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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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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TV <비정상회담>의 번외 편으로 보이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는 첫 방문지로 장위안의 고향인 중국 안산을 찾아갔다. 경유지인 리장에서 똘똘이 타일러와 사교왕 줄리안은 나시족의 동파문을 발견하고는, 털썩 주저앉아 즉석에서 간단한 ‘동파문’ 필담을 주고받는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정도면 초등학생들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동파문은 현재도 쓰이고 있는 나시족 고유의 상형문자라는데, 한자와는 기원이 다른 것 같다.

 

그러나 한자도 처음에는 상형문자로 시작했다. 한문 시간에 가장 먼저 배웠던 것이 한자를 구성하는 여섯 가지 원리로, 상형․ 지사․ 회의․ 형성․ 전주․ 가차였다.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가 표현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한자는 점차 추상적인 방식으로 진화해 갔다. 만약 한자 역시 동파문자처럼 상형에만 머물렀다면, 한자가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을까? 그 대신 공자도 맹자도 없었을지는 모르겠다.

 

대만 최고의 문화 비평가라는 탕누어가 쓴 『한자의 탄생』은 탄생, 즉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오른다. 맨 처음 만나는 것은 물론 동파문자와 비슷해 보이는 상형문자들이다.

 

침상 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모양, 夢, 꿈 몽의 갑골문자다. 너무 귀엽고, 가만 들여다보면 夢과 닮아 있다. 탕누어는 이렇게 갑골문자에서 시작해 현재의 한자로 변화되어 온 과정을 추적한다. 물론 이 책은 학술서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한자의 기원을 추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몇몇 사례를 들어 변천의 일반적 과정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갑골문에 특별한 애정을 가진 듯 보이는 저자는 현대 중국의 문자 간화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간화란 저자의 말을 빌면 이렇다.

 

  

 

「온갖 두려움에 휩싸여 촌음을 다투는 신경질적인 혁명 정당으로서 중국공산당은 문자사용에 있어서도 시간을 절약하고 빨리 손에 익히는 방법을 고안하기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전면적인 문자 간화를 실행했다. 그다지 쓰기 편치 않은 ‘진塵’자도 간화의 철퇴를 피해 갈 수 없었다. 1,000여년이 넘도록 운 좋게 살아남은 이 사슴도 중국공산당에 의해 멸종되기에 이른 것이다. 대신 아주 간단한 회의자인 ‘진’(자판을 찾을 수 없어 그냥 한글로 ;;) 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아주 작은 먼지 알갱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p269」

 

갑골문으로 추정되는 첫 번째 ‘진’ 자는 사슴 세 마리가 뛰어 노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두 번째는 우리가 한문이라고 배운 ‘진(먼지)’이며 중국에서도 가장 많이 사용되어 온 ‘진’자다. 세 번째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간소화된 ‘진’ 자다. 사슴 세 마리가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 가는 아름다운 글자는 무미건조하게 되어 버렸다. 실용성이라는 이름으로.

 

물론 간화된 문자는 원형을 간직한 갑골문이나 초기 형상이 상당히 보존된 복잡한 한자에 비하면 의미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만큼 기호화되었다. 그런데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한자의 간화라는 것이 단지 ‘빠르게 쓰기’에만 그 목적이 있는 것일까? 루쉰의 《아Q정전》의 마지막에는 글자를 모르는 아Q가 사인 대신 붓으로 큰 동그라미를 그리는 장면이 있다. 그 동그라미마저 삐뚤삐뚤해 아Q는 몹시 신경을 쓰지만, 정작 자신이 동그라미 한 그 문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한다. 중국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한자는 무척 어려운 글자다. 한자는 우리나라 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판 외국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매우, 매우 어렵다. 나만 그런가? 세종대왕도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맞지 않다고 했지만, 단지 말과 문자가 다를 뿐 아니라 한자는 글자 자체가 몹시 어렵다. 한글 창제 당시만 해도, 한글은 똑똑한 사람은 한나절이면 배우고, 바보라도 열흘이면 깨친다고 했다. 그렇게 배운 한글로 쓰지 못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한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열흘 만에 다 배울 수는 없다. 어쩌면 중국 공산당이 만든 간화도 원래 한자만큼 어려운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탕누어는 간화에 대해서 획수를 줄여 빨리 쓰게 만든 글자라는 식으로 말한 걸까? 간화는 전혀 알지 못하므로 무어라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획수가 줄어들면 당연히 배우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좋지 않을까?

 

탕누어가 간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공산당에 대한 반감인가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표음문자 보다 표의문자를 우위에 놓는 듯한 인상과 맥이 닿아 있다. 이 책의 번역어로는 ‘병음문자’ 라고 하는데, 소리를 모방하는 영어 같은 문자 체계는 상형의 한계에서 자신을 버리고 부호화에 투항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중국 문자는 변화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실상의 세계에 명맥을 유지하려는 성격을 갖고 있었 p39” 다. 그 결과 역사의 맥이 끊긴 후에 발견된 병음문자는 전혀 해석이 되지 않은 채 사장되었지만, 갑골문자는 문자 안에 의미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해석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령 지금의 문화가 완전히 파괴된 1000만년 쯤 후에 우연히 영어와 한자가 동시에 발견된다면 어떻게 될까? 영어는 의미 파악이 불가능해 버려지겠지만, 한자는 똑똑한 후대인들에 의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어, 인류의 역사를 고스란히 전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나 언어는 후세에 대한 전달력이 아니라 당장의 효율성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탕누어는 ‘어린 백성’ 을 위해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라는 세종대왕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많은 민족들이 직관적인 상형을 버리고 병음을 채택한 것은 세종대왕과 같은 마음에서가 아닐까? 문자 보다 사람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은 기본적인 세계관에서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지점이 있지만 , 그냥저냥 읽기에 나쁘지는 않은 책이다. 인문학적 비평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는 저자는 마르케스와 보르헤스를 비롯해 라이프니츠와 비트겐슈타인에 벤야민까지 다양한 지성을 끌어 모은다. 아주 깊이가 있거나 감탄할 정도는 아니지만, 부분부분 흥미로운 점이 없지 않다. 특히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염두에 둔 이런 묘사는 재미있다.

 

「파리의 한가한 구경꾼들에게 백화점이나 쇼윈도 같은 구경을 위한 회랑 공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갑골문의 대로 양쪽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식과 기능, 의미가 각기 다른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점유하는 땅이 비교적 크고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 그 권력을 행사하는 궁궐도 있었고, 제사를 위한 묘당도 있었으며, 일반인들의 주택 사이로 높이 솟은 호화 주택도 있었다. p170~1」

 

궁궐 宮, 묘당 享, 호화주택을 의미했던 京 혹은 高는 어느 것일까? 갑골문의 거리를 천천히 걸며 노니는 것, 그것이 『한자의 탄생』이 주는 참 재미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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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서회가 드디어 카페를 만들었다. 회원 가입제이긴 하지만 그동안 밴드로만 소통한 것에 비하면 공적 영역으로의 진출이라 할 수 있다.  발제와 후기도 공유하고, 온라인 회원도 받아들여,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독서회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다음주 책은 이언 매큐언의 『속죄』다. 한달여 전에 읽었을 때, 재미있기는 한데 리뷰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책은 진짜 별로인데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가 하면, 별로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잘 쓴 책인데도 오히려 생각의 물꼬를 터주지 못할 때도 있다. 물론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읽었다는 단순한 이유일 수도 있다. 보통은 모두들 할법한 생각 이외에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 글을 쓰고 싶은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다. 쓰면서도 재미가 없는 글을 누군가가 읽도록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카페도 만들고, 신입회원도 들어오고, 독서회 회의실도 넓어지고, 여러가지 변화로 시작한 올해 독서회, 초기라 그런지 좀 더 마음이 쓰인다. 토론할 내용을 생각하다보니, 그때는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른다. 특별한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이겠지만, 토론을 위해 몇자 적어 놓으려고 한다. 『속죄』의 발제자가 카페 게시판에 제시한 토론 주제는 이것이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브리오니가 자신이 창조한 소설을 통해 속죄한 행위는 자신을 위한 변명일까 아니면 가장 의미있는 속죄일까?"

 

나도 책을 덮으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이것이 속죄야 ? 변명이야?  속죄라기에는 용서를 구할 당사자들은 죽어버렸고, 브리오니는 소설가로 명예를 얻고 존경받으며 오래오래 살고 있다. 희생자들은 고통 속에 살다 누명도 벗지 못하고 죽었다. 브리오니가 죽음을 앞두고서야 겨우 출판을 결심한 그 소설은 속죄가 아니라 속죄의 이름을 빈 자기 정화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언 매큐언이 굳이 에필로그 성격의 그 마지막 장, <1999년 런던> 을 덧붙인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마지막 장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브리오니가 용서를 빌고 스스로 책임을 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마지막 장은 필요하다. 3부까지의 내용이 브리오니의 속죄라는 것을 독자가 알아야 하니까. 그것이 없었다면  『속죄』는 그냥 매끈하게 쓰인 또 하나의 소설일뿐일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에필로그는 단순히 지금까지는 브리오니가 쓴 소설이었어요, 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발화행위에 의해, 비로소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게된다. 이게 속죄야 ?변명이야? 진짜 속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언 매큐언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브리오니의 속죄가 아닐지도 모른다. 작가의 의도는 답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속죄라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속죄라고 믿는 것, 그것이 과연 속죄일까, 속죄라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이언 매큐언은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독자 스스로 이런 질문에 다가갈 수 있도록 유도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가 상대를 위해, 상대에게 해 준다고 믿고 있는 것들은 사실 우리 자신에게, 우리 자신을 위해 하고 있는 것들은 아닐까..

 

또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타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의 화자, 열두살 진희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분리하고, '바라보는 나'의 눈으로 세상을 통찰한다. 그녀의 눈은  MRI 수준이어서 그 눈을 통과한 타자는 투명하게 속속들이 까밝혀진다. 그녀의 눈은 오해나 무지를 모른다. 어떤 타자도 어떤 행동도 불투명함 속에 가려지지 않는다. 계몽(enlightenment)의 소녀라 할만하다.  『속죄』의 브리오니도 자신의 눈을 확신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오해했다. 타자는 그녀에게 전적으로 불투명하다. 포스트모던적이라 해야 할까?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대표하는(?) 두 소녀는 사실 소녀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우리는  진희와 같은 눈으로 타자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 우리가 가진 눈은 브리오니의 눈과 같다. 타자는 투명하지 않다. 어떨때는 더없이 다정하고 살가운 이웃이지만, 한순간 전혀 이해불가능한 낯선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두 얼굴의 타자는 나 자신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투명하게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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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연대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시간 연대기 -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시간의 모든 것
애덤 프랭크 지음, 고은주 옮김 / 에이도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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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이과 출신인 나는 과학 네 과목을 모두 배웠다. 화학, 생물, 물리, 지구과학. 가장 점수가 안 나왔던 것은 지구과학이었고, 전혀 이해를 못하는데도 희한하게 점수만은 만점이 나오던 것이 물리였다. 물리는 문제는 어렵고, 답은 쉬운 그런 과목이었다. 아마도 그 젊은 여선생님은 사물의 이치를 깨우쳐 주는 것보다는 답을 찾는 요령을 가르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80년대 중반의 대학은 학문보다 운동이 더 중요했던 시기였지만, 내게 학문은 운동만큼이나 충격적이기도 했다. 1학년 교양 수학 시간에 나는 처음 알았다. 내 머리는 소위 학문을 할 수 있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교수의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문제도 전혀 손 댈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풀 수 없는 수학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가장 좋아했던 과목 ‘수학’은 넘사벽이 되었지만, 사실 내가 절대 넘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물리였다. 그런데도 언제부턴가 나는 천체물리를 동경하고 있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공부는 얼마나 행복할까, 천체물리학과라는 말만 들어도 부러웠다. 다행히 내 머리의 한계를 잘 알게 된 이후라, 그걸 해보겠다고 덤벼들지는 않았다. 하늘의 별처럼, 아득히 멀지만 그 빛만큼은 마음속에 반짝였다.

 

애덤 프랭크의 『시간 연대기』가 신간 평가단 리뷰 도서에 선정된 것을 보고 기쁘면서도 한편 걱정이 되었다. 읽기에는 너무 좋겠지만, 리뷰를 쓰기에는 결코 만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막상 도착한 책은 걱정에 무게를 더했다. 하드커버에 500쪽이 넘는 분량, 물리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고생이 많겠다는, 주제 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번 주 내내 『시간 연대기』에 매달렸다. 3월이 되면서 이것저것 일들이 시작되고, 그만큼 절대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책 자체가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아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어렵지 않고 재미있어서, 두 세 시간 꼼짝하지 않아도 힘겹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예전에 시간에 관한 책을 두 세권 읽기는 했다. 호킹의 《시간의 역사》도 읽었고, 제목도 생각나지 않지만 시간 어쩌고 하는 책도 읽었다. 그 책들은 그다지 쉽지도 않고, 물리학적 지식을 꽤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그 책들에 비하면 『시간 연대기』는 차라리 반은 인문학이라 해도 좋을 만하다. 물리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호기심으로 몇 장 넘겼다가, 빨려들듯 읽게 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저자 프랭크가 시간을 푸는 방법에 있다.

 

“이 책은 시간, 즉 우주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다룬다. p12”

 

물리학이 다루는 ‘시간’은 거의 우주의 시간이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왜 화살처럼 방향을 갖고 있나 등의 너무 자명해 보이는 개념부터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빅뱅, 팽창하는 우주 등등이다. 그런데 『시간 연대기』의 저자 프랭크는 일반인에게는 너무도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 우주의 시간이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경험하는 일상의 시간과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서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주론과 우주의 시간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면, 인간의 시간도 함께 변화한다는 것이다. p15”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뉴턴의 과학적 발견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에 근본적 변화를 일으킨 산업혁명이다. 뉴턴의 물리학 법칙이 별들의 움직임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했고, 뉴턴 역학은 산업혁명의 토대가 되었다. 노동자들이 줄지어 출근 도장을 찍고 공장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생활양식은 행성들이 중력법칙과 운동법칙에 따라 시계처럼 궤도 운동을 하는 우주를 반영했다. “인간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은 짝을 이루며 서로를 변화시켜왔다. 우주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언제나 긴밀하게 서로 얽혀, 완벽하게 분리될 수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p15”

 

그러므로 『시간 연대기』는 물리학이자 동시에 역사학이다. 시간에 대한 인간 인식의 변화는 그대로 인간의 역사이다. 구석기 시대부터 SNS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간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체험은 혁명적 변화를 거쳐 왔다. 구석기 시대에는 그 누구도 秒 혹은 分 심지어 時라는 시간을 경험하지 않았다. 1300년대 초, 유럽의 여러 도시에 시계탑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인간은 時라는 시간을 인식하게 되었다.

 

시계는 중세 수도원의 규칙적인 성무일과라는 필요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수도원들 덕분에 … 모든 인간의 정신에 시계의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박자가 공통으로 생겨났다고 누군가 말을 한다고 해도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p123” 규칙이 별 의미가 없던 일반인의 생활에도 시계가 등장하면서, 시간이 질서정연한 생활의 배경이 되었다. 추상적인 시간은 생활의 새로운 도구가 되었다. “15세기 말 무렵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었다. 지역주민들은 커다란 시계 종소리와 시침에 따라 움직이는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p128” 시계에 의한 삶의 변화는 뒤이어 혁명적 우주론의 등장을 촉발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의 등장은 우리를 다시 우주의 시간으로 데려갔다.

 

그렇다면 수 천 년, 길게는 수 만년에 걸쳐 인간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이 얽혀 변화되어 온 시간이란 놈, 시간이란 개념은 이제 완성 되었는가? 우리는 시간에 대한 불변의 진리를 얻었는가? 저자 애덤 프랭크가 『시간 연대기』를 쓴 이유는 그 답이 ‘아니오!' 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 과학상식에 의하면 시간은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런데 최첨단의 우주론은 이렇게 말한다. “빅뱅이론의 시대는 지나갔고, 우리는 아직 무엇이 빅뱅이론을 대체하게 될지 모른다. p13” 137억년 동안의 우주 진화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이제 더 이상 확실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우주의 나이는 137억년이 아닐 수도 있다. “시간과 우주는 한 가지 유형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태초라는 개념을 버리고 연구를 다시 시작하려 한다. p26”

 

빅뱅이론의 위기는 ‘특이점’에 있다. 물리학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이 바로 특이점이다. 빅뱅 이후 137억년의 진화 과정은 모두 그럴 듯하다. 과학자들이 찾아놓은 증거들도 강력하다. 그런데 도대체 빅뱅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누가, 왜, 어떻게 불꽃을 당겼는가? 빅뱅이론에서 우주와 시간은 아무런 설명 없이 시작되었다.

 

“빅뱅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p366” 21세기와 함께 과학자들은 태초의 순간에 대한 급진적인 시각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고차원의 주기적 우주론과 다중우주론이 대표적이다. 이 이론들은 시작도 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접혀진 7차원, 막으로 된 우주, 영원한 인플레이션, 무수한 주머니 우주들에 대한 극한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시간에 관한 물음은 여전히 존재한다. 문제는 빅뱅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가 아니라, 이전 혹은 이후라는 말 자체다. 물리학과 우주론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시간’이다. 단적으로 “시간이라는 것은 없다.” 고 주장하는 과학자도 있다. ‘지금’들만 존재할 뿐 연속성을 가진 시간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생각나게 하는 ‘시계의 불확정성’ 이론도 있다. 어떤 시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주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시계가 불확정적이란 것은 우리 모두가 그토록 바라는 구체적인 물리법칙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각 우주마다 한가운데 앉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전에는 어느 법칙이 어느 특정한 우주에서 생기는지 알 수 없습니다. p449”

 

빅뱅이전에 대한 급진적 사고들은 저것이 과연 과학일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우주에 관한 이야기는 공상과학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물론 빅뱅이론의 대안들은 공상의 산물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의 극한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여전히 추상적 사고의 결과일 뿐 물리적 증거를 획득하지 못했다. 어쩌면 인간의 물질문화가 획기적 혁명을 거듭한 끝에 접혀진 7차원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우리가 10차원의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면, 우주와 시간에 관한 우리의 인식도 혁명적 변화를 겪을 것이다. 시간이 벤자민 버튼에게서처럼 거꾸로 갈 수도 있고, 한 순간에 여러 개의 우주에서 동시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그저 흥미로운 상상에 그칠 수도 있다. 아직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만 “과거에도 수없이 일어났던 것처럼,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물질적 개입이 이뤄지면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시간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p472" 그러나 그 시간 역시 어쩌면 ‘시계의 불확정성’ 원리가 말하는 것처럼, 단지 우리가 믿게 된 혹은 선택하게 된 하나의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에 불과할 수도 있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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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과의 하루
디아너 브룩호번 지음, 이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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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과 비슷한 느낌. 죽은 남편을 두고 바람 핀 일을 제일 먼저 다그치고 싶었을까? 함께 살기 위해 묻은 일을.. 한 두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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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문자가 와 있다. 2월 신간 평가단 책이 올 모양이다. 날도 짧고 설도 있었고, 일할 시간이 넉넉치 않았을 것이다. 알라딘 담당자가 두어번 양해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2월 책을 보기도 전에 3월 책을 고르게 되었다.

 

 

 

한병철의 《심리정치》 다. 책 소개를 보기전에 일단 보관함에 넣어 놓았던 것이다. 한병철의 생각을 다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것도 있지만, 현대 사회의 주요한 면을 압축된 문장으로 보여주는 장점이 있다. 그 압축된 문장이란 것이 사실 만만하지는 않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철학자들이 구겨(?) 넣어져 있을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주목신간으로 선택한 것은 유명세가 있으니 일단 많은 분들이 추천할 것 같고, 둘째는 문지가 책 지원을 잘 해줄 것 같고(근거는 없다;;), 셋째 책이 작고 얇을테니 분량에 대한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피로사회》, 《투명사회》와는 달리 '정치'를 콕 찍어 대상으로 하고 있고, 그것도 '심리 정치' 라니, 흥미가 더 인다.

 

 

<마르크스 vs 이진경, 세기를 잇는 철학의 대결 > 이라는 문구가 턱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이진경이다. 동구권 몰락 이후의 서구 좌파 사상을 이진경만큼 대중적으로 그리고 선구적으로 소개한 사람이 있나 싶다. 물론 들뢰즈주의자로 정평이 나있고, 들뢰즈의 유목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진경의 책은 늘 읽을만 했다. 이 책은 10년 전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의 마르크스와는 많이 다를 것 같은 느낌이다. 예전 책이 경제적 관점을 중심으로 했다면, 이 책은 철학적 관점으로 바라본 마르크스, 현대로 소환한 마르크스 철학의 의미, 뭐 그런 내용으로 보인다. 읽기에도 더 쉽고 재미있을 것 같다. 이야기를 푸는 형태는 초창기의 《굴뚝 청소부》와 더 가깝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읽어봐야 알겠지만 ^^;; 

 

 

 

 저자 맹정현은 언젠가 하이킥에 출연한 적이 있다. 지붕킥에서 정보석의 친구로 나왔던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랬다. 그가 운영하는 <정신분석클리닉 혜윰>의 간판을 선명하게 보여 주었더랬다. 그것을 보고 한번 찾아가 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정신분석가 과정을 열어 전문가 양성도 했는데, 잘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파리 8대학, 7대학에서 석사, 박사를 했고, 라캉의 《세미나 11》을 공동 번역하고, 브루스 핑크의 책도 번역하고, 직접 몇 권의 정신분석 책을 썼다.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에 관한한, 매우 활동적이고 신뢰할만한 우리나라의 정신분석가가 아닐까 싶다. 일반인이 읽기에 책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애도와 멜랑꼴리>는 프로이트의 논문이라고 한다. 애도와 우울에 관한 각종 이야기들이 아마도 여기에서 시작되었지 싶다. 나도 가끔 애도와 우울의 차이에 대해 말하지만, 자세히는 모른다.  이 책은 프로이트에서 시작해 라캉을 거쳐, 우울에 관한 주체의 여러가지 태도, 가령 신경증적 우울증과 정신병적 우울증 등에 관한 이야기로 뻗어 나간다. (고 한다.) 재미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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