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사 - 독일 정신은 존재하는가
비토리오 회슬레 지음, 이신철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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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체계에 대한 동경 : 독일 관념론

 

오직 하나의 철학 노선, 즉 독일 관념론만이 ‘독일’이라는 덧이름을 획득했다. 왜인가? 한편으로 그것은 독일이 산출한, 지적으로 가장 요구하는 바가 많은 철학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그 이전 독일 철학의 거의 모든 혁신적 성취를 철학적 사유의 가장 복잡한 형태인 체계의 형식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모두가 신학을 공부한 주요 인물 3명의 종교적 동기는 세계사적으로 새로운 형식의 철학적 종교성을 성립하는데 기여했다. 새로운 형식의 그 종교성은 19세기 독일의 특히 프로테스탄트적인 교양 시민층에게 그러나 또한 그 발상에서 가톨릭적 시민층에게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다른 유럽 나라에서는 그에 대한 등가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p163

 

여기서 주요 인물 3명은 당연히 피히테, 셸링, 헤겔이다. 독일 관념론이 ‘지적으로 가장 요구하는 바가 많은 철학’이란 말은 엄청 어렵다는 말로 새겨야 할 것 같다. 피히테, 셸링은 잘 모르겠지만, 헤겔이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 누구나 안에는 헤겔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더 많겠지만, 읽어보지 않고도 어렵다는 것을 알만큼 헤겔은 어렵다. 새롭게 읽히는 단어로 ‘체계’가 있다. 체계가 철학적 사유의 가장 복잡한 형식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체계가 사유의 형식이란 의미로 쓰이는 것도, 체계라는 말은 워낙 일상적으로 써왔기 때문에 더 생경하게 읽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 3인방이 독일 철학의 성과를 ‘독일 관념론’ 으로 체계화했다고 일단 이해한다.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2~1814)의 철학적 성취는 무엇인가? 저자 회슬레는 일곱 개로 요약하고 있는데, 어차피 몇 줄짜리 글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우니 그 중 몇 개만 옮겨 보겠다.

 

첫째, 철학에 대한 개념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철학은 개별 과학의 근본 명제들 및 이 원리들로부터 정리를 끌어내는 논리학을 정당화하는 과제를 지닌다. 더불어 철학은 학문들의 체계 내적 통일을 제시해야만 한다. 이러한 학문의 학문은 그 자체가 학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철학은 그 자신의 근본 명제를 필요로 하는데, 그 근본명제는 형식과 내용의 특수한 통일에 의해 자기 자신을 근거 짓는다. 피히테의 첫 번째 근본명제는 “나는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단적으로 존재한다.” 이다. 형식논리학은 초월론적 논리학에 의해 근거 지어져야 한다.

둘째, 피히테는 다른 칸트 비판자들이 그러하듯이, 초월론적 철학으로부터 사물 자체를 제거하고자 한다. 자아에서 가분적 자아에 가분적 비아를 대립시키는 것은 항상 자아이다. 자기의식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으며, 의식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은 배제된다.

셋째, 피히테의 개념에는 변증법적 방법에 대한 발상이 감지된다. 하나의 개념과 그것의 대립 개념으로부터 매개하는 개념이 형성되는 것이다.

넷째, 피히테 철학은 1인칭인 바, 유아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 피히테는 이러한 위험에 직면해 상호 주관성의 연역을 시도했다. 비록 불만족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엄청난 성취이다.

 

에크하르트처럼 피히테도 참된 종교는 단지 관조적인 것이 아니라 활동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실천적 믿음만이 우리를 앎의 심연으로부터 구해준다. 우리에게 현실의 객관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이론적 논증이 아니라 의무의 명령일 뿐이기 때문이다. 신은 스스로를 세계 내부적으로 가령 아름다움으로서, 정의로운 국가로서, 학문으로서 현현한다.

 

피히테를 독일 내셔널리즘과 묶어 주는 것은, 1808년 프랑스인이 점령한 베를린에서 연설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다. 프랑스 점령군은 피히테도 한 때는 경탄했던 나폴레옹의 혁명군이다. 개별적인 독일 국가들과 종족들을 넘어서, 독일은 1871년에야 통일되었다, 하나의 국민에게 호소하는 피히테의 연설들은 독일 내셔널리즘의 형성에 기여했다. 오로지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감정만으로 피히테는 남성과 여성을 위한 포괄적인 국민교육을 요구했다. 독일의 내셔널리즘은 프랑스의 권력 정치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그는 세계 시민적인 독일인을 기원했지만 동시에 언어의 근원성을 기준으로 게르만적 혈통의 다른 국민과 독일인을 구별했다. 고유한 언어가 고유한 국가에 대한 권리를 근거 짓는다는 것이다. 피히테는 독일인의 철학적 정신을 강조하며 이 철학적 정신에 의한 세계 지배를 약속한다. 그러나 그는 위험한 방식으로 실재적인 독일 국민과 융합한다. 피히테는 마키아벨리를 열광적으로 찬양하며 독일 국민으로 하여금 프랑스인에게 저항할 투쟁의지를 고무시키기 때문이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1789년 프랑스혁명에 이르기까지 절대 왕정시기의 유럽은 소규모 군대와 귀족 장교단으로 구성된 ‘군주들 사이의 전쟁’ 만으로 평화를 유지해 왔다. 피히테의 선동은 이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이 제한적 내각 전쟁을 깨뜨린 것은 프랑스 혁명군이었다. 그러나 만약 피히테가 그의 잠재적 해방 전사들에게 그들의 행위로부터 구원의 시대가 새롭게 시작될 것이라고 약속한다면 한계를 넘어서 있다.

 

 

신동이었던 프리드리히 벨헬름 요제프 셸링((1775~1854)은 15세에 튀빙겐 복음주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의 같은 방에는 헤겔과 횔덜린이 있었다. 그들의 이념은 서로에게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횔덜린(1770~1843)은 근대정신에서 겪는 자신의 고뇌를 엄청난 복잡성을 지닌 시작들에서 표현했으며, 계몽의 역사 낙관주의에 맞서 인간의 역사를 신적인 것으로부터의 소외로 해석했다. 근대의 객관적 관념론은 셸링에 의해 창조되었는데 헤겔 후기 이념들에서 그 대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셸링은 그 이념들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헤겔은 그들의 우정을 상실한 후에도 친구의 천재적 이념들을 셸링 자신이 할 수 있었을 것 보다 더 훌륭하게 체계화했다. 셸링의 프로그램은 헤겔에 의해 비로소 유럽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셸링은 처음에는 자신보다 못했던 사람이 더욱 훌륭한 성과를 거둔 것에 분노했다. 헤겔을 마치 식물의 잎을 갉아 먹은 벌레에 비유하는 편지를 다른 지인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했던 것은 체계성에 대한 헤겔의 유일무이한 감각, 셸링의 이념들로부터의 헤겔의 선택 그리고 법철학과 국가철학에서의 헤겔의 탁월성이 비로소 독일관념론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셸링은 피히테주의자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를 피히테로부터 곧바로 구별해 주는 것은 세계의 물질적 풍부함에 대한 관심이었다.

 

1803년 《자연의 철학에 대한이념들》의 제2판에 대한 중요한 보론들에서 셸링은 자신의 새로운 입장을 절대적 관념론으로서 피히테와 자신의 초기 저작의 상대적 관념론과 구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을 더 이상 유한한 의식에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와 유사하게 양자를 절대자의 현현으로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개념은 우리가 사물에게 강요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래적 본질을 파악한다. P183~4

 

셸링의 새로운 철학의 중심은 헤겔과 함께 편집한 《철학 비판 저널》이었다. 데카르트 이래로 지배적인 이원론의 극복을 현대 철학의 결정적 과제로 삼았다. 그것은 “세계와 신의 화해라는 참된 복음의 시대”에 대한 종교적 희망과 결합한다. “그리스도교의 시간적이고 한갓 외적인 형식은 몰락한다.” 이를 위한 지적 작업은 동시에 윤리적 과제이기도 하다. 셸링은 후기에 전통 그리스도교로 복귀하며 신화학에 열심이었다. 셸링에 따르면 신화 그 자체 안에 진리가 존재한다. 겉보기에 무의미한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는 셸링의 최후 작업을 독일 관념론의 해석학의 정점으로 만든다. 자연철학이 전혀 사유하지 않는 것 속에서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후기 작업은 명백히 이성에 배치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 속에서 이성을 추구한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이 쓴 최초의 책,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차이》는 헤겔이 셸링의 충실한 추종자였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예나 시대 헤겔의 주저인 《정신현상학》 서문에서부터 셸링의 동일성 이론으로부터의 이반이 시작되었다. 《정신현상학》은 절대지로의 상승을 명확히 하며, “참된 것은 전체다.” 라는 헤겔의 전체론을 장엄하면서도 모호한 언어로 전개하고 있다.

 

절대지는 본질적으로 결과라는 것이다. 헤겔은 감성적 확신의 가장 단순한 것으로부터 절대지에까지 이르는 의식 형식의 만화경을 펼치는데, 거기서 성숙한 체계들의 범주들로 하자면 주관 정신으로부터 객관 정신을 거쳐 절대 정신으로, 그러므로 철학적 심리학으로부터 사회론을 거쳐 종교철학에로 움직여 간다. (…) 저작의 목표는 두 관점의, 즉 주관과 객관의 그러나 또한 나와 우리의 일치다. 왜냐하면 《정신현상학》은 상호 주관성이라는 주제에 《엔치클로피디》 보다 많은 공간을 배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지배와 예속’ 장은 마르크스로부터 샤르트르에 이르는 이후의 발전을 너무도 지속적으로 각인했다. p192

 

헤겔의 역사철학은 19세기에 광범위한 독자들이 읽었으며, 그에게 진보를 장담하는 낙관주의적 역사철학자라는 이미지를 부여했다. 그에 반해 복잡한 그의 형이상학은 오직 소수에 의해서만 파악되었다. 헤겔은 의심의 여지없이 자연과 정신에서의 절대자의 현현이 그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헤겔이 그에 못지않게 확신하고 있는 것은 정신이 체계의 첫 번째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은 자연으로부터 전개되는데, 그 자연은 자기를 근거 짓는 이념적 구조를 전제한다. 그 이념적 구조를 헤겔은 창조 이전의 신의 본질로 표현한다. 논리와 자연 그리고 정신이라는 바로 이 삼분법이 헤겔의 성숙한 체계를 특징짓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헤겔의 체계를 그토록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인가? 왜 언제나 거듭해서 헤겔의 르네상스가 존재했으며, 왜 중요한 철학자들은 그와의 대결을 회피하지 않는 것인가?

 

첫째, 헤겔은 철학사의 가장 위대한 체계 형성자이다. 그는 학문의 내적 건축술에 대한 선험적 설명을 하고자 한다. 종합적-선험적 판단이 아니라 개념의 선험적 체계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개념은 우리가 현실에 덮어씌우는 어떤 것이 아니다. 개념이 경험으로부터의 추상에 의해 획득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실재 자체가 개념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객관적 관념론(또는 절대적 관념론)은 개념경험주의가 견지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근본적 개념은 스스로를 선험적인 구성 과정에 빚지고 있다는 통찰과 우리의 개념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개념 때문에 현실의 맥박에 다가선다는 실재론적 확신과의 결합이다. p195

 

둘째, 헤겔의 대명사, 변증법이다. 헤겔 변증법의 모든 이성적 재구성은 모순율을 전제한다. 결정적인 것은 뵈메에게서처럼 부정적인 것을 절대자 내로 통합하는 것이다.

 

논리학의 최종 범주, 즉 ‘절대적 이념’은 그의 개념들의 삼분법 구조의 근저에 놓여 있는 원리다. 긍정적 개념 뒤를 부정적 개념이 뒤따르며, 마지막으로 종결하는 종합적 개념이 뒤따른다. 종합적 개념을 형성하는 이성을 헤겔은 ‘변증법적’이 아니라 ‘사변적’이라고 부른다. p196

 

체계의 가장 포괄적인 삼분법은 논리, 자연, 정신으로의 구분이다. 정신은 물론 자연에서 유래하지만 동시에 논리학으로 귀환함으로써 자연을 초월한다. 정신은 자연 발전의 결과이지만 자연은 처음부터 개념적 구조에 참여하고, 이 구조를 파악하는 자연 존재를 산출해야 한다. 정신의 최종 형식은 철학이다. 철학에서는 처음부터 체계의 전개에서 일어났던 것이 명시적으로 해명된다. 체계는 자기 회복에서 완결된다.

 

셋째, 헤겔의 자연철학이다. 헤겔은 자연의 부분적인 선험적 인식 가능성을 가르치면서도 칸트와 달리 실재론적 직관을 배반하지 않는다. 자연의 풍부한 형태에서 절대자의 현현을 인식하면서도 정신에의 목적론적 정합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헤겔의 자연철학을 무시하고 《정신현상학》과 《엔치클로페디》 제3부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체계의 객관적인 관념론적 전체 구조를 놓친다. 요컨대 그 체계를 주관주의적이고 구성주의적으로나 심지어 역사학적으로 잘못 해석하게 된다.

 

짐작컨대 칸트와 헤겔의 선험주의는 독일의 자연과학을 가령 영국의 그것보다 더 강력하게 사유 실험과 보편적 원리에 대한 이론적 반성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동시에 힘주어 견지해야 하는 것은 헤겔이 라이프니츠와 달리 범논리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실재적인 것의 세계 안에 환원 불가능한 우연성이 존재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헤겔에 따르면 실재철학에서는 논리학에서와 달리 일정한 경험 내용의 개념적 구조로의 귀속이 요구된다는 것을 자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거기서는 필연적으로 개념적 구조의 도출이 문제로 되는 것은 아닌 잘못이 생겨날 수 있다. p200~1

 

넷째, 헤겔은 계몽과 고전주의 및 초기 낭만주의가 획득한 모든 통찰을 하나의 체계 속에 편입시킴으로써, 그것이 없었다면 1933년까지 독일 정신과학의 장대한 전개가 가능하지 않았을, 정신의 이론을 창조했다.

 

헤겔은 인간 정신이 개념들을 창조한다는 것을 논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재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원리적으로 다만 실재가 개념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고 오로지 그에 의해서만 가지적이기 때문일 뿐이다. 몰개념적인 사물-자체는 헤겔에 따르면 자기 모순적인 개념적 구성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존재는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도 한데, 왜냐하면 언어에서 정신은 세계의 개념적 구조를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p202

 

헤겔의 《법철학 요강》은 독일의 법철학과 국가철학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다. 헤겔은 시대의 정치적 변화에 민감했다. 헤겔은 프랑스혁명의 중요한 이념, 특히 법적 평등은 프로이센에서 실현되었다고 생각했다. 헤겔은 피히테와 달리 독일 내셔널리즘을 반감을 갖고 고찰했다. 그는 결코 공동의 국민을 국가의 필요한 요소로 간주하지 않았다. 정당한 국가를 위해 결정적인 것은 법이념의 실현이다. 헤겔이 부각시키는 구체적인 국가는 고전적인 자유주의 국가이며, 헤겔의 국가는 국가 이전의 자연법을 인정한다. 나아가 헤겔은 자율적인 시민사회를 옹호한다. 그는 시민사회를 주제화한 최초의 독일인이다. 국가에 대한 헤겔의 윤리적 정당화는 국가에 의한 사회적 문제 해결을 고취한 사회국가적 프로그램이 설계되도록 추동했다. 그의 중심적 국법상 요구는 권력 분할과 관련이 있는데, 국가 권력은 왕권과 상원 그리고 하원의 협력에서 표현된다.

 

절대정신은 헤겔에게 세계의 절대적 원리를 확인하는 인간적 시도다. 그것은 예술, 종교, 그리고 철학으로 표현된다.

 

7장의 3인방은 모두가 매우 어려운데, 설상가상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번역이 몇 개 있다. 오역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 같은데, 일단 한글 문법상 전혀 문장이 성립되지 않는다. 도대체 왜, 이런... 무슨 말일까요?

 

① (…) 제시한 체계가 과연 타당성 이론적으로 실제로 ‘현상학’을 필요로 하는지 의심스럽고 (…) p191

② 그에 반해 그의 형이상학의 근거짓기 이론적인 복잡성은 오직 소수에 의해서만 (…) p193

③ (…) 모든 통찰을 그 근거짓기 이론적인 복잡성이 그 통찰에 걸맞은 (…) p201

 

 

 

08 그리스도교 교의학에 대한 반란 : 쇼펜하우어의 인도 세계 발견

 

지금까지 독일철학은 종교철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독일철학의 바탕에는 항상 종교를 이성적으로 근거 지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런데 독일 최초의 반 그리스도교 철학자가 등장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이다. 그는 유럽 최초의 불교도 철학자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는 희랍인 이래로 존립해온 로고스 철학에 철저히 도전하면서도 유물론으로 빠지지도 않았다. 니체와 그 후손들은 쇼펜하우어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피히테와 헤겔에게서 협잡꾼을 보았으며, 그리스도교 및 교회와 국가에 순응한 대학 철학을 경멸했다.

 

쇼펜하우어는 극도로 보수적이었다. 그는 모든 역사철학을 거부했고, 민주주의에 명백히 적대적이었다. 그의 여성 혐오는 유명하다. 키르케고르가 성적 장애로, 니체는 아마도 동성애로 그러했을 것에 반해 쇼펜하우어의 여성 혐오는 반대로 그가 여성을 성적으로 아주 강하게 욕망했기 때문이다. 여성은 그의 금욕을 위태롭게 했다. 쇼펜하우어가 그리스도교를 거부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유대적 유산 때문이라는 점에서 특히 위험하다. 그는 피히테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인권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시민권은 박탈한다. 그는 유대교를 고등 문화의 가장 저급한 종교로 간주한다.

 

쇼펜하우어는 1848년 독일 혁명 실패 이후, 독일인으로부터 정서적 공감을 획득했다. 그의 성공은 그가 세계 고통을 강력하게 표현한다는 점에 있었다. 이러한 염세주의는 인간들이 고통을 삶의 정상적인 부분으로서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시기에 전개된다.

 

우파니샤드 및 불교와 더불어 쇼펜하우어는 플라톤과 칸트에게서 자신의 철학의 가장 중요한 원천을 보았다. 그의 철학은 분명히 칸트에 대해 반작용하며, 그는 사물-자체에 빛을 비추고자 하는 독일 관념론자들의 소망을 공유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쇼펜하우어는 여전히 강력하게 칸트의 주관주의에 붙잡혀 있으며 또한 그것을 필요로 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그에 따르면 주관주의야말로 현상적 세계를 무조건적으로 지배하는 결정론을 최종 심급에서 회피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현상하는 대로의 세계는 우리의 표상이다. 공간, 시간, 인과성 (그가 인정하는 유일한 범주)은 다만 우리의 주관적 구성일 뿐이며, 아니 칸트의 초월론 철학을 인간학적으로 피상화하는 동일성 이론에 근거하자면 우리 뇌의 기능일 뿐이다. 물론 우리는 어떻게 공간이 뇌와 같은 공간적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 물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쇼펜하우에 따르면 현실의 최종 근거는 인식 불가능한 사물-자체가 아니라 내관으로부터 확신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성이나 개념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다. p221~2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프로이트를 선취하는데, 완전히 의식적인 사유의 본래적 근원 근거로 무의식적인 것을 지시한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을 최고의 예술로 꼽는다. 음악은 이념의 모상이 아니라 의지 자체이기 때문이다. 감정에 대한 힘과 개념으로 옮겨질 수 없다는 그 불가능성 때문에 음악은 유일무이한 지위를 획득한다. 쇼펜하우어에 열광적으로 반응한 천재는 바그너였다. 바그너는 <니벨룽겐의 반지>를 쇼펜하우어에게 보냈다. 쇼펜하우어의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았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무대 축제극은 쇼펜하우어의 이념을 표현한다. 바그너에게 새로운 것은 몰락이 시인-작곡가가 긍정하는 폭력에 의해 실행된다는 점이다. 모럴니스트인 쇼펜하우어는 지그프리트의 소박한 잔혹성에서 기쁨을 느끼기 어려웠지만, 바그너는 그의 가장 이지적인 제자를 사로잡았다. 니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니벨룽겐의 반지>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은 니체만이 아니었다. 굴욕을 당한 민족은 1918년 이후 스스로를 지그문트의 고통과 동일시하고 자신의 지그프리트를 기대했는데, 이 민족은 1933년에 그를 얻었고, 그는 전적으로 계획에 따라 신들의 황혼을 실행했으며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적 환상을 피비린내 나도록 진지하게 생각했다.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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