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독서회가 드디어 카페를 만들었다. 회원 가입제이긴 하지만 그동안 밴드로만 소통한 것에 비하면 공적 영역으로의 진출이라 할 수 있다.  발제와 후기도 공유하고, 온라인 회원도 받아들여,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독서회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다음주 책은 이언 매큐언의 『속죄』다. 한달여 전에 읽었을 때, 재미있기는 한데 리뷰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책은 진짜 별로인데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가 하면, 별로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잘 쓴 책인데도 오히려 생각의 물꼬를 터주지 못할 때도 있다. 물론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읽었다는 단순한 이유일 수도 있다. 보통은 모두들 할법한 생각 이외에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 글을 쓰고 싶은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다. 쓰면서도 재미가 없는 글을 누군가가 읽도록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카페도 만들고, 신입회원도 들어오고, 독서회 회의실도 넓어지고, 여러가지 변화로 시작한 올해 독서회, 초기라 그런지 좀 더 마음이 쓰인다. 토론할 내용을 생각하다보니, 그때는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른다. 특별한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이겠지만, 토론을 위해 몇자 적어 놓으려고 한다. 『속죄』의 발제자가 카페 게시판에 제시한 토론 주제는 이것이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브리오니가 자신이 창조한 소설을 통해 속죄한 행위는 자신을 위한 변명일까 아니면 가장 의미있는 속죄일까?"

 

나도 책을 덮으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이것이 속죄야 ? 변명이야?  속죄라기에는 용서를 구할 당사자들은 죽어버렸고, 브리오니는 소설가로 명예를 얻고 존경받으며 오래오래 살고 있다. 희생자들은 고통 속에 살다 누명도 벗지 못하고 죽었다. 브리오니가 죽음을 앞두고서야 겨우 출판을 결심한 그 소설은 속죄가 아니라 속죄의 이름을 빈 자기 정화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언 매큐언이 굳이 에필로그 성격의 그 마지막 장, <1999년 런던> 을 덧붙인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마지막 장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브리오니가 용서를 빌고 스스로 책임을 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마지막 장은 필요하다. 3부까지의 내용이 브리오니의 속죄라는 것을 독자가 알아야 하니까. 그것이 없었다면  『속죄』는 그냥 매끈하게 쓰인 또 하나의 소설일뿐일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에필로그는 단순히 지금까지는 브리오니가 쓴 소설이었어요, 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발화행위에 의해, 비로소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게된다. 이게 속죄야 ?변명이야? 진짜 속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언 매큐언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브리오니의 속죄가 아닐지도 모른다. 작가의 의도는 답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속죄라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속죄라고 믿는 것, 그것이 과연 속죄일까, 속죄라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이언 매큐언은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독자 스스로 이런 질문에 다가갈 수 있도록 유도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가 상대를 위해, 상대에게 해 준다고 믿고 있는 것들은 사실 우리 자신에게, 우리 자신을 위해 하고 있는 것들은 아닐까..

 

또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타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의 화자, 열두살 진희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분리하고, '바라보는 나'의 눈으로 세상을 통찰한다. 그녀의 눈은  MRI 수준이어서 그 눈을 통과한 타자는 투명하게 속속들이 까밝혀진다. 그녀의 눈은 오해나 무지를 모른다. 어떤 타자도 어떤 행동도 불투명함 속에 가려지지 않는다. 계몽(enlightenment)의 소녀라 할만하다.  『속죄』의 브리오니도 자신의 눈을 확신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오해했다. 타자는 그녀에게 전적으로 불투명하다. 포스트모던적이라 해야 할까?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대표하는(?) 두 소녀는 사실 소녀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우리는  진희와 같은 눈으로 타자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 우리가 가진 눈은 브리오니의 눈과 같다. 타자는 투명하지 않다. 어떨때는 더없이 다정하고 살가운 이웃이지만, 한순간 전혀 이해불가능한 낯선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두 얼굴의 타자는 나 자신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투명하게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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