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사 - 독일 정신은 존재하는가
비토리오 회슬레 지음, 이신철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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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독일의 윤리 혁명 : 임마누엘 칸트

 

칸트, 특히 칸트 윤리학에 대한 윤곽을 이렇게 잘, 사실은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놓은 글을 찾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40쪽 정도 되는 칸트 부분을 쉬지 않고 읽었는데, 조각조각 알고 있던 내용들에 어렴풋하나마 어떤 형체가 갖춰지는 것 같았다. 저자가 이미 공언했듯이 ‘스카이뷰’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며, 내게는 칸트가 특히 그렇다.

 

쾨니히스베르크는 임마누엘 칸트(1724~1804)의 고향이다. 동프로이센의 수도였지만, 2차 대전 이후 소련에 양도되어 칼리닌그라드로 불리고 있다. 러시아의 정치적 격동 속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페트로그라드와 레닌그라드를 거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그 이름이 바뀌어 왔지만, 소련 정치인 미하일 칼리닌의 이름을 딴 칼리닌그라드는 지금도 칼리닌그라드로 불리고 있다. 밀란 쿤데라는 『무의미의 축제』에서 어떻게 칼리닌이 자신의 이름을 지금까지도 지킬 수 있는지를 스탈린과 칼리닌의 일화를 통해 재미있게 들려준다. 쾨니히스베르크 즉 칼리닌그라드를 평생 떠나 본적이 없는 걸로 유명한 칸트는 러시아 사람들이 우기려고만 든다면 어쩌면 러시아인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누구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칸트는 철두철미 독일어로 사고하고 독일어로 책을 썼기 때문이다. 덕분에 모든 나라의 철학자들은 150년 동안이나 독일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의무와 부담을 안게 되었다. 칸트는 거의 전 생애를 대학이라는 제도 안에서 보냈다. 그에 의해 대학은 동업 조합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지적인 혁신을 지닌 장소로서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신망을 획득했다. 칸트는 신동이 아니라 대기만성 형 늦깎이였다. 칸트 최초의 신기원적인 철학적 저작 『순수이성비판』은 1871년, 그의 나이 57세에야 출판되었다.

 

 

칸트 철학의 의식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칸트는 이론철학에서 낡은 형이상학을 파괴한다. 형이상학이 아니라 ‘낡은’ 형이상학이다. 칸트의 세 개의 비판이론은 새로운 형이상학을 준비하는 것이지, 모든 형이상학을 철폐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전통적인 신 존재 증명은 어느 것도 살아남을 수 없다. 변신론 문제에 대한 모든 교의적 해결책도 실패한 것으로 본다.

 

둘째, 칸트는 실천철학에서 신에 대한 새로운 접근 통로를 열었다. 에크하르트가 그 단초를 보인 것처럼, 칸트는 역설적으로 피안에 대한 모든 희망을 완전히 없앰으로써 새로운 윤리학의 정초를 마련했다. 칸트는 도덕적 행위가 개인적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고대의 이론에도 반대하며, 도덕적 행위의 가치는 오직 자기 목적으로서 행해지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윤리학의 근저에는 오히려 정언명법, 다시 말하면 의지주의적인 신이나 원리적으로 변화 가능한 도덕 감정 같은 타율적 요인이 아니라 실천 이성의 자기 입법에 힘입은 무조건적 명령이 놓여있다. 특징적인 것은 칸트가 감정윤리학도 타율적인 것으로 거부한다는 점이다. p107

 

윤리학을 이성에 부합시킨 칸트의 영향은 오늘날까지 독일문화에 지속되고 있으며, 그의 반-행복주의는 독일이 법치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정서적 결합을 희생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강화해 왔다. 칸트의 윤리학은 앵글로색슨의 개인주의적 국가철학과는 완전히 다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존엄은 비록 자신을 위해서라도 흥정될 수 없으며, 법·권리는 사실적인 이해 조정에로 환원될 수 없다. 칸트는 행복론으로 이해되는 모든 윤리학에 대해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우리가 제레미 벤담의 것으로 알고 있는 실증주의의 대표적 구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은 칸트의 윤리학과는 정반대의 편에 있다. 칸트는 행복이 아니라 숭고에 가치를 부여한다. 독일 비극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희생함으로써 존엄을 지킬 수 있다.

 

독일정신사에서 칸트의 특수한 지위를 이루는 것은 그가 계몽과 그것에 본래적으로 적대적 의도를 지닌 경건주의 사이의 균형, 즉 그것의 완전한 표현이 바로 그 자신의 인격적이고 지적인 통합성인 그러한 균형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는 독일의 종교성을 라이프니츠처럼 모든 학문적 영향뿐만 아니라 사회를 변형시키고자 하는 소원에 대해서도 열어 놓았으며, 역으로 계몽주의적 노력에 대해서도 동시대의 프랑스 철학자들에게서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윤리적인, 아니 바로 종교적인 추진력을 부여했다. 모든 것을 이성의 법정 앞으로 끌어내는 것은 칸트에 따르면 종교적 의무다. 그 점이 칸트의 철학함의 엄청난 진지함을 근거 짓고 있는데, 그러한 진지함은 많은 경우 그야말로 소박한 것으로 나타나고 아이러니에 대단히 낯설다. 요컨대 칸트의 발상은 비극에 날개를 달아주었지만 희극적인 것에 대해서는 유해했던 까닭에 그 장르에서는 독일 문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p110

 

세 번째, 이론철학과 실천철학 사이의 다리 놓기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 인간 정신의 자율에 새로이 자유로운 공간을 열어주었다.

 

칸트의 천재적 착상은 그가 인과율에 대해 교조적 형이상학도 흄의 회의주의적 경험주의도 충족시킬 수 없는 타당성을 확증에 주는 동시에 인간적 자유의 가능성도 보존한다는 점에 존재한다. 칸트에 따르면 인과성과 그와 비슷한 다른 범주들, 아니 더 나아가 바로 공간과 시간이 우리로부터 유래한다. 우리가 그것을 현실에 강요하는 것이다. p111

 

이성은 범주들 없이는 세계를 전혀 경험할 수 없다. 범주들은 선험적으로 타당하다. 세계의 통일은 신이 아니라 자기의식의 통일에 근거한다. 우리가 사물들에 인과성을 규정하는 그 행위에 의해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인과성은 우리의 자발적인 정립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것을 ‘초월론적(transzendental)’ 이라고 이름 붙였다.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은 낭만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유에 대한 믿음과 외적 현실에 대한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따르는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칸트가 없었더라면 아마 낭만주의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계몽주의자인 칸트 자신은 낭만주의에 비판적으로 대립했다.

 

그런데 인과성이 사물들 자체가 아닌 현상들에 제한되어 있다면, 칸트는 어떻게 사물들 자체가 우리를 촉발한다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인식 불가능한 예지체들(Noumena)의 나라에 관한 칸트의 말은 그 자신의 기준에 따르면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요한 것은 칸트의 그야말로 유령 같은 부분론이다. 칸트는 분명 근세철학의 데카르트적 노선, 즉 근대화하는 노선에 속한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 그는 데카르트와 근본적으로 관계를 끊는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의식 흐름이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것으로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칸트는 우리 의식의 시간성 자체가 다만 그 자체에서 우리의 것의 주관적 변형일 뿐이다. 시간성은 현상적 자아에 속하지 분명히 무시간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예지적 자아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라는 공허한 점에 의하거나 우리의 실천 이성을 통하는 것 외에는 예지적 자아에 이르는 접근 통로를 지니지 않는다. 이 두 가지에서 독일 관념론은 시작될 것이다. p113

 

칸트는 선험적 종합 판단(synthetisches urteil a priori) 의 발견을 자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성취로 간주했다. 선험적 종합판단은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거꾸로 칸트는 경험 일반의 선험적 이론을 기초하고자 했다. 칸트는 상식을 “그 권위가 오로지 공공연한 소문에 기초할 뿐인 증인”이라고 논박한다. 흄을 비판하며 형이상학은 단지 전체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도 학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험적 종합 인식의 실존과 그 근거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하나의, 아니 아마도 바로 그 결정적 문제이며 그에 대한 몰두가 독일 철학을 영국 철학과 구별해주는 바로 그 독일 철학의 본질 징표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은 오늘날에도 견지될 수 있다. 물론 칸트는 자신이 선험적으로 종합적인 것으로 간주한 그 판단들 모두의 공통된 징표를 제시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p114~5

 

칸트에 관한 설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남았다. 내용상으로 이미 말해졌지만 여하튼 칸트의 세 가지 비판 이론이 그것이다. 첫 번째 비판은 경험주의와 이성주의 사이에서 가운데 길을 제안하고 있는 『순수이성비판』이다. 칸트는 영국의 경험주의자들 보다 더 철저하고 일관되게, 경험으로부터 분리된 형이상학적 사변을 무의미한 것으로 거부한다. 오로지 경험과 관련해서만 입증 가능한 인식이 존재한다. 경험이 가능한 것은 그것이 종합적-선험적이고 모든 인식에 대해 타당한 원리에 의해 이끌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경험은 감성(직관)과 개념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생겨난다.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며,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직관은 개별적인 사물들이나 사건들로 향하지만, 그것들은 만약 인식이 성립해야 한다면 개념 밑에 포섭되어야만 한다. p123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들에 대한 반성은 실증주의에는 없는 칸트의 이성주의이다. 경험은 오직 열두 개의 순수 지성 개념 즉 칸트가 논리학의 판단 형식들로부터 획득한 범주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 범주들은 ‘나는 생각한다’ 라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과 감성적으로 주어진 것의 다양 사이를 매개해야만 한다. 범주적으로 구조화한 객관적 세계만이 스스로를 통일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자기의식에 관계할 수 있다.

 

칸트는 자신의 도덕철학을 『윤리형이상학 정초』와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윤리형이상학』에서 전개했다. 칸트는 예지계와 현상계를 구별하는데, 이 이원론이야말로 비양립주의적인 자유의 가능성을 보장한다. 윤리법칙은 오로지 그것이 자유의 표현일 때만 우리를 구속할 수 있다. 자기규정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유는 인과적 비결정성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유와 동일하지 않다.

 

칸트의 경험주의적 인식론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규정하는 실천 이성이 실질적 윤리학이 아니라 오직 형식적 윤리학만을 근거 지을 수 있다는 것에로 이어진다. 그의 최초의 정식화에서 정언명법은 다음과 같다.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으로 될 것을 네가 동시에 의지할 수 있는 준칙에 따라서만 행동하라.” 그것으로 칸트는 앙시앵 레짐의 무수한 불평등으로 규정된 법체계와 사회 질서를 우선은 점진적으로 그리고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서 훨씬 더 빠르게 평등한 의미로 개혁한 계몽의 근본 사상을 개념화한다. 칸트는 어떤 사람에 대해 어떤 것이 허락되는 것은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이것이 다른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때뿐이라는 보편주의적 확신을 표현한다. p128~9

 

도덕적 행위는 단지 의무에 적합하게가 아니라 의무로부터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칸트는 어떤 단 하나의 행위에 대해서도 그것이 의무로부터 행해졌다는 걸 확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천 이성의 요청은 결코 앎의 지위를 지니지 못한다.

 

칸트의 중심적 윤리 사상이 근대의 법률적 사고 형식을 받아들이는데 존재하는 까닭에 그가 법의 도덕적 정당화를 제공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정언명법에 따라 모든 인간은 자유에 대한 본원적인 권리·법을 지닌다. 법은 내적 태도가 아니라 외적 행위, 도덕성이 아니라 적법성에만 관계되며,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자유의 규제에 맞추어져 있다.

 

제3비판은 미학적 판단력에 대한 비판과 목적론적 판단력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3비판은 자연과 자유, 지성과 이성 간의 이원론을 조정하는 중심 과제를 지닌다. 칸트는 미학 최초의 저자는 아니지만 미학적 반성 없는 철학의 체계를 결코 완전한 것으로 여길 수 없는 그러한 최초의 저자이다.

 

 

 

06 종교적 과제로서 정신과학 : 레싱, 하만, 헤르더, 실러, 초기 낭만주의와 빌헬름 폰 훔볼트

 

독일 정신과학의 원천은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루터교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루터교 목사의 자손이거나 루터교 신학을 공부한, 지적으로 뛰어나고 도덕적으로 온건한 이 사람들에 의해 종교가 위기를 맞이했다. 신학에 대한 문헌학에 의해 개별적 성서 텍스트 간의 모순이 명백해졌고, 성서 이야기의 역사적 신뢰성이 붕괴했다. 계몽의 보편주의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에 제한된 구원사를 새로운 윤리학과 양립될 수 없는 편협성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18세기 말에 독일의 정신적 엘리트들 내에서 일어나는 루터교의 변형은 좀더 복잡해서 문헌학의 종교적 동기를 보존하는데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보편사적으로 확장되고 철학적으로 정초된다. 우리는 신학과 철학 그리고 문헌학의 삼위일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계속해서 열심히 연구하는 신의 말씀은 더 이상 성서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역사 전체에서 현현한다. 인간 정신의 역사를 통일로서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박학함의 관심이 아니다. 거기서 문제되는 것은 종교적 과제이며, 아마도 그러한 과제만이 바로 우리가 그것을 완수함으로써 실제로 지속적인 것을 성취할 기회를 갖게 되는 그러한 것들일 것이다. p142

 

유일신교의 전통이 없고 개인적으로도 종교가 없는 입장에서, 서구철학이 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참 이상해 보일 때가 많다. 중세와 함께 신학은 잊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지만,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까지도 신학과 철학을 결합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신학 없이는 철학이 불가능함을 역설하는 사람도 있다. 서구 문화 전반이 그렇지만 신학적 배경 없이 철학 읽기가 참 어렵다. 계몽주의와 함께 위기를 맞은 신학은 그러나 뒤이어 신학 자체를 보편화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역사에서 다시 살아난다.

 

6장은 이십 여 쪽의 짧은 분량에 레싱(1729~1781), 하만(1730~1788), 헤르더(1744~1803), 실러(1759~1805), 빌헬름 훔볼트(1767~1835)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데, 그 중 헤르더에 관한 부분만 요약한다.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의 성취는 정신과학들의 신학을 기초했다는 것이다. 정신세계, 특히 시문학에 대한 해명은 그에게는 종교적 과제였다. 헤르더는 세 가지 이유에서 독일 문화의 역사에서 중심적이다. 독일철학에 철학적 인간학, 언어철학, 역사철학 및 미학과 해석학 같은 분과들에 새로운 초점을 부여했다. 괴테와 함께 그는 독일문학에 질풍노도의 기초를 놓았으며, 새로운 철학적 종교성을 복음 교회 내로 통합하는 일을 개시했다.

 

헤르더는 언어를 인간의 결정적 징표로 보았다. 동물에 비해 뒤처지는 인간의 결함이 언어를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결함에서 탄생한 언어는 인간 특유의 사유, 곧 정신을 가능케 했다.

 

언어의 가능성과 필연성은 본능의 결함에 의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수한 본성으로부터 밝혀질 거라는 것인데, 이는 겔렌(1904~1976)에게서 계속해서 작용한 테제다. 바로 인간의 감관이 덜 날카롭기 때문에, 그는 세계 전체에 대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관계는 동물적 기초 위에 놓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동물적 기능의 본성도 변화시킨다. “인간의 가장 감성적 상태도 역시 인간적이었다.” 인간의 결정적 지표는 언어인데, 헤르더에 따르면 고립된 인간도 언어를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 있어서는 언어의 전달 기능이 표현 기능과 서술 기능보다 더 적은 역할을 수행한다. 복잡한 감각철학의 틀 안에서 헤르더는 중간 감각인 청각의 특수한 지위를 정당화한다. 사유는 언어에서 현현하며 그 근저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정신의 발전은 언어의 그것에서 읽어낼 수 있다. 시문은 산문에 선행한다. 추상적 개념은 늦게 획득된다. p150

 

헤르더의 역사철학은 매우 중요하다. 헤르더의 『인류의 형성을 위한 또 하나의 역사철학』 이후로 독일 고유의 역사철학이 존재하게 된다. 헤겔의 역사철학 강의는 다만 헤르더의 프로그램을 실행한다고 할 수 있다. 헤르더의 역사철학은 볼테르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진보를 긍정한다. 오리엔트 족장들의 세계부터, 그리스, 로마, 중세의 그리스도교를 거쳐 근세에 이르기까지의 발전이 인간의 나이와 비교된다. 계몽 이전의 문화에서 야만 그 이상을 보는 것은 종교적 의무인데, 그러함으로써 역사에서의 섭리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편주의적 윤리의 표현이다. 인간성의 촉진은 헤르더의 목표다. 그는 모든 문화에서 각자의 특수성에 대한 권리를 허용하며, 계몽의 도덕적 위축과 위선을 비판한다.

 

괴테의 문학적 천재성은 헤르더에게 도움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괴테는 헤르더에게 근원적인 민중 문학의 생명력을 가리켜 보여주고 인간 정신의 모든 창조물에 대한 보편사적 관점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연적 신선함과 철학적 세련됨으로부터 독일 문화가 1800년경 알고 있던 저 유일무이한 혼합이 산출되었는데, 이것이 독일 문화를 로코코의 인위성 및 그에 반대하는 루소적인 반란의 근본적인 정신 적대성으로부터 그리고 또한 영국 국교회적인 정통의 소박성 및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의 오만한 눈짓으로부터 구별시켜준다.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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