

 

 

06 종교적 과제로서 정신과학 : 레싱, 하만, 헤르더, 실러, 초기 낭만주의와 빌헬름 폰 훔볼트

 

독일 정신과학의 원천은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루터교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루터교 목사의 자손이거나 루터교 신학을 공부한, 지적으로 뛰어나고 도덕적으로 온건한 이 사람들에 의해 종교가 위기를 맞이했다. 신학에 대한 문헌학에 의해 개별적 성서 텍스트 간의 모순이 명백해졌고, 성서 이야기의 역사적 신뢰성이 붕괴했다. 계몽의 보편주의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에 제한된 구원사를 새로운 윤리학과 양립될 수 없는 편협성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18세기 말에 독일의 정신적 엘리트들 내에서 일어나는 루터교의 변형은 좀더 복잡해서 문헌학의 종교적 동기를 보존하는데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보편사적으로 확장되고 철학적으로 정초된다. 우리는 신학과 철학 그리고 문헌학의 삼위일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계속해서 열심히 연구하는 신의 말씀은 더 이상 성서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역사 전체에서 현현한다. 인간 정신의 역사를 통일로서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박학함의 관심이 아니다. 거기서 문제되는 것은 종교적 과제이며, 아마도 그러한 과제만이 바로 우리가 그것을 완수함으로써 실제로 지속적인 것을 성취할 기회를 갖게 되는 그러한 것들일 것이다. p142

 

유일신교의 전통이 없고 개인적으로도 종교가 없는 입장에서, 서구철학이 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참 이상해 보일 때가 많다. 중세와 함께 신학은 잊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지만,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까지도 신학과 철학을 결합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신학 없이는 철학이 불가능함을 역설하는 사람도 있다. 서구 문화 전반이 그렇지만 신학적 배경 없이 철학 읽기가 참 어렵다. 계몽주의와 함께 위기를 맞은 신학은 그러나 뒤이어 신학 자체를 보편화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역사에서 다시 살아난다.

 

6장은 이십 여 쪽의 짧은 분량에 레싱(1729~1781), 하만(1730~1788), 헤르더(1744~1803), 실러(1759~1805), 빌헬름 훔볼트(1767~1835)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데, 그 중 헤르더에 관한 부분만 요약한다.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의 성취는 정신과학들의 신학을 기초했다는 것이다. 정신세계, 특히 시문학에 대한 해명은 그에게는 종교적 과제였다. 헤르더는 세 가지 이유에서 독일 문화의 역사에서 중심적이다. 독일철학에 철학적 인간학, 언어철학, 역사철학 및 미학과 해석학 같은 분과들에 새로운 초점을 부여했다. 괴테와 함께 그는 독일문학에 질풍노도의 기초를 놓았으며, 새로운 철학적 종교성을 복음 교회 내로 통합하는 일을 개시했다.

 

헤르더는 언어를 인간의 결정적 징표로 보았다. 동물에 비해 뒤처지는 인간의 결함이 언어를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결함에서 탄생한 언어는 인간 특유의 사유, 곧 정신을 가능케 했다.

 

언어의 가능성과 필연성은 본능의 결함에 의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수한 본성으로부터 밝혀질 거라는 것인데, 이는 겔렌(1904~1976)에게서 계속해서 작용한 테제다. 바로 인간의 감관이 덜 날카롭기 때문에, 그는 세계 전체에 대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관계는 동물적 기초 위에 놓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동물적 기능의 본성도 변화시킨다. “인간의 가장 감성적 상태도 역시 인간적이었다.” 인간의 결정적 지표는 언어인데, 헤르더에 따르면 고립된 인간도 언어를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 있어서는 언어의 전달 기능이 표현 기능과 서술 기능보다 더 적은 역할을 수행한다. 복잡한 감각철학의 틀 안에서 헤르더는 중간 감각인 청각의 특수한 지위를 정당화한다. 사유는 언어에서 현현하며 그 근저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정신의 발전은 언어의 그것에서 읽어낼 수 있다. 시문은 산문에 선행한다. 추상적 개념은 늦게 획득된다. p150

 

헤르더의 역사철학은 매우 중요하다. 헤르더의 『인류의 형성을 위한 또 하나의 역사철학』 이후로 독일 고유의 역사철학이 존재하게 된다. 헤겔의 역사철학 강의는 다만 헤르더의 프로그램을 실행한다고 할 수 있다. 헤르더의 역사철학은 볼테르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진보를 긍정한다. 오리엔트 족장들의 세계부터, 그리스, 로마, 중세의 그리스도교를 거쳐 근세에 이르기까지의 발전이 인간의 나이와 비교된다. 계몽 이전의 문화에서 야만 그 이상을 보는 것은 종교적 의무인데, 그러함으로써 역사에서의 섭리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편주의적 윤리의 표현이다. 인간성의 촉진은 헤르더의 목표다. 그는 모든 문화에서 각자의 특수성에 대한 권리를 허용하며, 계몽의 도덕적 위축과 위선을 비판한다.

 

괴테의 문학적 천재성은 헤르더에게 도움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괴테는 헤르더에게 근원적인 민중 문학의 생명력을 가리켜 보여주고 인간 정신의 모든 창조물에 대한 보편사적 관점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연적 신선함과 철학적 세련됨으로부터 독일 문화가 1800년경 알고 있던 저 유일무이한 혼합이 산출되었는데, 이것이 독일 문화를 로코코의 인위성 및 그에 반대하는 루소적인 반란의 근본적인 정신 적대성으로부터 그리고 또한 영국 국교회적인 정통의 소박성 및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의 오만한 눈짓으로부터 구별시켜준다.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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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사 - 독일 정신은 존재하는가
비토리오 회슬레 지음, 이신철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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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비토리오 회슬레는 처음 들어봤지만, 번역자 이신철은 알고 있었다. 이신철은 프레드릭 바이저의 『헤겔』을 번역했다. 바이저의 『헤겔』이 워낙 좋아서, 덩달아 번역자에게도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 실제로 번역도 매끄러웠다.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번역인지는 모르겠지만, 앞뒤 문장이 모순되는 것도 없었고, 비문도 없었던 것 같고, 억지스러운 번역 말투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도 않았다. 버거운 철학책에 취미를 붙이면서 번역자에게도 자연스레 신경이 가게 되었다. 책 자체의 어려움에 오역과 악역(?)이 가세하면 그야말로 난제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선뜻 『독일 철학사』를 주문한 것은 입맛을 당기는 목차 덕분이지만 번역에 대한 불안이 없어서기도 하다.

 

『독일 철학사』는 2013년 독일에서 출간되었고, 외국어로 번역된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다. 회슬레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서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미국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의 현재 아내는 한국인이다. 그는 <대장금>과 <동이>에 감탄했다고 한다. 이 책은 총 15장으로 되어있는데, 4장까지 읽었다. 지금까지는 기대보다 좋다. 번역은 기대에 조금 못 미친다. 긴 호흡의 문장이 많아, 끊어 읽어야 할 부분을 잘 찾지 못하면 내용 파악에 어려움이 있다. 보통 번역자는 문장을 임으로 나누지 않는 것 같은데, 원문에 충실해야 한다는 입장을 이해하지만,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는 긴 문장은 독자에게 커다란 부담이다.

 

이 책의 부제는 “독일정신은 존재하는가.” 이다. 한 번도 의심해 본적이 없는 질문이다. 철학이라고 하면 밑천이 짧은 나는 칸트와 헤겔을 맨 먼저 떠올린다. 독일 관념론 철학을 대표하는 이 두개의 거대한 이름은 그 자체로 독일정신의 상징이다. 저기 독일정신이 있는데, 도대체 난데없는 이 질문은 무엇일까? 회슬레는 독일정신을 부정하는가? 강조하는가?

 

 

 

01 도대체 독일 철학의 역사는 존재하는가? 그리고 ‘독일정신’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목표는 독일철학에 대한 간결한 개관, 이를테면 항공사진을 제공하는 것이다. 아울러 그러면서 이 철학을 다른 유럽 국민의 철학과 구별 짓는 특유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독일 정신에는 결정적으로 정신개념(Geistbegriff)에 대한 추사유(nachdenken)가 속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독일 철학의 모든 전환에서는 그것 없이는 역사를 현실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그럼직한 발전 노선이 명백해야 한다. p19

 

추사유? 검색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몇몇 간단한 언급이 있지만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1937년 11월 19일’ 동아일보에 <哲學的 思惟의 理解>라는 칼럼이 있고, 여기에 헤겔의 nachdenken이 나온다.

 

「헤겔은 일즉이 "哲學(철학)"을 存在(존재)의 世界(세계)에 대한 "나흐·뎅켄"(追思惟(추사유))으로 보앗읍니다. 이"나흐·뎅켄"이란 實在(실재)나 現實(현실)을 떠난 헛된 觀想(관상)이 아니라 도로혀 어디까지던지 客觀的(객관적)인 實在(실재) 및 그 世界(세계)에 대한 理解(이해)이요 省察(성찰)이겟습니다.」

기록보관의 힘이다. 독일어 검색을 하면 좋겠지만, 독일어 문맹이라 아쉽다. 여하튼 어떤 글에서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언급하던데, 이 부엉이가 황혼에 난다는 점과 한자 追思惟의 追가 ‘쫓을 추’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nachdenken이 실재나 현실 혹은 행위를 뒤따르는 사유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여하튼 독일정신이란 정신개념을 곰곰이 따지는 사유,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정신에 대한 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왜 그렇게 (읽는 사람) 미치도록 ‘정신’이란 것을 물고 늘어지는지 알만하다.

 

독일정신 혹은 독일철학의 존재 유무를 따지려면 먼저 독일이란 개념이 존재해야 한다. 독일은 1871년에야 뒤늦게 통일국가를 이룬다. 독일이 근대국가로 부상하는 것을 그토록 어렵게 만든 것은 신성로마제국의 담지자라는 영예로운 특수역할이었다. 여하튼 1800년 전후로 강력한 독일 국민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회슬레는 이 책이 주로 1720년부터 2000년까지의 약 300년을 다루고 있다면서, “독일 정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도발적으로 그것이 1750년 이후에야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고 말한다. ‘작가와 사상가의 민족으로서 독일’ 이라는 말은 19세기에야 비로소 만들어졌다.

 

이 책의 일차적 독자는, 내게 무척 다행히도, 일반적 교양 시민이다. 이를 위해 회슬레는 정확한 지식이나 복잡한 논증을 의식적으로 포기한다. 중요한 것은 박식한 세부사항이 아니라 커다란 노선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철학이 불러일으키거나 개념화한 의식사적 변화이다. 이 책은 철학사학적이라기보다는 이념사학적이다. 반은 에세이고 반은 역사학인 이 책은 독일철학을 의식적으로 독일 관념론에 비추어 해석한다. 또한 독일철학을 외부적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다. 회슬레는 분명 독일인은 아니다.

 

독일에 대한 나의 눈길은 더 이상 내부적인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물음, 즉 어떤 요인이 독일철학을 인류사에서 두 개의 가장 매혹적인 철학 중 하나로 떠오를 수 있도록 했는가,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전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1933~1945년의 도덕적-정치적 대재앙이 생겨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파악하고자 하는 외국인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p28

 

 

02 영혼에서 신의 탄생 : 중세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게서 독일어로 철학함의 시작.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중세 사유의 완성과 돌파

 

라틴어는 전 유럽에 공통된 학문언어였다. 회슬레는 이 책에서 독일철학의 기준을 독일영토가 아니라 독일어를 기준으로 나누고 있다. 지금의 독일 땅에서 살았더라도 라틴어로 학문을 했다면 그는 독일철학자가 아니다. 거꾸로 독일어를 사용했다면 활동지역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도미니크회의 수도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 추정) 는 고유의 철학사상을 독일 민중어로 표현한 최초의 독일철학자이다. 그는 단테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에크하르트라는 이름에는 보통 신비주의 사상가란 말이 따라오는데, 회슬레는 에크하르트의 철학을 “이성주의적 근본 기획을 직접적인 신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결합한 것” 이라 말한다. 에크하르트의 이성주의적 입장은 교부철학자들이 플라톤주의에 작별을 고하고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촉진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성서의 말씀을 자연적인 이성을 가지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로지 정신에 의해서만 성서는 올바르게 파악될 수 있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가 아니라 척도다.

 

에크하르트는 “신에게 있어 존재와 인식은 동일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신에게 있어서는 인식이 존재를 근거 짓는다는 테제를 옹호한다. 인식을 존재보다 위에 놓는 것은 비록 인간이 아니라 신을 염두에 둔 것일지라도 관념론의 근본 작업 과정을 미리 보여준다.

 

에크하르트는 신에 대한 근본적 사랑을 주장한다. 죄와 고통마저도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신이 일정한 방식으로 나의 죄를 원하는 까닭에 내가 범죄를 범하지 않았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더구나 어떠한 보상도 바라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라도 보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신에 대한 근본적 사랑의 이념은 칸트에게 있어 마침내 수천 년에 걸친 행복주의 전통의 붕괴로 이어지는 요소 가운데 하나다. 또한 에크하르트의 다른 윤리적 이념도 칸트를 예고하는데, 가령 헤아리는 것은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의욕이라는 그의 견해가 그러하다. p44

 

루터로부터 독일 관념론으로 나아가는 길은 직선이 아니라 에크하르트에게로 되돌아서 가야한다.

 

 

03 종교개혁에 의한 철학적 상황의 변화 : 파라켈수스의 새로운 자연철학과 야코프 뵈메의 신에게서의 아님

 

철학적으로 본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은 진보일 뿐 아니라 퇴보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은 주교들의 도덕적 신뢰 상실과 독일 군주들의 정치적 이해에 의해 그 토대가 만들어졌다. 루터는 자신의 군주의 호의 없이는 승리할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루터는 군주들의 보호를 받기 위해 (가톨릭과 칼뱅주의에 반하여) 군주에 대한 저항권을 포기해야 했다. 양심의 자유에 대한 파토스와 부당한 정부에 대해서마저도 굴종하는 것을 제멋대로 결합하는 것은 오랫동안 독일에서 루터교의 징표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루터는 우리가 성격(Charakter)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녔고, 선을 위해서든 악을 위해서든 자신의 종교적 및 언어 창조적 성취를 통해 다른 어느 누구와도 다르게 유럽 공동의 가족으로부터 독일 민족을 분리해내는 데 기여했다. 루터가 츠빙글리와 칼뱅의 또 다른 개혁에 함께하지 않음으로써 독일 프로테스탄티즘은 라틴계와 앵글로색슨계 나라들이 그에 대한 본보기를 이루는 옛 세계와 새로운 세계 사이의 중간 상태에 머물렀다.

 

 

구두장이였던 야코프 뵈메(1575-1624)는 근세 최초의 독일 철학자다. 그는 결코 공부를 한 적이 없고 라틴어를 쓸 수 없었지만, 신비적 체험 이후 루터교적 성서 신앙을 신과 자연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의 전개에 관한 철학적 설명을 통해 근거 짓고자 했다. 그는 확실히 이성적 신학자는 아니었다. 엄밀하게 논증하는 대신 정신의 이름으로 종종 이성에 반대했다.

 

그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단한 용기를 지니고 전통적 신학이 흔히 비껴가는 물음을 제기했다는 점은 논박할 수 없다. 고통과 악은 어디로부터 세계로 오는가? 우리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고전적 대답은 결여론 이다. 즉 나쁜 것 또는 악은 존재에서의 결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과 악의는 단연코 단순한 결여 이상인 것으로 보이며, 만약 신이 모든 것의 창조주라면 그것들도 신 안에서 그 근거를 지녀야만 한다. 뵈메는 신 자신 안에 부정적 원리를 갖다 대는 것을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며, 긍정적 원리와 부정적 원리의 공동작용으로부터 외적 세계에서의 신의 현현, 즉 오로지 신적 본질의 전개일 뿐이고 다른 두 원리를 결합하는 자신의 세 번째 원리를 이루는 신의 현현을 파악하고자 한다. 결정적인 것은 대립이 없으면 아무것도 계시되지 않는다는 그의 사상이다. p71~2

 

악마의 분노는 부정적인 신적 원리의 표현으로, 악마는 신의 내적 본질이다. 선과 악, 긍정과 부정이 하나라는 것, 그리고 그 대립 없이는 아무것도 계시되지 않는다는 것, 이런 것을 우리는 보통 헤겔적이라고 하지 않나? 

 

 

 

04 신에게는 오로지 최선의 것만이 충분히 좋다 : 라이프니츠의 스콜라 철학과 새로운 과학의 종합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는 한마디로 천재다. 그는 인류 최후의 보편적 학자로, 철학 뿐 아니라 수학, 자연과학과 공학, 법학과 역사에 창조력을 발휘하였다. 미적분학 창시자의 자리를 놓고 뉴턴(1642~1727)과 싸운 이야기는 유명하다.

 

17세기에 철학이 이성주의적으로 전환한 결정적 요인 중 하나는, 단순히 권위에 기초한 그리스도교의 여러 종파들과 다르게, 권위에 기초하지 않는 어떤 심급의 필요성이다. 다른 하나는 종교적 시민전쟁이 불러일으킨 물리적·도덕적 악의 존재이다. 신성로마제국은 거의 모든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종파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30년 종교전쟁을 끝낸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다른 유럽 국가들과 제국의 차이는 분명해 졌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왜 바로 독일에서 종교의 이성적 근거 짓기를 향한 노력이 특히 중요했는지, 더 나아가 왜 그것이 종교적 활기를 지니고 추구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단순히 말해 30년 전쟁은 종교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진리 기준을 모색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이성주의이다. 17세기는 계몽의 시대라 불리는데, 바이저의 『헤겔』에는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이란 표현이 나온다.

 

과학과 신학의 결합은 근세 자연과학의 일반적 특징이다. 그런데 의지주의자인 데카르트와 달리 라이프니츠는 이성주의자였다. 데카르트는 수학의 공리를 신적 의지의 자의적 정립으로 간주했다. 라이프니츠는 신의 본질과 그의 창조를 이성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선험적 반성에 의해 현실의 근본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과학적인 종교적 신앙의 억제는 독일 정신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가장 중요한 기여였다. 그것도 신의 이름으로.

 

신은 과학의 각각의 모든 새로운 승리가 위태롭게 하는 미봉책이 아니다. 오히려 신은 과학의 기초이며, 과학을 촉진하는 것은 종교적 의무다. 그와 유사하게 초기 계몽주의적 세계 개선 프로그램은 그리스도교 철학의 표현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우리는 과학과 기술에서 신의 창조력을 모방한다. 종교를 가톨릭교회와 동일시한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를 관통하는 이성과 종교의 대립을 라이프니츠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며, 라이프니츠 이후에도 독일 문화에서는 결코 현실적으로 기반을 얻지 못했다. 그리스도교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한 니체는 자신의 독일적 뿌리를 오히려 자신이 동시에 이성에 대해서도 투쟁하는 것을 통해 보여준다. 이것도 역시 볼테르에게는 이해 불가해했을 것이다. p85

 

독일철학은 종교와 싸우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과 종교는 한편이다. 볼테르(1694~1778)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는 『캉디드』에서 라이프니츠를 대놓고 비웃는다. 캉디드가 만나는 이 비합리적인 세계가 라이프니츠의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의 진정한 모습임을 보여준다. 독일철학의 특수성은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비판이 곧 이성에 대한 투쟁과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근세 철학은 아주 단순화하자면, 고대 양식을 모방하는 저자들과 근대화하는 저자들 사이의 경쟁이라 할 수 있다. 데카르트를 우두머리로 하는 근대화 파는 일차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사유하며, 스피노자를 필두로 하는 고대 모방파는 주로 존재론적으로 사유한다. 데카르트는 res extensa와 res cogitans를 이분하여, 고대철학에는 낯선 근세적 발전의 추동력을 일으켰다. 고대양식을 모방한 스피노자는 존재론적 증명을 철학의 출발로 삼고 있다. 스피노자는 유일한 실체, 신 즉 자연, 의 실존을 증명하는데 실체는 무한한 속성을 지니지만 그 중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단지 연장과 사유다. 정신적 사건과 육체적 사건은 평행적으로 진행되며, 현실의 두 측면이지 서로 인과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영혼을 부여받고 있다.

 

라이프니츠의 중심 철학은 무엇인가?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들인다. 라이프니츠에게도 신은 항상 이차적 원인을 거쳐 작용하며, 그 역시 결정론자이며, 오로지 자유가 철저한 결정화와 양립할 수 있는 한에서만 자유를 옹호한다.  동시에 스피노자와의 차이도 중요하다. 스피노자는 논리적 필연성과 법칙론적 필연성을 구별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것은 가능한 모든 세계에 타당하며, 법칙론적으로 필연적인 것은 오로지 해당 자연법칙을 지닌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라이프니츠는 우선적으로 이성 진리와 사실 진리를 구별한다. 이성 진리는 가능한 모든 세계에서 타당하므로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다. 사실 진리는 오로지 현실 세계에만 타당하다.

 

그러나 왜 신은 다른 세계가 아닌 바로 이 세계를 창조했는가? 다른 세계들이 논리적으로 가능했을지라도, 신의 선택을 위한 근거가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충족이유율은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형이상학에 대해 모순율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행위도 역시 바로 자유로운 행위가 근거를 지니는 것이다. 전능하고 전지하며 전선한 존재로서 신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것을 창조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사실 진리는 -비록 우연적이라 할지라도- 무한한 정신에게는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p88~9

 

라이프니츠는 현실 세계의 특수한 지위를 가치론적으로 정당화한다. 가치 기준은 신 앞에 주어져 있으며 결코 신의 자의에 따르지 않는다. 그는 최대 가치를 지니는 유일한 세계의 존재를 전제한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또 다른 차이점은 실체 개념과 관련이 있다. 스피노자는 일원론자인데 반해, 라이프니츠는 실체의 다수성을 가정한다. 라이프니츠는 이 다수성의 실체를 모나드라고 부른다. 모나드의 활동성은 오로지 이 모나드와 신 자신에 의해서만 규정되기 때문에 모나드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없다. 그 대신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를 주장한다.

 

비록 창 없는 모나드들이 오로지 자기의 내적 프로그램만을 연주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서로 정확히 일치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러함에 있어 각각의 모든 모나드는 우주 전체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관점을 표현하거니와 각각의 모든 모나드는 모든 순간에 그 자신의 이전과 이후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우주 전체를 표현한다. p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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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말부터 도서관 신간코너에 꽃혀 있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표지 그림이 눈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누구의 그림인지 모르겠지만, 외면하고 싶었다. 매일 도서관 앞 작은공원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돌고 또 도는 그녀의 눈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철학으로 유명한 그 비트겐슈타인이다. "현대 독일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자전적 소설" 이라는 광고문구를 보며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라는 파울이 실존인물일까 궁금했다. 위키 백과에는 진짜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있다. 그런데 그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가 아니라 형이다. 1차 대전에 참전하여 오른팔을 잃었지만, 왼팔만으로 피아노를 연주한 유명한 피아니스트라고 한다.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으로 유명하다는데, 음치인 나는 물론 들어본 적이 없다. 여하튼 자전적 소설이긴 하지만, 파울은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다 (어쩌면 동명의 조카가 실제할 수도 있는데, 확인을 못했다).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한다는 면에서 진짜 파울이  ('자전적' 이라는 말을 논픽션으로 받아들인다면, 또 다른 파울, 진짜 조카 파울일 수도 ;;) 모델이아닐까 싶지만, 하릴없는 추측일 뿐이다. 

 

파울은 천재이며 광인이다. 그의 발작은 전조 증세와 함께 시작된다. 갑자기 손을 떨고, "문장을 끝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쉬지 않고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말을 했다. 그의 말을 중단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p60"  말을 중단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면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단 하나의 문단으로 되어 있다. 단락 나누기 없이 파울의 친구인 '나'의 독백이 끝없이 이어진다. 잠깐 덮어놓으려면 도대체 어디에서 중단해야 할지 난감하다. 파울은 정신병으로, 나는 폐병으로 같은 병원의 다른 병동에 나란히 누웠지만, 나 역시 또 다른 광인이다.

 

"파울은 오직 광기 하나만을 갖고 있었으며 그 광기로 인해 존재했지만, 나는 내 광기에 더해서 폐질환까지 덤으로 안고 있었고, 광기와 폐질환 그 둘을 똑 같이 이용했다. 즉 두 가지 병 모두를 어느 날 이후부터 일생에 걸친 내 존재의 원천으로 삼아 버렸다. 파울이 수십 년 동안 정신병자로 살았듯이, 나는 수십 년 동안 폐병환자로 살았고, 파울이 수십 년 동안 정신병자 연기를 해 왔듯이, 나는 수십 년 동안 폐병 환자의 연기를 해 왔다. 그가 정신병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데 이용했듯이, 나는 폐병을 내 목적을 이루는 데 이용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재산이나 어느 정도 위대한 예술을 얻고 싶어하고 그것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면서 일생 동안 최대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어떤 상황에서라도 철저하게 이용하면서 마침내는 자기 삶의 유일한 내용으로 만들려고 욕심내듯이, 파울은 자신의 광기를 일생 동안 붙들고 놓지 않으면서 확실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철저히 이용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자기 삶의 내용으로 삼아 버렸다. 나 또한 내 광기를, 그리고 내 폐병을 내것으로 삼아 마침내 거기에서 내 예술이란 것을 탄생시켰다. p33"  

 

현대인은 모두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말은 널리 유포되어 있다.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나도 강박증이 있다. 그 강박증이 적절한 상황과 결합하면 치밀하고 빈틈없는 직장인이 되지만, 현관문을 열다말고 가스렌지 앞에 되돌아와 몇 분을 붙박히게 되면 정신질환자가 된다. 정신증과 광기는 의학적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그 기준이 그렇게 분명한 걸까? 광기말고 라캉의 죽음충동은 어떨까? 인간만이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고 뭔가에 존재 전체를 걸 수 있다. 광기가 예술을 탄생시키고 삶의 내용을 만들어 낸다. 돈이 그렇듯이, 광기도 그렇다. 그런가?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은 자신의 정신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죽는 순간까지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정신과 의사들은 파울의 정신병에 끊임없이 새롭고 자극적인 명칭을 붙였지만 그 어느 것도 올바른 병명이 아니었다. 하나의 병명이 나오면 늘 이전의 다른 병명과 완전히 모순되었다.  

 

"소위 신경정신과 의사라는 사람들이 어이없게도 친구의 병명을 한 번은 이렇게, 한 번은 저렇게 부르곤 했는데, 그것은 다른 모든 질병과 마찬가지로 친구가 가진  바로 그 질병에 들어맞는 올바른 명칭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잘못된, 항상 오류를 불러일으키는 병명만을 붙여 왔음을 인정할 용기가 없어서였다. p13"

 

용기가 없어서라기 보다는, 정신병이라고 통칭하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닐까? 지문처럼 사람들마다 다 다른 그 정신의 결을 몇 가지 분류만으로 어떻게 이름붙일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 가문은 오스트리아의 철강 갑부였다. 실제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모르겠지만 ,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 많은 유산을 다 줘버리고 시골학교의 선생을 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의 파울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펑펑 줘버리고 가난 속에 홀로 죽는다. 파울은 삼촌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딱 한번 파울이 이런 말을 하기는 했다. 그의 삼촌 루트비히는 가족 중에서 가장 심각한 미치광이였다고, 억만장자가 시골 학교에서 선생으로 일하다니. 그게 도착증이 아니고 뭐겠어? p90"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바보천치일 뿐이었다. 그런 바보천치를, 괴상한 소리만 들으면 대단한 것인 줄 알고 귀가 솔깃해지는 외국인들이 유명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이 집안의 천치 한 명에게 전 세계가 홀라당 넘어갔어. 아무짝에 쓸모없는 인간이 어느날 난데없이 영국에서 유명해지더니 위대한 사상가로 돌변해 버리는군, 하고 웃기는 현상으로 치부해버렸다. 비트겐슈타인 집안 사람들은 지극히 교만했으므로 자기 가문의 철학자를 무시할 뿐 눈곱만한 존경심도 갖지 않았다. p91"

 

실제 비트겐슈타인 집안이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실제와 허구가 섞인데다(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 이라는 말이 더해져,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어쩌면 삶이 그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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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2015-02-12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 후기를 보니 작가의 친구인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실존 인물이라는 것 같다. 그런데 그에 대한 설명은 책 내용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짜 실존인물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만약 삼촌과 조카가 동명이인으로, 두명의 파울이 있었다면, 작가가 한번은 언급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루트비히의 형인 파울은 엄청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는데, 그런면에서 조카 파울이 실존했다면 이름뿐만 아니라 음악 천재라는 동일성을 공통으로 가졌는데, 사람들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언급하지 않았을까?
 
슬로리딩 - 생각을 키우는 힘
하시모토 다케시 지음, 장민주 옮김 / 조선북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우연히 득템한 트렁크를 끌고 살인(?)의 흔적을 질질 흘리며 도망(?) 다니는 100세 노인은 정말 유쾌했다. 그렇지만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고서야 100세 노인이 그렇게 기운넘치리라 믿기는 힘들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노인이 있다.  『슬로리딩』을 쓴 일본의 하시모토 다케시다.

 

2011년 백수(통상 99세에 치른다) 파티에 '순백색 슈트에 빨간 장미 코르사쥬' 를 달고 등장한 하시모토 할아버지의 첫 번째 목표는 120세 대환력까지 사는 것이다. 대환력에는 '붉은 정장에 흰 장미 코르사쥬'를 달고 나갈 계획도 세워 놓았다. 하시모토는 50년 동안 '나다'라는 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 그리고 100세를 눈앞에 둔 2011년, 27년 만에 다시 나다교의 교단에 섰다. 100세 할아버지가 교재를 들고 다시 학생들 앞에 선 것이다. 그 수업은 어땠을까?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시모토 할아버지가 유명해 진 것은 그의 독특한 수업때문이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교과서를 다시 써야할 상황에서 국어 교사인 하시모토는 과감히 교과서를 버리고 <은수저>라는 얇은 문고판 소설로 교재를 대신한다. 나다교의 특징은 한번 교과를 맡은 교사는 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전학년을 지도하는데, 하시모토 교사는 3년 동안 《은수저》 한권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나카 간스케의 소설인 《은수저》. 이 200쪽짜리 얇은 문고판을 3년에 걸쳐 읽어 가는 사이 실로 다양한 공부를 했습니다. 국어 수업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 연날리기 장면이 나오면 밖으로 나가 직접 연을 날리고, 막과자가 등장하면 교실에서 실제로 먹어 보는 겁니다. p44」 

 

《은수저》 한권으로 단어 공부, 문장 공부는 물론 책 속에 나오는 것들을 일일이 찾고 연구하고 실습까지 하면서 3년을 읽었다. 당시에도 기발한 수업이었지만 그렇다고 '슬로 리딩'이라는 개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마음에 평생 남을 수 있는 독서 중심의 수업을 하기 위해 시도한 것인데, 아이들의 호응과 교육 효과가 매우 좋았다.

 

하시모토 교사의 수업을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이 수업을 잊지 못한 제자들이었다.  책과 방송을 통해 이 수업법은 '슬로 리딩'으로 소개되면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100세가 된 2012년, 하시모토 다케시는 자신의 《은수저》 수업법을 『슬로리딩』이란 책으로 직접 소개했다. 얇은 책이라 금방 후루룩 읽을 수 있는데, 《은수저》 수업이라는 독특한 수업법을 빼고는 평이한 교육 지침 혹은 교육 경험담이 쓰여있다. 어쨌든간에 100세 노인이 교단에 다시 서고, 책을 쓰고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작년에 동네 꼬마 세명이랑 동화책 몇권을 읽었다. 처음 계획은 겨울 방학 동안 『어린왕자』를 천천히 읽는 것이었다. 이 책처럼 나도 나름대로 슬로리딩 비슷한 것을 생각했던 셈이다. 그런데 잘 되지 않았다. 나는 『어린왕자』 속에는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너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별' 하나만 가지고도, '사막과 우물' 하나만 가지고도, '길들이기' 하나만으로도 한 시간 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아이들은 별에도 사막에도 여우에도 장미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세번 만에   『어린왕자』를 마쳤다. 나는 다만 아이들이 상상력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슬로리딩』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준비되지 않았었다는 것을.  하시모토 교사는 《은수저》 수업을 위해 1년 넘게 준비를 했다.  <은수저 연구 노트>를 만들어 매 시간 그 짧은 문장 속에서 어떤 공부와 어떤 놀이를 해야 하는지 꼼꼼이 계획했다. 나는 그저 말로 떼우려고 했던 것이다. 

 

이 책  『슬로리딩』에는 그렇게 자세한 수업법은 없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은수저》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었을지 궁금하다. 아마 그  <은수저 연구 노트>를 보게 되면 조금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차피 직접 해보는 것일 테다. 하시모토 다케시 역시 자신의 수업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틀을 깨고 상상의 힘으로 새로움을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 이 책의 가치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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